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70회 초인들의 세계 Ch 29. 바깥의군주들과안쪽의군주들(3)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2.10.07 | 회차평점 0 |
(이전 회차에서 계속)
“이곳 신국의 시스템이 너무 낡고 닳아서 앞으로 제가 그려낼 장래 그림에 방해가 됩니다. 장차 변화할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겠죠. 다만 그들이 쌓아온 인프라는 제법 써먹을 만합니다. 그래서 일단 신속히 빼앗은 후에 첫 번째 섹터로 만들어서 일종의 시드(seed)로 이용할 계획입니다.”
꼬마는 이렇게 거침없이 제안하였다.
“제가 알려주는 전략 그대로 시행하십시오.”
‘이대로 신뢰해도 좋을까?’
의심 많은 지그문트의 본능마저 신뢰할 것을 강요했다.
“머잖아 당신을 유럽 지역의 새로운 패자로 만들어드릴 수 있습니다.”
이는 대단히 발칙하면서도 대담한 제안이었다.
‘세계를 논하는 꼬마라니.’
기성세대의 어른들이 알게 되면 충분히 놀라 까무러칠 정도였다.
“공짜는 아니겠죠? 당신이 대가로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에 꼬마는 지그문트에게 흥미로운 제안을 했다.
“나를 지지하겠다는 계약입니다.”
“그것만으로 되겠습니까?”
“굳이 다른 건 필요 없습니다.”
마치 꼬마는 일이 다 정리되면 지그문트 본인이 알아서 자신 밑에 기게 될 것임을, 아니 마음으로 복종하게 될 것임을 미리 예언하는 투였다. 신국을 차지한 뒤에 챙길 자신의 몫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도 않았다.
앞으로 길어야 십 년 안에 꼬마는 인류연합을 재편한 후 우주에 흩어진 모든 시스템을 강제 복속시킬 계획이었다. 신국을 몰락시킨 후 그곳을 섹터로 재구성하면, 그 체제를 본떠 다른 대륙들도 마찬가지의 섹터 형태로 개편할 예정이었다. 그 후 우주와 지구를 단일화시켜 하늘과 땅을 통일할 계획이었다.
“다른 초인들을 제 수족으로 내세워 땅들을 복속시킬 겁니다.”
“그들이 모두 굴복하겠습니까?”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하늘을 먹으면 땅에 속한 자는 굴할 수밖에 없죠.”
한 마디로 앞으로는 자신이 세력을 쥐어틀 테니 지그문트 같은 초인은 일찌감치 고개를 조아리고 줄을 잘 서라는 강요나 마찬가지였다. 꼬마는 앞으로 모든 초인을 같은 방식으로 섭외할 생각이었다. 사탕발림으로 꼬드기며 아양 떠는 것은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의 위세와 존재감을 믿었다.
그렇게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그 꼬마와 계약하여 전쟁에 임한 지 삼 년 만에 닐리언 헤스는 연전연승을 거두어 끝내 신국을 완전히 전복시키는 데 이르렀다. 마침내 군사적으로도 행정적으로도 외교적으로도 전혀 빈틈이 없는 새로운 국가 체계가 건설되었다.
예견이 성취된 시점에서 지크문트는 감히 꼬마와의 계약을 배신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의 마음은 완전히 꺾였다. 꼬마는 자신과는 격이 다른, 절대 적으로 돌려서는 안 될 드높은 상대라는 확신이 들었다. 반대로 그에게 복종하여 그의 편에만 선다면 상승가도를 올릴 수 있음은 자명했다.
‘역시나 이분이야말로 3세대들 중 최강의 존재임이 분명해.’
그는 자기 권위를 꼬마 앞에 전부 내려놓고 복종하는 길을 택했다.
그렇게 새롭게 유럽의 패자로 우뚝 선 에우로페 제국은 신국과는 달리 지배자가 전면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배후에서 지배하는 흑막 형태 노선을 택했다. 공개적인 반-우중 정치를 표명하는 바람에 민중들의 반기를 산 신국의 실책을 반복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이미 거대한 세력을 구축했던 그 꼬마, 카이젤 라흐블뤼크는 자신을 섬길만한 다른 3세대 초인을 물색하였다. 그는 동시에 우주 개발 프로젝트를 점거하여 본격적인 은하계 개척에 박차를 가해 영향력을 서서히 넓혀나갔다. 에우로페 제국뿐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국가를 자기 통제 아래에 두기 위해서. 그리고 나아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우주 세력의 단일화를 시행하기 위해서.
***
- 다시 현재 시점 -
지그문트는 거대한 홀로그램 시뮬레이션을 주시하였다.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연결된 관계도, 그 위에 수많은 인물의 이미지와 데이터가 엮여 있었다. 2세대 초인 중 생존한 자들인 원로들을 겨냥한 블랙리스트였다.
근 몇 달 동안 지그문트는 다소 분주히 움직여야 했다. 엠페러들끼리의 합의로 원로회를 정리하도록 결정이 내려진 후 오랫동안 지구권 내 숙청을 도맡았던 그가 본격적으로 발을 벗고 나섰다.
물론 실질적으로 이 일을 넌지시 제안한 장본인은 카이젤이었다. 자신이 신뢰하는 부관들인 엠페러들에게 지구 문명권의 조율 권한을 맡긴 이유 중에는 이처럼 자기 뜻을 제때 파악하여 처리하도록 훈련시키려는 목적도 있었다.
오래전부터 상관은 통제를 잘 따르지 않는 2세대 일부를 불쾌히 여겼었다. 그들도 과거에 인류를 상대로 저지른 죄와 불법과 우행(愚行)이 많았지만, 단지 적절한 타이밍에 줄을 잘 섰다는 이유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카이젤은 내심 그들을 공정히 처단하지 못해 아쉬워하던 참이었다.
그러던 참에 이번 기회는 때마침 적절한 기회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알아서 인류연합의 규율을 어기고 선을 넘어 주었으니 말이다.
최근 지그문트는 룩에게서 인형 사체들을 넘겨받았다. 그는 최근 개발된 시공간 확률 기반 사이코메트리 기술을 이용해 인형에 기록된 명령 명세를 역 추적하였다. 그 결과 어렵잖게 원 조종자와의 링크를 색출할 수 있었다. 물론 상대편도 철저히 준비해온 모양인지 생각 외로 추적 경로가 단순하지는 않았지만, 지그문트의 기술력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나름 만반의 준비를 했으니까 경솔하게 움직였겠지,’
그 후 지그문트는 미리 준비된 여러 정치 이슈들을 내세워 원로 측을 향한 압박을 서서히 시작했다. 그리고 그 틈에 그들이 숨겨놓은 비밀 시설을 추적 및 점령하였다. 필요한 것은 회수하고 나머지는 제거했다. 지크문트의 공작으로 단번에 팔다리를 절단당한 원로 세력들은 울분을 토했으나 대응할 도리가 없었다. 그들도 머잖아 신세대가 거치적거리는 잔재를 치워버릴 것을 직감했다.
‘그들도 초인답지 않게 섣부르고 미련했어. 수면 위로 알아서 나서 준 덕에 정치적으로 몰락시킬 기회를 잡았지. 사실 이전부터 다 예정된 계획인지라 굳이 이번이 아니었어도 언젠가는 처리했겠지만.’
언제가 될지 시간의 문제였을 뿐 권력 단일화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반드시 시행해야 할 의무였다. 원로 중에서 아예 선을 넘어서 쿠데타 행위를 시도하는 자가 나왔다면 더 좋았을 터. 아쉬움이 조금 남았다. 그랬다면 아예 핵심 인물 제거까지 수행할 수 있었을 테니까.
‘뭐, 그 정도까지 미련한 초인은 없겠지만.’
다만 한 가지 의구심이 지그문트의 머릿속에 남았다.
사병으로 운용되는 로봇 인형. 그것들을 어떻게 ‘기계 율법’의 영향에서 일시적이나마 벗어나게 할 수 있었을까? 지금 인간들이 사용하는 기계는 하드웨어 구성이나 소프트웨어의 원리를 막론하고 무조건적으로 율법의 지배를 받는다. 인간 정신과 실시간 공명이 가능한 인형이라고 다르진 않다.
‘기계 율법은 고도로 정제된 초 고등 물리학을 기반으로 한 테크놀로지.’
고로 율법은 카테고리를 막론하고 시스템과 기계를 침식하는 성질을 띠었다. 새로운 기계가 만들어지면 어느 공정에서 제작되건, 어떤 발전된 기술을 썼건 반드시 율법에 침식당하는 운명에 놓인다. 통신 장비가 전자기학 기반이든 양자 역학 기반이든 상위 물리학을 기반으로 하든 율법 침식 앞에선 속수무책이다.
게다가 그런 기계 율법에는 인간과 인류를 향한 절대복종뿐 아니라 연합에 대한 충성까지도 명시되어 있다. 어떤 함선이나 로봇도 감히 연합의 명령에 반대되는 임무는 수행할 수 없다. 지구의 로봇이건 우주의 로봇이건, 장소나 기술력에 상관없이 이는 동등하다.
‘그런데 율법의 제어를 벗어나서 사병으로 운용할 수 있는 인형이라.’
뭔가 특수한 조작을 가했으리라 추정되었다. 문제는 그런 조작을 할 만한 기술이 지크문트가 아는 바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도주한 두 반역자 중의 한 명이 연루되었을 가능성도 있겠다. 현 시스템을 조금이나마 훼방할 실력을 지닌 불순분자라면 그들뿐일 테니까. 그저 불확실한 심정적 추측에 불과하지만, 이 예측이 맞다면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였다.
‘그런데 대체 무슨 요행을 부린 것인지는 짐작도 안 되는군.’
그 두 명의 위험분자는 비록 현재는 이미 세력과 기반을 잃은 채 실종된 상태였지만, 아직 확실히 사살되지는 않았다. 예전에는 무려 왕좌를 놓고 경합 벌였던 전적도 있으니 기습적으로 재등장한다면 골치 아프고 위협적일 것은 분명했다.
혹시 그들 중 하나가 원로회에 몰래 비밀스러운 기술을 제공한 걸까. 그렇다기에는 원로회 추적 결과 아무런 증거가 없었다. 적어도 원로들이 직접적으로 반역자들과 맞닿지 않은 건 분명해 보였다. 그렇다면 위험분자들이 축출되기 전에 미리 뭔가를 안배해뒀을까? 혹은 현 과학 기술로 설명되지 않는 모종의 초자연적 수법을 준비해뒀던 걸까?
‘대규모로 일을 벌였으면 시스템 전체를 혼란스럽게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는 못한 것을 보아 대단히 수량이 제한적인, 거의 요행에 가까운 기술이리라. 수장께서도 이미 짐작하셨을 텐데 아직까지 조용하신 것을 보면 무언가를 비밀리에 계획하시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최근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힘을 모종의 원리로 진화시키신 것도 그런 계획의 일환이 아닐까 싶었다. 원래 그 위험분자들도 유독 그 ‘중추’를 편집증적으로 무서워했지.
‘이것은 혹시 앞으로 닥칠 더 큰 일에 대한 전조인가?’
증거라도 잡아낸다면 마음이 편할 텐데.
안타깝게도 가장 깊은 근원적 비밀은 도마뱀처럼 꼬리를 자른 채 도망갔다.
지그문트는 직접적으로 연루된 회원들을 처벌한 뒤 회수된 인형 사체들을 제로원의 본부 쪽으로 송부하였다. 증거물들은 철저히 해부될 것이다. 기계 율법을 은근슬쩍 회피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수단도 곧 검색되리라. 또 비슷한 일이 발생하지 못하도록 철저한 원천 차단책이 마련되리라.
‘그분은 절대로 두 번의 실수를 허용하지 않는 분이니까.’
아니면 애당초 실수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번에도 전처럼 의도적으로 뭔가를 낚기를 바라시고서 물밑 세력의 준동을 허용하셨을 수도 있겠다. 지그문트는 상관의 완전무결한 전략 전술을 확신했다. 극한의 위기마저 극상의 기회로, 적 책략을 올무로 바꿔내는 데는 달인이시니까. 다만, 두 반역자를 적극적으로 쫓지 않는 그분의 느긋함은 아랫사람으로서 아주 조금은 염려되었다.
“뭐, 그 문제는 알아서 하시겠지.”
그 일이 자기 권한 밖임을 자각한 지그문트는 진행하던 업무를 재개하였다.
***
시베리아는 현재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인간이 살지 않는 곳이다. 극지와 오지는 물론 심해, 지하, 우주까지 도시로 개척하는 데 성공한 인류가 왜 유독 이 차가운 땅만은 도시화시키지 않았을까? 이는 이곳이 일찍이 우주와의 연결 채널로써 선택되어 특수하게 개조되었기 때문이었다.
현존하는 지표면 상의 시민 거주지는 인류연합에 의해 임의대로 ‘섹터(sector)’라는 행정 단위로 구획 지어져 있었다. 규모에 따라 메이저 섹터, 마이너 섹터로 분류되었는데, 메이저는 주로 육지와 해상을 대상으로, 마이너는 상공, 지하, 해저 등의 신규 개발 지역들을 주로 포함하였다.
물론 공식적으로는 하늘 위의 상공, 달까지 이르는 궤도 전역, 지하로는 내핵에 이르기까지 전 영역도 행정 체제 안에 포함되어 있었으나, 지표를 제외한 이런 광활한 영역들은 전부 제로원, 즉 센트럴 섹터에 속했다.
한편, 센트럴 섹터를 제외한 나머지 섹터에는 총독 역할의 ‘섹터장’들이 최종 통솔권을 쥐고 있었는데 이들은 최상위 혹은 그에 준하는 클래스의 초인들이었다. 이들은 표면상으로 존재하는 국가 연합의 수장인 동시에 섹터의 공식 지배권도 지닌 진정한 실세이기도 했다.
엄밀히 말해서 섹터 행정 구분은 국경과는 별개였다. 표면상의 허울뿐인 분할이 국경이라면 실질적인 연합의 행정 단위 구분은 섹터였다. 하지만 대체로 메이저 섹터는 대륙 단위의 구분을 따랐다. 한 개의 북부 섹터(북미), 두 개의 남부 섹터(아프리카와 남미), 두 개의 동부 섹터(북아시아와 남아시아), 두 개의 서부 섹터(산발적으로 흩어진 브리타니아 연방, 그리고 에우로페 제국)가 그것들이었다. 대륙 단위 구분을 따르지 않는 섹터는 브리타니아 연방뿐이었다.
다만 지구상에는 섹터로 구분되지 않는 예외 구역도 세 군데 있었다.
첫 번째는 인류연합의 중심부이자 제국의 수도인 제로원이었다. 센트럴 섹터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우주 식민지 전체와 연결되어 인류의 중추를 이루는 특성 때문인지 따로 떼어서 취급하는 경우가 많았다.
두 번째는 이스라엘과 중동 소국 몇 개를 포함한 비좁은 영역이었다. 이곳은 인류연합으로서는 계륵 같은 땅이었다. 악명 높은 크레센트 집단을 비롯해 온갖 복잡한 정치적 사정이 얽혀 있던 이곳은 사실상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첨단 문명의 혜택을 못 받고 혼돈 시대의 황폐함만 물려받은 폐허였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가 바로 동토 시베리아였다.
이곳은 특수한 목적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지구가 아닌 우주 식민지 일부로 여겨졌다. (참고로 이렇게 강제로 개조당한 데에는 초인들만 아는 뒷사정이 있었다) 여하튼 시베리아 대륙 전체는 일종의 게이트로 개조되었다. 이곳을 통해 거대 함선과 요새들이 들락날락하였고 많은 양의 자원과 물자가 수송되었다. 동시에 그 땅은 은하계 안에서도 몇 개 안 되는 대규모 워프 중개지였고, 항성급 에너지를 상회하는 에너지를 생산하고 전송하는 발전소이기도 했다.
자연히 시베리아는 외부와 단절된 출입 금지 구역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곳의 중력과 시공간과 각종 물리량과 환경은 지구의 원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이질적인 형태로 변질하였다. 따라서 인간이 거주하기는 적합지 않았다. 기계들과 자동화 시스템이 그곳의 모든 노동을 도맡았다.
시베리아는 행정 분류상 지구의 일부가 아닌 우주 식민지에 속하는 영역이다 보니 관리자 역시 지구의 조율자인 로스트엠페러들이 아니었다. 식민지 출신의 최상위 초인 중 가장 뛰어난 일곱이 공동 관리자로 임명된 상태였다.
우우우우우우웅.
동토의 게이트가 열리며 거대한 전함이 그 위용을 드러내었다.
크기 수십 킬로미터 단위의 초거대 다용도 함선 AZK 350-20이 시베리아 대기권으로 진입했다. 거대한 크기에도 불구하고 자체적 중력 차폐 기술 덕에 주변 환경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 이윽고 AZK 350-20에서 단거리 이동 워프 광선이 뿜어졌다. 광선은 지하와 상공을 관통하는 초거대 요새 2103번 정류장 쪽으로 연결되었다.
(다음 회차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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