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8회 초인들의 세계 Ch 4. 형제의 재회 (2)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2.07.30 | 회차평점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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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첨단 운송 시스템. 투명한 외부와 달리 내부는 극도로 고급스러웠다.
윤혁이 뒷좌석으로 들어오자 옆의 사내가 흥미롭다는 듯 웃었다.
“일찍 왔군. 약속을 잘 지키는 건 좋지.”
“일방적으로 불려서 나왔습니다만.”
“이런, 강요는 아니었건만.”
카이젤이 동생을 살살 약 올렸다.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얼굴이라도 보려고. 지금 아니면 여유가 별로 없으니까.”
차가운 인상과 어울리지 않게 능글맞은 태도가 거슬렸다.
“형님이랑 제가 알게 된 건 고작 며칠만이지 않나요?”
“뭐 그렇긴 한데.”
‘이상하게 동생이라는 인간에게 조금 흥미가 생겨서.’
카이젤은 속으로 말을 삼켰다.
그는 늘 모든 인간을 오로지 능력, 자질, 기품에 기반해 평가해왔다. 누군가에게 관심을 둔다면 그것은 자신과 비슷한 종류의 탁월한 재능을 가진 자, 혹은 최소한 매우 우수한 자 정도였다. 혈육이라고 특별하게 여길 이유는 없었다. 만약 자신의 어머니가 무능한 사람이었다면 그녀조차도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리라.
그런데 이상하게도 강윤혁이라고 하는 인간에게는 호기심이 생겼다. 별다른 이유도 없이. 호감도 불쾌감도 아닌 이상한 호기심이었다. 시선을 끌 특별한 능력도 전혀 없는 것 같은데 말이다. 본인도 이유를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식사 자리 마련했다. 가서 이야기나 하지.”
“알겠습니다.”
망설이듯 대답한 윤혁은 고개를 들어 카이젤의 얼굴을 살짝 쳐다보았다. 전에도 느꼈지만, 비길만한 얼굴을 못 찾을 미남이었다. 단순히 외모만 대단한 게 아니라, 특유의 분위기까지도 굉장했다. 이 세상을 바다 생태계로 묘사한다면 레비아탄에 비견될 최강자이리라. 누구라도 그 앞에서는 위압을 느끼지 않을 리 없다. 다만 자신은 혈육이라 그런지 위압감에 빠르게 익숙해졌다.
“아버지는 요새 어떻게 지내시지?”
정적을 깨트리고 카이젤이 기습적인 질문을 던졌다.
사실 서로의 공통 관심사가 아직은 아버지밖에 없긴 했다.
“어머니 가게 일을 돕고 집안일을 하세요. 건강은 아무 이상 없으시고요. 60세가 가까워졌는데도, 겉보기에는 청년 같으세요. 몸도 그만큼 건재하시고요.”
“주부⋯⋯, 고작 그 정도로 충분히 만족하시고?”
윤혁은 잠깐의 생각 후 형의 말뜻을 곧 이해하였다. 아마도 과거에 촉망받던 아버지가 불명예스럽게 퇴직하고 사회경제적 지위를 포기해야만 했던 일에 관해 묻는 것 같았다. 다소 대화 나누기 불편한 주제였다.
“겉으로는 한 번도 내색하신 적 없으세요. 가정에도 충실하시고요. 제가 그때의 아버지 입장이 되어보진 못했으니 모르죠. 마음속으론 힘든 부분이 있으실 수도 있을 것 같나요. 저 같았어도 상실감이나 상처가 아예 없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렇군.”
카이젤은 조금 기분이 상했다.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저지른 잘못.’
불필요한 죄책감이 불현듯 그를 짓눌렀다.
“그래도 네 가족에겐 존경받으시니 다행이군.”
자신의 어머니가 비참하게 만들었던 아버지께서 동생과 그의 어머니로 인해 진정한 마음의 회복을 얻었다는 사실은 한편으로는 몹시 다행스럽기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심히 무거운 기분을 주었다.
몇 분 후, 카이젤은 전에 식사했던 장소로 윤혁을 데려갔다.
제국의 황제가 지나가는 것처럼 모두가 깍듯이 예를 갖췄다. 윤혁으로선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형님이 대단한 사람일 것이라고 추측은 했지만, 예상보다도 훨씬 더 거물이리라는 감이 들었다. 정작 카이젤은 이러한 우대를 매우 자연스럽게 여겼다. 부담스러워하지도 않고 오만한 표정도 짓지 않는 담담한 모습이었다. 마치 태생부터 왕이 될 운명으로 태어난 고귀한 남자처럼.
식탁에 앉은 둘은 서로를 물끄러미 마주 보았다. 잠시 시간이 정지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대화할 공통 주제도 없었지만, 두 사람의 온도 차가 너무 큰 것이 문제였다. 윤혁은 바늘방석 위에 앉은 것 같아 영 개운치 않았다.
‘아무리 진귀한 요리를 먹는다고 해도 이런 불편감은 사양이야.’
괴로운 정적이라도 깨보기 위해서 먼저 형에게 질문을 해보았다.
“조금 실례되는 질문이지만……, 형님은 혹시 어디에서 오셨나요?”
최대한 심기를 거스르지 않게 공손하게 굴었다.
“아, 혹시 제가 형님이라고 불러서 기분 상하신 건 아닌지…….”
“아니. 관심을 가져주니 기쁘군. 그나저나 그걸로 되겠나?”
윤혁은 형이 의외로 호쾌하게 받아주자 어안이 벙벙했다.
“그것 말고도 궁금한 게 몹시 많을 텐데?”
물론 형에 대해 궁금한 것이야 산더미 같았다. 하지만 입이 왠지 안 벌어졌다.
“나는 특정 국가 소속이 아니다. 연합 소속이니까.”
이에 윤혁은 속으로 놀랐다. 탈국가적인 지위라고? 아무리 세계 질서가 과거와 다르게 재편성되었지만 그런 일이 가능한가? 그 정도로 높은 사람이란 뜻인가? 머릿속에서 여러 의문이 튀었다.
“아, 일반인들의 상식으로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울 거다.”
그 말대로였다. 윤혁은 말없이 고개만 주억거렸다.
“인류연합이라는 말은 들어본 적 있지?”
“네, 그렇긴 합니다만.”
인류연합. 최초의 통합 체계. 윤혁도 역사책에서 배운 바 있었다.
“위버멘쉬가 세웠던 조직이죠.”
“현대사 공부는 게을리하지 않았네.”
과거 위버멘쉬와 그의 직속 세력들이 주축이 되어 생성된 범국가적 시스템이 바로 인류연합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존 국적을 버리고 초국가적인 조직을 세웠던 자들로 21세기의 세계를 통합했던 주역들이자 위인들이었다.
“형님도 비슷한 개념의 조직에 소속되셨나요?”
“뭐, 비슷하긴 하지.”
카이젤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그 이상 알려고 하지 않는 게 좋아.”
그는 나직이 속삭였다. 기가 죽은 윤혁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너무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라. 내게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으니까.”
카이젤은 주눅이 든 동생을 귀여운 동물을 보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지금처럼 내 얼굴을 보여준 것도 이례적인 일이거든.”
“⋯⋯네.”
윤혁은 형과 자신 사이의 거대한 격차 탓에 조금 수그러들었다.
“기죽지 마라. 그래도 넌 어쨌든 내 하나뿐인 형제이니까 편하게 대해도 된다.”
“아직은 좀 어렵네요.”
그는 씩 웃으면서 동생을 주시했다. 형형히 빛나는 금빛 눈동자가 기분 좋은 기색을 띠고 있었다. 둘은 같이 식사를 나누면서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나저나 생명공학 쪽에도 관심이 있을 줄은 몰랐군.”
위화감을 느낀 윤혁.
“이번에 참석한 발표회가 의학 공학 관련이었다지?”
형에게 자신이 오전에 어디에 있었는지 말해준 적은 없었다.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라도 하는 건가?’
권력이 엄청난 사람으로 보이니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
“이 나라도 제법 귀여운 묘기를 잘 부리더군.”
그는 심지어 한국의 기술 수준을 가소로운 대상을 평가하는 투로 말했다.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실용성도, 정밀성도, 아직 한참 멀었어.”
“하지만!”
조금 감정 상한 윤혁이 변호를 해보려 했다. 그러나 곧바로 입이 다물어졌다. 식탁 앞에 형이 소환한 홀로그램 화면 때문이었다. 학교에서 배운 내용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정체를 알아볼 수도 없는 무언가의 도면이 나타났다.
“피코머신을 활용하면 입자 단위의 조작까지도 가능한데 말이지.”
“피코머신……, 이요?”
금시초문이었다. 전 세계 모든 국가를 통틀어도 나노머신 혹은 그 업그레이드 버전 정도가 전부라고 알고 있었는데? 그것만으로도 이미 현존하는 모든 암 질환, 대사성 질환, 감염 질환을 완치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는데? 그런데 그보다 더한 것이 있었다고?
‘혹시 민간과 국가의 기술 보유 수준 자체가 다른 건가?’
“정확히는 너희 지표면 국가들이 민간 세계, 내 쪽이 진정한 정부지.”
윤혁의 속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한 대답이 카이젤로부터 돌아왔다.
“설마 피코미터 단위까지 미세 동시 조종이 가능한가요?”
“물론. 개발 자체는 이미 오래전에 완성되었지.”
카이젤은 홀로그램 도면을 확대하며 느긋한 미소를 입에 걸었다.
“이미 10세대 이상 개량되어 현재는 실용 단계에까지 적용되도록 시뮬레이션과 임상 시험도 마쳤다. 생산량의 한계 및 인류사에 미칠 여파를 고려해서 공개는 천천히 하도록 계획했지만. 게다가 아직 전 인류가 무한정 사용할 만한 재고량이 갖춰지지 않았거든. 이 문제도 머잖아 내가 해결할 예정이지만.”
카이젤이 손가락을 움직이자 작은 로봇의 홀로그램 설계도가 공중에 나타났다.
“정교하지?”
“이미 현 의학 기술로도 모든 질병을 완치할 수 있는 마당에 그보다 더 높은 단계의 기술을 개발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요? 게다가 모든 사람이 피코머신을 무한정으로 사용한다니요?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시죠?”
“둔하진 않아서 좋군. 공대생이라서 이런 주제가 적격이지?”
카이젤은 흥미로워하며 방긋거렸다. 그는 윤혁을 내려다보며 역질문했다.
“인간이 마지막으로 정복해야 할 질병이 무엇일까?”
선뜻 대답하지 못한 윤혁은 머릿속을 더듬어 보았다. 이미 암이나 치명적인 만성 감염조차도 유전자 단계에서 제거가 가능한 시대이다. 최소한 질병 때문에 죽는 일은 사실상 없어져 버렸다. 그런데 아직 정복하지 못한 것이 있을까?
“노화.”
카이젤이 간단명료하게 대답을 내렸다.
“고대로부터 항상 인류가 넘기를 갈망해왔던 마지막 보루지.”
“설마 ‘불로불사’를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당혹스러움에 사로잡힌 윤혁은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그래, 쉽게 표현하면 그렇게 되겠군.”
전설 속에서나 가능한 이야기. 육신적 죽음 자체의 정복. 형이라는 인간은 너무도 태연하게 꿈같은 주제를 과학의 범주 안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공상 과학에서야 워낙 자주 보아왔지만, 대놓고 현실에서 말하는 자는 처음이었다.
“노화라고 해봐야 생체 분자들의 배열 흐트러짐에 불과해. 아주 작은 분자 단위에서부터 일일이 고쳐버리면 노화를 막고, 역행하는 일도 가능하지. 단순하면서도 매우 정교하고 난이도가 높은 과제지.”
참으로 두렵고도 섬뜩한 사고방식이 아닐 수 없었다.
윤혁은 순간적으로 형이란 인간의 정신세계가 궁금했다.
“예전 같았으면 엄두도 내지 못했겠지. 하지만 지금은 기술력은 물론 에너지의 무한정 생산까지도 가능하지. 인체 분자 재조립도 불가능하지는 않아. 실제로 동물들과 시뮬레이션 세계를 상대로 완전한 입증을 해냈지. 초기엔 약간의 부작용이 있었지만, 이제는 완벽한 안전과 효율성까지 보장할 수 있게 되었다.”
공상과학소설 같은 프로젝트. 틀림없이 비밀리에 연구되었으리라.
“좀 더 호기심이 생긴 모양이군?”
마른침을 넘기는 윤혁을 본 카이젤이 빙긋거렸다.
“아니 욕망이라고 해야 하려나?”
“저는 이 세상에서의 영존은 별로 관심 없습니다. 순리에 맞지도 않고요.”
“호오, 종교적인 신념 때문에?”
이번에도 생각을 읽은 듯한 날카로운 질문. 윤혁은 짙은 의문을 접어두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형이 정말로 독심술이라도 쓴 걸까? 그럴 리는 없을 텐데? 그때 가족 식당 안에 성경 구절이 적힌 팻말도 있었으니 단순히 그걸 보고 지레짐작했겠지. 윤혁은 애써 밀려오는 위화감을 억눌러보았다.
“네.”
“하하, 네 신앙은 존중한다. 그래도 학문적 관심 정도는 나쁘지 않을 텐데?”
그 말을 듣자 호기심과 두려움이 동시에 섞였다. 언젠가 인간이 노화를 극복하리라는 설은 예전부터 설왕설래가 많았지만, 실제로 성공적인 성과를 보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보는 기분이었다.
“사람에게도 피코머신 실험이 성공했나요? 아무런 부작용 없이요?”
조심스럽게, 어떻게 보면 소심한 어투로 윤혁이 질문했다.
‘귀엽군. 재미있는 친구야.’
휘둘리면서도 꿋꿋한 동생을 본 형은 오래간만에 흥미진진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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