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47회 초인들의 세계 Ch 22. 잃어버린세계의일곱제왕 (2)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2.09.10 | 회차평점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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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집사라고 하면 부유한 귀족 집안의 저택을 맡아 관리하는 나이 지긋한 노신사를 떠올리는 법이다. 그러나 그렇게 상상 속에서만 그리던 집사를 실제로 만나고 난 뒤 받은 인상은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지내시는 데는 불편하신 점 없습니까?”}
윤혁 앞에 형님네 집의 집사가 있었다. 말끔한 정장을 입은 건 참으로 근사한데 외모는 나이 지긋한 노인보다는 중년과 청년 사이 모습이었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현대적인 느낌이 물씬 났다. 부드러운 흰 머리에 자색의 눈을 지닌 그 남자는 신뢰감을 주는 인상에 기묘한 이질감이 함께 어우러져 있었다.
몸에 깃든 예의범절과 품위, 그리고 ‘단테’라는 고풍적인 느낌의 이름. 그가 사람이 아닌 인공지능을 탑재한 유기체 결합형 사이보그 로봇이라는 사실을 눈치채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윤혁은 지금껏 이렇게까지 사람과 구분이 불가능한 존재는 처음 보았다. 단테 집사는 인간만의 영역인 자유의지와 감정마저도 모방해낸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집사님이 잘 챙겨주셔서 편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주인님과는 별다른 트러블도 없으시고요?”}
“물론입니다.”
단테는 형이 직접 제작한 작품 중 하나였다. 겉보기로는 프로그램에 의한 충성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충성으로 주인을 섬기는 모습이었다. 윤혁과 처음 만났을 때 단테는 주인님의 친동생이라는 이유로 윤혁을 도련님이라 불렀는데 너무 낯 뜨겁고 부담스러웠다.
“아, 한 가지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집사님.”
{“무슨 일이신가요.”}
“저번 주에는 워낙 정신없어서 어쩔 수 없이 그냥 넘어가긴 했는데 내일이 일요일이라서 예배를 드리려고 합니다. 물론 온라인으로도 설교 듣고 혼자 기도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사람끼리 모여서 함께 나누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혹시 이 도시 근방에는 적당히 찾아갈 만한 지역 교회가 있을까요?”
이에 단테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면서 친절히 답해주었다.
{“도련님은 종교적인 신념이 신실하신 분이로군요.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아쉽게도 제로원 내에는 공식적으로 모이는 교회가 더 이상 없습니다.”}
“네? 그게 정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정보 확인이 필요하십니까?”}
“하지만 제가 듣기로는 심장부에만 수천만, 전체로는 십억 가까이나 되는 인구가 거주할 정도의 초특급 대도시라던데, 교회가 아예 없을 수 있나요?”
혹시 시민권을 얻는 과정에서 종교적 차별이 있는 건 아닌가 의심되었다. 하지만 단테의 증언에 따르면 그런 차별은 없었다. 이 도시는 적당한 자격을 갖춘 자면 지구 출신이건 바깥 출신이건 얼마든 영주권을 얻어 자리 잡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종교 유무는 입주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미천한 이 몸의 소견입니다만 아마도 개인의 문제가 아니려나 싶습니다.”}
“개인의 문제라고요?”
인간 유사체인 인공지능이 사적인 사상을 밝힌다니 기분이 이상했다.
{“분명 매번 유입된 인구 중엔 기독교인을 자처하던 자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도시에 적응한 이후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모임이 흩어졌죠. 생성된 교회는 얼마 안 가 전부 없어졌습니다. 다른 종교도 별반 다르지 않지만요.”}
아무리 종교가 쇠퇴하거나 변질하는 종교의 황혼기라고는 해도 여전히 방방곡곡에는 교회가 존재했다. 제로원으로 자리를 옮긴 자 중에도 믿는다는 사람은 제법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들어온 이후에 이어진 배교 현상이었다. 대다수 종교인은 제로원의 풍요 앞에 굴복하여 자발적으로 종교를 포기했다.
{“제 객관적인 눈에는 그 원인이 명확히 보입니다. 제로원은 현존 도시 중 가장 완벽한 물질적 풍요와 안전이 보장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사람들에게 고통이나 어려움을 줄 만한 것은 존재하지 않지요.“}
단테가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또한 자신의 욕망과 야망대로 무언가를 추구할 여력과 가능성도 무궁한 곳입니다. 여기에 더해 물질문명과 첨단 기술도 극도로 발전했고 지금도 그 발전 속도가 가속되는 중이죠. 그 때문에 신을 믿을 마음이 남아나지 않는 것입니다.”}
‘인공지능조차도 정확하게 원인을 진단하는구나.’
윤혁도 얼추 느끼고 있었다. 이 도시는 모든 것이 풍요롭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물질적으로만 그러하였다. 사람들은 그 풍요에 취해버렸다. 결국, 신 따위 없어도 자신들의 힘으로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믿는 신조가 팽배하였다. 물론 현대 사회의 흐름 전체가 그러하다지만 이곳 제로원은 몇백 년 이상 앞선 문명을 이룩해낸 곳이니 그 현상이 더욱 두드러질 것이다.
{“굳이 신처럼 떠받드는 것이 있다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지도자인 주인님일 것입니다. 우주 어디든 인류가 살아가는 곳이라면 별 차이 없겠지만요.“}
참으로 우스운 일이구나.
{“제 소견에 의하면, 종교인들이란 다들 말로는 신앙을 고백하지만 정작 중요시하는 건 자기 배 속을 채우는 일인 작자들이라 그런 게 아닐까 싶군요.”}
지금 인간은 영적으로 로봇보다도 아둔했다.
“틀린 말이 아니라서 더욱 부끄럽네요.”
로봇 단테의 올바른 힐난에 같은 인간으로서 윤혁은 책임감과 참담함을 느꼈다. 사람이 추구하는 영성이라는 것이 고작 이것밖에 안 되는 걸까. 현실의 안락이 아닌 하나님의 올바른 뜻을 추구하는 사람이 이리도 적었단 말인가. 다른 종교면 몰라도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마저 그러면 어쩌잔 말인가.
하는 수 없이 돌아오는 일요일에는 조용히 혼자 예배드릴 수밖에 없었다.
마침 좋은 피아노가 있어서 찬송가를 직접 연주할 수 있었고, 설교 영상이나 성경책도 있어서 특별히 부족한 자원은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과 상호작용을 나눌 수는 없었다. 비록 작고 낡지만 성도들이 모여 사랑의 분위기를 나누었던 지역 교회에서의 예배와 비교하면, 외롭고 조촐한 시간이었다.
부모님과 함께 어렸을 적부터 지금까지 다니던 그 교회는 배교가 넘쳐흐르는 현시대 종교계 사조는 무시한 채 꿋꿋하게 올바른 길과 참된 복음에만 집중하던 선한 교회였다. 그곳이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피아노를 배웠나 보군.”
마지막 곡을 연주하며 마무리하던 차에 형님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형?”
“계속해도 좋아. 나쁘지 않군.”
“별로 잘 치는 건 아니에요. 그냥 취미일 뿐이죠.”
형은 심심하다면서 연주를 선보이도록 부탁해왔다. 이에 윤혁은 OST, 재즈, 클래식 소나타 등을 몇 개 연주했는데 긴장해서인지 평소보다 많이 틀렸다. 쑥스러워서 자리를 뜨려고 하자 형이 조금 아쉽다며 대신 자리에 앉았다.
“직접 만져보는 건 오랜만인 것 같군. 뭐가 좋을까.”
그는 홀로그램 화면에서 연주 영상들을 뒤지더니 곧 마음에 드는 것을 발견했다. 대중에게 공식적으로 역대 피아노곡 난이도 넘버 원으로 알려진 유명한 협주곡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거의 오래간만에 처음 만져보는 악기로 처음 듣는 곡을 연주하겠다고? 윤혁은 의심의 눈초리를 흘렸다.
“별로 어려운 동작은 아니군.”
카이젤은 한 번 건성으로 영상 속 동작들을 관찰하였다. 그리고 피아노 앞에 앉은 후 기절할 만큼 놀라운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그는 프로가 연주했던 것보다 더 완벽하게, 한 터치의 오차 없이 곡을 연주했다.
‘세상에!’
단순히 똑같이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신이 작곡가가 된 것처럼 철저하게 이해하였다. 감정과 악상과 미세한 터치까지 재현하는 것 같았다. 악기를 넘어서 공간과 음파를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우와! 대단해!’
저절로 감탄이 튀어나올 만큼 충격적이었으나 정작 본인은 무덤덤했다.
“말도 안 돼요.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는 거죠?”
“별로 신기한 일은 아니다. 난 다른 무엇을 해도 똑같아.”
“솔직히 말해서 못하시는 일 없으시죠?”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보통 처음 시도부터 잘하는 경우는 없거늘.
“어렸을 때부터 모든 재능을 마음대로 복제해 흡수할 수 있었거든.”
카이젤의 입에서 충격적인 고백이 나왔다.
“한 번 보거나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내 것으로 만들었지. 쉬운 일이었어.”
형은 동생에게 자신의 비밀을 하나 알려주었다.
카이젤 라흐블뤼크라는 인간에겐 다른 초인들과는 차별화된 매우 강력한 재능들이 몇 가지 있었다. 종종 최상위 초인은 남들에게 없는 특수한 고유 재능을 두어 개 정도 지닌 경우가 제법 있었지만, 카이젤의 경우에는 그러한 단계마저도 아득히 넘어섰다고 한다.
“재능을 복제한다고요?”
“단순 복제가 아니라 완벽한 이해를 바탕으로 기반 원리까지 파악해버리지.”
예컨대 누군가가 특정 동작을 딱 한 번 보여주면 잠깐 스쳐 지나가듯 보는 것만으로도 해당 동작 전체의 정신, 기반 원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하여 흡수한 뒤, 그보다 더 완성된 경지까지 창조해버리는 경지란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학습의 한계 용량을 넘어선 수준. 그는 타고난 ‘학습의 괴물’이었다. 더 엄밀히 말하면 그보다는 카이젤이라는 인격체 속에 ‘학습의 괴물’이라는 형이상학적 실체가 기생하고 있다는 표현이 올바르리라.
“못 믿는 것이 당연하지. 그럼 다른 것도 보여주면 되나?”
카이젤은 정말로 모든 것을 시연해줄 기세였다.
“아, 아니에요! 믿어요!”
사실 형에게서 너무 대단한 능력들을 많이 봐와서 이제는 형이 무엇을 보여줘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학습의 괴물’이라는 개념은 다소 신선한 충격이었다. 아무리 봐도 인간의 영역에서는 불가능할 경지로 보였다. 말하자면 두꺼운 전문 서적 한 권을 일 분 만에 훑어본 직후에 곧바로 그 분야의 최고 전문가를 초월한다는 뜻 아닌가.
‘반칙도 이런 반칙이 없네.’
“그렇긴 하지.”
생각을 또 읽은 것인지 카이젤이 무덤덤히 대답했다.
“뭘 해도 시시하다는 형 말이 이해되네요.”
“공감하려는 노력이라도 해줘서 고맙군.”
“뭐, 굉장하긴 한데……, 반칙이라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그런저런 수준의 인간에게나 유용성 있는 반칙 아닌가요? 형님처럼 이미 모든 재능이 무한정 거대한 사람이 타인의 재능이나 실력을 복제한다고 해도 바다 위에 물 한 잔을 추가하는 격일 것 같은데요?”
동생이 의문을 드러내자 카이젤이 쓴웃음을 삼켰다.
“학습의 괴물이란 그런 식의 산술적인 복제 덧셈의 개념이 아니야. 상대의 재능이나 능력이 흡수될 때는 당연히 나라는 존재의 크기에 맞춰진 분량으로 환산되어 더해지지. 아니, 더해진다기보다는 제곱 된다는 표현이 맞겠군.”
예를 들어 가령 카이젤 속의 ‘학습의 괴물’이 어떤 음악가 속의 재능을 복제해서 삼킨다고 하면 카이젤에게는 음악가의 재능 분량의 절댓값만큼만 재주가 더해지는 것이 아닌, 음악가와 카이젤 두 존재의 존재적 크기의 비율에 음악가의 재능을 곱한 만큼의 재능이 제곱 되어 더해지는 식이란다. 즉 아무리 작은 재능을 삼켜도 카이젤에게 충분한 유익이 되는 분량만큼 큰 성장이 더해지는 셈. 소름이 끼칠 만큼 섬뜩한 능력이 아닐 수 없었다.
“솔직히……, 많이 두렵긴 하네요.”
윤혁은 오싹거리는 느낌을 참으며 애써 태연하여지려 노력했다.
“개인적으로는 썩 마음에 드는 재능은 아니야.”
“학습하는 성취감이 없어서요?”
“그런 이유도 있지만, 어머니께서 자꾸 나를 다른 사람에 비춰 보았거든.”
카이젤의 어머니, 라일라. 윤혁도 아버지께 얼추 그녀 이야기를 듣긴 했다. 이전 세대 때 활약했던, 막대한 부와 영향력을 지닌 유력가이자 당대의 탁월한 위인급 인물이었다는 사실 정도는 알았다. 그 이상 물어보자니 아버지 입으로 과거 애인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아서 가정의 평화를 위해 관뒀지만. 문득 형의 어머니와 그 시대 다른 초인들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형의 어린 시절은 어땠을까?’
돌연 호기심이 들었다. 소년 시절의 카이젤은 지금처럼 차디찬 냉혈한이었을까? 아니면 그에게도 나름 순수하던 시절이 있었을까? 만일 후자가 옳다면 귀여운 아이가 어째서 저런 철인적인 존재가 되어버렸을까?
윤혁은 호기심이 쏠리는 질문 중 하나를 던져보았다.
“어머님께서 어떤 인물과 형을 비교하셨는데요?”
“난세의 영웅이자 어머니가 신봉하고 동경했던 대상, 이브. 원래 오리지널 ‘학습의 괴물’은 그녀였지. 나의 경우 훨씬 더 승격된 상위호환 버전이지만.”
“난세의 영웅이라고요? 이브요?”
“처음 듣는가? 꽤 유명했을 텐데? 하긴 대중에겐 이름은 안 알려졌겠군.”
이벨리아 코흐 하바 아담즈.
축약해서 이브 혹은 이벨리아 아담즈.
혜성처럼 나타나 혼란의 시대 후반부를 사실상 평정하기 직전까지 나아갔던 자. 무정부 지대들을 휩쓸면서 각종 대치 세력들을 물리치고 세계구급 조직들을 상대해오며 무수한 난제와 테러와 전쟁을 해결했던 어둠의 영웅. 사실 윤혁 역시 대강은 그런 영웅 설화를 들어본 바 있다. 거의 홍길동 설화나 다름없는 낭설에 가까워서 믿지는 않았지만. 참고로 이브라는 그 인간은 날개를 펼쳐보지도 못하고 여러 세력의 음모에 의해 아쉽게 세상을 떠났다고 하였다.
“어머니와 이브 모두 2세대 초인이었다. 이벨리아는 당시 최강의 초인이자 영웅이었는데 어머니는 그녀의 능력을 동경했지. 한때 이브를 새로운 세계의 왕으로 모시려는 계획을 꾸민 일파 중 하나가 어머니였지. 하지만 어떤 계기로 그녀가 몰락하자 어머니는 이브를 대신할 후계자를 만드는 일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라일라의 태도는 카이젤에게 있어서는 불쾌한 어린 시절의 원인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세계 최고의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어머니의 과대한 야심 아래에서 기대를 받으며 자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낳은 너라면 이브와 초대째를 뛰어넘어 더 완벽한 존재, 내가 동경해 마지않은 그런 자가 될 수 있어.’ 그런 말을 한두 살 되던 나이부터 귀에 박히게 들어왔지. 어머니는 실제로 그렇게 되도록 나를 가르치고 훈련했지.”
윤혁으로서는 그런 어린 시절은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이 세상 도대체 어느 어머니가 자녀에게 그런 종류의 꿈과 목표를 정해놓고, 그것을 온전하게 이룰 때까지 혹독한 가르침을 주입한단 말인가? 기막혔다.
“사실 힘들지는 않았다. 내게 누군가를 넘어서고 경쟁에서 이기는 일은 숨 쉬듯 자연스럽고 쉬운 일이었으니까. 승리란 호흡과도 같은 것이었지.”
카이젤은 자신의 옛 그림자였던 부모를 비하하듯 평가하였다.
“다만, 태어나서부터 얼굴도 못 본 자와 비교당하며 나의 가치를 누군가에게 잣대질 당하는 일은 생각보다 꽤 불쾌했어.”
그래서 어린 카이젤은 어머니가 원하던 대로 해주었다. 경쟁자는 물론 이전 세대 왕들의 위상을 완전히 초월했다. 아예 누구도 자신과 대등한 선상에 놓일 엄두를 못 내도록 성장했다. 또한 오랜 시간 동안 다양한 지식을 익히며 다른 이들의 특수한 재능을 흡수하여 훨씬 더 강력한 것으로 발전시켰다.
이야기를 하던 중에 모서리를 쥐던 카이젤의 손등에 힘줄이 튀어나올 만큼 힘이 서려갔다. 악기에 금이 갔다. 표정은 진지하게 가라앉았으나 절제된 분노가 실려 있었다. 형이 겪어온 시간이 얼마나 지독했을지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그저 처음에는 본성이 오만한 사람일 거라고 지레짐작했었다. 하지만 그 역시도 비틀린 욕망의 희생자였을 지도 모르겠다. 무지개를 잡으려 다가가도 손에 잡히는 것은 허공뿐인 것처럼 야망만 좇던 그의 삶도 공허했으리라.
“난 두세 살 무렵에 이벨리아 그녀처럼 모든 재능과 지식과 기술을 흡수하는 능력을 각성했지. 그리고 어머니는 기뻐하였다. 그리고 나와 비슷한 격의 실력자들과 경쟁하여 진정한 실력을 증명하라고 하셨지.”
그 나이의 아이는 또래와 놀며 부모님의 돌봄을 받아야 마땅하거늘.
“모든 초인이 형 같은 재능을 갖는 건 아니죠?”
“당연히 아니지.”
초인이라고 모두가 그런 능력을 타고나지는 않는다. 오로지 극소수만 특수 재능이 주어진단다. 특히 카이젤과 같은 케이스는 한 시대에 한 명 존재할까 말까라고 한다. 그에게는 동 세대 초인들을 제어하는 통솔력, 타인의 재능을 흡수하는 능력, 그리고 포화 단계 없이 무제한 성장하는 거대한 그릇이 있다고 하였다. 그런 재능은 인류에게는 선물일지 모르나 개인에게는 오히려 저주이리라. 영혼의 존엄성이 아닌, 오로지 유용성만으로 존재의의가 규정되는 셈이니까.
‘형은 한 번이라도 행복과 충만감을 느껴보았을까?’
그에 대해서 지금까지 아는 것이 너무도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속으로는 상처투성이였구나. 누군가의 사랑이나 우정을 체험해보지도 못하고. 얼마나 목말랐을까 싶어 안쓰러웠다.
윤혁은 단 한 번도 형이 ‘초인’으로서 소유한 것들을 부러워하거나 시기한 적 없었다. 반대로 카이젤은 자신에게 결핍된 ‘인간’으로서의 모든 따뜻한 요소를 지닌 동생을 질투하였다. 본인은 속에서 치솟는 질투심을 애써 부정하겠지만.
‘괜히 미안해지네.’
민망한 마음이 들었다. 아버지와 라일라의 그릇된 욕망으로 인해 형이 박탈당했던 모든 것들이 자신에게는 충만했다. 부모님의 헌신과 모범, 친구와의 신의와 우정, 인생의 참된 목표를 향한 열정과 충만감 같은 것. 오히려 도움이 절실한 쪽은 형이 아닐까 싶었다. 처음으로 그에게 경계심이 아닌 측은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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