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71회 초인들의 세계 Ch 29. 바깥의군주들과안쪽의군주들(4)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2.10.08 | 회차평점 0 |
(초반부는 이전 회차의 끝과 겹쳐짐)
우우우우우우웅.
동토의 게이트가 열리며 거대한 전함이 그 위용을 드러내었다.
크기 수십 킬로미터 단위의 초거대 다용도 함선 AZK 350-20이 시베리아 대기권으로 진입했다. 거대한 크기에도 불구하고 자체적 중력 차폐 기술 덕에 주변 환경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 이윽고 AZK 350-20에서 단거리 이동 워프 광선이 뿜어졌다. 광선은 지하와 상공을 관통하는 초거대 요새 2103번 정류장 쪽으로 연결되었다.
“본성의 땅은 몇 달 만에 밟는군. 그새 많이도 변했어.”
칠흑의 머리칼, 이글거리는 붉은 화염 같은 동공을 지닌 흰 피부의 남자가 지상에 발을 내디뎠다. 지구에서는 GASA의 관리자로 시베리아 게이트 및 플랜트를 관리하지만, 본 신분은 은하계 식민지 소속의 ‘제1 철인왕’인 칼리드. 그는 일곱 철인왕 중에서 제왕의 자질을 가장 풍부하게 함양한 자였다. 그의 흑발만큼이나 검은 제복은 흡사 힘으로 통치하는 마왕의 자태를 연상시켰다.
“그러게. 너랑 같이 들어오는 것도 간만이네, 칼리드.”
이번에는 칼리드와 대조되는 금발의 미청년이 나타났다. 격자 문양이 뻗어나가는 기계 느낌의 푸른 안광의 눈이 돋보였다. 그는 인류연합의 최상위 과학자 중 하나인 ‘제4 철인왕’, 진이었다. 그는 보통 지구를 방문할 때면 가벼운 차림을 하곤 했지만, 이번만큼은 칼리드와 비슷한 디자인의 흰색의 제복을 입고 왔다. 정식적으로 그의 양아버지이자 주군인 그분을 만날 때 입는 복장이었다.
그때 칼리드의 눈동자가 점화된 불씨처럼 이글거렸다. 불타는 눈은 붉은색의 채도를 더욱더 높이며 빛을 발산하였다. 칼리드와 같은 철인왕들의 시각 기관과 신경계에는 특수한 테크놀로지의 산물이 이식되어 있었다. 이 눈들에는 종류별로 각기 특수 능력이 심겨 있었는데 그중에는 광역 물리 관측에 특화된 기능도 있었다.
“흐음.”
그는 확률함수 탐지 기능의 감지 범위를 최대한도로 높여 태양계 전역을 실시간 관측하였다. 입자 단위로 면밀히, 그리고 광학의 범위를 넘어 단숨에. 아버지를 대행하여 여러 영토를 관리하는 행정부 수장 곧 대총통인 만큼 칼리드는 우주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관측하는 것이 습관이 된 상태였다.
태양계 내의 천체, 인공위성, 인공 항성, 태양 내부 요새에 이상이 없는지를 확인하던 중 문득 이상한 현상이 하나 관찰되었다.
“트리톤(해왕성의 위성)이 가루가 됐군.”
내란이 있었다는 보고는 없었는데. 연합 측에서 고의로 부순 것인가? 위성이 부서진 패턴을 관측해보니 화력 병기로 녹인 것이 아니라 소형 개체의 물리적 충돌 때문에 벌어진 것으로 추측되었다.
이에 칼리드의 궁금증을 진이 곧바로 풀어주었다.
“아하, 넉 달 전쯤에 룩과 비숍이 태양계를 방문했어. 아버지께서 룩에게 임무를 맡겼는데, 비숍이 돌발적으로 따라 들어왔더군. 아예 아버지가 그 참에 친선 경기를 개최하셨다던데? 아마도 룩과 비숍이 싸운 흔적 같아. 제법 서로 쌓인 게 많았나 봐. 제대로 붙었으면 파괴가 더 컸겠지.”
그러자 칼리드는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아버지께서도 점점 터프한 스타일이 되어가는 느낌이군.”
“하하, 원래 마초 성향이시잖아.”
“트리톤이라, 딱히 쓸모도 없는 별이었는데 자원으로 쓰면 딱이겠군.”
위성이 부서졌다는 말을 듣고도 일상적인 일을 말하듯 태연한 태도였다.
“그나저나 아키라의 안부는 어떻지?”
칼리드가 기습적으로 질문을 던지자 진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라, 왜 아키라를 내게 묻는 건데?”
“너랑 제법 친했던 거로 아는데? 은연중 자주 접촉했던 것 아닌가?”
“뭐 그렇긴 한데⋯⋯, 칼리드 네가 그 녀석까지 신경 쓸 줄은 몰랐네.”
진은 숨기던 것을 들킨 아이처럼 넉살스럽게 웃었다.
“나름 아키라와 나는 의형제니까.”
“몇 주 전에 봤을 때는 별 탈 없었으니까 걱정하지 마, 칼리드.”
칼리드의 불꽃 같은 붉은 눈이 진의 푸른 눈을 주시하였다. 그러나 진은 표정의 미동조차도 전혀 없이 태연함을 유지했다. 둘은 서로를 견제하다가 이내 건물 깊숙한 곳에 있는 센터로 들어갔다. 사방의 경관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전보다 대규모로 개척되어서 그런지 몹시 살풍경했다.
“엠페러들도 이제는 대기권 내 소형 게이트 운용에 성공한 모양이군.”
“그래? 좀 늦긴 했네.”
진이 비웃듯 흥얼거렸다.
“아버지가 이미 소년 시절에 해치운 걸 뒤늦게 따라잡다니.”
“그분은 논외지.”
“하긴 우리 최상위 클래스라 해봐야 감히 그분께 비할 바는 아니지.”
시베리아의 게이트 개조화도 카이젤이 벌인 작품이었다. 그는 이곳을 개조한 이후 호랑이가 날개 얻은 양 폭발적으로 우주 정복에 박차를 가했었다. 우주 개척에 필수적인 교통 기술을 독점한 이유는 간단했다. 식민지의 권력 단일화. 그는 그렇게 시베리아를 발판 삼아 후발 주자들이 우주 개척을 위한 모험 부대를 파견하기도 전에 은하계 내 모든 쓸 만한 영역을 정복해버렸다.
원래 지금까지는 대기권 내에서 게이트를 열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이 지구 궤도 엘리베이터를 타고 바깥으로 나가야만 했는데, 그 궤도 엘리베이터와 배리어 역시 제로원의 통제 아래 있었다. 즉 우주와 지구의 왕래는 철저히 왕의 통제 아래 있어왔던 셈이다.
그나마 이제는 비로소 후발 주자들도 대기권 내 게이트를 열긴 했지만 이미 은하 정복은 카이젤에 의해 종료된 상태였다. 자신의 부하들에게조차도 독립의 기회를 주지 않는 철저함. 과연 사다리 걷어차기의 훌륭한 표본이었다.
“단일화를 위해서는 바람직하고 지혜로운 대처이지.”
“그런가?”
칼리드는 일곱 철인왕 중에서도 유독 충성심이 높았다. 그는 언제나 양아버지를 절대적으로 지지하였다. 그에 비해서 진은 충성하긴 충성하되 어느 정도는 아버지의 행적에 의구심을 품기도 했다.
“외우주 식민지를 확실히 제어할 역량을 키워내기 전까지는 지구의 다른 실력자들도 발을 묶어둘 필요가 있다는건가? 정치적으로는 완벽한 판단이긴 하네. 아버지다운 패러다임이야.”
“진 네가 감히 걱정해줄 필요는 없다. 판단할 자격도 없고.”
“녀석 참 딱딱하긴.”
둘은 하필 같은 시기에 소환되었다. 그러나 소환된 목적은 달랐다.
칼리드는 이번 달 개최할 세계 정상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지구를 방문했다. 허울뿐인 각국의 대표, U-Society의 주요 간부, 행정 구역인 섹터들을 다스리는 섹터장, 그리고 우주 식민지의 행정 제어 및 정치를 도맡은 식민지 대총통 칼리드까지, 이렇게 구성된 멤버들이 한데 모여 차기 인류연합의 우주 행정 재편에 관하여 논의를 할 예정이었다.
“칼리드, 최근에 원로들의 힘도 거의 제거했다던데, 정말이야?”
“너도 벌써 그 소문을 들었군.”
“이번에는 정말로 통합과 재편을 하려나 보네. 벌써 이만큼까지 왔구나.”
내심 경탄하며 진이 말했다.
“그리 놀랄 일은 아니야. 이제 앞으로 길게는 4년 안에 우라노폴리스 내부 하데스 방 내에 봉인된 사람들이 풀려날 거다. 최근 테라포밍 속도가 빨라져서 그때쯤이면 최소 몇만 개의 지구 유사 행성들의 환경 조성이 완료될 거야.”
칼리드가 말했다.
“게다가 전면 개방이 이뤄지고 우라노폴리스 주민들의 신분이 정식 시민으로 승격된다면, 그리고 하데스챔버의 인간들의 신체 재생이 완료되면 인류의 거주 구역은 단숨에 한 개 행성에서 몇만 개 행성으로 늘어난다. 지금의 허울뿐인 국가 따위는 이제 필요 없어.”
앞으로 4년. 미리미리 준비해도 촉박한 시간이다. 이젠 매년 정기 회의를 열어서 행정 재편에 본격적인 박차를 가해야 할 때였다. 행성 단위 구역 재편은 물론이고 지구와 식민지 행성들 사이의 대규모 이주 정책까지 대비해야 한다.
“다른 트리플 스페셜 초인들도 기를 쓰고 더 권한을 가지려 애쓰겠네.”
진이 동류의 강자들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제법 고생 좀 하겠어, 칼리드.”
“쓸데없는 오지랖이다.”
“뭐, 그래도 너만큼은 다들 무서워하니까 걱정은 안 되네.”
지구의 로스트엠페러들은 식민지에서 태어난 이들을 은근 깔보는 경향이 있었지만, 유독 정치에 능숙한 칼리드만큼은 경계하는 기색을 보였다. 능력도 능력이지만 권력을 자기 손발처럼 능수능란하게 부리는 게 몸에 밴 인간이기에 그러하리라. 진은 마음에도 없는 격려를 하듯 형제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어차피 우린 주역이 아니야.”
칼리드가 진의 손을 치워냈다.
“주권은 오로지 아버지에게 집중될 예정이지.”
“하하, 그런가? 아무튼 힘내. 우리 몫의 밥그릇 싸움까지 하고 오셔야지.”
“난 대의에만 관심 있다.”
“그러던가. 그나저나 회의는 그분이 직접 진행하나? 아니면 대행자께서?”
국제회의는 참여해본 적이 없어 사정을 잘 모르는 진.
“아버지께서는 그런 사소한 회의는 안 나간다.”
“그러면 역시나.”
“그래. 부대표 에녹이 인도할 예정이다.”
“하기야, 아버지 본인은 항상 뒤에서 조종하는 걸 좋아하시지.”
이번에는 화제를 바꾸어 칼리드가 질문 역공을 하였다.
“이번에 연구 교류를 한다고 하지 않았나. 화물 상태는 체크 했겠지?”
마침 함선에서 몇 개의 소형 우주선이 사출돼 요새에 정착하는 중이었다. 족히 수십 미터 이상은 될 화물들이 수백 개 이상 탑재되어 있었다. 이것들은 진이 이번 연구 교류에 쓰기 위해 가져온 것들이었다.
“내 효도 선물에 기분 좋아하실지는 잘 모르겠군.”
진은 자신이 낸 발명 아이디어를 혼자 힘만으로 완성하기 어려울 때면, 아버지와 기술 교류를 나누곤 했었다. 서로의 아이디어를 교환하고 구체화해 실용화에 이르기까지 끌어올리는 방식이었다. 그 과정에서 둘은 서로의 지식과 연구를 교류하여 다양한 이득을 얻곤 했다.
이번에 진이 소환된 목적 역시 바로 그 연구 교류를 위한 만남이었다. 진 자신이 보장하건대 이번 프로젝트는 가히 새로운 특이점에 도달했다고 장담할 수 있는 획기적인 내용이었다.
“이번에도 내 신기술을 순식간에 완성해주시겠지.”
“그건 좋은데, 중간에 딴 길로 새지는 말아라, 진.”
칼리드가 묵직한 목소리로 경고하자 진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내가 뭐 어때서.”
진의 항변에 칼리드는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레리엔과 정기적으로 만나는 것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
“억울하네. 스승님과는 그저 순수한 학문적 교류를 할 뿐이야.”
진이 어깨를 으쓱이며 항의했다.
“학문적 교류와 산업 스파이 행위는 종이 한 장 차이다.”
“사부는 애초에 속세에는 관여 안 하거든.”
“정신 못 차렸군.”
“알았다, 알았어. 치사해서 원.”
둘은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각자 목적지로 향하기 위해서 길을 나섰다.
마왕과 매드사이언티스트, 두 위험한 거물의 지구 귀환에 마치 행성 자체가 긴장이라도 하는 듯 불안정한 시베리아 대기권이 뒤흔들리며 자기장과 중력장의 파동이 메아리치듯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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