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69회 초인들의 세계 Ch 29. 바깥의군주들과안쪽의군주들(2)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2.10.06 | 회차평점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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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으로부터 21년 전 -
신국(New Nation) 관할 구역의 도시, 제203 페어리 시티(Fairy City).
도시 심장부를 점령한 해방군의 수장인 사내는 전략 회의실에서 깊은 상념에 잠겨 있었다. 짙은 진회색 머리카락에 흰 피부, 고운 중성적인 외양에 사나운 눈초리를 하고 있었다. 현재 그는 거대한 세력을 상대로 싸우는 중이었다. 쿠데타를 꾀한 도시들의 지도자들은 그를 주축으로 단합하고 있었다.
지난 세기에 세계정세의 무게 중심이 이동하면서 모든 국가는 급격한 변화를 체험하였다. 유럽 연합 역시 그 흐름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당시 지표면의 모든 국가의 제어를 담당했던 초기 인류연합은 효과적인 통치를 위해서 국가 간의 균형을 이루려는 정책을 펼쳤다. 아직 각국의 경제권과 군사력을 온전히 몰수하지 못한 시점에서 이는 필수적인 절차였다.
초기의 인류연합은 여러 기업체를 운영하면서 지금껏 인류가 보지 못한 최첨단 기술들을 쏟아내었다. 더불어 연합을 이끄는 젊은 천재들이 정치, 경제, 학문 분야에서 가히 혁신이라 불릴 만한 성과를 끌어냈다. 그들은 날마다 기록을 경신해대며 대규모 약진을 하였다.
그 과정에서 세계를 장악한 연합 측 인물들은 과거의 잔재 세력을 서서히 생선 가시 발라내듯 제거하였고, 자신들이 획득한 전 지구 규모의 자본을 재배치하여 국가 간 경제 균형을 개편하였다. 약소국들이나 제3세계는 빠른 경제 성장을 하도록 유도하였고, 반대로 선진국들이나 초강대국들에서는 기존에 누리던 부당한 특권을 천천히 합법적으로 박탈했다. 아무도 반발하지 못하도록 서서히.
연합은 경제에 이어 군사 영역에서도 고저를 평탄하게 재조정하였다. 핵무기마저 무력화시킬, 반칙에 가까운 방어용 신무기를 개발해 모든 국가에 공정히 배분하는 방법으로 말이다. 물론 가장 우위에 있는 최첨단 병기는 연합이 독차지하였다.
아울러 연합은 원시 단계의 핵융합을 비롯한 놀라운 신에너지 자원을 개발하여 석유를 권력으로 휘두르던 산유국들을 모조리 몰락시키기도 했다. 에너지의 허브가 중동에서 인류연합으로 옮겨지면서 세상의 질서는 송두리째 바뀌었다.
중국, 러시아, 미국 같은 몇몇 거대 국가는 소심한 반발의 목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이미 그 나라들도 도시나 주(州) 대부분이 본국을 등지고 인류연합을 따르기로 맹약한 상태라 속수무책이었다.
기존에 권세를 떨쳤던 일부 국가나 일부 세력이 이에 반항의 움직임으로써 연합 수장을 시해하려 시도했지만, 도리어 이는 큰 역효과를 가져왔다. 분노한 수장은 기존의 온건 정책을 거둘 명분을 확립했다. 그는 강력한 수를 두었다. 모든 국가를 절대적인 힘으로 굴복시켜 끝내 평화를 가져오기에 이르렀다.
인류연합 시절의 유럽은 애매한 위치에 있었다.
이미 그들은 오래전부터 국제 정세에 미치는 영향력이 약해지고 있던 참이었지만, 그래도 선진국으로 분류되긴 했었다. 계륵과도 같았던 유럽. 그들은 역사의 대대적인 변천이 발발하자 발 빠르게 영악한 움직임을 보였다. 네오 오더를 배신하고 인류연합과 위버멘쉬의 편에 붙은 것이었다.
그에 대한 보상으로 유럽 국가들은 문명 발전을 위해 건설된 많은 인프라를 자신들 땅에 유치시킬 수 있었다. 덕분에 분열되지 않고 대륙 단일화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만약 그들이 자신들 내부를 침식하고 있던 네오 오더의 중심부를 위버멘쉬에 기꺼이 내어주지 않았다면 그들도 약소국으로 전락했으리라.
그 이후 유럽 연합의 단일 체제화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결국, 영국을 제외한 서유럽 국가들 전부에 더해서 동부 유럽까지 흡수되었고 이들 유럽 연방을 바탕으로 하여 신국(New Nation)이라는 체계가 발안 되기에 이르렀다.
신국의 생존력은 바퀴벌레와도 같았다. 그들은 심지어 위버멘쉬 사후 인류연합이 분열되고 그로 인해 혼돈이 야기될 때도 존속을 유지했다. 그들은 일찍이 혼란을 예측했기에 일찍이 문을 닫고 국경을 보호할 수비책들을 세워두었던 것이다. 덕분에 세계를 휩쓴 무수한 분쟁과 사고를 온전히 버틸 수 있었다.
물론 그 대가는 반강제적인 ‘폐쇄 정책’이었다. 신국은 외부와의 인적 교류가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쇠퇴하지는 않았다. 혼돈의 시대의 외부 폭풍들이 워낙 타격이 컸기에 상대적인 반사 수익을 본 덕이 컸다. 게다가 위버멘쉬가 이미 태양계를 어느 정도 개간해두었고 신국 내에 항구들이 외계와의 소통 창구가 설치된 덕에 외계 자원 공급도 무난히 이뤄졌다. 그 덕분에 독자적인 형태의 기술 개발이 신국 내에서 꾸준히 지속되었다.
이렇게 외부와 단절되어 자체적으로 발전하다 보니, 신국은 흡사 동화 속 세계처럼 현실과는 단절된 듯한 독특한 곳으로 변질해갔다. 상대적 반사 수익 덕택에 위세와 국력은 강대해졌으나 단절로 인한 괴리 화도 만만치 않았다.
한편 두 번째 세대의 청년들이 초월적인 지능을 각성하기 시작하였다. 이 초인들은 새로운 지배층으로 떠올랐다. 이자들은 위버멘쉬의 유지를 계승하는 후계자를 자처하였다. 더불어 자신들과 같이 각성한 인간을 새로운 부류, 곧 ‘초인’이라는 일반명사로 은연중에 칭하였다. 초기 세대에 각성했던 의로운 선배들보다 한층 더 오만해진 초인들이 세상에 범람하였다.
외부의 국가들과 대륙들이 그러했듯, 신국의 권력층 역시 2세대 초인들에게 잠식당했다. 그들은 외부 세계와의 상호작용을 줄였다. 그 대신 내부 정치의 안정화, 독자적인 기술 개발, 자급자족, 우주 개발 프로젝트 등에 집중하였다.
그렇게 수십여 년의 시간을 거치며 대륙은 급변하였다.
변혁의 시대와 두 세대에 걸친 초인들의 급진적 활동.
이것들은 불씨가 되어 세계의 모습을 이전과는 다른 형태로 변개했다.
오랫동안 외부에 단절되었던 신국은 대단히 이질적인 세계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독특한 에너지원과 독특한 기계들, 그리고 다른 문명권과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변화한 기술 패러다임 때문에 혹자는 신국을 가리켜 ‘마법과 기술의 경계가 허물어졌다’라며 ‘마도 문명’이라고까지 칭하였다.
그러나 평화로운 신국 내부에도 많은 문제가 곪고 있었다.
먼저 소수의 엘리트가 제멋대로 국가를 운영하는 것에 대해 불만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초인들이 내세웠던 정치 원칙은 반-우중 정치. 그들은 민주주의를 우중 정치, 즉 어리석은 자들의 정치로 여겼다. 그렇게 점점 전제국가로 바뀌어가는 시스템을 보면서 시민들은 환멸을 느꼈다.
아울러 바깥 세계와의 단절 문제에 대해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다. 단기적으로는 전쟁 난민, 바이오 테러리즘, 핵 위협 등의 침투를 막음으로써 국가의 보존을 도와주는 측면도 있었다. 실제로 위버멘쉬가 중동과 그 민족을 거세시키기 전까지는 난민 침식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흑역사를 지닌 유럽 대륙이었으니까. 하지만 폐쇄는 적응력을 감퇴시키는 법. 혼돈의 시대가 종료되는 즉시 외부 환경에 둔감한 폐쇄적인 신국은 도태되리라며 많은 이가 우려하였다.
역설적이게도 2세대 초인들이 조종하던 신국 체제는 3세대라는 새 세대가 출현하자마자 3세대의 본격적인 활동 개시로 인해 야기된 혁명에 휘말렸다. 정작 불만을 터뜨린 피지배층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고 새로운 세대가 권력을 잡겠다며 기회를 틈타 나섰다.
여기서 잠시 당시 세계의 초인 권력 역학 관계를 짚고 넘어가자.
기성세대와는 달리 선천적 각성(태어날 때부터 초인으로 각성함)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던 신세대. 그럼에도 후천적 각성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자연히 이런 후천적 각성자들은 나이가 어린 선천적 초인들과 비교해 비교적 일찍 사회 활동을 개시할 수 있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사회 활동이란 당연히 개혁, 혁신, 권력 전반의 이양을 의미했다.
능력의 질에서도, 수에 있어서도 기성세대를 뛰어넘은 신세대였기에 혁명을 일으키기에는 충분한 조건이 마련되어 있었다. 마침 2세대들이 쌓은 기행과 악업도 상당했기에 합법적으로 무너뜨릴 명분도 충분했다. 균열은 순식간에 세계 곳곳에서 번져나갔다.
전 세계에서 신세대의 놀라운 활약이 이어졌다. 그중에서도 제일 먼저 신세대들이 적극적으로 국가를 재편하기 위해 공개적인 활동을 벌인 곳은 다름 아닌 유럽의 신국이었다. 아무래도 폐쇄적인 신국의 특성상 2세대가 쌓은 우매한 행위의 업이 풍부하기도 했고 또 외부 개입이 어려웠기에 눈치 보지 않고 행동하기에 적합한 무대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신세대도 아직 기반이 확고하지 않았기에 섣불리 정면 대결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그들은 나름대로 혁신적인 신기술을 고안하면서 시스템의 빈틈을 노렸다. 그렇게 어느 정도 준비가 갖춰지자 신세대 실력자들은 각 지방에서 휘하의 세력을 조심히 끌어모아 정치적 개혁, 군사적 게릴라 항전을 벌였다.
일부는 제법 놀라운 성취를 거뒀다. 어떤 세력은 도시 규모 영역을 탈환하기도 했다. 신국에 대항한다는 의미로 탈환된 거점들은 페어리 시티(Fairy City)라고 명명됐다. 오백여 페어리 시티가 단숨에 세워졌다. 그곳들을 중심으로 신국 각지에서 항전이 벌어졌고 새 시대를 요하는 움직임이 범람했다. 변화에 굼뜨고 정체된 신국은 이내 위기에 봉착했다. 그러나 여전히 저항 세력의 힘만으로 거대 국가의 힘을 완전히 전복시키기란 역부족이었다.
한편, 이들 신국 신세대 중에는 걸출한 유력자가 있었다. 제203 페어리 시티의 총통은 지혜로운 자요 치밀한 명장이요 영악한 군주였다. 그는 3세대 중에서도 나이가 조금 많은 축에 속했기에 유럽 지역 내에서는 사실상 저항군 리더 포지션에 있었다. 물론 그래봤자 열여덟 살에 불과한 소년이었기에 아직은 열세를 극복할 만큼 경험이 충분하지 못했다. 성인만 되었더라도 충분히 혼자서 신국을 무너뜨릴 위인임은 분명했지만, 아직 시간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리더 소년을 돕기 위해 의외의 손님이 방문했다. 그는 소년보다도 훨씬 어려 보이는, 잘해봐야 일곱 살 남짓 되는 어린 꼬마였다. 총통은 아이를 내려다보더니 무슨 판단을 해야 할지 몰라 갈피를 잡지 못했다.
‘설마 이 아이가 그자인가?’
얼마 전 총통 소년에게 핫라인을 통해 접촉해온 비밀스러운 조력자가 하나 있었다. 그자는 총통이 직면한 난관을 극복하는 일을 도와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를 직접 만나기 전까지는 총통도 내심 제법 경험이 풍부한 지혜로운 어른을 기대했었다. 그런데 막상 방문한 자는 그의 기대를 깨부쉈다.
‘하필이면 꼬마라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확인 사살을 하듯 꼬마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당신을 만나려 했던 코드네임 알레프(א)가 맞습니다. 닐리언 헤스 씨.”
꼬마의 목소리는 앳되었으나 말투는 어른스러웠다.
“아니, 이명대로 ‘지크문트’라고 부르는 게 낫겠죠?”
어린 꼬마에게는 도무지 그 또래에서 가질 수 없는 거대한 카리스마와 비범한 기운이 느껴졌다. 신세대 초인 중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뛰어난 지크문트조차 짐짓 그 앞에서 위축될 정도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고작 유치원에 다닐 꼬마는 좀 아니지 않은가? 아무리 초인의 능력에는 나이가 무의미하다지만 저 나이로 사회 활동을 시작할 수 있다고?
“넌 누구지?”
“당신이 내 어머니를 포함해서 여러 어른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기에 제법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직접 보니 조금은 아쉽군요. 지금 당신의 모호한 태도로는 신국을 잡아먹을 수 없습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자신을 도발하는 태도에도 침착하게 응수하는 지그문트.
“제가 당신이 이 섹터를 차지하는 일을 돕겠습니다.”
순간 당황했다. 자신이 확실히 상대보다 우위에 있음을 아는 태도. 허황된 망상이나 치기 어린 어리석음에서 나오는 오만함과는 본질부터 다른 무언가. 꼬마에게는 분명 그런 뭔가가 있었다.
“아직 제 능력을 불신하는 점은 이해합니다.”
꼬마의 눈빛은 흡사 소년 총통의 폐부를 해부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건 아십니까? 제 쪽에서도 당신이 아쉬운 이유가 없습니다.”
카리스마 앞에 말문이 턱 막혔다.
“대체할 만한 인재는 얼마든 있으니까요.”
꼬마는 오만한 동시에 우아했다. 그는 지그문트 앞에서 전략과 큰 그림을 읊었다. 놀랍게도 그는 현재 대치 중인 신국과 페어리 시티들의 대립 구도를 손바닥을 내려다보듯 꿰고 있었다. 나아가 장기적으로는 국제 정세 개편과 우주 식민지 경쟁에 이르기까지도 큰 그림을 그려두고 있었다.
‘이건……, 인간의 영역에 속하는 지혜가 아니다.’
지크문트는 경외감에 저절로 뻣뻣한 자세가 되었다. 그는 지금껏 해답을 찾아내지 못했던 핵심 쟁점들에 대해 꼬마에게 질문하였다. 그러자 아이 입에서 지그문트가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기발한 발상과 묘책들이 튀어나왔다. 꼬마는 상대의 불신을 꺾고자 최상의 시뮬레이션과 차선책들을 한꺼번에 제안했다.
“당신은 대체……, 어떤 그림을 그리시는 중입니까?”
지그문트는 어느새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보다 한참 어린 꼬마에게 공손한 말투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왠지 모르게 내면에서부터 깊이 복종해야만 할 것 같은 정신적 압박감이 느껴졌다.
(다음 회차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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