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77회 초인들의 세계 Ch 32. 신수(神獸)와 정신지배 (1)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2.10.13 | 회차평점 0 |
Chapter 32. 신수(神獸)와 정신지배
그는 자신이 언제 어디에서 태어났는지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최초로 닿는 기억은 무수한 퍼즐 같은 세계들이 얽히고설켜 생성된 거대한 대(大) 미궁 속이었다. 원래 자신이 그곳에서 태어난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그곳에 옮겨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만일 후자의 경우라면 누가 무슨 목적으로 미궁 속에 사람들을 넣었을까? 이 또한 알지 못했다.
훗날 진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다만, 미궁 속에 있던 당시의 그는 그런 문제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눈앞에 주어진 확실한 과제는 자신이 미궁에 갇힌 다른 아이들을 제치고 위로 올라가야만 한다는 점뿐이었다. 그곳은 새로운 기회의 시작이었다. 미로는 평범한 아이가 한계를 넘어서 더욱 뛰어난 존재가 되도록 독려하였다. 아이들은 수많은 경쟁과 대결, 수수께끼와 미션에서 승리를 쟁취해야 했다.
실패자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지는 당시에는 아무도 몰랐다. 그렇다고 중도 탈락자들이 죽었던 건 아닌 것 같다. 훗날 알게 된 진실에 의하면 그들은 시간 압축된 억겁의 쳇바퀴 속에 갇혀 있거나 기억이 지워진 채로 다른 세계로 옮겨 심어졌다. 그렇게 그들에게는 거듭되는 기회의 쳇바퀴가 주어졌다.
여하튼 당시의 그는 여유롭게 생각했다.
‘어려운 일도 아니네. 그저 이기고 올라가면 되는 거야.’
그 미궁 세계는 다중 차원에까지 얽힌 보기 드문 인공 구조물이었다. 복합 공간 통제 기술, 3차원 공간 후면부 너머의 10차원 물리계에 세워진 구조물, 뫼비우스의 띠처럼 비비 꼬인 공간 좌표. 온갖 기이함이 압축된 불가사의의 연속이었다. 강해질 자들을 양육해내는 요람다운 곳이었다.
아이는 그곳에서 무수한 수수께끼와 시험들을 거쳤다. 미로 속의 다른 인간들과 공정한 경기를 치르기도 했다. 경기 내용은 주어질 때마다 변화무쌍하게 바뀌었다. 때론 복잡한 퀴즈를 풀어야 했고 때론 치졸한 정치 싸움을 벌였다. 마치 마법 체스 게임이 펼쳐지기라도 한 양 온갖 신비로운 경기와 게임들이 아이들의 영민함과 두뇌를 시험하였다. 그 경험과 훈련은 아이들로 하여금 극한의 상황 앞에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각성하도록 자극해주었다.
아이들은 종종 꿈속의 세계 혹은 가상 세계에 들어가야만 했던 적도 있었다. 그곳에 끌려들어 간 자들은 주어지는 지정 미션을 해결하거나 방대한 지식과 정보들을 학습해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야만 했다. 가상현실 속의 시간은 물리적 세계보다 빠르게 흘렀기에 매번 수년 이상의 긴 시간을 체험하고도 현실 속에 돌아오면 몇 초의 시간 밖에 지나지 않곤 했다. 덕분에 아이들은 제한된 시간 안에 수천, 수만 년 분량의 훈련을 오롯이 축적해냈다.
담대함을 시험받은 적도 있었다. 주어진 무장들을 가지고 미궁에서 생성된 기계나 괴물 생명체를 상대로 맞서 싸웠다. 생명은 보호되었지만 반복되는 싸움 때문에 많은 후보자가 정신적으로 지쳐 나가떨어졌다.
이 일련의 과정에서 아이들은 수없이 많은 것을 공부해야 했다. 그들은 배우고 응용하면서 복잡한 과제들을 무수히 해결했고 그 과정에서 방대한 지혜, 슬기, 현명함, 창조성을 축적했다.
마치 하나의 난자를 향해 다가가는 수억의 정자들처럼 치열한 경쟁을 뚫은 소수의 아이들은 마침내 바깥 세계로 나올 수 있었다. 승리자들은 수백 단계의 층들에 펼쳐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미로와 세계들을 극복하고 압도적인 성적을 쟁취했다. 그렇게 미궁 바깥의 세계를 목도할 기회를 얻었다.
그 미궁의 정체는 푸른 항성, ‘리겔’ 쌍성계에 만들어진 인공 구조물이었다.
승리자의 합격 월계관을 쓴 아이에게 별이 직접 말을 걸어왔다.
{축하한다, 얘야. 너는 이제 후보자가 되었구나.}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항성 리겔 A를 관리하는 항성 급 요새이자 인공지능이다. 리겔이라고 부르렴. 이 별의 에너지를 이용해 네가 유년기를 보내온 ‘라비린토스 3048번’에 에너지원을 공급해왔다. 너희들 모두를 지켜봐 왔지. 바깥에서는 찰나에 불과한 시간이 너희들이 사는 그 안에서는 나무의 수명보다도 길게 흐르거든.}
시간 감옥. 그 미로는 그런 곳이었다. 바깥보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인공적인 구조물, 가상현실과 달리 진짜로 물리적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공간. 아마 그 안에서 엄청나게 많은 세대와 그 곱절 배의 숫자의 사람이 거쳐 갔으리라. 도대체 무얼 위해서 그렇게 많은 세대를 빠르게 ‘순환’시켜야 했을까?
“무엇이 되기 위한 후보자입니까?”
{초인. 인간을 뛰어넘어 세계를 이끄는 자.}
리겔은 아이에게 정보를 허락해주었다.
{특히나 네게는 지배자의 자질이 있단다.}
“어떻게 하면 초인이 될 수 있습니까?”
{네가 거쳐 온 것 이상으로 긴 시간의 수련과 경쟁, 그리고 시험을 통해서.}
“그거면 보장 가능합니까?”
{아니. 어디까지나 요행에 가까운 확률 게임이지.}
“제 역량과 자질에 달렸다는 뜻이군요.”
{그렇지. 지금까지의 여정은 그저 예선 경기였다고 생각하렴.}
소년은 리겔의 혹독한 제안을 의외로 흔쾌히 받아들였다.
사실 리겔은 심부름꾼 인공지능일 뿐 배후에 있는 존재야말로 이 모든 계획들의 구성자라는 점 정도는 소년도 쉽게 추론해냈다. 어차피 어느 쪽이건 그다지 상관없었다. 소년은 지금까지 그저 올라가고 이기는 법과 능력을 획득하는 방법만 배워왔다. 이제 그 습관대로 쭉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그 후, 소년은 기나긴 코스를 따라 은하계 곳곳으로 옮겨져 시험을 보았다.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어려운 과제들이 거듭 주어졌다. 그러나 그는 매번 위기를 뛰어넘어 자신의 한계를 조금씩 돌파했고 서서히 인간의 뇌에 씌워진 물리적 한계선을 허물어뜨려갔다. 그 과정에서 시간 감옥들과 가상현실들을 견뎠다. 험난한 순례길을 기꺼이 걸었다. 지쳐 쓰러지기 직전 여행 막바지에 이른 그는 넘을 듯 말 듯 하던 한계의 벽을 기어코 뛰어넘고 신인류로 각성했다. 초인이라는 이름의 신인류로.
초인이 된 이후에 그는 자동으로 최고시민권을 획득했다. 생애 대부분을 보내온 미로, 여러 별들에 걸쳐진 광활한 세계, 그 모든 문명의 시작점인 은하계 변방 행성 지구, 그러한 기밀 정보들을 허락받게 되었다. 과연 지구는 모든 것들의 시작점. 지구의 문명이 바로 지금 은하계에 펼쳐진 각종 유인, 무인 식민지를 만들어낸 근원이었다. 초인 소년은 그곳을 앙망했다.
‘은하계 모든 인간을 다스리는 중심지.’
성스러운 고향인 동시에 수도 행성인 그곳.
그곳에 소환된 소년은 초인으로서의 자질을 철저히 평가받았다. 당시는 이미 초인의 지적 능력을 평가하는 척도가 완벽히 확립된 때였다. 통칭 최상위라 불리는 트리플 스페셜 클래스 초인으로 자질을 인정받은 소년 칼리드는 ‘지구의 왕’께 총애를 받아 그의 양아들이 되었다. 그 후 그는 자신이 태어난 고향도 속한 은하 방방곡곡의 ‘하늘도시’들을 제어하는 ‘채찍과 당근의 임무’를 부여받았다.
*****
- 현시점에서 4일 전 -
사흘 동안의 국제회의가 가까스로 종결되었다. 일부 결과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도 있긴 했지만, 지극히 합리적이고 올바른 결론이었음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개최된 국제회의는 항상 이러한 패턴이었다.
최종 선언 발표를 앞둔 마지막 인터미션 시간이 되었다.
회의 참석자들은 제각기 그룹별로 모여서 친목 행위를 이어나갔다.
최하위권에 속하는 자들, 초인이 아닌 단순한 일반인 국가 원수들은 몹시 침울하고 무력감에 짓눌린 모습이었다. 그들도 자신들이 실질적으로 행사할 영향력이 전무함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번 회의를 통해 철저히 체험하면서 더욱 크게 절망했다. 그들은 대체 불가 인재인 초인과 달리 언제든 버려지거나 교체될 수 있는 자들인 만큼 이 자리에서 주권을 지니지 못했다.
하위권 혹은 중위권 초인들은 그들만큼은 아니었지만 강력한 수직 질서 아래 눌려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겐 딱히 불평불만이 없었다. 일반인들이야 초인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그들은 자신들도 직접 각성을 해봤기에 초인 한 클래스의 차이가 얼마나 거대한 벽인지 잘 알았다. 임의로 정해놓은 신분 차이가 아닌, 실제적이고 존재론적인 능력 격차. 그들은 그 현실을 존중했다.
“이번 회의는 유독 길었군.”
“중요한 화제들이 나왔으니까.”
중하위권들은 회의 내용을 회상하며 앞으로의 대응책을 고민했다.
“언제나 그렇듯 적응하기 힘든 고 차원적 의사 결정법이었어.”
여기까지 오기까지 모든 단계의 세부 회의는 상당히 복잡다단한 원리를 통해서 진행되었다. 의사 결정 및 조율 과정에서 무수한 양자컴퓨터와 인공지능들까지 같이 동원되었다. 합리성과 이성이 극대화된 회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원리가 무엇이 되었건 민주주의 원리와는 전혀 무관한 새로운 개념의 회의였다. 물론 비합리적 일방 독재와도 전혀 개념이 달랐다.
반면, 중상위인 A 클래스와 상위인 S, SS 클래스 초인들은 제법 여유만만한 분위기였다. 그들에게는 이 같은 복잡한 회의 과정도 한 판의 게임처럼 단순했다. 그러다 보니 콩고물을 향한 눈길을 돌릴 여유도 충분했다. 권력욕과 명예욕을 감추지 않고 내비치는 유력 인사들도 꽤 많았다.
그리고 또 한 무리가 있었다.
수효가 불과 두 자릿수에 불과한 최상위 초인들.
그들이야말로 지금의 판을 능수능란하게 다스리는 주연들이었다.
네 명의 엠페러, 곧 샤오 윤윤, 지크문트, 쿠에시, 마리아가 차원 벽 왜곡을 통해 만들어낸 본인들의 허상 공간 안으로 들어갔다. 국제회의에서 도출된 각종 결의안을 적절히 시뮬레이션해보고 응용해보기 위해 따로 자기들만의 토론 자리를 마련한 것이었다. 최상위 초인들 사이에서는 이 같은 사적 모임이 국제회의 도중에도 잦았다. 그것이 그들의 특권 중 하나였다.
“나머지 셋은 어디에 갔으려나?”
마리아 살바도르가 먼저 목소리를 냈다.
“성운과 늑대는 일반인 녀석들을 달래주러 갔다.”
쿠에시가 의문을 해결해주었다.
“아니, 성운이 그런 녀석들은 왜?”
“원래 약자들을 배려하는 친구잖아.”
“그러면 인디언 보이는 또 왜? 그 친구는 일반인들 별로 안 좋아하잖아?”
“성운 혼자서 해도 되겠지. 그래도 강경파가 옆에 붙어야 질서가 잡히니까.”
그 말대로 현재 성운은 평범한 일반인들을 상대로 말동무를 해주고 있었다. 최상위 초인 중 얼굴도 잘 알려지고 사교성도 좋은 건 성운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어떻게든 떡고물을 받아먹겠다고, 혹은 불평을 하소연하겠다고 피라미들이 몰려드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불공평한 처사가 많은 것 같다’, ‘경제 개편 안이 너무 급진적이다’, ‘이주 플랜을 시행하면 앞으로 지구 주민들은 어떻게 되는 것이냐’ 등 하소연들이 쏟아졌다.
‘아, 진심 정말로 귀찮다.’
여기에 더해서 ‘자신들의 입장을 좀 잘 봐달라’라거나 ‘연합 대표께 잘 좀 말씀 부탁한다’든지 여러모로 식상한 시나리오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젊고 잘생긴 갈색 머리의 이십 대 청년은 아버지뻘 인간들이 비굴하게 빌빌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겉으로는 신뢰감 넘치는 예의 바른 미소로 응수했지만, 속으로는 식상함과 따분함에 혀를 내둘렀다.
‘왜 맨날 이런 역할을 내 차지일까?’
저 불쌍하고 어리석으신 리더들께서는 아직도 21세기에 사는 모양이다. 우중 정치(민주주의)가 이미 망해버린 지가 백만 년인데. 위버멘쉬의 시대, 혼돈의 시대와 초인들의 춘추전국 시대, 그리고 신(新)인류연합의 시대까지 왔으면 일반 대중은 몰라도 지도자들은 재깍재깍 깨달아야 하는 것 아닌가?
‘저들은 자신들이 아직 남아있는 이유도, 저들의 이용 가치도 잘 모르는군.’
사실 초인들과 인류연합은 카이젤을 중심으로 이미 세운 강력한 전제 정권을 언제든 대놓고 드러내어 커밍아웃을 할 수도 있다. 일반 대중들이 불만을 느끼든 말든 사실 보스는 별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식민지의 인구가 지구의 인구를 아득히 초월하니까. 대중의 인기니 뭐니, 그에겐 있으나 마나 한 것이었다. 그래도 모양새로나마 평등한 세계에서 살고 있단 착각을 좀 더 오래 누리도록, 대중의 늦잠 투정을 허락해주는 자비를 베풀었건만.
‘별 녀석들이 다 기어오르는군. 자비의 처사도 모르고.’
개구리를 갑자기 끓는 물에 넣으면 고통스럽게 죽는다. 하지만 찬물에 넣어 천천히 탕 온도를 높이면 자비롭게 죽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죽는다는 운명은 불변 확정이지만 어쨌건 자비는 자비인 셈이다.
초인들이 바라보는 일반인 세계 역시 비슷했다.
그들은 인류를 귀중하게 아끼긴 했지만, 인류 진보를 위해서는 철저히 자신들이 머리가 되어 나머지를 이끌어가야만 한다고 굳게 믿었다. 대중의 우매한 권력은 죽여야 할 개구리였다. 이미 기계 시스템을 위시해 전제 정치를 손쉽게 시행할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과거 잔재를 모양으로나마 유지는 시켜주었다. 천천히 권력을 빼앗는 길을 택해야 사람들이 전제 정치에 서서히 익숙해지니까.
즉 초인이 아닌 일반인 권력자들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정치적 과도기 때에 적절히 대중의 물매를 맞을 희생양으로 세운 자들이었다.
‘자기 객관화가 잘 안 되면 이래서 곤란하다니까.’
마루타들이 자꾸 기어오르는 꼴을 보고 성운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옆에 떡 버틴 인디언 청년이 당장 하위 인간들을 집어삼킬 기세로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성운의 제지로 가까스로 참는 중이었다.
‘참아. 내가 알아서 잘 설득할게. 누군가는 유치원 선생을 맡아야지.’
‘언제든 필요하면 말해. 이번 기회에 질서 잡는 것도 좋겠지.’
‘됐어.’
엠페러들이 지닌 기업체나 대륙 연합 조직은 어디까지나 표면상의 지위, 그들이 지닌 진짜 권력은 인류연합에서 부여된 직위였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메이저 섹터장으로서의 정치적 지위, 그리고 특별히 주인께 허가받은 ‘특수 사병(私兵) 체제’였다. 그렇기에 엠페러들은 다른 국가 원수와는 격이 다른 존재였다. 원래 이렇게 말을 섞는 것조차도 꺼리는 일이었다. 성운 정도나 되니 받아주는 것이었다.
(다음 회차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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