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13회 초인들의 세계 Ch 7. 공학 (1)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2.08.03 | 회차평점 0 |
Chapter 7. 공학
맑고 깨끗한 흰색 방.
이곳에는 공학자들이 다양한 소재를 가지고 실험을 할 수 있도록 설비들이 갖춰져 있었다. 코를 찌르는 탁한 약품 냄새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상쾌하고 환기가 잘되는 탁 트인 공간. 그 대신 신기한 기계들이 즐비 되어 있었다. 젊은 인재들의 창조성을 자극하고 끌어낼 수 있는 편안한 분위기였다.
아직 전문가가 아닌 젊은 학생들을 위한 장소지만 백 년 전 세계 최고의 혁신 기업에서나 제공될 연구소보다도 나았다. 공학 분야의 대학이라면 이 이상의 설비는 기본으로 보급되어 있다. 중상위 대학인 Y대 공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주입식 교육은 이미 오래전 퇴색했다. 그런 구시대적 교육으로는 고도로 발달한 시대에 뒤처지기에 십상이다. 지식을 익히는 것은 필수적이지만, 그 이상의 창조적인 훈련을 받지 못하면 사회에 기여하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제는 바야흐로 유연한 사고력이 가장 큰 자질로 평가받는 시대가 되었다. 특히 공대생들이라면 더욱. 남들과 다른 탁월한 연구 성과물과 프로젝트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그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이었다. 얼마나 독창적인 생각을 구현하고 그것을 현실에서 실용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느냐가 중요할 뿐이었다.
긍정적인 변화임은 부정할 수 없었다. 다만 학생들에게는 큰 고역이 되었다.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그만한 창조성이 없었으니까. 수련을 받는다고 해서 성장시킬 수 있는 역량도 아니었고. 아무리 머리를 짜내어도 좋은 성과를 못 만드는 사람들은 떠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런 가운데서 꿋꿋하게 제 역할을 수행하고 제 가치를 증명하는 학생들은 탁월한 인재로 인정받을 만하리라. Y대 공과대학 A 건물의 발명 랩(Lab)에도 그러한 경지를 노리며 정진하는 이들이 꽤 있었다.
네 명의 젊은이가 거대한 크기의 랩 내부의 서로 다른 구획에서 복잡한 기계들과 두꺼운 전문 서적들을 쌓아둔 채 프로젝트와 씨름하고 있었다. 고리타분한 모범생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세련된 외모. 하나 같이 생기가 넘치고 자유분방하고 사교성이 좋아 보였다.
그때 후드티를 입은 검은 머리 청년이 랩 안으로 들어왔다.
“역시나 A 건물 랩 분위기가 제일 치열하네.”
윤혁은 둘러쓰고 있던 후드를 뒤로 넘기고 들고 온 짐을 탁자에 올려놓았다. 그는 실험실 안의 분위기를 면밀히 살폈다. 그는 제일 먼저 특수 유리 안쪽을 바라보면서 화면을 열심히 조작하는 여학생에게 다가갔다.
“커피 좀 가져왔으니까 잠시 쉬다 해.”
“어머, 센스도 좋아요.”
하연아. 그녀는 싱긋 웃으면서 윤혁이 건네주는 음료를 받아들었다. 고양이상 눈매와 흰 피부를 지닌 그녀는 웃음이 매력적이었다. 그녀는 신물질 공학 전공이었다. 이곳 스물여섯 번째 랩은 다섯 명의 각기 다른 전공의 공대생들이 사용하는 곳이었다. 모두 열정 넘치는 청년들로, 밤늦게까지 연구하며 교류한 덕에 금세 서로서로 친해질 수 있었다. 윤혁과 연아 역시 그 무리 중에 속했다.
일부러 다양한 분야의 학생들이 일하게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자신의 분야 이외의 공학 분야를 접하여 안목을 넓힐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서로의 아이디어를 교류하여 창조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실제로 서로의 연구에서 얻을 수 있는 힌트와 지식은 꽤 많았다. 더욱이 학생들끼리도 성격이 잘 맞았기에 친교의 시너지 효과가 상당했다.
“예쁘지?”
연아는 벽 너머에 있는 빛을 내뿜는 물체를 지칭했다. 특수 장비로 코팅된 유리 너머에 기체와 액체의 중간 상태로 보이는 에메랄드빛의 물질이 채워져 있었으며 그 내부에는 보랏빛으로 빛나는 보석 비슷한 다면체의 광물이 있었다.
“위험하지는 않나? 특수 방사선 나오지 않으려나?”
윤혁이 골똘히 그것을 직시했다.
“10중 특수 실드가 작동하고 있어서 괜찮아.”
연아가 유리에 씌워진 보이지 않는 에너지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번에 학부에서 새로 수입한 물질인가? 처음 보는 것 같은데.”
“KPS-4357 알파 타입. 개발된 지 1개월도 안 된 따끈따끈한 신물질이야.”
현시대는 신물질의 시대.
이미 수없이 다양한 유형의 신물질들이 발견되고 제작되고 가공되었다.
이러한 개발의 연쇄가 시작된 지 이미 꽤 오랜 세월이 흘렀다.
처음에는 빅뱅을 연구하기 위해 입자 가속기 실험을 시행한 결과물에서 이런 신물질 발견이 시작되었다. 입자 가속기를 통해서 우주 탄생의 비밀을 밝힐 수 있으리라 굳게 믿은 당시의 과학자들. 그러나 부단한 노력에도 태초의 비밀은 알아낼 수 없었다. 다만, 전혀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수차례의 실험에서 기존 우주에서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유형의 물질들을 부산물로 얻은 것이다. 많은 학자들은 이러한 ‘새로운 개념의 물질’들이 기존 우주인 3차원 공간 너머에 있는 더 큰 영역에서 흘러들어온 것으로 추측했다.
이러한 발견들 덕분에 물질에 대한 과학 개념은 크게 확장되었다. 그 후로도 여러 방법을 거쳐 새로운 물질들이 속속들이 발견되었다. 과거에는 미지의 암흑물질, 암흑에너지의 범주에 포함되던 것 중 많은 신물질이 베일을 벗어버렸다. 또 물리 이론이 점차 고차원적으로 발전함에 따라 신물질을 조정하고 다룰 지식과 기술 역시 급속도로 발전했다.
한편, ‘게이트’ 기술이 발명되고 응용됨에 따라 신물질 기술은 한 차원 더 도약했다. 본래 게이트는 먼 곳까지 물체를 순간이동 시키는 용도였다. 그러나 게이트는 그 외에도 수많은 부산물들을 출아하였다. 상위 차원 입자들을 방출한 것도 그 대표적인 예시였다.
이후 기존 물리학의 범주를 완전히 벗어난 원소들도 발견되었다.
인류는 물질 기본 원소인 끈(String)과 브레인(M-brane)을 다양한 패턴으로 재조합하는 경지에까지 다다랐다. 덕분에 원소의 분류 범주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환상 소설에나 등장할 법한, 마법 같은 특수 금속들이 버젓이 현실화 되었다. 덕분에 지금은 매일 수천 가지의 새로운 물질이 발견, 합성, 양산되는 중이다.
“저건 선택적으로 에너지를 흡수하는 특성이 있어. 본체를 중심으로 특수한 필드를 펼쳐서 그 필드 내에 들어온 특정 유형의 에너지들만을 선택적으로 끌어들여서 본체에 담을 수 있지.”
연아가 신물질 샘플을 보여주며 설명했다.
“그건 흔한 타입 아닌가? 그것만으로는 특별하지 않을 텐데?”
윤혁이 턱을 손가락으로 괴며 되물었다.
“그래, 하지만 더 중요한 점은 저거야.”
연아는 다섯 개의 빛나는 보석들이 각기 담긴 다섯 캡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첫 번째 보석이 작동하더니 천장에서 방출되는 에너지를 흡수하였다. 에너지를 흡수한 보석은 보라색에서 검푸른색으로 변색하였다. 그런데 이윽고 옆에 있던 다른 보석들까지 함께 색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한 물체가 흡수한 에너지를 다른 짝들이 공명하여 나눌 수 있어.”
“호오.”
“공명 비율을 잘 조절하면 에너지의 크기를 늘리거나 줄일 수도 있고.”
기이하고 아름다운 광경에 눈을 뗄 수 없었다. 전공 서적에서 이보다 더 상위의 기능을 띤 물질들을 종종 보긴 했지만, 고성능의 특수 물질은 워낙 구하기가 힘든 탓에 이렇게 직접 실험실에서 확인해보는 건 처음이었다.
“굉장하네.”
“꽤 멋있지? 우린 학생들이니만큼 직접 저런 걸 제작하거나 조작하는 건 무리겠지만, 응용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어. 물질 종류도 많으니 앞으로도 실험할 주제는 무궁무진해.”
연아는 신이 나서 여러 전문 용어와 기초 이론들을 들어서 설명해주었다.
“그나저나 선민이는 어디에 있어?”
윤혁은 연구실 동기의 행방을 물었다.
“저 반대편 벽의 컴퓨터실에. 같이 가볼래?”
“오케이.”
연아와 선민은 어릴 적부터 가까운 소꿉친구였다. 둘은 유치원 때부터 지금까지 쭉 함께 다니고 있다. 둘의 부모님은 부유한 사업가였으나 연아와 선민은 경영을 배우지 않고 공과대학에 진학했다. 순수하게 발명을 좋아해서 그런 것인지, 혹은 산업을 더 잘 이해하려고 그런 것인지는 잘 모른다.
집안이 좋음에도 두 사람은 친구들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고 친절히 대한 덕분에 평판이 좋았다. 다만 연아가 똑 부러지는 단호한 성격이라면 선민은 조금 우유부단하고 남들의 부탁을 잘 이기지 못하는 유한 성격이었다. 그래서 연아는 유독 친구가 실수하지 않도록 참견을 많이 하곤 했다. 선민은 그런 간섭을 기분 나쁘게 여기지 않고 도리어 고맙게 생각한다.
주변 사람들은 그 두 단짝을 보고 서로 사귄다는 걸 기정사실처럼 여겼다. 정작 본인들은 전혀 서로를 이성으로 보지 않았지만.
컴퓨터실 안에 들어가 보니 최신 사양의 양자컴퓨터들이 비치되어 있었다. 물리적인 키보드, 마우스, 모니터 같은 낡은 구세대 산물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전부 홀로그램으로 대치된 지 오래였다. 컴퓨터의 본체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안전하게 설치되어 있었고, 사용자는 그저 공중에 떠오른 수많은 화면을 손가락짓이나 눈짓만으로 조작하였다.
“우선민!”
“우와 깜짝이야. 뒤에서 놀리지 말랬잖아.”
“미안. 네 리액션이 너무 재미있어서.”
조금 색소가 옅은 머리카락의 순박한 남자가 미간을 조금 찡그렸다.
그는 장난치는 걸 좋아하는 자신의 소꿉친구를 바라보았다.
“윤혁이가 학생 로비에 있는 간식을 챙겨서 갖고 왔어.”
연아의 말에 곁에 있던 윤혁이 눈웃음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프로젝트는 잘 되어가고 있어?”
윤혁이 묻자 선민도 부드러운 웃음으로 답했다.
선민은 현재 컴퓨터 과학을 공부하는 중이었다. 공학 기술 중 가장 빠르게 급변하는 분야가 정보기술이었다. 특히 하드웨어 발전에 맞물려 소프트웨어 기술은 그야말로 지수 함수적으로 진화하는 중이었다. 보통 일 년만 지나면 지구상 모든 컴퓨터 능력의 총합이 단 한 대의 소형 기계 능력 수준으로 압축된다고 하던데 이제는 이마저도 옛말이 되었다. 이젠 한 달이면 충분했다.
‘어쩌면 숨겨진 기술은 그보다 더할지도 모르지.’
그러다 보니 IT 기술 종사자들은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썼다. 열심히 기술을 배우고 발전시켜도 몇 달이면 완전히 새로운 이론들이 등장하는 판이니, 핵심 이론의 개발은 고사하고 기존 기술을 응용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더욱이 지금은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스스로 프로그램을 창조하는 경지에까지 이르렀으니, 컴퓨터 전공자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요구되었다.
그렇게 혹독한 분야임에도 단지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포기하지 않는 것을 보면 우선민이라는 인간도 참 독종이다 싶었다. 모두 그의 오기를 높이 평가했다. 부드럽고 유해 보이는 겉보기 모습과는 다른 강한 의지력이었다.
“재미있는 거 한 번 보여줄까?”
선민이 두 친구에게 제안했다.
“이번에는 또 어떤 프로젝트인데?”
윤혁도 은근 선민의 연구 테마가 궁금했다.
“보면 알게 될 거야.”
선민이 홀로그램 스크린을 누르자 허공 위로 한 인물의 모습이 떠올랐다.
홀로그램임에도 살아있는 사람과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높은 완성도.
“일반적인 홀로그램이랑 크게 다르지 않은 거 같은⋯⋯.”
윤혁은 말을 잇지 못했다. 분명 조금 전까지는 대머리에 온몸이 하얀 인간형 생명체였는데 이내 모습을 바꾸어서 그와 똑같은 외향으로 변신하는 게 아닌가.
“한 번의 관측을 통해서 인물의 형상을 그대로 모방할 수 있어.”
실물뿐 아니라 사진 데이터를 통해서도 추측해낼 수 있단다.
“목소리도 모방이 가능한가?”
윤혁은 자신과 똑같은 모양의 인공지능을 만져보았다. 촉감까지 느껴졌다.
“물론. 말투와 행동 습관까지도 모방할 수 있지.”
이번에는 홀로그램이 선민을 대신해서 윤혁에게 대답했다.
“멋지긴 한데, 조금 징그러울 것 같다.”
단순히 이미지만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율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움직이는 개체가 된다면? 게다가 그런 것이 겉모양까지 완전히 똑같이 모방해 활동한다면? 미생물 크기의 초소형 드론으로 그런 홀로그램을 무수히 만든다면? 수천 개의 변신 가능한 환영 분신들을 찍어낼 수 있다는 뜻이 되리라.
“뭘 놀라고 그래. 요새 기술에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인걸.”
“이런 걸 볼 때마다 사람들의 적응 속도가 기술 발전 속도를 못 따라간다는 게 여실히 느껴지네.”
연아가 감탄하였다.
“하긴 그건 나도 공감이야. 컴퓨터 공부를 하기로 마음은 먹었지만 따라가는 게 여간 만만치 않거든. 어떨 때는 무력감을 느끼고 포기할까도 생각한 적 있었고.”
“넌 그렇게까지 힘들게 컴퓨터 배울 필요 없잖아.”
윤혁이 질문했다.
“그래도 역시 힘들더라도 좋아하는 일을 할 때 보람이 있으니까.”
내심 윤혁은 선민의 확고한 태도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예전 같은 가업 세습은 사실상 무의미해졌다지만, 그래도 집안이 부유하니 굳이 어려운 분야에 뛰어들 필요는 없었을 텐데. 자신도 선민처럼 평생을 걸 만큼 의미 있는 진로를 찾아 전념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재능 수준이 아직 애매한 윤혁은 늘 비전 때문에 고민이었다.
(다음 회차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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