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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49회 초인들의 세계 Ch 23. 친선 경기 (2)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2.09.12 | 회차평점 0 0

 

 

 

 

 

 

(이전 회차에서 계속)

 

 

 

 

  한편, 어느 날 윤혁은 집을 거니는 시종 몇 명에게 함께 가까워질 겸 다과라도 좀 나누며 친교를 쌓을 것을 제안했다. 처음에 그들도 망설였으나 윤혁이 거듭해서 설득하자 별수 없다는 듯 승낙했다.

  그렇게 그들이 계단을 오르던 차였다.

  거실에 못 보던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윤혁 또래 정도로 보이는 청년이었는데 키가 대단히 큰 남자였다. 룩과 거의 비슷한 정도의 거구. 짧은 검은색 머리를 하고 있었고 피부가 짙게 그을린 사람이었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인상적인 미남이었으나 상당히 사나워 보였다. 범죄자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무서워 보였다. 시종들을 둘러보니 다들 바들바들 공포에 떨고 있었다.

  “여어! 버러지들이 아직도 남아있었나?”

  장신의 남성은 나지막이 경멸의 눈초리로 시종들을 내려다보며 욕설을 내뱉었다. 윤혁은 순간 그 무례한 태도에 발끈해서 대꾸하려 했다. 하지만 막상 거구의 사내 앞에 서자 간담이 서늘해졌다. 싸늘한 검은 눈동자를 보자 입이 도통 떨어지지 않았다. 그 청년은 시종일관 무표정을 유지하며 시종들에게 다가갔다.

  “크어어어어억.”

  한 시종이 사내의 손에 목덜미를 잡혔다.

  “벌써 잊어버렸나 보지? 편히 눌러앉아서 농땡이 부리는 걸 보니 말이야.”

  “꺼어어억!”

  “킹이 변덕을 부려서 겨우 목숨을 유지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사, 살려주십시오.”

  목이 졸려진 시종은 넘버3. 그녀는 발버둥 치면서 사내에게 애원했다. 사내는 그녀를 두 손가락만으로 가볍게 들어 올리고 있었다. 그 차가운 눈길은 마치 하찮은 벌레를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저기! 손 놓아주시죠. 처음 보는데 행동이 지나치신 것 아닙니까?”

  참다못한 윤혁이 언성을 높이며 무서운 남자에게 말했다.

  “이분도 이곳에서 일하는 직원분입니다.”

  이에 그가 고개를 윤혁 쪽으로 돌렸다. 사나운 눈빛이 윤혁을 찔렀다.

  ‘크윽!’

  찌르는 듯 살기에 압도되었으나 애써 버티며 표정에 힘을 주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여기에는 어떻게 온 거지?”

  남자는 넘버3의 목은 내려놓고 윤혁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옷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그의 근육은 매우 팽팽했다. 남자는 험상궂은 얼굴을 더 험악하게 일그러트리며 일부러 윤혁에게 겁을 주었다.

  “어이, 벌레들! 이 손님은 어떻게 해서 온 거지?”

  “주인님께서 함부로 당신들과 말을 나누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넘버4가 나름 변명을 해보았지만.

  “지금 내가 장난하는 것으로 보이나?”

  짙은 피부의 남자의 목소리가 더 낮고 사나워지자 시종들은 벌벌 떨며 두려움에 질렸다. 시종들의 언급으로 보아 아마도 이곳에 들어오는 외부인에게는 윤혁에 대해 쓸데없는 말을 발설하지 못하도록 카이젤의 지시가 있었던 듯했다.

  “생각해보니 좀 닮은 것 같은데.”

  갑자기 남자가 다시 윤혁의 얼굴을 찬찬히 주시했다.

  ‘무엇과 닮았다는 거지? 형이랑 아는 사람인가?’

  그는 무례할 정도로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으음, 천 배쯤 못생기긴 했지만.”

  역시 형제간의 외모 유사성을 남자도 눈치챈 모양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 함부로 외모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건 조금 기분 상했지만, 하필 비교 대상이 형이라서 윤혁도 딱히 할 말은 없었다. 그보다는 시종들에게 험악하게 대하는 남자의 태도가 매우 불쾌했다.

  그때 남자가 윤혁을 향해서 손을 뻗치려 했다.

  ‘위험해!’

  저도 모르게 윤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손 치워라, 비숍.”

  사내의 경박한 목소리와 대조되는 고풍스럽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집의 주인이 위기의 순간에 절묘하게 타이밍을 맞추어 돌아왔다.

  “이야, 오랜만이십니다, 킹이시여.”

  “네 난폭한 행적을 보고 받다 보니 이젠 네 얼굴 보기도 지겹군.”

  카이젤은 자기보다 큰 키의 비숍을 마주하면서도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비숍이라 불리는 남자도 상관이 내뿜는 패기에 아까보다 기세가 수그러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굴하거나 고분고분하게 변하진 않았다. 도리어 그는 껄렁껄렁한 불량배 학생이 선생 앞에서 마지못해 숙이는 듯한 태도였다. 불만스럽지만, 지위의 차이 때문에 참는다는 느낌이었다.

  “저 사람, 당신 피붙이입니까?”

  “그래. 소중한 동생이니까 정중하게 대하는 게 좋을 거다.”

  카이젤은 한숨을 쉬었고 비숍은 흥미진진한 눈빛을 초롱거렸다.

  “네 손버릇 나쁜 건 알지만, 자비를 베풀어 인내해주고 있음을 명심해라.”

  “쳇, 언제는 가족 같은 걸 챙겼었다고.”

  비숍이란 남자는 툴툴거리면서도 물러났다. 그때 카이젤의 뒤편에서 투명한 실루엣의 움직임이 보이더니 점차 원래 모양과 색채를 드러냈다. 스텔스 모드로 되어있던 인영이 다시 눈에 보이는 상태로 되돌아왔다. 그 존재는 윤혁도 익히 잘 아는 얼굴, 바로 룩이었다.

  “마침 이 녀석 데려온 게 다행이었군.”

  카이젤은 두 사람을 번갈아 마주 보며 중얼거렸다. 룩과 비숍은 서로 라이벌이라도 되는지 전의를 불태우며 매서운 눈으로 상대를 노려봤다. 백호와 청룡이 서로를 삼키려 싸우기 직전의 상황이 연상되었다.

  ‘다행이라고요? 일이 더 커질 것 같은데요, 형?’

  둘은 당장이라도 싸울 기세였다. 폭풍 전야의 공포가 감돌았다. 저렇게까지 서로를 대등한 적수로 여기고 심히 견제하는 것으로 보아 비숍이라는 이름의 피부 그을린 거구의 남자도 굉장한 강자로 추측되었다.

  ‘생체병기, 그것도 최강급 생체병기이겠지?’

  그나저나 룩에 이어서 비숍인가. 카이젤은 킹이라고 불렸지?

  ‘나중에는 퀸이나 나이트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겠다.’

  윤혁은 기가 차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휴가 중에 무단 방문하다니, 그 제멋대로인 성격은 여전하군.”

  카이젤이 비숍을 향해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 우리를 평상시에 마음대로 부리시면서⋯⋯.”

  “비숍.”

  “쉬는 중에라도 제 마음대로 하지 못합니까?”

  “뭐 노동이 불만이면 이해는 하다만⋯….”

  카이젤은 흡사 말썽꾸러기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된 모습이었다.

  “그래. 이왕 이리 됐으니 한판 즐기는 것도 좋겠지. 스트레스도 풀 겸.”

  “무슨 말씀입니까?”

  카이젤은 피식 웃으면서 비숍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렇게 모이는 것도 간만인데 친선 경기라도 하는 게 어떨까 해서.”

  룩과 비숍의 표정에 놀람과 당혹이 스며들었다.

  “마침 네 적수로 딱 맞는 녀석도 있으니 완벽하지 않나?”

  지금 갑자기 충동적으로 내린 계획은 절대 아니었다. 카이젤은 계획적인 성격의 남자. 사실 오늘의 친선 경기는 이미 계획된 일정이었다. 단지 룩과 비숍은 그 판에 좀 더 여흥을 돋궈줄 양념이었다. 카이젤은 돌발적 변수마저 자신의 계획 속에 첨가하여 완벽하게 통제하는 데는 이골이 난 위인이었다.

  “지구에 주둔 중인 다른 바이오닉 솔져들도 전부 소환해서 경기에 참여시키도록 하지. 안 그래도 개량을 위해 실전 데이터가 필요했던 참이라서 잘 됐어. 너희들은 피날레를 장식해줬으면 좋겠군.”

  “지금 제가 저 녀석이랑 검투사 놀이라도 하란 말입니까.”

  바이오닉 솔져끼리의 경기는 생각보다 자주 있어온 편이었다.

  하지만 룩과 비숍 같은 최고 레벨이 맞붙는 경우는 지금껏 거의 없었다.

  “질까 봐 겁이 난다면 뭐 어쩔 수 없고.”

  주인은 미소 지으며 번견을 당근과 채찍으로 구워삶았다.

  단순하게도 비숍은 보란 듯이 손쉽게 걸려들었다.

  “하? 저따위 애송이에게? 웃기지 마시죠. 곧바로 밟아줄 겁니다.”

  “나야말로 환영이야.”

  이번에는 룩도 표정을 차갑게 일그러뜨리며 비숍을 쏘아보며 말했다. 두 사람은 아무래도 앙숙 관계인 듯했다. 아마 주인은 그 두 마리 번견을 침착하게 달래서 진정시키는 대신에 갈등을 화끈하게 터뜨려 해소하게 할 작정이겠지. 이는 사실 둘의 성정으로 미루어볼 때 지극히 현명한 선택이었다.

  “윤혁아. 내일 저녁 시간은 비워둬라. 재미있는 걸 보여주지.”

  ‘왜 하필 나까지 말려든 걸까?’

  윤혁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하지만 형, 저는!”

  “요청이 아니라 명령이다. 이곳에서는 내 명령을 따라야겠지?”

  역시 연약한 동생에게 거부권은 없었다.

  “알겠습니다.”

  “후회하지는 않을 거다. 평생 잊지 못할 만한 걸 보게 될 테니.”

  카이젤은 동생의 등 위에 자신의 두터운 팔을 얹으며 손으로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윤혁은 룩과 비숍의 대립, 그리고 형의 여흥에서 비롯된 이 숨 막히는 긴장감으로부터 어서 빨리 벗어나기만을 기다렸다.

 

 

 

 

 

 

***

 

 

 

  본래 인류연합의 바이오닉 솔져들은 은하계 주요 식민지들과 자원 행성들과 요새들을 지키기 위해 각지에 파견되기에 본성 지구에 남겨두는 숫자는 보통 세 자릿수 이하였다. 현재 제로원으로 소집된 바이오닉 솔져들은 총 153명. 본성 주둔 바이오닉 솔져는 총 370명이었으나 이 중 일부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제로원에 소환되지 않은 채 남아 자기 자리에서 잠잠히 임무를 수행했다. 따라서 친선 경기에 참여하는 인원은 153명이 전부였다.

  ‘반신반의했는데 정말로 인류가 다수의 생체병기들을 운용하고 있었구나.’

  윤혁은 마른침을 목구멍 뒤로 조용히 넘겼다.

  ‘게다가 형은 인류연합의 제왕으로서 그들을 수족처럼 다루고 있고.’

  초인들의 수장 위버멘쉬, 인류라는 종의 지배자인 인류연합 대표, 그 지위가 어느 정도로 무겁고 무서운지 일반인으로서는 도무지 가늠이 서지 않았다. 국가 수장이나 대기업 총수 따위는 피라미처럼 여기겠지. 우주 규모의 막강한 재력과 권력도 모자라 무적에 가까운 무력마저 제 마음대로 운용할 수 있으니 고대 시절 황제의 위상은 아무것도 아니리라.

  “형은 친선 경기 보시는 건 처음이죠?”

  친선 경기에 대해 룩이 옆에서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무장이 아닌 본신의 무력이 전투력의 상당 비중을 차지하는 바이오닉 솔져. 이들은 생체병기라는 특성상 숱한 훈련과 경험을 통해 제 능력을 활용하는 기술을 연마하는 것이 전투력 향상에 매우 중요하다. 기술 연마법에는 크게 실전과 훈련이 있었다. 우주에서도 종종 인류연합 내부의 견제 식 전투가 있긴 했지만 상호 합의하에 친선 전투 경기를 진행하는 방식도 좋은 경험이 되었다.

  “서로의 목숨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힘과 무장의 범위를 제한한 뒤 정해진 규칙을 따라 경기장 내부에서 싸우는 거죠. 쉽게 말해 격투기 싸움이랑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돼요.”

  말만 들으면 단지 시범 전투, 대련, 훈련 같은 개념으로 들렸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생각 외로 평범하고 건전한 방식인데?’

  그러나 그 생각은 무지한 윤혁의 착각이었다.

  바이오닉 솔져들의 친선 경기는 격투기 경기라기보다는 로마 원형 경기장에서의 맹수와 글레디에이터의 싸움에 더 비견되었다. 그 경기는 극도로 위험한 시뮬레이션 전쟁이었다. 그나마 콜로세움과 차이가 하나 있다면 관람객의 유희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바이오닉 솔져들의 경험을 높이고 실력을 단련시키는 일, 그리고 전투력 데이터를 확보하여 솔져 개개인의 위력을 강화하는 일만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이었다.

 

 

 

 

(다음 회차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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