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40회 초인들의 세계 Ch 19. 생체병기 (2)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2.09.04 | 회차평점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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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간, 룩은 잊을 만하면 윤혁을 불쑥 방문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불쑥 모습을 드러내곤 했는데 아무런 기척도 없이 나타나는 바람에 매번 깜짝 놀라게 되었다. 간혹 주변에 친구들이 있을 때 나타나서 시선을 끌기도 했다. 당황한 윤혁은 일단 지인들에게는 룩을 친한 동생이라고 소개함으로써 곤란함을 무마했다.
“다음번에 나타날 때는 좀 연락이라도 하던가.”
“미안해요.”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니까 꼭 미행당하는 것 같잖아.”
참고로 룩은 자신의 근방 10km 내의 모든 사람을 별도의 장비 없이 탐지할 수 있었다. 생체 신호 하나하나를 일일이 구분할 수 있다나. 게다가 이동 속도도 지나치게 빨라서 순간이동처럼 보이곤 했다. 그랬으니 일반인인 윤혁의 입장에서는 마치 그가 홍길동처럼 불쑥 튀어나오는 것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다음부터는 천천히 올게요.”
“어련하겠나.”
룩은 의외로 어린아이 같은 구석이 있었다. 그는 노는 것을 꽤 좋아했다. 부모도 없고 또래 친구도 없었으니 누군가와 평범하고 어울려 놀 기회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사소한 놀이도 굉장히 즐거워했다. 길가에서 하는 뽑기 놀이라던가, 카페에서 음료와 간식을 먹으며 수다를 떤다던가. 그럴 때마다 그는 순박한 시골 소년이 된 듯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윤혁도 못 이기는 척하고 몇 번 그와 놀아주었다. 그러다 보니 며칠 만에 두 사람은 같이 어울려 노는 것이 익숙한 사이가 되어 버렸다. 룩은 그저 남들처럼 평범하게 대해주는 것만으로 굉장히 좋아했다.
‘처음 볼 때는 거대한 괴수였다면 이제는 꼬리를 살랑거리는 강아지인가?’
자꾸 회색 머리 위로 축 처진 귀가 보이고 등 뒤로 꼬리가 흔들거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평범한 삶에 대한 욕구를 억누르고 험한 일만 보면서 살았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들판을 떠돌아다니던 유기견을 잘 먹이고 키워 애견으로 만든다면 꼭 이런 느낌이 들까 싶었다.
물론 윤혁은 룩의 전투력과 호전성을 잊지 않았다.
덩치 큰 아이 같지만 실상 본질은 전투로봇마저 압도하는 최종 병기.
종종 그와 스포츠를 할 때면 그런 사실을 다시금 상기하게 되었다. 너무나도 압도적인 신체 능력 때문에 룩과는 도저히 스포츠를 할 수 없었다. 룩도 몇 번 시도해본 뒤 자신의 넘치는 능력을 제한할 방법을 몰라 포기했다.
“아쉽네요. 보통 사람들처럼 평범한 능력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게다가 룩은 지능도 비정상적으로 높았다. 퍼즐이나 체스를 할 때면 전문 인공지능도 가볍게 꺾곤 했다. 분명 평범한 사람의 뇌는 아니었다. 윤혁은 이를 다소 의문스럽게 여겼다. 혹시 룩이 뇌마저 개조된 것인가? 몸은 그렇다고 쳐도 영혼에까지 개조의 때가 묻었다면 심각한 일 아니겠는가?
이에 룩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알림으로써 해명했다.
그는 스스로를 생체병기인 동시에 최상위 초인이라고 알렸다.
“초인이었다고?”
“네. 놀랐죠? 참고로 생체 실험과는 무관해요. 요행에 가까운 중첩이었죠.”
“어쩐지 게임을 할 때마다 너무 손쉽게 최고 경지에 도달했더라.”
“전 원래 연산하는 건 기가 막히게 잘해요. 무기나 함선을 다룰 때는 천문학적인 양의 연산을 찰나에 시행해야 하거든요. 이쪽으로는 초인 중에서도 절 따라올 사람이 거의 없어요.”
하긴 진짜 전쟁 병기도 지배하는 초인에게 게임은 누워서 떡 먹기일 테지.
“너 뇌까지 개조된 건 아니겠지 설마?”
“형이 생각하는 개조랑은 다른데, 강화를 받긴 했죠. 각성이랑은 별개로요.”
“헉! 그런 걸 받고도 멀쩡하다고?”
“저도 최상위, 트리플 스페셜(SSS) 클래스 초인이니까요. 생체병기라서가 아니라 초인이기 때문에 안정성이 높은 거예요. 그래서 특수 지능체를 아무리 이식해도 온전한 제 몸 일부로 소화할 수 있어요.”
참고로 인간 정신은 인위적인 개조에 한계가 있단다. 첨단 장비와 소형 컴퓨터, 인공 뉴런을 아무리 심어도 일정 단계까지만 강화가 될 뿐 그 이상의 첨가는 보조 기능만 될 뿐이란다. 그 일정 단계 이상을 넘어가면 원래의 정신과 삽입된 지능은 물과 기름처럼 융화되지 않는다. 마치 머릿속에서 자기 정신과 분리된 별개의 존재가 느껴질 뿐이란다.
하지만 지성과 잠재력이 우월한 초인은 조금 다르다. 그들은 일반인보다는 훨씬 더 수용력이 크다고 하였다. 그렇기에 삽입 지능과 원래 지능의 통합이 놀라우리만큼 잘 이뤄지는 편이라고 한다. 물론 이런 강화 역시 무한정 소화될 수는 없고 한계가 엄연히 존재했지만.
“으윽, 조금 섬뜩하네.”
“빨리 적응하는 편이 좋아요. 요새는 이미 그런 기술도 범람했으니까요.”
“쳇, 어쨌건 초인이든 생체병기든 신체가 특별할 뿐 인간이 맞긴 한 거네.”
“그렇게도 볼 수 있겠죠.”
이렇게 대화하면서 둘은 며칠 만에 사이가 가까워졌다.
룩은 윤혁을 제법 마음에 들어 했다. 그는 본래 사람과의 사귐에 있어서 거리나 벽을 잘 두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충분히 가까워졌다고 생각한 룩은 자기 본명을 살짝 알려주었다. 큐오즈린. 성도 없이 단어 하나로 구성된 그 이름은 다소 낯설고 투박하게 느껴졌다.
***
며칠 후, 룩은 은근슬쩍 진짜 방문 목적에 대해서 밝혔다.
“앞으로 삼 일 뒤 형을 본성의 수도로 모셔갈 거에요.”
“본성의 수도?”
참고로 본성(本星)이란 보통 초인들이나 우주 출신들이 지구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이미 여러 항성계를 정복하여 넓은 영토를 차지하게 된 인류 입장에서 그들의 고향이자 수도가 되는 행성은 당연히 지구가 된다.
‘그렇다면 그 지구의 수도라면?’
윤혁은 조용히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대충 짐작하고 있었죠? 제가 별 이유 없이 놀러 왔을 리는 없으니까요.”
현역에서 일하는 전략 병기이자 군인, 그것도 초인인 녀석이 아무런 임무 없이 단순히 놀아보겠다고 평범한 사람 옆에 어슬렁거릴 리는 만무하다. 윤혁도 예상하긴 했으나 룩이 본색을 드러내고 다가오자 조금 낯설었다. 그새 친해졌다고 정이라도 들어버린 것일까? 고작 며칠 만에?
“뭐, 그렇긴 하다만⋯⋯, 역시 좀 당황스럽네.”
“놀랐다면 미안해요. 전 당신을 모시고 오도록 지시를 받았어요.”
“내가 그렇게 중요 인물일 리는 없을 텐데?”
이에 룩은 상세한 답변도 없이 의미심장한 미소만 지었다.
“만약 거절한다면?”
윤혁이 조심스럽게 떠보았다.
“하하, 설마 안 갈 생각은 아니죠?”
“그건 그렇지.”
상대가 상대인 만큼 반항이 무의미하다는 건 윤혁도 알았다. 하긴 저항해도 강제로 집행하고도 남을 녀석이니, 괜히 무의미한 반항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윤혁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래도 납치는 안 해줬으면 좋겠네.”
“걱정하지 마요. 은혜는 갚아야죠. 제가 안전하게 지켜줄게요.”
문득 얼마 전 아버지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형과 만나기로 했던 약속이 있었지.’
룩이 이번에 찾아온 일도 그때의 초대와 관련이 있었던 것일지도?
“카이젤 라흐블뤼크 씨였던가?”
윤혁은 아예 직설적으로 물어보았다.
“그분인가? 네게 명령을 지시한 사람이?”
이에 마침내 룩은 친근한 가면을 내려놓고 빙긋 웃어 보였다.
그는 친구가 아닌 왕의 사절로서 정중하게, 공적인 태도로 돌변했다.
“킹께서 당신을 보호한 뒤 안전하게 데려오라고 명령했습니다.”
말투도 현격히 공손하게 바뀌었다. 일전에 룩이 인형을 상대로도 거칠게 대하던 걸 보면 그가 모신다는 ‘킹’은 아마도 가장 높은 지위의 존재가 아닐까 추측되었다. 말하는 것을 보아 그가 바로 형님과 동일 인물이겠지.
‘설마 하긴 했는데 역시인가?’
형님도 그들의 일원, 그것도 그들의 상층부에 군림하고 있는 인간이겠구나.
“그렇다면 그도 너희를 만든 인체 실험에 참여했던 건가?”
혹시나 하여 점검 차 의심을 드러냈다.
그런 무서운 사람이라면 결코 얽히고 싶지 않으니까.
“그 반대죠. 우리를 만든 사람이 아니라 구해 준 사람이에요.”
룩이 다시 처음처럼 편안하고 친근한 어투로 돌아왔다.
“구해줬다고? 어떤 식으로?”
이해하지 못한 윤혁이 갸우뚱거렸다.
“처음 태어났을 때 저는 불안정한 생명과 정신을 지녔거든요. 아예 인간 형태조차 유지하지도 못했었죠. 저뿐 아니라 우리 실험체들 모두가요. 저희를 그렇게 만든 존재는 이전 세대의 초인들이었어요.”
룩은 십수 년 전의 어느 날을 회상했다.
재확립된 인류연합 측에서 이전 세대 초인들이 만든 불법 실험실들을 대규모 색출하여 점령하였다. 그들은 그 과정에서 룩을 포함해 수많은 생체 실험체들을 확보했다. 처음에는 모두를 가증한 금기의 산물로 여겨 일괄적으로 폐기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킹은 다른 해결방안을 제시했다.
“인간인 존재가 있다면 존엄성을 회복시켜줄 필요가 있어.”
킹은 실험체를 분류했다. 그는 그 나름의 기준을 통해서 인간인 것과 아닌 것을 신중히 구분했다. 인간이 아닌 것들은 안락사시키거나 얼려두었고, 인간으로 규정된 것들에게는 긍휼을 베풀었다. 자신의 최첨단 의학 기술을 활용해 대뇌 고등 정신 기능을 재생시키고, 육체도 사람의 형태를 갖추도록 재건해 주었다.
“우리는 킹에게 온전한 인간성을 선물 받았어요. 그 대가로 인류 전체와 공공의 계약을 맺었죠. 일종의 봉사 계약이죠. 인류를 안팎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그들의 존재 의의를 수호하는 일을 맡았어요. 그 보수로 재산과 지위, 그리고 군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정당한 권익과 명예를 받았죠.”
어떤 의미에서는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불공정 계약일지 모른다. 그러나 폐기될 뻔했던 목숨을 돌려받고, 불안정한 몸과 정신을 치료받아 완전한 존재로 회복된 그들 입장에서는 충분히 가치 있는 계약이었다.
‘킹? 카이젤 씨? 형님? 그분은 대체 무슨 생각이신 거지?’
그 사람은 선인일까 아니면 악인일까?
그때 언뜻 본 그 사람은 최소한 신을 따르는 것 같진 않았다. 겉보기 모습처럼 철저한 인본주의자일까?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두려워하는 사람일까? 사람들 입장에서는 성군이요 위인일 것이다. 실제 행보를 보면 번영의 길로 이끄는 개척자임은 맞는 듯하다. 하지만 절대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위인은 필연적으로 모두를 쇠퇴로 이끌 터인데. 후세는 그를 어떻게 평가할까?
결국, 윤혁은 룩이 내건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좋아, 약속했던 대로 나를 네 주인에게 데려다줘.”
어차피 제 발로 찾아갈 생각이기도 했고 말이다.
“사흘 후에 이곳으로 사람이 올 거예요. 그를 따라서 들어가도록 하죠.”
룩이 반가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경비가 삼엄해서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숨겨진 도시거든요.”
“조금 전 말한 그 지구의 수도라는 곳을 말하는 건가?”
“네, 맞아요.”
“미안하지만 그곳이 혹시 어떤 곳인지 말해줄 수 있을까?”
내심 호기심과 더불어 우려도 들었다.
“근사한 곳이에요. 인류의 전 영역을 통제하는 컨트롤 타워죠. 동시에 모든 문명과 과학기술의 중심지이기도 해요. 마치 아틀란티스(Atlantis) 대륙이나 무(Mu) 대륙처럼 비밀에 싸인, 흡사 마법과도 같은 세계이죠.”
룩은 상대의 기대감을 부추길만 한 설명을 늘려놓았다.
그러나 명료한 지명까지는 가르쳐주지 않았다.
‘하긴 어느 곳이 되었든 어차피 큰 상관은 없으려나.’
형을 직접 만나 대면하여, 현 세계가 숨기고 있는 비밀들을 살펴보리라.
동시에 지금의 인류가 향하는 향방을 파악해보자.
‘이왕 이렇게 된 거 잘 됐어.’
룩 덕분에 당분간은 이전처럼 목숨이 위험할 일도 없을 것이다.
“마침 잘됐네.”
결심을 굳힌 윤혁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나도 그분한테 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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