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72회 초인들의 세계 Ch 30. 진실 게임 (1)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2.10.09 | 회차평점 0 |
Chapter 30. 진실 게임
-크르르르르릉
익숙한 낮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거친 혓바늘이 돋아있는 촉감이 얼굴에 닿았다. 윤혁은 자신이 깨어난 곳이 아늑한 자기 방이 아닌 낯선 공간임을 상기하고 어제의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어제 도착했을 때는 늦은 밤이었었다. 한국과 멀리 떨어진 곳이다 보니 시차가 있었다. 그래서 워프 직후에 깊은 피로를 이기지 못한 채 짐도 안 풀고 침대에 곯아떨어졌었다.
자택 인테리어는 저번과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미묘하게 달랐다.
‘지난번에 왔을 때랑은 느낌이 완전히 다르네.’
애당초 위치가 다르니 그럴 수밖에. 첫 방문 때에는 대서양 쪽의 아엘브론이었고 이번 방문은 태평양 쪽의 레뮬로스였다. 제로원이라는 범지구적 영역의 일부이긴 해도 두 도시는 지구 정반대 편에 위치해있었다.
사실 이번에 레뮬로스에 도달해보니 저번에 본 제로원과는 문명 수준이 전혀 달랐다. 압도적으로 고차원화된 상태였다. 아엘브론이 뒤처져서 그런 게 아니라 기술 발전에 가장 민감하게 순응하는 지역이 제로원이기 때문이었다. 윤혁과 같은 촌뜨기에게는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미래 도시였다.
그래도 검은 호랑이 케일과 단테 집사님은 그대로였다.
-냐아아아아
그런데 이번에는 또다른 익숙한 울음소리도 들려왔다. 분명 어제 헤어진 줄 알았건만, 몰래 가방 안에 들어가 따라 들어온 모양이었다. 검은색 길고양이 태원. 윤혁은 어이가 없어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하긴 워프 시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의 워프뿐이었지.’
동물의 경우에 인간과 달리 별다른 워프 코드 인식이 필요 없다.
워프나 게이트 같은 원거리 이동 기술은 도입 자체는 꽤 오래되었음에도 인간에게도 안정적으로 상용화되기까지는 많은 개량이 요구되었다. 다른 종류의 물체, 심지어는 유기체와 동물조차도 별문제가 없는데 이상하게도 인간의 이동에는 자꾸 오류나 사고가 발생했다. 물론 개발 초기 시절 이야기고 지금은 연구를 거듭해 인간의 이동마저 완벽하게 해결했다지만.
‘인간의 영혼⋯⋯, 물질계보다 높이 위치한 그 미지의 구성요소 때문인가?’
개인적인 추측은 그러하였다. 연구한 당사자들이 더 잘 알겠지.
여하튼 고양이 태원은 뜻하지 않게 소환 워프에 같이 휘말려 이곳에 왔다. 케일은 태원을 바라보았다. 마치 한없이 연약한 아기 호랑이를 보듯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혹여나 부서질까 주의하며 앞발로 품고 혀로 살살 쓰다듬었다. 어미가 아기를 품는 것 같기도 했고 애정 공세를 하는 모양 같기도 했다.
‘의외로 겁을 안 먹네.’
원래 연약한 고양이라면 맹수를 앞에 두면 살기와 공포를 느끼는 것이 보통이리라. 그러나 태원은 공포 반응을 담당하는 편도체가 고장 나기라도 했는지, 자신보다 백 배 이상은 되는 맹수 앞에서도 의연했다. 문득 초인들의 눈에는 형이랑 어울려 다니는 자신도 이렇게 비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나저나 시종들은 안 보이네.’
이름조차 없었던 그 시종들. 어르신은 그들에 관한 증언을 듣자마자 정신 간섭이라는 단서를 추측해내셨다. 만약 시종들을 다시 보게 된다면 그와 관련된 단서를 좀 더 알아보리라고 작정했던 참이었다.
‘아쉽게도 이번에는 없네.’
방을 나서서 집 안을 둘러보았다. 커다란 저택은 적막하였다. 시설이 자동화되어서 그런지 일할 사람도 없었고 방문객도 없었다. 한 사람이 지내기에는 크다면 큰 곳이겠지만 집 주인의 비상식적인 권력과 부를 생각한다면 나름 검소한 곳이기도 하였다. 적어도 생활공간 부분만 본다면 말이다.
그때 위쪽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신사처럼 신중하게 걸음걸이를 내딛는데도 무거운 중량과 힘 때문에 진동이 느껴졌다. 집주인이 계단으로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긴장한 윤혁은 발 소리도 내지 않고 잠잠히 멈췄다.
카이젤은 누군가와 통신을 하고 있었다. 그는 통신할 때는 항상 침투나 도청이 불가능한, 최첨단 양자 뇌파 기술이나 텔레파시를 사용하곤 했다. 편집증적이라 힐난할 수도 있겠지만 그의 언행이 갖는 거대한 파급력을 생각할 때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방심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집안이라 편해서 그런 것인지 혼잣말도 작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분간되는 소리는 아니지만.
“인류 미래를 위한 협의는 사흘 후부터 아엘브론에서 진행될 것입니다. 현재까지 총 30만 가지 시나리오에 대한 대응 플랜은 마련되었고, 위버멘쉬께서 원하는 사항들을 강행시키겠습니다.”
“밤새워서 고생했겠군. 어차피 형식적인 자리이니까 부담은 갖지 말고.”
“국가원수들이나 원로회, 그리고 SS 클래스 이하는 어차피 영향력에 제약이 있으니 상관없지만, 칼리드와 엠페러들의 대립 구도는 제어해둘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일단은 가능한 모든 시나리오에 대한 중재안을 준비해두었습니다만.”
상대 쪽 텔레파시는 대단히 차분하고 진중한 어투였다.
“어차피 조금 투덕거리다 끝날 문제일걸? 걱정하지 마.”
“회의 후에 보고드리겠습니다.”
“고맙네, 부대표.”
상대는 카이젤이 가장 신뢰하는 부하이자 연합의 서열 2위인 부대표였다.
그는 트리플 스페셜 클래스 초인 가운데 가장 능력이 출중한 부관이었다. 동시에 카이젤이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형제 같은 소꿉친구이기도 했다. 다소 고지식하고 원리원칙주의자인 탓에 본인은 부하로서의 태도를 철저히 고수하긴 했지만, 여하튼 카이젤이 유일하게 수평관계를 허락하는 친구였다.
“녀석은 어째 점점 딱딱해지는 느낌이군, 원.”
그때 그는 잠시 멈춰 섰다.
배다른 동생이 눈에 띄었다. 전일 도착했었다는 보고는 들었지만, 얼굴 보는 것은 석 달 만이었다. 어째서인지 윤혁은 전과 달리 비굴함이나 겁먹은 기색이 없었다. 변함없이 공손하고 겸허한 모습으로 인사하긴 했지만 그래도 한켠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거참 재밌겠군.’
마침 때는 새벽, 출근 시간이었다. 보통 때처럼 근력 훈련을 막 끝마친 카이젤은 혼자 있을 때의 평소 습관대로 샤워를 마친 직후 상의를 벗은 채 목에 수건만 걸치고서 배회하던 상태였다.
“오랜만이군, 동생.”
윤혁은 계단 위에 서 있는 형을 올려다보았다. 제복이나 양복을 입은 형은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듯 위압적이었다. 그런데 지금처럼 상의를 벗은 편안한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모습은 왠지 낯설게 느껴졌다.
“이런, 집에서는 편하게 다니는 게 습관이 되어서……, 손님 왔는데 실례했군.”
“아, 저는 괜찮아요.”
편안하다기보다는 다른 의미로 인상적이었다.
형은 온몸이 갑옷처럼 단단하게 압축된 근사한 근육으로 꽉 짜여있었다. 마디마디 근육 경계선이 또렷하고 깊게 쪼개졌는데 흡사 예리한 칼로 깎아놓은 것만 같았다. 군살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구릿빛 피부는 수정처럼 매끈하고 맑고 깨끗했다. 상체 근육은 두툼하면서도 온전한 기하학적 조화와 비율을 이루고 있었다. 무신처럼 한없이 강하면서 동시에 조각상처럼 한없이 아름다웠다.
‘얼굴도 굉장하신데, 몸은 더욱더 굉장하네.’
형의 건장한 위용에 동생은 다소 기가 죽었다.
이내 형이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윤혁은 순간 호랑이 앞발에 움켜쥐어진 고양이가 된 기분을 느꼈다. 그래도 다행히 이번에는 두려움이 덜했다. 3대째 위버멘쉬에 대해 어르신께 이런저런 말도 듣고 각종 자료까지 조사했기에 형을 보면 무서움을 느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오늘은 친근감이 전해졌다. 강한 결의와 다짐 때문인지 아니면 나름 혈육이라고 정을 품어서 그런지는 알 길이 없었다.
카이젤은 잠시 자신의 동생을 지긋이 내려다보더니 귀여운 애완동물을 대하듯 손으로 살살 머리를 헝클였다. 샤워를 막 마쳐서 그런지 은은하고 자극적이면서 고혹한 향기가 코를 찔렀다. 포식자의 느낌을 돋보이게 해주는 향기였다.
“오늘 저녁에는 조금 여유가 나니까 같이 한잔하지.”
그는 연약한 상대를 자신의 친목 울타리 안쪽으로 초대하였다.
“와인은 안 마시려나.”
“아직 마셔본 적은 없어요.”
“괜찮다. 나도 알코올은 안 좋아하거든. 적당히 분위기만 낸다고 생각해.”
딱히 거절할 명분은 없었기에 승낙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
윤혁은 본래 음주를 하지 않았다.
종교적 강박 때문은 아니었다. 단지 한 번 입에 대기 시작하면 절제하기 어려울 것을 알기에 미리부터 멀리하는 편을 선택했을 뿐이었다. 또 쾌락에 의존하는 방종한 생활은 그가 그리는 바람직한 삶과 거리가 멀기도 했다.
그렇다고 고등학교 동창들이나 대학교 동기들, 혹은 다른 가까운 친구들이 술자리를 가질 때에 분위기를 깨트리지는 않았다. 적당히 친구들과 더불어 즐거운 대화 상대가 되어주되 술만 멀리하곤 했다.
카이젤은 조금 다른 이유로 음주를 꺼렸다.
알코올은 인간의 사고력을 저해하기 마련이다. 보통 사람 같으면 잠깐 하룻밤 정도 취하여 불과 열 시간 정도만 사고력의 10~20%를 잃으면 그만이다. 허나 카이젤의 사고력 저하는 단 1분, 아니 단 1초 동안만, 단 0.1%만큼만 발생해도 인류 차원의 손실로 직결된다. 그가 1초를 취하면 그동안 만들 수 있었던 아이디어 하나가 날아가는 셈이고 그만큼 문명 진보는 유의미한 타격을 입는다.
현 인류의 위버멘쉬에 대한 의존도가 얼마나 높은지에 대한 방증이었다.
형제는 저녁 식사를 함께 나눈 후 식탁에서 곧바로 무알코올 음료를 꺼냈다. 향취와 풍미는 영락없이 고급 와인이었지만, 정신력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 음료였다. 야경이 보이는 실내 정원이 배경인지라 그야말로 분위기가 진했다. 윤혁은 그게 약간 부담스러웠다.
‘연인끼리 와도 민망할 텐데 하필 형제끼리라니 원.’
반면, 카이젤은 즐겁기만 한 기색이었다.
“나중에는 아버지까지 불러서 잔을 나눠도 재밌겠군.”
카이젤은 여러 종류의 병들을 찬찬히 살피면서 쓰다듬었다. 하나하나 고풍스러운 디자인이 표면에 수놓아진 병들이었다. 마치 신들의 음료 넥타르를 흉내 낸 것 같았다. 본인이 스스로를 신들처럼 여기기라도 하는 걸까?
“요새는 바빴다. 네게 관심을 쓸 틈도 없이 말이지.”
“그러셨군요.”
“신경 못 써줬다고 원망하진 말아라.”
원망은 무슨. 오히려 감사할 노릇이었다.
‘그나저나, 요새가 아니라 항상 바쁘셨던 것 아니었나?’
분야마다 최고의 전문가가 각기 다르다면 각 전문가가 해당 분야에만 집중을 쏟아부어도 된다. 하지만 모든 분야에서의 압도적 1인자가 동일 인물이라면 그 사람에게는 모든 일에 대한 책임과 부담이 씌워질 수밖에 없다. 대단히 피곤한 일이리라. 그 1인자는 이 일도 저 일도 함부로 손을 놓을 수 없을 테니까. 문득 윤혁은 형이 너무나 피곤하게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도 좋지만, 너무 무리하진 마세요. 건강도 챙기셔야죠.”
말을 꺼내고 나서야 본인도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가 터져 나왔다. 초인의 육체를 보유한 사람에게 건강 문제로 잔소리라니. 게다가 타고 난 축복 받은 체질과 혹독한 수련으로 다듬어진 최고의 몸을 지닌 형이거늘. 영락없이 굼벵이 앞에서 주름잡는 격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카이젤도 피식 웃었다.
“하하, 그래도 형제라고 신경 써주는 건가?”
“뭐, 말이 그렇다는 거죠.”
머쓱해진 윤혁이 기어들어가는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술이란 걸 마시면 진심을 터놓는다고 말하던데 정말 그러던가?”
카이젤이 느닷없이 질문했다.
“아무래도 거짓말을 하지 못할 정도로 사고력이 약해지긴 하겠죠?”
“직접 마셔보진 않은 건가?”
“네, 하지만 친구들 보면 대체로 맞는 말인 것 같기는 해요.”
“흠, 나도 마셔보지는 않았지만, 궁금하군.”
다른 초인들도 카이젤 같은 이유로 술을 안 마시는 걸까? 아니면.
“초인들은 아예 술에 안 취하나요? 그러니까 ‘초인의 육체’ 때문에요.”
“아무래도 신체의 독성 저항도 있고 워낙 사고력도 높으니 쉽게 약해지지는 않지. 내 주변의 부하들은 아무리 술을 부어도 거짓말도 잔꾀도 태연히 잘 부리더군. 나는 혹시나 해서 아예 안 마시니까 잘 모르겠지만.”
참고로 그는 많은 인간을 상대하다 보니 표정과 분위기만 보고도 진심과 거짓말을 간파하는 감각을 터득해버린 상태였다. 그 감각은 그의 선천적인 재능이자 동시에 후천적으로 연마된 비술이었다. 여기다 ‘과학 기술력’과 ‘특수한 재능들’과 ‘하늘의 선물’과 ‘학습 능력’까지 더해지니 남의 심리를 파헤치는 것은 손바닥을 읽는 것보다 쉬운 일이 되어버렸다. 굳이 ‘정신 계열 기술력’ 없이도.
윤혁은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고자 가벼운 제안을 던졌다.
“혹시 진실 게임이라는 걸 해보신 적이 있나요?”
“진실 게임이라고?”
그것은 유행이 한참 지난 서민들의 게임이었다.
모든 것을 알 것 같았던 형도 처음 듣는다는 기색을 보였다.
“상대의 질문에 대해서 정직하게 털어놓거나 벌칙을 받는 게임이에요.”
“우습군. 진실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판단하겠다고.”
그는 크게 웃으면서 잔을 홀짝였다.
“하긴 비슷한 주제로 반복해서 물어보면 거짓이 들통나긴 하겠군.”
일반인들이란 이래서 불편하겠다. 서로의 속임수를 간파하려면 그런 번거롭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니까. 인간의 심리를 동화처럼 읽어낼 수 있고, 마음마저 데이터로 바꾸어 분석할 수 있으며, 특수한 고유 재능이나 학습된 노하우나 독심술을 배제하고도 오로지 감만으로 생각을 분별해온 그는 보통의 범재들이 얼마나 불편할지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카이젤은 조용히 품에서 물건을 하나 꺼냈다.
“그럼 우리도 한판 해야 하지 않겠나?”
그것은 작은 약병이었다.
“술을 마실 수는 없으니 이걸로 대신하지.”
그는 윤혁 앞에서 약병을 짤랑짤랑 흔들어 보여주었다.
(다음 회차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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