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11회 초인들의 세계 Ch 6. 이방인 가족 (1)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2.08.01 | 회차평점 0 |
Chapter 6. 이방인 가족
이 동네에서는 본 적이 없던 아이였다. 외국인인 것 같긴 한데 한국말이나 발음에 능숙하였다. 인종은 어느 쪽인지 확실치가 않아 보였다. 중동 출신 같기도 하고 유럽 같기도 하고 또 아시아인이나 라틴계 같아 보이기도 했다.
‘하긴 오늘날은 전 세계 민족들이 거의 섞여버렸으니까.’
국제 정세가 여러 차례 격변을 겪는 과정에서 대규모 이주 및 혼합이 생겨났고 그로 인해 한 지역에 머무르던 민족이 다른 곳으로 이주해 섞이는 현상이 수도 없이 많이 일어났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나라에서 거의 모든 민족이 백 년 전과는 달리 용광로처럼 섞여버렸다. 사실상 외모로는 민족을 구분이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그나마 한국은 비교적 단일 민족성을 많이 유지한 편이었다.
‘우리나라도 이제 슬슬 용광로 속에 섞이겠지?’
아이는 피아노를 신기한 듯 쳐다보았다. 요새는 전자 악기의 음이 워낙 발달해서 고전 악기 특유의 느낌을 원본 이상으로 표현해내는 시대. 그 탓에 이렇게 전통적인 방식으로 나무를 깎아 만든 악기의 수요는 크게 줄어들었다. 이 낡은 피아노도 찾아보기 힘든 고전 유물 중 하나였다. 아이 눈에도 분명 신기하리라.
“한 번만 다시 들려주면 안 돼요?”
“응?”
남들 앞에서는 부담스러운데. 윤혁은 조금 곤란한 듯 건반을 툭툭 두드리며 고민하였다. 그는 마지못해서 조금 전까지 연주하던 곡을 연주하였다. 그런데 아이는 그 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거 말고 조금 전에 두드렸던 그 노래요.”
이에 윤혁은 반강제적으로 기억을 더듬어 다른 곡을 두드렸다.
“나쁘진 않지만, 제가 듣고 싶었던 건 다른 거예요.”
아이의 또랑또랑한 눈빛에는 거역하기 힘든 강제성이 있었다. 윤혁은 기억을 더듬으며 한 시간 전부터 자신이 마음 내키는 대로 연주했던 모든 곡을 하나씩 되짚으며 다시 재현했다. 아이는 계속해서 고개를 저었다. 윤혁은 자신이 무엇을 빠트린 것인지 고민을 했으나 잘 생각이 나지 않아 이내 포기하려 했다.
‘아, 혹시?’
그는 한 선율을 건반 위에 담아보았다.
그제야 아이의 의뭉스러웠던 표정이 환히 펴졌다.
‘신기한 꼬마네.’
윤혁 본인도 꿈에서 들었는지 생시에서 들었는지 모를 희미한 선율을 바탕으로 상상해서 떠올린 것이었거늘, 이상하게도 그 단순하면서도 기이한 선율이 어린아이의 정서에도 공명한 모양이다. 윤혁은 그 소리를 꼭 기억해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기억력이 따라줄지는 모르겠지만.
“넌 이곳에서 사니?”
윤혁은 말을 붙여보고자 아이에게 질문했다.
“네, 저번 달에 이곳으로 이사했어요.”
“한국말 잘하는구나.”
요즘은 영어를 베이스로 이전 세대에 창작된 인류 공용어가 주로 쓰이고는 있지만, 그래도 아직은 각 민족 별 언어가 남아 있었다. 한국은 아직까지도 본연의 언어를 유지하는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였다.
“한국에 온 건 일 년 전이에요. 큰 도시에 있다가 여기로 옮겼어요.”
아이는 묻는 말에 제법 또박또박 잘 대답했다. 어휘력도 괜찮아 보였다.
“부모님이랑 여기서 같이 살고?”
“아뇨, 엄마랑 아빠는 안 계세요.”
괜히 아이에게 안 좋은 기억을 건드린 모양이다.
“오, 이런, 미안.”
그러면 다른 친척들과 같이 살고 있는 건가?
“저는 할아버지랑 같이 살고 있어요.”
“친할아버지랑?”
“아니요, 이집트에서 살고 있을 때부터 알고 지내던 이웃이었어요.”
“꽤 먼 나라에서 이주해왔구나.”
보아하니 피가 섞이지 않은 이웃과 함께 사는 모양이었다.
‘어린 나이에 힘든 사정이라도 겪었던 걸까.’
차마 실례가 될까 봐 물을 수가 없었다.
“이만 돌아갈래? 오늘은 늦었으니까 같이 데려다줄까?”
아이는 조금 아쉬워하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할아버지가 찾으실 거야? 걱정시켜드리면 안 되겠지?”
윤혁은 에이든을 집까지 데려다주기로 하였다. 작은 아이 혼자 길을 걷도록 내버려 두자니 영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그는 아이의 작은 발에 자신의 발걸음을 맞춰서 천천히 가로수 길을 걸어갔다.
“그래도 다음부터는 모르는 사람한테 다가가면 안 돼.”
윤혁은 조금 엄한 척 흉내 내며 타일렀다.
“형이 좋은 사람이라서 망정이지, 이상한 사람을 만났으면 어쩔 뻔했어.”
“전 나쁜 사람 구분 잘해요. 그런 사람들은 안 좋은 향기가 느껴지거든요.”
“그래도 사람 속은 잘 모르는 거야.”
“알았어요.”
윤혁은 아이의 안내를 따라 이동했다. 아이는 어린 나이임에도 길을 잃어버리지 않을 만큼 기억력이 좋은 편이었다. 한 이십 분쯤 걷자 에이든의 집 앞에 도착했다. 첨단화된 건물이 아닌, 평범하고 아늑한 주택가였다.
윤혁은 초인종을 누르고 신원을 밝혔다. 이내 문이 열렸다. 에이든과 윤혁은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주택 안에는 뜰이 있었고 그 뒤로 거주 공간이 있었다. 삭막한 도시 중심부에서는 쉽게 보기 힘든, 전원적인 환경이었다. 뜰에서 기르는 나무들과 꽃들에 한 노인이 물을 주고 있었다.
“할아버지!”
아이가 튀어 나가 노인의 품에 안겨들었다.
“오, 얘야. 에이든. 너무 늦지 않게 돌아오라고 하지 않았니?”
수염 기른 백발노인은 아이를 품에 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분명 혈연관계가 아니라고 했는데도, 둘은 친조부와 손자 같은 분위기였다.
“길은 잃어버리지 않았고? 밤길이 어두워서 위험했을 텐데?”
“아저씨가 데려다주셔서 안 무서웠어요.”
그제야 노인은 뜰 안에 서 있는 청년의 모습을 발견했다. 윤혁은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이다가 노인에게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인사했다. 딱히 자신이 한 일은 없었건만. 어차피 오늘날은 치안, 보호, 위치 탐색 기술이 발달해있으니 아이가 혼자 있어도 위험에 처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외곽에 있는 교회당 기도실에서 혼자 있다가 아이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할아버지가 걱정하지 않도록 해명을 해주었다.
“별다른 특별한 일은 없었으니 안심하셔도 좋아요.”
“이 애를 무사히 돌아오도록 챙겨줘서 고맙군, 젊은이.”
“편하게 말씀하시지요. 저는 강윤혁이라고 합니다.”
“그래, 윤혁 군. 시간이 되면 간단히 집에서 다과라도 어떤가.”
밤이 매우 늦지는 않았기에 윤혁도 노인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노인은 자신을 편하게 ‘켄’이라고 불러도 된다고 했다. 하지만 한국어 문화 때문인지 반말에 익숙하지 않아서 어르신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꽃이나 수목을 직접 기르시나 보네요.”
“이 늙은이에게는 몇 안 되는 소중한 취미라네.”
“식물을 직접 가꾸는 것을 보는 건 굉장히 오랜만인 것 같네요.”
요새는 자동화 시스템으로 자연환경을 조성할 수 있다 보니 사람이 애써 손으로 무언가를 가꾸어야 할 이유가 사라졌다. 열대우림과 수풀은 물론 거의 모든 종류의 환경을 자유자재로 제작해내는 것은 물론, 대기와 대양의 물리적 조건마저 조성해내는 시대니까. 얼핏 지구 밖의 행성들에도 비슷한 방식으로 자연환경을 만드는 작업이 시도되는 중이라고 들은 것도 같다.
“늘 그걸 아쉽게 생각했다네. 인간이 자연과 단절되는 것 같아서 말이지.”
“생태계를 조성하고 정화할 만큼 테라포밍 기술이 발달해버리긴 했죠.”
우주에까지 인간이 거주할 콜로니를 제작할 정도로요.
“하지만 그만큼 자연에 대한 감사도, 공존하려는 노력도 잊은 것 같아.”
“원래는 좋은 목적으로 만들어진 기술인데 아쉽네요.”
테라포밍의 절정 판인 ‘바이오스피어’ 기술.
인간과 동식물이 살아갈 물질적 행성 환경을 재조성하는 능력이다. 그것은 물과 대기의 순환을 제어하는 것은 물론 각종 이물질의 광범위한 제거까지 맡는 폭넓은 범위의 기술이었다. 작게는 국립 공원에서부터 크게는 아마존과 같은 거대한 정글까지도 어렵지 않게 관리해낼 수 있는, 응용 스펙트럼이 큰 기술이었다.
본래 바이오스피어 기술은 21세기 초 과학자들의 주도하에 훼손된 지구 생태계를 복원하고자 제안된 프로젝트에서부터 기인했다. 그 취지는 지구를 되살리고 인간과 생명체가 공존할 수 있도록 균형 잡힌 생태계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다소 인위적이고 비현실적이었기에 모두가 실패를 예측했지만, 그 프로젝트는 보란 듯 성공 궤도에 올랐다.
그 후로도 바이오스피어 기술은 발전을 거듭해 오늘날에는 우주 공간까지 뻗어나갔다. 지구와 동일한 구조의 생태계를 타 행성이나 콜로니에 인공적으로 조성하거나 이식하는 일이 이론상으로 가능해진 것이다. 오늘날 인류가 급격한 기후변화나 사막화 같은 과거 무서운 재난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도 전적으로 바이오스피어 기술 덕택이었다.
다만 부작용이 한 가지 수반되었다. 인간의 오만함이 하늘을 찌를 만큼 높아져 버렸다. 더는 자연에 자유를 제약받을 일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금성의 대기마저 조작 가능한 시대에 지구환경 오염 정도를 무서워할 이유는 없었다. 환경을 보존하기 위해 애써야 할 당위성이 없어져 버린 셈이다. 그 결과, 인간들은 자연마저도 마음대로 다스릴 수 있다는 자만심에 빠졌다.
“나처럼 어려웠던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네. 피조물들을 소중하게 다스리고 그것들과 공존해야 하는 인간의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지를.”
켄은 조용히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청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윤혁 군, 혹시 자네도 믿음을 갖고 있는가?”
그는 윤혁의 신앙관에 대해서도 물었다.
“아, 네, 물론입니다.”
“기도실에서 혼자 있었다고 하길래 그럴 거라고 짐작은 했다네.”
“신실하다고까지 자신할 수는 없지만요.”
“스스로에 대한 겸손한 태도가 올바른 신앙일세. 가족들도 모두 함께 믿는가?”
“네, 특별히 어머니께서 대단히 성실하세요. 주님을 매우 깊이 사랑하시죠.”
켄은 허허하면서 웃었다.
“아버지랑 저도 어머니의 영향으로 믿음을 갖게 되었어요.”
“그것참 감사할 일이구먼. 아직도 주님 편에 서 있는 가정이 남아 있다니.”
노인은 오래간만에 통쾌함을 허심탄회하게 드러냈다.
“가뜩이나 요새는 모두가 신을 떠나가는 시대가 아닌가?”
“그렇긴 하죠.”
윤혁이 씁쓸하게 대답했다.
“어르신께서도 이집트에서 오신 겁니까?”
그는 화제를 다른 방향으로 돌려보았다.
“에이든에게 들었나 보군. 이야기하자면 조금 길긴 하지.”
켄은 과자와 빵, 과일과 밀크티를 꺼내서 탁자에 올려놓았다.
“꽤 오래전이었을까? 에이든이 아기일 무렵부터 떠돌아다녔다네.”
“실례일 수도 있지만, 혹시 어떻게 에이든을 키우시게 된 건가요.”
“우리 가족과 에이든의 가족은 꽤 오래전부터 동고동락하던 사이였다네.”
노인의 미소 위에 아련함이 더해졌다.
“이웃이고 한 공동체였지. 어려운 시절을 함께 나누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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