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12회 초인들의 세계 Ch 6. 이방인 가족 (2)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2.08.02 | 회차평점 0 |
(이전 회차에서 계속)
당시는 세계가 아직 회복되기 이전, 혼돈의 시대 말기.
내전과 만인의 투쟁과 재난이 일상사였다.
이 당시에는 본래부터 정세가 불안정했던 특정 나라들이 특히 큰 영향을 받았다. 이집트를 비롯한 근동 지방이 대표적이었다. 한 세기 전 신 에너지원의 개발로 인해 인류가 화석 연료에 더는 의존하지 않게 되면서 중동 세계는 정치적으로 몰락했다. 이는 나비 효과를 일으켜 중동 내부에 불안정성을 축적했다.
이후 혼란기로 접어들며 곪아왔던 문제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내전, 테러, 종교적 갈등과 분쟁이 중동 전역을 쉬지 않고 휩쓸었었다. 그야말로 중동과 북아프리카로서는 고통의 시간이었다. 물론 혼돈의 시대 당시는 세계 곳곳이 경기 침체와 준 세계 대전 급 내전, 슈퍼 웨폰, 생체병기 사태 등으로 인해 전반적으로 시끄러웠긴 했지만, 이 지역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 와중에 이집트 지역에서는 콥트를 비롯한 여러 교회 공동체들이 미움과 핍박의 대상이 되었다. 혼돈의 시대 이전 21세기 중반에는 이 지역 교회들도 선교팀들의 도움과 경제적 지원 덕에 어려움 가운데에서 일어나 부흥했었다. 하지만 세계가 침체와 난전에 접어들자 기껏 일어났던 중동과 이집트의 교회들은 다시금 그 지역 민족들의 핍박 아래 놓여 순교를 각오해야만 했다.
“내게는 어린 손자가 한 명 있었고 같은 공동체 내에 친하게 지내던 이웃 가정이 하나 있었는데 그들 젊은 부부에게도 손자가 있었지. 둘은 어린 시절부터 영특했다네. 그리고 둘도 없이 가까운 친구 사이였지.”
켄은 조용히 사진을 한 장 꺼내서 먼지를 손수건으로 닦아냈다. 그 사진은 낡고 색도 변색되어 있었다. 사진에는 지금보다는 나이를 덜 먹은 켄이 어린아이 두 명의 어깨 위에 손을 얹고 앉아 있었다.
“당시 우리들의 환경은 불우했지. 그런데 다행히 어떤 은인을 만나게 되어 경제적 어려움도 해소하고 아이들도 공부할 기회를 받게 되었다네.”
윤혁은 잠자코 노인이 하는 말을 경청하였다.
“감사할 일이었지. 하지만 그렇게 살던 중 일이 터지게 되었네. 손자 놈이 막 십 대 중반에 들던 때였지. 이웃집 부부에게도 막 둘째 아이가 생겼고.”
“그 아이가 에이든인가요?”
“맞네. 그들은 자신들에게 찾아온 선물로 인해 크게 기뻐하고 있었지. 하지만 불행히도 아이가 돌도 되기 전에 부부의 집에 큰 폭발 화재가 벌어졌다네. 내가 가까스로 이 애는 구해냈지만, 이웃집 식구 나머지는 모두 목숨을 잃었다네.”
켄은 다소 회한과 그리움과 애정이 섞인 표정으로 거실에서 장난감을 갖고 놀고 있는 에이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기억조차 못 할 나이에 가족들을 잃은 아이. 할아버지는 아이를 진심으로 애틋해 하는 것 같았다.
“유감이네요.”
“천만다행히도 에이든은 아직 그날의 일을 잘 기억하지 못하고 있지.”
‘괜히 기억을 떠올려봐야 좋을 것 하나 없겠지만.’
켄은 아이가 고통스러운 기억에 휘말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자신의 손자처럼 그날의 아픔 때문에 의무감에 짓눌리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아이에게는 부모님에 관한 이야기는 안 하셨고요?”
“가끔 물어볼 때도 있었지. 그때마다 두 사람이 매우 선량하고 좋은 사람들이었다고 말할 뿐 그 이상 자세한 건 말하지 않았다네.”
“그렇군요.”
윤혁은 차를 조금씩 홀짝이며 집 구석구석을 둘러보았다. 건물은 겉에서 볼 때는 조금 시대에 뒤처진 듯한 낡은 모습이었지만, 안에는 나름 현대 문물들이 있었다. 과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은, 딱 적당한 규모의 가구와 살림이었다. 사람이 살아가는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곳이었다.
문득 한 청년과 노인, 그리고 에이든이 찍힌 가족사진이 보였다. 검붉은 눈동자와 짙은 고동색 머리카락, 갈색 피부를 지닌 청년은 체구는 작아도 순수해 보이는 남자였다. 직접 마주 본 것도 아닌데 이상하리만큼 선명하게 느껴졌다.
“저분이 어르신의 친손자인가요?”
“그래, 우리 손자일세.”
“혹시 지금도 같이 살고 있나요?”
“지금 저 아이는 외국을 돌아다니고 있다네.”
“흠, 그렇군요.”
“몇 달에 한 번은 찾아오니 어쩌면 자네와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윤혁은 그 사람을 눈여겨보았다. 비교적 최근에 찍은 사진 같아 보였다. 켄 어르신의 손자는 얼추 윤혁 자신과 비슷한 나이 같아 보였다. 동갑내기 친구일까? 아니면 한두 살 터울 정도 될지도 모르겠다.
“오래전부터 세계 곳곳을 바쁘게 순회하는 아이라네.”
“자유로운 성격인가 보네요.”
“허허.”
할아버지의 말동무가 되어 한 시간 정도 다과를 나눈 뒤 윤혁은 아이와 가볍게 놀아준 다음 이웃집을 떠났다. 그는 켄에게 융숭한 대접에 대한 감사를 표하고는 곧바로 집으로 돌아갔다. 간만에 사람들을 많이 만난 따뜻한 하루였다.
***
‘성녀, 그녀의 행방은 어디로……?’
카이젤은 조용히 몇 년 전에 출간되었던 민간 뉴스들을 재검토하였다. 그리 흥미를 줄 만한 내용은 없었다. 이미 다 아는 것들이니까. 그나마 그의 관심을 끌 만한 내용은 예전 동료들에 대한 소식 정도였다.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아주 조금은 궁금했다.
“성녀라. 우습지도 않은 별칭이군. 뭐, 어차피 이제는 별 의미 없으려나.”
그의 철권통치 아래 평화의 시대가 도래했다. 전쟁도 내전도 없어졌으니 그녀가 다시 활약할 일이 앞으로도 없을 거다. 혹시 다시 써먹을 만한 일이 생길까? 일단 주의할만한 인물이니 행방을 주목해야 하리라.
세계 최고의 권력자인 카이젤에게도 경계 대상들은 있었다.
과거에 왕좌를 두고 경쟁했던 옛 친구들이었다.
그들의 존재감은 마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지금은 도주해 잠적했거나 고분고분하게 굴복하고 있지만, 그래도 예전에는 한 명 한 명이 큰 풍파를 가져올 만한 자질과 역량을 선보였었다. 이를테면 폐허 지역을 전전하며 탁월한 의술과 첨단 의학 기술을 기반으로 사람들을 죽음 직전에서 살려내고 종교나 인종을 초월해 사람들을 화합시켰던, 기묘한 매력을 지닌 희대의 평화주의자인 성녀처럼.
‘정작 본인은 신 같은 건 섬기지도 않으면서 말이지.’
카이젤은 이내 흥미가 다했는지 안락의자에 앉아 허공 위로 수많은 홀로그램을 띄운 뒤 뇌파와 손가락질로 그것들을 조작했다. 일반인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빽빽한 텍스트와 영상 정보들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두뇌 작동력과 감각적 기능이 일반 물리적 범주를 뛰어넘는 그는 스쳐보는 것만으로도 모든 정보를 기억하고 이해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냈다.
“곧 도착할 겁니다, 보스. 제로원으로 향하실 겁니까.”
“일단 서부 섹터에 잠시 머물도록 하지. 그쪽 일을 처리할 차례라서.”
“알겠습니다. 일정을 준비하겠습니다.”
데미안은 구 신국(유럽 연합의 후속 국가) 에우로페 제국 부근의 서부 섹터로 대표의 방문 예정 소식을 보낸 뒤 일정 브리핑을 도왔다. 그들이 탑승한 첨단 전용기는 곧바로 대기권 내 워프를 가동하였다.
“비서관은 자기 가족들을 기억하나?”
“물론 아닙니다.”
비서의 태연한 무감각에 보스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일 처리는 믿음직스러우나 보스에게 휘둘리지 않고 자기 페이스를 유지하는 게 데미안의 장점이었다. 초인 중에 속하면서도 일개 비서 자리에 만족하는 것도 참으로 신기했다.
“기억하지 못할 수밖에요. 저는 하늘도시에서 태어나서 평생 훈련을 받았습니다. 각성하기까지 수십 차례의 경쟁을 거쳐 더 높은 세계로 올라왔고 동면과 시간 압축까지 체험했었죠. 기나긴 세월을 기다리며 과거의 허물을 벗어왔습니다.”
“과거를 잊고 앞으로 나아가라⋯⋯. 좋은 말이지. 하지만 아쉽기도 해.”
“하늘도시는 당신께서 주도하신 프로젝트의 일환이 아닙니까.”
“뭐 그거야 그렇지.”
머쓱해진 카이젤이 자신의 소매를 만지작거렸다. 코팅된 특수 물질로 된 격자들이 반지에서 뻗어나가 그의 손과 아래팔을 장갑처럼 뒤덮었다. 금강석처럼 단단하면서도 액체처럼 유연한 물질은 티 한 점 없이 깨끗하게 빛나고 있었다.
“업그레이드된 나노슈트로군요.”
“완벽한 질량 압축이 가능해서 편리하지.”
“질량까지 마음대로 조정이 가능한 겁니까.”
‘최신 나노슈트로도 그 정도 단계까지는 무리일 텐데?’
늘 무표정하던 비서가 아주 조금 흥미를 내비쳤다.
“수천 가지 기능 중 하나일 뿐이지.”
“그렇군요.”
“내심 공을 들였던 작품이지. 앞으로는 일상화되겠지만.”
왕은 슈트의 장갑 부분을 흔들어 다양한 형태로 변화시켰다. 은빛 금속 같은 그 물질은 시시각각 색과 형상을 바꾸었다. 맹금류 발톱, 용의 앞발, 맹수의 발톱 등의 형태뿐 아니라 검, 창, 총기, 둔기 등 무기 형태로도 변형되었다.
“최초의 슈트가 파괴적인 용도로 응용되지 않은 건 천만다행이었어. 원래라면 전쟁 중에 기술 경쟁을 하는 과정에서 개발되었을 물건이었겠지. 보통 고전 영화 속의 영웅들도 슈트를 전투적인 용도로만 활용했었지.”
비서관은 대답 없이 조용히 상관의 말을 경청하였다.
“지구에서 처음 슈트가 개발되었을 때 어떤 목적이었는 줄 아나?”
“소방관들을 위한 발명 아닙니까? 저도 지구 역사 정도는 압니다.”
그 말대로 최초 슈트는 전쟁 목적이 아닌 인명을 구하기 위한 목적의 다용도 슈트였다. 사실 이는 놀랄만한 일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수지 타산에 맞지 않는 목적이기 때문이다. 전쟁 병기로 팔아먹으면 이익이라도 있지, 소방관들이 불을 끄기 위해 슈트를 사용한다면 단기적으로는 제작비용의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탐심에 얽매이지 않는 마음가짐과 독특한 지혜를 동시에 갖춘 자가 아니고서는 이런 발상을 해낼 수 없지. 지금의 우리들이야 밥 먹듯이 지식들을 쏟아낸다지만, 그 시절에 그런 아이디어를 내기란 쉽지 않았어.”
“확실히 그렇겠군요.”
“개발자가 최초의 슈트들을 거의 헐값에 제공했다지. 그 덕에 소방관들은 안전하게 대형 화재를 대처하는 것은 물론 테러 현장에까지 투입할 수 있게 되었어. 순직이나 부상도 최소화되었고 말이야.”
소방관에게 도입된 이후에는 거의 모든 분야의 위험한 산업에는 이런 탁월한 다목적 슈트가 동원되었다고 한다. 다목적 슈트는 근력과 운동신경을 향상하는 것은 물론 거의 모든 종류의 작업을 손쉽게 시행할 수 있었고 화학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각종 위험의 노출을 막을 수 있었다. 작업 효율이 극대화되었고 활용의 스펙트럼이 넓어진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왜 당시에는 위험한 일들을 자동화된 시스템에 맡기지 않았을까?”
카이젤이 부하를 시험해보듯 질문했다.
“당시엔 모든 상황에 대처할 만큼 인공지능의 수준이 높지 않았을까요?”
“과연 그럴까? 초대째 위버멘쉬는 효율성을 극히 중시하던 사람이었어. 슈트보다는 로봇 생산에 투자하는 편이 경제적으로 이익임을 모를 리가 없었지. 이건 그의 동무가 낸 발상이야.”
21세기 최고의 과학자 중 하나로 여겨지는 베일 속의 인물.
“현역 시절에는 공학 한정으로는 위버멘쉬보다도 살짝 우위였다지.”
정치나 경영은 일절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공학에만 전념해서 그랬겠지만.
“슈트 기술을 처음 시작한 사람도 그 사람이었어.”
그가 소방관들을 위한 슈트를 처음 개발한 것은 순전히 고귀한 도덕관 때문이었다. 그자는 타인을 구하는 숭고한 일꾼들이 큰 힘을 다루기를 원했다. 그들이 안전하게 일하도록 돕되, 육체노동을 로봇들에게 떠넘겨 자동화시키는 선택지는 고르지 않았다. 그는 기존의 노동자들이 일자리와 보람을 잃게 될 것을 원치 않았다.
“그자가 내린 결론은 숭고한 노동을 하는 일꾼들에게 그에 마땅한 권리를 ‘숭고한 힘’을 부여하는 것이었지. 그래서 당시에는 그도 동료들과 논쟁을 많이 빚었어. 그런 최첨단 기술을 고작 그런 용도로 낭비하느냐고 말이지.”
하지만 그자는 효율성이 아닌 인간의 고유 가치를 더 중요시하였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굳게 지켰고 결국은 실천에 옮겼다.
“결론적으로 후세에 와서 평가해보니 그의 생각이 옳았음이 증명되었지.”
만일 효율성에 눈이 멀어 전쟁 슈트 기술을 개발했다면, 인류는 훨씬 더 빠르게 자멸했을 것이다. 또 육체노동의 자동화를 지나치게 빨리 앞당겼다면, 아직 초인들이 많지 않던 그때 인간은 소명과 존재 의의를 잃고 퇴화했을 것이다. 그랬었다면 지금의 찬란한 인류 문명 또한 이룩되지 못했으리라.
“여하튼 그런 독특한 발상력의 극소수 위인들 덕에 지금 인류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설 길을 연구할 수 있게 되었지. 지구 밖 환경에서 적응하고 인공지능을 뛰어넘는 초지능체를 이식하고 초인적인 힘을 다룰 가능성을 얻었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이기심을 포기한 이타적 마음가짐에서 시작된 기술들, 그런 유산들이 쌓이고 쌓이더니 어느덧 후세 인간들에게는 오히려 인류의 이기적 야망에 성장력을 붙여줄 정신적 발판이 되어버렸다. 과거의 위인들이 이를 본다면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카이젤은 싱긋 웃으면서 슈트를 해제 후 압축하였다.
“그 사람은, 아니 그분은 아직 행방불명입니까?”
데미안이 질문했다.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아마도 백이십은 넘겼겠지.”
“초인에게는 아직 한참 젊은 나이입니다.”
“글쎄. 과연 어떨까나?”
카이젤은 손을 움직여 홀로그램에 새겨진 한 문자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א(알레프). 본인의 미들네임.
동시에 존경하는 옛 위인의 코드네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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