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39회 초인들의 세계 Ch 19. 생체병기 (1)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2.09.03 | 회차평점 0 |
Chapter 19. 생체병기
얼마 후 윤혁은 가급적 다시 보고 싶지 않았던 얼굴을 마주쳤다.
잊어버리고 싶었던 그 날의 섬뜩한 기억이 새록새록 재생되었다.
‘아니, 이 사람은 대체 왜 또 나타난 거야?’
그는 주춤거리며 뒤쪽으로 물러섰다.
“안녕하세요.”
그때 그 회색 머리에 키가 큰 젊은이였다. 윤혁을 형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아서 나이는 어린 듯했다. 외모도 딱 스무 살 정도였다. 전과 달리 평범하고 자연스러운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 순진무구한 표정 뒤에 얼마나 무서운 폭력성이 숨겨져 있는지 똑똑히 보았던 윤혁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에이, 무서워하지 말아요.”
“무, 무서워한 거 아니야!”
말은 그렇게 했으나 떨리는 몸은 솔직했다. 저번 전투를 직접 목격하지만 않았다면 저 남자도 그저 잘생기고 운동 잘하는 순박한 청년이라고 착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미 생체병기로서의 진가를 봐버리고 말았다. 평범한 윤혁으로서는 두렵지 않을 리 없었다.
“혹시 제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러는 거예요?”
그러자 남자는 이번에는 몹시 상처받았다는 얼굴로 조금 울상을 짓는다. 거칠게 싸울 때의 모습과 심한 괴리감이 느껴졌다. 딱히 자신이 못되게 군 것도 아닌데도 죄책감이 드는 것은 왜일까?
“설마 형도 사람을 차별하는 건 아니죠?”
보아하니 그는 사람다운 대우에 목이 말라 있는 듯했다.
“내가 잘못했으니까 이제 그만해.”
윤혁이 못 이기는 척 굴복했다. 그러자 녀석은 커다란 강아지처럼 활짝 웃었다. 너무 갑작스럽게 친근하게 돌변하자 좀처럼 적응이 안 되었다. 원래는 저게 저 사람의 진짜 성격일까? 본래는 다정하고 상냥한데, 생체병기라고 멸시하는 시선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다 보니 비뚤어져서 흉포한 성격이 된 건가?
“그럼 저랑 친하게 지낼래요?”
큰 개가 꼬리를 살랑거리듯 친근감 드러내는 룩,
“뭐, 그것까지는 좋은데⋯⋯, 좀 들러붙지는 말아줄래?”
‘저 근육 덩어리가 어깨동무하고 힘주면 내 몸이 단번에 으스러질지도?’
윤혁은 지금까지 만나 온 사람 중에서 이복형보다 키가 더 큰 사람은 룩이 처음이었다. 가까이서 보니 룩의 키는 최소한 2m는 넘겨 보였다. 게다가 어깨는 과장을 보태서 바다처럼 광활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갑옷보다도 묵직한 근육들로 휘감겨있었다.
‘부담스러워.’
사람들과 두루두루 원만하게 지내는 윤혁조차도 룩에게만은 다가가기가 쉽지 않았다. 아무래도 개조 인간이라는 사실 때문에 쉽게 선입견이 사라지지 않는 것 같았다. 정작 룩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천연덕스러웠지만.
“그때 일은 주변에 떠들고 다니지는 않을 테니까, 질문 좀 해도 될까?”
윤혁이 사려 깊은 어투로 조심히 말을 뗐다.
“어떤 거 말이에요?”
“그, 그게 말이지.”
머뭇거리는 윤혁을 향해서 룩이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하, 나 같은 부류가 궁금하신가 보네요?”
“으음⋯⋯, 그, 그래.”
얻어맞을까 잠시 무서웠다.
“뭐, 최대한 들키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미 목격했으니 어쩔 수 없겠죠.”
룩이 턱에 손가락을 괴며 중얼거렸다.
‘그때는 전혀 들키지 않으려는 태도가 아니었던데.’
신나게 때려 부수고 날뛰었지.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형도 참 성가신 사람들에게 얽혔네요.”
뼈아픈 사실을 룩이 다시 한번 상기시켜주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우리 같은 생체병기들의 존재를 아는 사람들은 주로 상층부죠.”
그가 화두를 열었다.
“대중은 우리가 존재를 잘 몰라요. 실제로 우린 비밀 병기이기도 하고요.”
룩은 의외로 순순히 자신의 과거와 출신을 알려주었다. 심지어 힘을 얻게 된 경위와 인류를 위해서 맡은 임무에 관해서도 자세히. 그 이야기 중에는 윤혁이 공상 과학에서나 보았던 충격적인 이야기들이 참 많았다.
“우린 생체 실험을 통해서 만들어졌어요.”
사실 윤혁도 미리 조사한 정보들을 통해 대충은 짐작하고 있었다.
“출생이 더럽다고 말했던 건 그것 때문이에요.”
하지만 이런 식으로 생체병기 본인의 입으로 듣는 건 처음이었다.
“출생 이후로도 몇 번 더 개조되긴 했지만, 태어날 때부터 정상은 아니었죠.”
‘태어날 때부터 정상이 아니라고?’
성폭력에 의해 잉태된 아이조차도 자궁 속에서부터 살아있는 생명이자 인간임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만들어진 생명체라면 어떨까. 그중에서도 클론이나 인공적인 방법으로 임신된 것이면 조금 사정이 낫겠지만 처음부터 무기로 사용되기 위해서 유전자 조작을 통해 제작된 자는 어떨까? 그런 존재는 그야말로 비정상인 생명체라고 여겨질 수밖에 없겠지.
“그래서 심한 말도 꽤 들었어요. 인간이 아니라는 욕은 말할 것도 없고요.”
복잡한 윤리적 딜레마였다. 윤혁은 함부로 의견을 피력할 수 없었다. 생체 실험을 통해 생명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행위 자체는 혐오스러웠다. 하지만 그 실험의 피해자인 실험체들은 어떻게 대해야 할까? 생체병기들의 존엄성과 존재적 의의를 부정해버리는 게 옳은 일일까? 아니, 그 이전에 인공 생명체가 사람인지 아닌지를 분간하는 기준은 무엇이란 말인가?
“나도 그런 사람들을 죽이고 싶을 만큼 혐오해요. 날 만든 작자들요. 어떨 땐 제 몸조차도 얼마나 혐오스러웠는지⋯⋯, 당신은 상상조차 못 할걸요.”
룩은 절제된 표정 속에서 이를 부득 갈았다.
“그런⋯⋯, 유감이구나.”
딱히 다른 위로의 말을 해줄 수가 없었다.
“씁쓸한 일이죠.”
문득 그는 윤혁 쪽을 바라보며 심각한 표정으로 도전의 말을 내던졌다.
“그러면 당신도 혹시 내가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응? 뭐라고? 그, 그게 말이지.”
아주 잠시 말문이 막혔다. 뭐라 답을 내려야 할까? 인간이 맞다고? 그러면 실험으로 만든 뒤틀린 생명체도 인간이 된단 말인가? 그렇다고 인간이 아니라는 대답을 내릴까? 그러면 눈앞의 룩의 존엄성을 부정해야 한단 말인가?
“뭐, 이해해요. 쉽게 판단이 안 서겠죠.”
다행히 딜레마를 던져준 룩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했다.
“초인들도 궁금해하는데, 당신이라고 다르겠어요?”
“참 어려운 문제네.”
그래도 룩은 내심 아쉬운 모양이었다.
“내 베이스는 그래도 사람 유전자에요. 형도 보다시피 살아서 숨 쉬고 사람처럼 생각하고 판단하고 있죠. 인격도, 마음도 있고 심지어 양심이나 감정도 있어요. 모든 면에서 인간과 완벽하게 똑같아 보이는 영혼이죠.”
그는 자신의 심장 쪽을 손으로 두드렸다.
윤혁은 궁금했다. 인위적 유전자 조작으로 인체를 만든다면 어느 단계까지를 인간으로 인정할 수 있을까? 난해한 윤리 문제였다. 만약 동물과 사람을 섞는 프로젝트에 성공한다면 그 결과물은 사람으로 보아야 할까 짐승으로 보아야 할까? 지능이 높으면 사람으로 간주해야 할까? 그 논리대로면 동물의 지능을 우수하게 개조한다면 그것도 사람이 되는 건가? 난감했다.
‘사실 유물론자나 무신론자들에게는 별 의미 없는 질문이겠네.’
그들 눈에는 사람이건 동물이건 개조 인간이건 키메라건, 어차피 유기체의 연장선에 불과할 테니까. 하지만 윤혁처럼 하나님을 믿는 사람 입장에서는 대단히 무거운 딜레마였다. 영혼과 신의 형상을 믿는 그로서는 하나님을 모독하지 않는 대답을 내려야 할 의무가 있었다.
사실 이러한 생물학적 딜레마는 오늘날 갑자기 제기된 이슈는 아니었다. 이를테면 과거에도 ‘태아는 언제부터 인격을 갖게 되는 것이냐’ 같은 질문도 있었다. 그런 경우라면 윤혁도 ‘수정되는 순간부터’라고 당당히 답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실험을 통해 태어난 비정상적인 것들은?
여기에 대해서는 윤혁도 묵묵부답이 되었다.
그 비정상적인 존재의 제작 과정은 죄악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그 죄는 어디까지나 그 존재를 만들어낸 사람에게 물어야 한다. 결과물로서 탄생한 생명체 본인은 도리어 피해자이니 죄의 책임을 물을 수 없지 않은가? 그러면 그 생명체는 죄악이 없으니 존재와 존엄성을 인정받아야 하나? 아니면 태어난 것 자체를 원죄로 규정해야 하나? 그것의 본질은 무엇으로 규정해야 하는가?
룩은 자신의 제작 과정을 좀 더 자세히 알려줬다.
“참고로 저는 여러 가지 기술들이 종합되어서 만들어졌어요.”
모자이크 차일드(Mosaic Child), 곧 여러 유전자를 인위적으로 조합하고 융합해서 세포를 제작한 뒤 배양하는 기술이 메인이었단다. 여기에 특수한 세포 조직의 이식, 증식 가능한 개조 미토콘드리아 및 세포 소기관 장착, 각종 특수 약물 및 나노 머신 주입, 이계 물질과 융화시키는 프로젝트까지 첨가되었단다. 한마디로 룩은 온갖 종류의 생물학, 물리학을 총망라하는 실험을 통해 탄생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아무도 날 인간으로 보지 않았어요.”
룩은 어린 시절 대부분을 실험실 안에서 살아왔다고 한다. 여러 가지 끔찍한 일들을 당했다. 하루하루가 그야말로 고통의 나날이었다. 정신은 점차 피폐해졌고 의식은 흐려졌으며 인격은 극히 난폭해졌다.
“그런 정신 나간 짓들이 아직도 자행되고 있단 말이야?”
분명 불법이라고 들었거늘. 경악스러웠다.
“지금은 당연히 불법화되었죠.”
룩이 쓰린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알다시피 신(新)인류연합이 부활하기 전에는 여러 세력이 뿔뿔이 흩어져 제각기 멋대로 행동해왔거든요. 형네 부모님 세대는 잘 아시겠죠. 혼돈의 시대라고도 부르죠. 아무튼 그때는 문자 그대로 윤리가 엉망진창이었어요.”
온 세계를 제어하던 위버멘쉬의 인류연합, 그 힘이 분열되어 무력화된 이후 도처의 춘추전국 세력이 제각기 일어나 날뛰었다. 그들은 새 기술을 얻기 위해 온갖 악행을 서슴지 않았고 윤리 따위는 땅바닥에 내던졌다.
“물론 그 바람에 과학은 극도의 초고속으로 발전했지만, 그 대가로 인간의 본분을 완전히 망각해버렸죠. 뭐, 필요악이라고 해야 할까나요?”
실제로 혼돈의 시대 당시에는 타락한 기술들이 범람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혼돈의 시대 때 악행을 통해 얻은 각종 기술은 그런 악행을 금지해버린 지금조차도 엄청난 유익이 되었다. 그때 부산물로 수확한 유용한 과학 기술을 기반으로 큰 발전을 쌓았으니까. 과거의 죄는 새 도약을 위한 유용한 기반이 되었다.
“뭐, 인류 역사상 항상 그래왔죠.”
하긴 언제나 의학 발전의 밝은 빛 뒤에는 모르모트의 그림자가 있었지.
“혼돈의 시대 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요.”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인류연합이 재건되기 전까지는 많은 세계 조직들이 금지 조약을 무시한 채 생체 실험과 각종 위험한 연구를 벌였다. 예컨대 우주에 적응할 수 있도록 신체를 개조하는 실험, 여러 종류의 생명체들을 조합하는 행위, 인체를 고의로 기계로 대체하는 사이보그 실험들이 있었다. 그 결과 클론이나 키메라나 사이보그 같은 온갖 금기의 산물들이 음지를 범람시켰다. 폐기된 불쌍한 실험체들까지 포함하면 훨씬 더 많았으리라.
‘인간의 타락상이 그 정도였을 줄이야. 심각하네.’
속에서 한탄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미친 시대였죠. 일반인들이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심지어 네오 오더 같은 악한 조직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절도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단다. 딱히 사람들이 과거보다 더 사악해졌다기보다는 과학의 수준이 너무 진보하면서 자연스레 시행 가능한 악행의 폭도 넓어진 것으로 보아야 하리라. 선대를 몰아낸 자들도 결국 선조들과 비슷한 행보를 걷고야 말았다.
“너무 힘든 일들을 겪었겠구나.”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죠.”
안타까웠다. 룩도 어린 시절 온갖 수모를 다 겪었을 것이다. 탄생을 축복해줄 부모님 따위도 없었다. 그의 존재 의의는 그저 학문의 발전과 전쟁에서의 승리였으리라. 윤혁은 문득 룩에게 본능적인 거부감을 품었던 것이 미안하게 느껴졌다. 오히려 지금은 깊은 동정심이 들었다.
“일단 제 소개는 여기까지! 역시 거부감 드시죠?”
룩이 호쾌하게 웃으며 태연스럽게 말했다.
“그건 네가 한 잘못이 아니잖아. 만들어낸 사람들이 잘못이지.”
윤혁이 만류했다.
“그렇다고 해서 네가 사람이 아니라는 말은 아니지만.”
사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잘 몰랐다. 결국, 누가 사람이고 누가 영혼을 지닌 지는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문제겠지. 하지만 저렇게까지 감정과 지식과 의지와 자아와 도덕심을 온전히 갖고 있다면 사람으로 보는 게 옳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머리가 복잡했다. 최소한 자신이 그렇게 믿는다면 그에 합당하게 상대의 존엄성을 배려해야 옳지 않을까?
“하긴 요새는 인공지능도 사람의 정신을 완벽히 모방하니 누가 사람인지 헷갈릴 때가 많겠죠. 심지어 사람의 몸을 완전히 기계로 개조해도 살아남을 수 있죠. 경계선이 허물어져 무엇이 진짜인지 구분할 수도 없는 시대에요.”
그야말로 진실과 거짓을 분간할 수 없는 세계.
‘이 모두가 인간의 욕망과 그릇된 호기심이 낳은 결과다.’
참담하고 끔찍한 일이지만 분명 현실이었다.
“감정 따위는 너무 많이 닳아버려서 이젠 아무렇지도 않네요.”
룩이 윤혁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웃었다.
“나도 너무 경솔하게 판단했던 것 같아. 미안해.”
윤혁은 솔직하게 감정을 담아 사과하였다.
“형은 그래도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것 같네요.”
사실 인격체 대우를 해주는 것만으로도 양반이긴 했다. 개조된 생체병기는 대부분 인격을 보유했음에도 아예 그 존엄성을 인정받지 못하니까. 차별 대우나 멸시의 시선은 일상사이다. 인격적인 대우는 기대할 필요도 없다. 그런 마당에 생체병기와 선뜻 대화하는 윤혁은 참 흥미로웠다.
‘그래서 킹께서 강윤혁을 나름 즐겁게 살펴보는 건가? 흥미롭군.’
지금껏 보아온 평범한 인간들과 달리 느낌이 새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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