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43회 초인들의 세계 Ch 20. 제로원 (3)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2.09.07 | 회차평점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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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떠보니 전혀 다른 장소에 와 있었다. 정말 찰나의 시간이었다. 과연 실제로는 몇 초나 소요되었을까? 한순간에 눈앞의 광경이 바뀌어버리는 느낌이었다. 현재 윤혁은 과학인지 마법인지 분간이 안 되는 신비한 공간에 서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스테이션이요. 워프 이동 시 도착하는 곳이죠. 소형 개체 워프라면 보통 여기로 통하는데, 집단 워프 혹은 거대 물체 대상이었다면 다른 곳으로 갔겠죠.”
그곳은 사각형이 아닌 특이 곡면으로 된 벽으로 싸여있었다. 흡수 미로와 같은 방이었다. 마치 중력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위와 아래를 구분하기 힘들었다. 배경을 보니 착시 효과가 일었다. 열린 통로들이 있는 것을 보아 폐쇄 공간은 아닌 듯했다. 벽은 기묘한 재질의 금속으로 되어 있었고 흠집이나 때도 없이 맑은 덕에 빛을 고르게 반사했다.
“밖으로 나가죠. 제로원의 섹터들을 보여드릴게요.”
셋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는 삼차원 영역을 유유히 이동했지만 기이하게도 관성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중력 조절 혹은 관성 중화 장치가 설치된 듯했다. 지금껏 보았던 것과 완전히 다른 문명 같았다.
“여기는 뭐랄까⋯⋯, 다른 세상 같네.”
몇백 년쯤 지난 후의 세계처럼.
“크큭, 다들 처음 보면 그렇게 이야기하더라고요.”
룩은 어안이 벙벙해진 촌뜨기를 보며 웃음을 참았다.
“근데 벌써부터 놀라면 안 돼요.”
엘리베이터가 최상층에 도착하자 문이 열렸다.
바깥 경관을 보자마자 윤혁은 왜 룩이 그리 말했는지 단번에 알게 되었다. 굉장했다.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시대가 지구 위에 공존한다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바깥 세계의 가장 탁월한 문명의 이기마저 이곳에서는 그저 원시인의 돌도끼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아름답다.’
마치 마법으로 성을 지어놓은 양 중력을 무시하는 건축물. 신경세포처럼 촘촘히 짜인 구름다리와 도로들이 기하학적인 미를 한껏 뽐내며 빛의 거미줄을 만들어냈다. 게이트 통로들과 거기서 나오는 비행용 함선과 교통수단들이 공중에 즐비해 있었다. 게다가 하늘 위를 둥둥 떠다니는 공중 섬들의 경관, 반투명한 성채들, 하늘을 둘러싼 실드와 보호막까지, 지극히 경이로웠다.
“숨 막힐 정도로 굉장하네.”
“구경이라도 많이 해요. 그런데 어차피 더 많은 걸 보게 될걸요.”
제로원 A구역 202번째 섹터. 지상 7번째 층에 있는 곳이었다.
윤혁과 룩이 지금 있는 A구역은 도시 심장부와 가까이 위치한 곳으로 지구와 우주 양쪽 모두와 교역이 많았다. 인구 밀도는 통상의 도시보다 높은 편이며 강력한 무인화 시스템을 통해 치안과 보호가 이루어졌다. 아울러 테라포밍으로 내부 환경, 기온, 습도, 대기 청정 상태, 심지어 인공 생태계까지 컨트롤 가능했다.
“그나저나 지상 7층이라면 그 위도 존재한다는 뜻인가?”
“그렇죠. 기본적으로 이 도시는 공중 도시나 마찬가지니까요.”
하나의 축 위에 여러 층이 샌드위치처럼 쌓여 있는 구조라고 한다.
지금 윤혁의 눈에 보이는 하늘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요?”
“아엘브론과 레뮬로스 중 어느 쪽을 제로원이라고 부르면 되지?”
조금 바보 같은 질문이었는지 룩은 피식 웃었다.
“하하, 미안해요. 하긴 처음 들어온 형은 모를 수도 있겠네요. 제로원은 둘이 통합된 도시에요. 아니다. 애초에 하나라서 둘의 통합이라 할 것도 없겠네요.”
“그게 무슨 소리야? 좀 알기 쉽게 말해 봐.”
“알겠어요.”
제로원은 지구를 관통하는 인공적인 축 위에 세워진 도시였다. 한쪽 끝인 아엘브론은 대서양, 다른 쪽 끝인 레뮬로스는 태평양을 통과하게 되어 있었다. 그 축은 지구 중심에서부터 열권 궤도까지 닿아 있었다. 지하에서 지상까지 축을 건설하고 그 축을 기반으로 인공 도시를 제작해서 쌓아 올렸다나.
땅 밑으로는 수많은 요새와 생산 시설이 제로원에 딸려있었다. 하늘 위로는 지구를 둘러싼 여러 겹의 오비탈 링(행성을 둘러싸는 고리 형태의 인공 구조물), 배리어 캡슐(행성을 얇게 감싸는 막 형태의 인공 구조물)이 제로원과 직접 닿는다. 여기에 수천 기의 궤도 엘리베이터들이 일종의 다리 역할을 하여 상층 구조물과 하층 구조물을 연결하였다.
“그런 걸 언제 다 건설했대?”
“이상한 일은 아니죠. 지금은 은하계를 식민지로 삼고 단시간에 항성과 행성을 개조할 수준에 이르렀는데 지구 정도 개조하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아요. 오히려 제로원은 현시대 기준으로는 구시대의 산물에 가깝죠.”
듣고 보니 확실히 그렇긴 하다. 아직 환경 조건 때문에 인간을 지구 밖으로 보내 거주시키기를 꺼릴 뿐이지, 이미 인류는 은하계 전체를 제패하고 개척한 마당이었다. 머지않아 은하 밖으로 진출할 채비는 이미 모두 마련되었다. 지구 개조는 그러한 우주 개간 기술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했다.
“그건 그렇고, 혹시 무너지지는 않으려나.”
윤혁의 질문에 룩은 고개를 저었다. 견고함과 안정성으로는 인류 구조물 중 최고가 제로원이란다. 설령 지구 전체를 원자 단위로 부술 폭격을 수천억 회 압축하여 쏟아붓는다고 해도 제로원만큼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채 완벽히 보호된다고 하였다. 한 마디로 궁극의 요새였다.
“지구가 파괴되는 시나리오를 고려해서 중력 형성 장치도 내장되어 있죠.”
“별의별 짓을 다 했네.”
윤혁은 도시 곳곳을 둘러보았다. 기묘할 만큼 아름답게 발전되어 있었다. 사람들의 무리, 그보다 더 많은 수의 안드로이드들이 북적였다. 공중에는 무인 장치들도 지나다녔다. 기계들은 무기질보다는 설화 속의 요정 같은 신비로운 느낌을 주었다. 제로원 바깥 세계 물건들보다 훨씬 앞선 것들이었다.
‘빠른 교통, 삶과 융합된 정보 시스템, 안정적인 보안, 넘쳐나는 부까지.’
모든 요소가 무한하리만큼 풍부하게 갖춰진 도시. 하지만 사람들의 얼굴 표정에는 왠지 만족감이 없어 보였다. 그저 살아가기만 하는 느낌이었다. 고도의 기계 문명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의의를 찾지 못하는 것만 같았다. 분리되고 개인화된 인간관계와 육체노동의 부재로 인한 따분함도 살짝 엿보였다.
‘현대성의 극한이란 게 이런 건가?’
어디선가 들었던 설교가 희미하게 생각났다. 인류에게 있어서나 개인에게 있어서나 진정으로 위협적인 도전은 고난이나 핍박이 아니라고 했던가? 사실 그 설교는 한창 어려움의 때를 통과해 나왔던 부모님 세대를 겨냥한 것인지라 윤혁은 그 의미를 머리로만 이해했을 뿐 온전히 피부로 이해하지는 못했었다.
물론 어릴 적에는 윤혁도 혼돈의 시대라는 것의 단말마를 간접적으로나마 통과하긴 했었다. 그러나 어쨌건 그가 살아온 생애 대부분은 풍요의 시대에 속했다. 당연히 아버지네 세대처럼 실감 나는 아픔을 알 기회는 없었다. 아픔의 기억이 아예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것도 실상 지금은 흐릿한 유아 시절의 기억에 파묻혔다. 고난다운 고난이 실감 날 리가 없으니 ‘고난보다 더하다’라는 말도 당연히 체감되지 않았다. 비교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그간 누려온 풍요의 시대가 극한까지 농축되어 빚어진 결정체가 자기 앞에 버젓이 펼쳐지니 그제야 윤혁은 편리성과 현대성이야말로 인간의 마음을 뺏는 최악의 도적이라는 말의 의미를 뼛속까지 체감했다. 그도 소박한 소시민으로서 검소하게 살아왔기에 망정이지 만일 과분한 현대성의 늪에 풍덩 빠졌더라면 저런 몰골이 되는 건 시간문제였을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이 드니 씁쓸했다.
{강윤혁님.}
정적을 깨고 AT-Z2039451이 말했다.
“아, 네. 말씀하세요.”
{잠시 후 A 구역에서 센트럴 월드로 이동하겠습니다.}
“센트럴 월드요?”
{도시의 중앙부입니다. 보안 구역이죠.}
아마도 도심 지역을 말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럼 그곳에 형님이 계시는 건가요?”
{대표님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네, 맞습니다.}
그들은 특수한 구조물 쪽으로 향했다. 뫼비우스의 띠가 겹쳐 있는 것 같은 그것은,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AT-Z2039451이 비밀 코드를 제시하자, 구조물이 변형되었다. 마치 차원의 문이라도 열리는 것처럼 공간의 벽이 개방되었다.
“게이트입니까?”
그때 재빨리 룩이 끼어들었다.
“조금 달라요. 아공간(亞空間) 차폐라는 기술이죠.”
“아공간?”
“아, 기초부터 알려드려야겠네요.”
룩의 설명에 따르면 아공간 차폐란 일종의 차원 기술이었다.
“숨겨진 물리 차원들에 대한 건 현대 물리 시간에 배우셨죠?”
“그렇지. 아무래도 공대생들한테는 필수 과목이니까.”
인간들이 살아가는 현실 3차원 공간 이면에는 많은 수의 숨겨진 차원들이 존재한다. 현대 과학기술을 이용하면 바로 그 차원을 재가공해서 무대 뒤의 다른 무대를 만들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소위 말하는 아공간이었다.
아공간은 쓰임새가 많았다. 일종의 인벤토리처럼 사용되기도 했고 방어막으로 이용되기도 했으며 무한정의 가상공간을 만드는데도 쓰였다. 그중에서 아공간 차폐란 응용법이 있었는데 이는 아공간을 활용해서 한 좌표의 특정 공간을 외부 다른 공간들로부터 차단하는 기술이었다.
“즉, 저 차원 문을 통과해야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죠.”
“물리적으로 우회할 방법은 없는 건가?”
“외부에서 자의적으로 물리적 방법을 써서는 통과가 안 돼요.”
그들은 이후로도 몇 번 더 비슷한 구조물을 통과했다.
구조물과 구조물 사이마다 기나긴 통로가 있었는데,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형상이 수놓아져 있었다. 마치 다차원 통로나 웜홀을 지나는 기분이었다. 이윽고 모든 통로와 문을 통과한 후, 그들은 센트럴 월드에 도달하였다. 마법 같은 신비한 모험을 마친 윤혁은 긴장을 내려놓고 한숨을 쉬었다.
{센트럴 월드에 입장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부터 따로 안내하겠습니다.}
제복을 입은 다른 가드 로봇이 나타났다. AT-Z2039451은 물러났다.
{즐거운 시간 보내시지요.}
룩도 자신은 여기까지만 따라오겠다고 말했다.
“심심하시면 놀러 올게요.”
그는 친근하게 윤혁의 등을 두드리며 농담을 섞었다.
“킹께서 형 괴롭히면 말해주시고요. 제가 혼내드리죠.”
“뭔가 상하 관계가 바뀐 느낌인데?”
“나름 친하거든요. 계약 관계이기도 하지만 친구이기도 하니까요.”
“아무튼 데려다줘서 고마웠어.”
윤혁도 지금까지 보호해준 것에 감사를 표하였다.
“역시나 형은 친절하네요.”
룩은 강아지가 배웅하듯 팔을 흔들더니, 곧장 워프 되어 자취를 감추었다.
‘별도의 게이트 통과도 필요 없나 보네?’
생체병기라서 저런 면까지 특수한 건가 싶었다.
‘하긴 곧 있으면 생체병기보다 더한 분도 마주할텐데 놀랄 일은 아니지.’
동행자와 헤어진 윤혁을 발걸음을 돌려 약속 장소로 이동하였다. 센트럴 월드는 바깥과 또 상당히 달라 보였다. 제로원의 안과 밖이 다른 것만큼이나 큰 차이였다. 윤혁은 가드의 안내를 받아 형의 자택으로 이동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건물 안으로 들어선 뒤 승강기를 타고 이동했다. 가장 깊은 방문에 당도한 윤혁은 잠시 긴장감을 다스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어서 와라.”
화려한 방문이 활짝 열리며 매혹적인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다.”
사람을 위압하면서도 혼을 빼놓는 아름다운 음성. 그저 평범한 인사치레인데도 마법 혹은 최면술에 걸려드는 듯한 느낌이었다. 앞으로 저런 음성을 반복해서 들어야 할 것을 생각하니 상상만으로도 피로감이 드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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