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78회 초인들의 세계 Ch 32. 신수(神獸)와 정신지배 (2)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2.10.14 | 회차평점 0 |
(이전 회차에서 계속)
성운이 고생하는 동안 다른 네 명은 허상 공간 안에서 제각기 앞날에 대한 나름의 토의를 나누었다. 국제회의 결의안들은 사실 어느 정도 그들도 예상한 시나리오 안에서 도출되었다. 엠페러들이 크게 손해 본 것은 없지만 그렇다고 크게 득을 본 것도 없었다. 연합 대표 이외에는 아무도 진정한 승자가 없는 싸움. 완벽하게 그의 각본대로 흘러간 싸움이었다.
촤아아아악.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허상 공간 시스템을 송두리째 찢으며 난입했다. 네 명 모두 순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차원 간섭을 이렇게까지 효율적으로 연산할 수 있는 실력자는 최상위 초인 중에서도 그리 많지 않다. 엠페러 넷이 제작한 공간을 훼파할 실력자라면 더욱더 드물다.
“사적인 자리를 지양해달라고 부탁했거늘, 유감이군요.”
가면을 쓴 흑발의 남자가 뚜벅뚜벅 걸어들어왔다.
“수호자들이시여.”
“에녹!”
세계의 2인자, 부대표, 리더의 대행, 최강의 SSS 클래스.
부르는 명칭은 다양했지만 사실 그보다 좀 더 직설적인 표현이 있었다.
‘카이젤 라흐블뤼크의 번견.’
“뭐 그런 움직임도 예측 반경 안에 있긴 하지만요.”
무겁고 절도 있는 목소리로 상대를 심리적으로 위압하면서 조종하는 방식, 주인과 조금 비슷하지만, 훨씬 융통성 없고 고지식했다. 물어뜯는 충견이라는 말은 괜히 나온 말이 아니었다. 팽팽한 전운이 감돌았다. 최상위 초인들이 대치하자 양쪽에서 맹렬한 불꽃이 튀는 듯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샤오 여사님?”
“왜죠?”
“오늘은 일부러 나이 들어 보이게 화장하고 나오셨군요?”
별안간 에녹이 본인답지 않게 사적인 질문을 샤오에게 던졌다.
원리원칙의 화신답게 공적인 일에 대해서만 말할 줄 알았건만.
“흥, 별걸 다 신경 쓰시는군. 부대표님.”
“고작 한 세대 위이시고 나이 차이도 그리 크지 않잖습니까?”
샤오의 외관상 나이 든 외모는 어디까지나 화장술로 만들어낸 가짜였다. 시각 보조 시스템을 통해 진짜 외모를 꿰뚫어 보면 그녀 역시 동료 엠페러들과 똑같이 젊은 여인의 외모였다. 비록 2세대 출신이지만 초인의 육체 덕에 그녀는 이십 세의 외모를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외모뿐 아니라 육체 나이 자체도.
“별 뜻 없어. 뒷방 늙은이가 주책없이 젊은 사람 행세해서야 되겠나?”
“흠.”
“그냥 제 나이로 보이고 싶어서 그런 것뿐이야.”
“……그렇군요.”
맥이 빠질 만큼 시시한 대답에 에녹은 아무렇지 않게 수긍했다. 보통의 여성이라면 어떻게든 더 젊게 보이려고 노력하는 게 일반적이지 않나? 잠깐 궁금해했지만, 이내 관심을 껐다. 이렇게 가끔씩 어울리지 않는 엉뚱한 면모를 보이는 에녹이었지만 기본적으로 그에게는 공적인 인류 전체의 일 이외에는 궁극적 관심이 없었다. 그는 본론을 꺼냈다.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이룩한 공로를 폄하하려는 생각은 없습니다.”
시작은 칭찬의 말로 운을 뗐다.
“하지만 본분을 기억해주셨으면 좋겠군요.”
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경고의 메시지를 펼쳤다.
“위버멘쉬와 계약한 대로 ‘시민의 수호자’로서의 의무를, 최상위 초인으로서 초인 사회에 대한 타의 모범을, 그리고 인류의 일원이자 장차 임할 우주 시대 인류의 견인자로서의 책무를 늘 상기하고 그에 합당하게 행동하시기를.”
“이런 오해를 샀군, 부대표님.”
지그문트가 싸늘하게 대답하였다.
“설마 우리가 충정을 의심받는 지경까지 왔다고는 생각지 않았는데.”
두 초인 사이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인류연합을 모시는 마음으로는 우리도 당신 못지않아.”
“지그문트, 그러고 보니 당신은 위버멘쉬보다도 활동 시작 시기가 빨랐죠.”
여러 의미를 함축한 말이었다. 함부로 월권하려 들지 말아라. 정해진 선을 함부로 넘으면 기성세대들처럼 될 수도 있다. 이런 종류의 의미였다. 지그문트도 그 의미를 깨닫고 움츠러들었다. 감히 카이젤의 선을 넘거나 그에게 맹세한 약속을 어길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왠지 에녹의 입으로 경고를 듣자니 기분이 안 좋았다. 하지만 상대가 최고 부관인지라 할 말은 없었다.
“나는 철저한 원칙 준수를 좋아합니다.”
에녹은 눈에 힘을 풀고 뒤로 돌아섰다.
“지금 세계의 룰은 오래전 1세대 당시부터 이미 확정되었습니다. 압도적으로 능력이 뛰어난 자가 모든 것을 컨트롤 하라. 가치를 인정받고 싶으면 실력을 통해서만 입증해라. 이끌어갈 자격이 없으면 시스템에 순응하라. 당신들이나 저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모든 초인이 이미 익히 잘 알고 있는 ‘위버멘쉬가 확립한 정치 원리’.
에녹은 다시 한번 유치원생들에게 설명하듯 차근차근 상기시켜 주었다.
“지금의 인류가 초인들에게 순순히 절대 권력을 내어준 것은 우리가 그만한 자격을 실력을 통해서 입증했기 때문입니다. 자원, 영토, 환경 문제 등 모든 것을 해결해온 것은 항상 우리들이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공로의 99.99999%는 3대째 수장의 몫이겠지만.
“바야흐로 초인이 아닌 지구 인류는 도태되었습니다. 충분히 양산이나 대체가 가능한 시대에 이르렀습니다. 섬김받아야 할 인류가 존엄성과 존재 의의를 위협받는 도전의 시대가 되었죠. 경각심을 느껴야 합니다. 우리라고 해서 그들과 다를 것 같습니까? 기계나 인공 생명체에게 밀려나지 않을 자신 있습니까?”
에녹은 어느 정도 선까지는 최상위 초인들이 자기 권익을 위해 목소리를 내주는 것을 허용했다. 실제로 어느 정도는 그런 경쟁이 생산성을 만들어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국 에녹은 자기 주인이 모든 주권을 확고히 쥐도록 지켜주는 쪽으로만 모든 일을 주관하고 허락했다. 그것에 반대되는 모든 건방진 움직임들은 원천봉쇄할 것이다. 어차피 카이젤에겐 그런 도움조차도 필요 없겠지만.
“아니지. 인외의 존재들은 고사하고 위버멘쉬께서 장차 새로운 세대를 훈련시키고 양육하실 때 우리가 그들에게 존재 의의를 빼앗기지 않을지 그것부터 걱정해야겠군요. 위버멘쉬는 절대로 인간이 무익한 존재로 남도록 허락할 분이 아니니까요. 당신들도 ‘그 계약의 효력’만 믿고 안주하기보다는 성심껏 시대를 따라잡으려 몸부림치는 편이 좋을 겁니다.”
잔잔하게 경고하는 에녹의 말에 로스트엠페러들이 합죽이가 되었다.
“때가 되면 3대째 위버멘쉬와 우리의 능력 격차도 점점 벌어질 것입니다.”
이는 양쪽 모두 알고 있는 불편한 진실이요, 불가피한 흐름이었다.
“그분을 대체할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질 것이고, 반대로 우리는 점점 대체 가능한 위치로 전락하겠죠. 그 흐름을 막을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가 미래에도 의미를 남기고 싶다면 지금부터 위치를 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가면에 가려진 그의 표정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푸른색의 눈동자만 고결함과 엄격함을 동시에 머금은 채 빛을 내고 있었다. 엠페러들은 생각했다. 철인왕들의 ‘특수한 눈’보다도 어쩐지 저 아무 특수성 없는 평범한 벽안에서 더 무거운 존재감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다고.
*****
회의가 종료되었다.
칼리드는 조금 심기가 불편했다. 엠페러들과 첨예한 대립을 하는 것은 그에게도 상당히 피곤한 일이었다. 하나 같이 언변에 능통한 자들이었으니까. 철학, 자연 과학 지식도 인류 최고 수준이고 온몸을 철저한 논리로 무장한 자들. 그런 인간들끼리 토론을 벌이면 소크라테스와 제자들의 대화가 유치원 수준으로 느껴질 만큼 고차원적 담화가 난무하기 마련이다. 하물며 이번에는 인류의 미래를 걸고 토론을 벌여야 했다. 그 피곤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같은 주인을 모시긴 하지만 유독 그들과는 자주 대립이 섰다. 사실 어느 시대나 당파가 갈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긴 했다. 하지만 철인왕들과 로스트 엠페러들의 대립에는 단순한 이익 다툼, 이데올로기와 정치 철학의 다툼 외에도 또 다른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는 출신 지역의 문제.
같은 행성 안에서의 민족적 차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문제였다. 지구에서 태어난 3세대 초인, 인위적으로 건설된 식민지의 주민 중에서 선출되어 각성한 3세대 초인, 두 부류는 서로를 향해 강한 이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는 과거의 역사 때문에 칼리드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매듭이었다. ‘전면개방’과 ‘표식 전체 해방’이 이뤄지기라도 하면 모를까, 아직은 요원했다.
두 번째 이유는 선천성과 후천성의 여부.
지구 출신의 3세대들은 대부분 선천적 초인으로 태어났다.
반면에 식민지에서는 좀처럼 초인으로 태어나는 이가 거의 없었다. 그 구체적인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어쨌건 카이젤은 지구 밖에서도 새로운 인재를 발굴해내기 위한 목적으로 후천적인 각성을 인위적으로 유도하는 프로젝트를 오래 지속해왔다. 자신이 지배하는 식민지 주민 중 뛰어난 자질을 가진 아이들을 어렸을 때부터 따로 모아 여러 어려운 시험들을 통과시키는 방법으로 말이다.
칼리드 역시 그와 동일한 방식으로 후천적으로 각성한 초인이었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하늘도시에서부터 옮겨져 리겔 성계의 라비린토스 미궁에서 길러졌다. 그 안에서 의식주와 생활을 해결했으며 공부하고, 훈련하고, 어려운 시험들을 통과했다. 그 후로도 그는 많은 난관을 거쳤고 시간 감옥들과 차원의 벽과 항성계들을 건너 끝내 각성을 쟁취해냈다.
칼리드와 같이 많은 시련을 극복하고 각성한 초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모든 것을 다 지녔던 지구의 선천적 초인들을 온실 속의 화초로 여겼다. 반대로 지구 출신은 식민지 출신들을 출생부터 불완전한 존재로 치부했다. 사실 두 부류의 재능과 경험의 유의미한 차이는 (초인 특유의 무궁한 성장 과정에서) 흐지부지되기 마련이었지만, 그래도 왠지 모를 편견은 있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서로 지구 출신 엠페러들과 우주 출신 철인왕들의 감정은 좋아질 턱이 없었다. 철인왕들이 자신들의 양아버지 역시 지구 출신임을 상기한다면, 그리고 엠페러들이 주군이 길러낸 희대의 걸작들이 바로 우주 식민지에서 나온 초인들임을 상기한다면 상호 간의 이해심의 다리가 놓였으련만.
그때였다.
“악수를 청해도 되겠습니까?”
칼리드는 자신에게 다가온 키 큰 젊은이를 응시했다. 브리타니아 연합 수장이자 서부 섹터장인 일라이저 1세였다. 전형적인 귀공자이자 도련님. 칼리드는 경계하며 일라이저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이런. 감정 상하신 건 아니신지 염려되는군요.”
일라이저는 의외로 공적인 협력 관계에만 초점을 맞추는 투였다.
“똑같이 인류를 위해 봉사하는 처지에 사사로움에 얽혀서야 되겠습니까?”
둘은 종종 공석에서 마주쳤지만, 개인적인 친분은 없었다. 칼리드는 조용히 그가 개인적으로 믿을 만한 사람일지 살펴보았다. 붉은 눈동자가 화염처럼 타올랐다. 두 만만치 않은 위인은 서로를 진중하게 탐색하였다.
“호오! 특수한 눈의 능력, 직접 보는 건 처음이군요.”
카이젤이 원리 불명의 메커니즘으로 발명해냈다는 소문의 그 ‘눈’.
“관심이 몹시 많은 모양이시군, 서부 섹터장.”
“물론입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신비로운지요.”
눈에 노골적으로 관심을 보이는 일라이저. 칼리드는 미간을 찌푸렸다.
“어차피 태어날 때부터 ‘종속’을 가지고 있는 우주 출신들만 이식 가능한 능력이다. 애당초 그 ‘종속’에서부터 파생되기도 했고. 너희들처럼 타고난 재능에만 안주하는 사람들에겐 어울리지 않아.”
“이런, 온실 속의 화초 취급이라니. 아쉽군요.”
백금발의 청년은 기분 상할 법한 말을 듣고도 의연함을 유지했다.
“이해는 갈 법합니다. 확실히 우리는 당신들처럼 치열하게 살아오지도 않았고 다른 이들과 경쟁할 일도 상대적으로 적었지요. 수십억의 경쟁자들을 누르고 피땀 흘려 한계를 거듭 넘어온 당신들의 경이로움을 저도 인정합니다.”
순수한 칭찬의 말의 연속.
‘무슨 꿍꿍이지?’
칼리드는 계속 상대의 말을 조용히 들어주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희도 마냥 편하게 지냈던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저희는 어린 나이부터 권력 다툼의 현장에 뛰어들어야 했거든요. 2세대를 포함한 기성세대에게서 질서를 회수해오기 위해 말이죠. 게다가 3세대끼리도 패권을 두고 경쟁해야 했죠. 심지어 당신들의 아버지께서도 그 주역에 서 계셨답니다.”
“너희는 그저 그분께서 태워준 버스에 탑승했겠지.”
“하하, 그 말도 틀리지는 않는군요.”
이에 일라이저는 자신의 옛이야기를 시작했다.
“지구 역사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들어보시렵니까?”
“뭐, 한 번 해보시던지.”
(다음 회차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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