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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64회 초인들의 세계 Ch 27. 남은 자들 (2)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2.10.01 | 회차평점 0 0

 

 

 

 

 

***

 

 

 

  방학이 다가오기 전 고등학교 동창들은 다시 가벼운 친목 모임을 가졌다.

  흥미로운 소식도 있었다. 정후와 지아가 공개적으로 연애를 시작했다고 했다.

  “언제 그렇게까지 되었대?”

  윤혁은 신기한 눈초리로 둘을 축하하면서도 괜히 옆에 있는 태헌의 눈치가 신경 쓰였다. 고등학교 때부터 선배가 지아를 짝사랑했음을 짐짓 알고 있었으니까.

  “둘이 잘 됐으니 잘 된 거지 뭐.”

  아닌척해도 태헌도 속으로는 조금 아쉬움이 있었는지 씁쓸해 보였다. 항상 일등을 놓치지 않았던 사람이었으니 지금이 처음으로 느낀 패배감일지도 모르겠다.

  “신경 쓰지 말아요. 어차피 선배는 공부에 집중해야 하잖아요.”

  “위로치고는 좀 현실적이구나, 윤혁아.”

  술을 한 잔 마시는 태헌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취한 그는 투정인지 애교인지 윤혁의 어깨에 머리를 박고 밀착하였다. 애써 떨어뜨린 후 바깥으로 나갔다.

  “그래도 너라도 있어서 좀 다행이네.”

  “제가 연애 한 번도 안 하고 모태솔로로 남아있어서요?”

  윤혁이 시니컬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지아나 정후는 이제 전처럼 편하게 대하기 어렵겠지만 그래도 너는 남아있으니까.”

  풋. 의외로 엉뚱한 모습을 다 보이네. 선배의 머리에 가볍게 꿀밤을 먹였다.

  ‘이런 고민은 전혀 안 할 것 같이 보여서는 원.’

  의외로 인간미가 돋보이는 이런 모습이 더 나은 듯도 했다.

  “선배, 별건 아니고 제가 어딜 다녀오면서 묻고 싶은 게 생겼는데요.”

  윤혁은 이참에 의학 전공자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글쎄, 뭔데?”

  “혹시 나중에 세부 전공으로 뭘 택하고 싶으세요.”

  시작은 의심하지 않도록 가벼운 질문을 택했다.

  “아무래도 의학 연구 쪽에 생각이 있지.”

  최근 가장 빠른 속도로 발전을 보인 분야 중 하나가 의학이었다. 현재는 나노머신과 같은 반칙에 가까운 기술을 통해 세포 단위의 재구성마저 가능해지면서 모든 병을 근본 단계에서 고치는 것이 가능케 되었다. 다시 말해서 의사의 역할은 그만큼 줄어들었다는 뜻이다. 연구에 뜻이 있는 의학자가 아닌 이상은 웬만해서는 존재의의를 갖추기 어려우리라.

  “병리학이라던가, 의공학이라던가, 아니면 정신과학에 관해서도 관심이 있고.”

  “뭐, 마침 잘 되었네요.”

  “음, 그런데 뭐가 그렇게 궁금한데?”

  윤혁은 문득 태헌에게 질문해도 좋을지 고민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묻자니 가깝지 않아서 부담스럽기도 했고 이상하게 보일 것 같았다. 요새 의대생들은 미래 지향적인 기술도 많이 배우겠지? 물론 학생 신분이라 전문 지식의 깊이에 한계는 있겠지만 비전문가보다는 나을 것이다.

  “사람의 정신에 강제적인 간섭이나 조작을 가하는 일이 가능한가요?”

  “⋯⋯!!”

  태헌은 헛기침하며 번쩍 술에서 깼다.

  ‘왜 얘가 또 이런 걸 물어보지?’

  그 기색을 눈치챈 윤혁은 속으로 대답을 기대하였다.

  “아! 약물이나 수술 같은 걸 말하는 게 아니에요. 완벽한 뇌의 지배, 혹은 아주 자연스러운 세뇌, 아니 마인드 컨트롤? 마인드 스캔? 뭐라고 불러야 하려나요? 아무튼 초능력에 가까운 수준의 정신지배가 가능할까요?”

  잠깐의 침묵 후 흥미로운 대답이 나왔다.

  “내가 알기론 하지 않는 것이지 못하는 건 아닐 거야.”

  “네? 진짜요?”

  윤혁은 다소 놀랐다. 어르신의 우려가 진짜일 가능성이 크다니. 당장 초인도 아닌 일개 의대생마저 알고 있을 정도면 이미 허황된 공상과학 이야기 정도로 치부할 가능성은 없는 셈 아니겠는가.

  “자세히 좀 말해줄 수 있어요?”

  “흐음, 조금 다르지만 비슷한 기술들이 몇 가지 있어. 양자 두뇌라고, 나노 단위의 초소형 양자컴퓨터들을 뉴런 내에 주입해서 자체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기술이 한창 연구 중이야. 동물 단계에서 성과를 자주 보였고.”

  “어느 정도로요?”

  “어류의 지능을 침팬지의 백배까지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는 연구도 있어.”

  곧이어 나열되는 여러 다른 예시를 듣고 윤혁은 식겁하였다.

  “초지능이라는 것이 정말로 있었군요.”

  컴퓨터 공학 전문인 선민이 언뜻 말했던 초지능, 그것이 벌써 실제 의학 영역에서도 연구되고 있단다. 민간 세계가 그럴진대 초인들은 어떨까? 이미 윤혁은 제로원에서 기술력 격차를 확인한 바 있었다. 초인의 보유 기술력은 나머지 인간 전부의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는다. 어쩌면 그들은 이미 정신 능력 강화도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어서 실전에 적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바이오닉 솔져들도 그런 식으로 신체를 개조한 걸까?’

  탁월한 힘을 운용하려면 그에 걸맞은 높은 지적 기능도 필요하겠지.

  룩도 언젠가 자신에게 강력한 초지능이 융합되어 있다고 말한 적 있었다.

  “인간 지능을 강제 향상할 수 있다는 건 말이야.”

  태헌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정신을 조정하는 것도 능히 가능하다는 뜻이지.”

  뇌 과학을 공부하지 않아 온 윤혁에게는 낯선 이야기이지만 뇌에 대한 첨단 지식을 수도 없이 접해온 태헌에게는 대단히 현실감 있는 주제였다. 그는 초지능 강화 기술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매우 잘 알았다.

  “그렇군요. 역시나!”

  현시대의 과학 기술은 어르신 살던 시절과는 비교조차 안 될 만큼 향상된 상태였다. 즉, 마음만 먹으면 사람 마음에까지 마수를 뻗칠 수 있는 단계였다. 이런 시대에 인간들이(정확히는 초인들이) 존엄성이라는 유명무실한 명분을 두려워하여 정신 간섭 기술에 손을 대지 않으리라 기대하는 건 무리이리라.

  “사람의 생명도 그렇고, 사람의 정신도⋯⋯, 생각 외로 연약하네요.”

  이제는 과거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것들마저 과학의 무시무시한 손에 마음껏 좌지우지될 수 있는 연약한 갈대로 전락하였다. 목이 잘려도 죽지 않는 인간을 만들고, 수명도 마음대로 무한으로 늘리고, 이제는 두뇌의 한계마저도 거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즉 누가 인간의 마음과 인간의 생명을 존귀한 것으로 여기겠는가. 초월화가 곧 존엄성의 추락이라는 점이 아이러니했다.

  “그때 괴한이 나타났던 일을 아직도 고민하는 거야?”

  룩이 출현했을 때 태헌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

  “잊어버려. 혼자서 고민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잖아.”

  “하지만 생명과 정신을 인간 마음대로 다루는 건 역시 마음에 안 들어요.”

  윤혁이 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겠어. 지식수준을 과거로 퇴행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고.”

  태헌도 약간은 공감했는지 혀를 찼다.

  “막는다고 해도 미래에는 반드시 누군가 손을 대겠지.”

  어떤 사람들은 윤리를 지식 성장을 막는 거추장스러운 방해물로 여긴다. 그러한 부류의 인간들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나타나리라. 당장 초인들만 해도 그 윤리관의 구조를 이해하기 어려운 인간들이었다. 설령 지금의 위버멘쉬와 초인들이 사라지더라도 장차 그 이상의 새로운 초인이 태어날지도 모른다. 윤리를 넘어선 과학을 추구하는 자는 끝없이 출현하겠지. 태헌의 말대로 미래의 후손들이 존엄한 인간만의 성역을 존중해줄 것이라는 기대는 무리인 듯했다.

  “나중에 선배는 사람을 개조하시는 일 말고 살리는 일을 하셔야 해요.”

  “큭, 네가 그렇게까지 신경 써줄 줄이야.”

  “농담하는 거 아니에요.”

  “알았어. 명심할게.”

  태헌은 뭐 그리 심각한 농담을 하냐며 웃으면서 윤혁의 등을 두드렸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본인도 은근 걱정되었다. 질병과 노화마저 정복되는 마당이었다. 미래 의학은 노화를 정복하는 것을 넘어 사람을 물리학적으로, 화학적으로, 생물학적으로, 철학적으로, 뇌 과학적으로 초월화시키는 목적으로 변질되겠지. 일개 의학도가 어찌할 수 없는 불가피한 흐름이었다.

 

 

 

 

 

 

***

 

 

 

  돌아오는 일요일.

  윤혁은 부모님과 교회에서 예배를 마친 뒤 친구와 약속했던 장소로 이동하였다. 거주지와 조금 거리가 떨어진 전원 지역에 있는 아담한 교회였다. 안에는 다섯 명의 청년이 둘러앉아서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한 명은 윤혁이 이미 잘 아는 이집트 출신의 리온 마흐무드, 그리고 나머지 넷은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키 큰 흑인 남성 하나, 조금 아담한 체격의 귀여운 아시안 남성, 그리고 갈색 피부의 여성과 금발의 백인 여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윤혁, 어서 와.”

  리온이 손을 붕붕 흔들며 인사를 했다.

  오늘 모인 이들은 리온이 소속된 선교팀이었다.

  리온은 이미 몇 년간 수차례 팀을 꾸려 활동한 경력이 있었다. 맨 처음에는 중동 교회에서 합류한 청년들의 모임으로 시작했다. 그 이후 여러 국가를 활보하면서 다른 선교팀들과 교회와 더불어 교류하였고, 사역자가 더 많이 합류하면 다시 여러 팀으로 쪼갠 뒤 흩어져 활동하는 식으로 임해왔다. 보통은 젊은 부부들끼리 팀원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새롭게 파송된 팀들은 다시 현지의 신실한 교회와 연결되어 몇 달씩 교제를 나누었다. 선교팀 중 일부 인원은 해당 지역에 남아 봉사를 지속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활동하던 중 해당 지역에 열매가 맺혀 함께 하기를 원하는 이들이 나오면 일정 시간 이상 그 사람들의 신앙 성장을 지켜본 후 받아주었다.

  이러한 선순환의 과정을 거친 덕에 현재 활발하게 사역 중인 모든 선교팀과 교회는 지역을 막론한 긴밀한 연결 고리를 소유하게 되었다. 워낙 그리스도인이 소수가 되어서 그만큼 더 뭉치게 된 영향도 있었지만.

  리온을 비롯한 선교팀 리더들은 딱히 수직적 질서 없이 평등한 친구로서 협력한다고 하였다. 그들은 종종 영상을 통해서 자신들이 선교를 맡은 지역에서 벌어지는 어려움이나 핍박, 혹은 감사할 만한 영적 성과 등을 공유하며 서로를 위해서 중보 기도를 해주곤 해왔다.

  “저 친구가 네가 한국에서 만났다는 분이구나. 잘생겼네.”

  레브라는 이름의 젊은 흑인 남성이 윤혁을 보고 반응을 보였다.

  “부담 갖지는 말아요. 그냥 친목을 나누려는 것뿐이니까.”

  에일리라고 하는 백인 여성도 웃으며 반겼다.

  “먼 타지에서 같은 믿음을 가진 친구를 만나서 기뻐요.”

  다른 한 명의 여성, 제니가 꾸밈없는 순수한 표정을 머금고 악수를 청했다.

  윤혁은 세 친구의 악수를 받아주었다. 다들 공용어로 의사소통을 하였기에 지역적인 장벽은 그다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한편, 발음으로 보아 중국인처럼 보이는 동양인 남성은 왠지 수줍음을 타는 것인지 윤혁에게는 가볍게만 인사하고 말을 많이 꺼내지는 않았다.

  친교의 시간을 갖기 전, 그들은 각기 다른 지역의 성도를 한자리에 모이도록 해주신 주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다. 이어서 리온부터 시작해 각자가 기도하는 소원에 대해서 나누었다. 그 후에는 서로를 더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다. 어떻게 주님을 믿게 되었는지, 선교팀에는 무슨 계기로 합류하게 되었는지, 출신지가 어디며 어디에서 활동했는지 등을 간증했다.

  “요즘처럼 불신앙으로 돌아서는 세상에서 활동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윤혁은 그들의 열정과 헌신에 대해 감탄을 표하였다.

  “사실 처음부터 대단한 뜻이 있어서 이곳을 섬기게 된 건 아니에요.”

  곧바로 에일리가 손사래를 쳤다.

  “내가 떠나온 에우로페 제국(구 신국, 구 유럽연합)은 편리한 복지와 자유로운 풍조 때문인지 이미 교회를 찾아보기 힘들어요. 예수 믿는 사람을 탄압하는 건 아니지만 신자의 밀도가 너무 낮아서 연합하거나 교제하는 게 불가능해요.”

  윤혁은 얼추 그녀의 안타까워함에 공감했다.

  “그래서 선교팀이 찾아왔을 때는 왠지 따라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에일리는 그 순간을 떠올리며 벅찬 감정을 표했다.

  “같은 주 안에서 믿음을 나눈다는 것이 너무 기뻤거든요.”

  그 말을 들은 레브 역시도 맞장구를 치면서 자기 이야기도 꺼냈다.

  “과거에는 직접적인 정치적 탄압이나 경제적 어려움이 선교에 걸림돌이 되었지만, 지금은 다르죠. 다행인지 불행인지 지금은 그러한 어려움은 없지만, 이제는 오히려 우리 그리스도인 자신의 미적지근함이 더 큰 적이에요.”

  들으면서 윤혁은 마음속으로 뜨끔했다.

  “하지만 핍박받을 때도 주님 일에 대한 게으름이 용납되지 않거늘, 지금 같은 자유로운 분위기에 게으름을 피우면 얼마나 꾸중을 듣겠어요. 저는 지금 같은 때에는 오히려 더 열심을 내야 한다고 확신했어요.”

  레브는 그렇게 아프리카 연맹을 떠나 방랑자가 되었다고 하였다.

  “한편으로는 오늘날은 복음을 전도하는 데에는 오히려 불리한 측면도 있죠. 어려운 나라일수록 고난 가운데에서 하나님께 돌아와 회개하는 움직임이 활발히 일어나는 게 일반적인데 요즈음은 그런 지역을 찾아보기 힘드니까요.”

  제니가 조금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그래도 아주 조금씩이라도 열매가 맺히긴 하니 감사할 따름이에요.”

  그녀를 비롯한 그 자리의 모두는 진정으로 영혼 추수의 기쁨을 깊이 아는 듯했다. 자신만을 위한 인생에서의 성취가 아닌, 다른 영혼의 소생을 기뻐하는 즐거움. 윤혁은 지금껏 세상의 어느 친구에게서도 그런 솔직한 영적 생동감을 목격한 바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은은한 감동이 깊이 전해졌다. 동시에 아쉽기도 했다. 왜 자신은 그간 저런 순결한 즐거움에 푹 잠기지 못했을까?

 

 

 

 

 

(다음 회차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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