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31회 초인들의 세계 Ch 15. 리온 마흐무드 (3)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2.08.24 | 회차평점 0 |
(이전 회차에서 계속)
윤혁은 켄과 에이든의 증언으로 간접적으로만 들어왔던 리온의 행적을 본인 입으로 직접 자세히 듣게 되었다. 몇 년 전부터 리온은 그의 친할아버지나 동생과는 달리 한 지역에 정착하지 않고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는 삶을 살아왔다. 종종 한 번씩 가족을 방문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바쁘게 돌아다녀야만 하는 일을 맡았기 때문에 떠돌이 신세를 감내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여러 나라 언어를 두루두루 능수능란하게 다루게 되었다고 한다.
“에이든이 네가 길 저편의 기도원에서 피아노 치는 걸 들었다던데?”
리온이 물었다. 윤혁은 그 노인이 만들어냈던 선율을 떠올렸다.
“그리 대단한 수준은 아니야. 남들에게 보이긴 부끄럽지.”
살짝 쑥스러운지 낯을 붉히며 손을 저었다.
“평소에도 교회당에 찾아가나 봐? 요즈음에는 발길이 끊겼다고 들었는데.”
“혼자 침묵의 시간을 갖기에 좋더라고.”
“예를 들어 기도할 때처럼?”
“뭐, 그렇지.”
이에 리온은 윤혁의 말에 동감을 표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타인과 소통하고 교제하는 시간을 필요로 하지만, 동시에 외부와 떨어져 조용히 자숙하는 시간도 한 번씩은 필요하다고.
‘재미있는 친구네.’
리온의 언행에는 이전에 윤혁이 쉬이 보지 못했던 재치와 지혜가 있었다. 남의 입장을 존중하는 사려 깊음도 느낄 수 있었다. 리온은 자신의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면서 낯선 분위기의 깨트리고 윤혁에게 다가왔다.
“여러 나라를 돌아다녀 봤으면 그곳 사정이 어떤지도 잘 알겠네?”
윤혁은 바깥세상에 대한 궁금증을 표하였다.
“따로 한국 밖으로 나가본 적은 없어?”
그 말을 들으니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 같아 뜨끔했다.
“몇 번 일이나 공부 때문에 나간 적은 있지만 몇 달 이상 거주한 적은 없어.”
“음, 고향에 정착하는 걸 좋아하는 타입인가 봐.”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는 폐쇄적인 사람이라는 비난일 리는 없겠지만 찔리는 기분은 들었다. 윤혁은 지금껏 아는 영역 안에서만 거하는 것이 일상화되었다. 언젠가는 부모님을 떠나서 독립하겠지만, 아직은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리온 같은 자립적이고 진취적인 사람들과 자신은 너무 달랐다.
“뭐, 어쩌다 보니. 사실 세상 밖으로 나가볼 생각은 그리 많지 않거든.”
윤혁이 반쯤 자조하듯 피식거렸다.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을 해결하기도 벅차니까.”
“사람마다 다 제각기 성향이 있는 거지.”
리온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나처럼 방랑하고 다니는 것보다 어쩌면 훨씬 더 안정적일 수 있지.”
“그런가?”
그래도 바깥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윤혁도 조금 궁금했다. 뉴스나 개인 정보 매체를 통해서 접하는 여러 가지 소식, 역사책을 통해서 배우는 현대사 같은 간접적인 내용 대신 직접 눈으로 보고 들은 목격담을 알고 싶었다. 이미 지구촌을 넘어 훨씬 더 넓은 우주 영역까지 확대되고 있는 지금의 세계인데 자신은 당장 가까운 곳에 대해서조차도 아는 것이 적었다.
고맙게도 리온은 윤혁에게 자신이 활동하면서 직접 겪은 체험을 전해주었다. 무용담처럼 자랑하지는 않았다. 그저 곳곳의 현장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알려주었다. 요새 세계정세가 어떻게 흐르는지도. 여기에 리온이 직접 보고 느낀 감정들까지 가감 없이 솔직하게 전해주었다.
“내가 거닐던 지역은 주로 황폐하고 낙후된 곳들이야.”
이런 고도화된 시대에 폐허가 있겠냐고 물을 사람도 있겠지만, 불과 이십 년 전 만 해도 내전이 끊이지 않던 지역들이 꽤 많았다. 여기에 더해 더 과거의 ‘혼돈의 시대’ 때에는 전쟁 및 생화학 사태 등의 타격을 입었던 곳들도 수두룩했다. 대부분은 폐허를 딛고 회복되었으나 버려진 땅도 일부는 있었다. 리온은 주로 그곳 주민들이 살아나가는 이야기를 꾸밈없이 전했다.
‘모르던 이야기가 참 많았네.’
귀가 이후에도 윤혁은 리온과 메시지를 통해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리온에게서 많은 것을 배운 윤혁은 오래간만에 큰 흥미를 느꼈다.
며칠 후 켄의 집에서 리온을 다시 만나자 못 보던 것이 눈에 띄었다. 저번에 보았을 때 리온은 목까지 올라오는 상의를 입었었는데 이번에는 좀 더 헐렁한 옷이어서 그런지 왼쪽 목덜미에 선명하게 남은 흉터가 보였다. 날카로운 물체에 베인 건가 했는데 그건 아니었다. 살점이 찢겨나간 것처럼 불규칙하고 넓었고 보기에도 조금은 흉해 보였다.
‘어떻게 생기게 된 거지?’
직접 묻자니 실례가 될 것 같아 잠자코 있었다.
윤혁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하는 것을 눈치챈 리온이 궁금증을 풀어줬다.
“이건 북아프리카 A 섹터에서 있을 때 생긴 건데, 그 지역 폭도들에게 납치당했었어. 가까스로 동료들의 도움으로 벗어날 수는 있었지만 정말로 죽는 줄 알았지. 탄이 목을 스치고 지나가면서 하마터면 과다출혈로 기절할 뻔했거든.”
충격적인 이야기에 윤혁은 흠칫 놀랐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렇게까지 사태가 번진 건데?”
“요새는 많이 가라앉았지만, 아직도 이슬람 과격파가 활동하는 지역들이 있거든. 선교 활동을 하다 보면 종종 그런 사람들의 심기를 거스르는 경우가 많아. 물론 그렇게 무력하게 당하고만 있는 건 아니야. 그렇지만 아무래도 우리는 비무장이다 보니 험한 꼴도 많이 봤지.”
목숨의 위협조차도 아무렇지 않게 담담하게 경험담으로 말할 수 있는 그가 조금 신기하고 존경스러웠다. 분명 고통스러운 기억이었을 것이다. 누군가를 물리친 무용담도 아니고, 그야말로 일방적으로 당했다는 이야기 아닌가. 자신 같았으면 감췄을 것 같다.
“힘들진 않았어?”
“사실 한두 번 겪는 일은 아니니까.”
“뭐라고?”
“내 동료들이나 다른 팀원들도 이런 일을 종종 체험하거든.”
“우와!”
리온은 자신에게 여러 명의 동료가 있다고 하였다. 현재 세계 각처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이란다. 교파나 출신 국가를 초월하여 협동하는 여러 선교팀. 그들은 지구 최후의 복음주의자들이었다. 허울뿐인 포교자가 아닌, 진심으로 목숨을 걸고 땅끝까지 뛰어다니는 사람들. 그들은 거짓을 폭로하고 진실을 밝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폭력에도 비폭력과 사랑으로 대응하는 자들이었다.
“보통 우리는 은어로 이런 상처를 아벨의 표식이라고 불러.”
“아벨의 표식? 성경에 나오는 용어는 카인의 표식이 아니던가?”
“뭐, 그렇긴 하지.”
인류 최초의 형제, 카인과 아벨.
형이 동생을 살해했을 때 신께서는 형을 징계하셨다고 한다. 보복을 두려워하는 카인에게 보호의 의미로 신이 베푼 긍휼의 표식이 바로 카인의 표식이었다. 리온이 말한 아벨의 표식이란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였다.
“세상적인 의미로 볼 때 카인의 표식은 살인자의 표식, 강자의 표식이야. 주님께 순종하지 않고 방황하는 세상 사람들에겐 궁극적인 질서가 없어. 오직 힘의 논리만 작용하지. 때문에 세상 사람들에게는 카인의 표식이 승리자의 상징이야. 약육강식과 진화론을 말하는 세상에서 이보다 더 확실한 징표가 어디 있겠어.”
유려히 설명하는 리온의 모습은 대단히 영민해 보였다.
“그렇다면 아벨의 표식은 뭐라고 보면 되지?”
호기심에 윤혁이 다시 질문했다.
“사람들이 볼 때는 약해 보이고 미련해 보이나 주님 뜻에 순종하여 고난받는 걸 기뻐하는 하나님 나라의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자기 죄로 인함이 아닌 하나님의 의로 인하여 미움받고 희생당해서 남은 흉터지. 마치 예수님의 못 자국과 창 자국처럼 말이야.”
“호오, 듣고 보니 말이 되네.”
“남들 보기엔 어리석은 상처지만 우리는 그로 인해 더욱 기뻐할 수 있지.”
문득 어디에선가 읽은 소설 이야기가 떠올랐다. 헤르만 헤세라는 작가의 소설이었던가? 한 소년이 밝은 신앙의 세계에 속해 있다가 다른 소년을 만나 배도와 타락의 길로 접어드는 내용이었다. 기이하고 매혹적인 친구의 말에 이끌려 마음속에서 여호와를 지워버리고 다른 신을 따라갔던 주인공. 윤혁은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친구를 잘 만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리온이라는 청년도 기묘한 끌림을 주는 범상치 않은 사람이었다.
다만 그는 혼돈이 아닌 질서의 방향으로 자신을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빛에 머무르려는 자를 타락시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미적지근하고 나약한 자를 더 밝고 순수한 진리를 향해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덕분에 늘 나약했던 자신의 열정이 오랜만에 고귀하고 순결한 에너지에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넌 정말 대단하네. 나이는 나랑 같은데 벌써 그렇게까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신념을 갖고 움직이다니. 참 쉽지 않은 일인데 말이야. 당장 난 작은 어려움만 닥쳐도 금세 지쳐 넘어지거든.”
윤혁이 부러움과 부끄러움을 표하였다.
“그렇다고 자신이 나약하다고 단정 짓기에는 아직 이른 게 아닐까?”
리온은 힐난 대신 아주 자연스러운 위로로 대꾸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세상의 모든 고통에는 반드시 그 나름대로의 의미와 목적이 있다고 한다. 괴로움 그 자체가 선한 것은 아니지만, 고통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뜻과 주권 아래에 놓여 있으므로 반드시 그 속에는 의미가 존재한단다.
“아픔은 때론 지혜를 배우게 하려고, 때론 성장을 위해서 주어지지.”
또한 어떨 때는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공감할 능력을 주고자 주어진다.
“물론 어떤 경우는 정말 의미를 알 수 없기도 하지.”
당장 결과가 안 좋아 보이는 고난과 실패도 매우 많다. 하지만 먼 훗날이 되어서는 그 뜻을 비로소 알게 된다. 고통은 신이 인간을 향해 자신에게로 돌아오도록 촉구하는 사랑의 메시지가 되기도 하고, 또 앞으로 더 많은 선한 일에 힘쓰도록 용기를 주는 격려가 되기도 한다. 이것이 리온이 생각하는 지론이었다.
“하지만 당장 나는 선한 일을 하여서 핍박받은 적이 없는걸.”
차라리 그랬더라면 예수님 말대로 기뻐하기라도 했을 텐데.
“그냥 내 부족함 때문인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해.”
윤혁은 반쯤 한탄 조로 말했다.
“힘든 것도 힘든 데, 그게 상급을 받을 거룩한 어려움이 아니라 그저 내 실수나 실패로 인함이라고 생각하면 기운이 빠져. 내가 주님을 위해 욕을 먹으면 뿌듯하겠지만, 내가 그냥 나 때문에 고생한다면 누구에게 하소연하겠어.”
그러나 리온은 고개를 저었다.
“내 생각은 달라. 혹시 네가 장차 주님께서 원하는 귀한 일을 하도록 준비된 사람일 수도 있잖아? 그걸 미리 아신 주님께서는 너를 연단 시키고자 어려움을 허락하거나 악한 자로 하여금 너를 방해하고 괴롭히는 일을 허가하신 거지.”
기묘하기 그지없는 논리였으나 이상하게도 설득이 되었다.
“그렇다면 낙담할 것이 아니라 용기를 얻어 준비해야 하는 것 아니겠어?”
“음, 알 것 같으면서도 잘 모르겠네.”
“지금은 그렇게 느낄지도 몰라.”
리온은 친구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했다. 더불어 둘이서 같이 잘해나가 보자고 말했다. 덧붙여 ‘너처럼 괜찮은 친구는 오랜만이야’라면서 칭찬했다. 앞으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거든 자신을 꼭 먼저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재미있는 녀석이네.’
윤혁은 웃으면서 그와 악수했다. 리온이 위로해준 방식은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방식이 아니었다. 윤혁 역시 한 번도 체험해보지 못한 위로였다.
“고통이 나를 잡아먹으려고 할 때는 방어만 하지 마.”
리온이 담대히 말했다.
“고통의 본진을 쳐 봐. 최선의 방어가 공격이라는 말도 있잖아.”
“공격이라고?”
이 말 역시도 쉽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리온이 부연해주었다.
“사람을 상대로 반격하거나 미워하라는 뜻은 아니야. 자기가 처한 상황에 패하지 말고, 도리어 그 기회에 선한 일을 낳으라는 뜻이지. 악재를 호재로 바꾸는 거야. 악의에 대해서는 사랑으로, 음모에 대해서는 지혜로 맞서는 거야.”
그는 이 모든 일을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는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아직 윤혁은 그 일을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사실 준비된 것이 거의 없었으니까. 하지만 대화하다 보니 답답했던 마음이 한결 풀림을 느꼈다. 그리고 친구를 본받아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도 하나님이 주시는 용기를 받을 수 있을까?’
훗날 알게 되겠지만, 그날의 다짐은 기대했던 것보다 빨리 현실이 되었다.
이전회
30회 초인들의 세계 Ch 15. 리온 마흐무드 (2) |
다음회
32회 초인들의 세계 Ch 16. 초대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