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79회 초인들의 세계 Ch 32. 신수(神獸)와 정신지배 (3)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2.10.15 | 회차평점 0 |
(이전 회차에서 계속)
일라이저의 아버지는 몰락한 영국 왕실의 사생아, 자비스 왕자였다. 그는 권력도 명예도 없이 대부분의 생애를 떠돌이로 살았던 사람이었다. 왕가의 일원으로 인정받지도 못했던 애물단지. 그러던 자비스는 신국(New nation) 출신의 어느 한 붉은 머리 여인과 눈이 맞았다. 그리고 이내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남겼다. 그 아이가 바로 일라이저였다.
어린 시절 홀어머니께 양육 받은 일라이저는 일찍이 자신의 두뇌가 보통 인간과는 궤를 달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 사실을 매우 영악하게, 효율적으로, 동시에 생산적으로 활용했다. 아홉 살 무렵부터 그는 실력자로 이름을 날렸고 각종 위업을 만들어냈다.
그 무렵, 위대한 천재 몇이 일라이저에게 접촉해왔다.
그들은 당시 한창 서로 경쟁하던 실력자들로 쓸 만한 동료를 구하고 있었다. 일라이저로서는 참으로 어려운 시험이었다. 그들 모두 일라이저보다 몇 수 위의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마치 그리스의 세 여신이 파리스 왕자더러 자신을 최고의 미인으로 선택하라고 요구했던 것처럼, 브리튼 왕자 일라이저보고 각자 자기의 노선을 따를 것을 종용했다.
다만, 트로이의 왕자와 브리튼의 왕자 사이에는 ‘지혜와 안목’이라는 결정적 차이가 있었다. 일라이저는 누구를 따라야 할지를 쉽게 판단했다. 최고로 뛰어난 자가 누굴까? 최종 승자가 될 위인은 누구일까? 그는 모든 정황을 냉철하게, 그리고 육감적으로 분석하여 자신의 판단 기준으로 삼았다.
초인처럼 제 잘난 맛에 사는 족속이 의외로 힘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그 특유의 안목 덕분이었다. 그리고 일라이저는 그 안목에 있어서 동류보다 뛰어났다. 그를 비롯한 초인들은 최강자가 누군지 올바로 알아보고 미리 고개를 숙일 줄 알았다.
“그때 나머지 넷의 유혹을 뿌리치고 주군을 선택했습니다.”
분명 인간 영혼의 본연을 자극하던 지극히 달콤한 유혹들이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돌아보니 일생 최고의 지혜로운 판단이었다.
“눈이 멀진 않았군.”
“과연 그분은 경쟁자들을 누르고 왕관을 얻으셨죠.”
일라이저가 당시 상황을 기쁘게 회상하였다.
그 뒤로도 어린 왕자는 세계의 권력 다툼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타고난 외교의 대가이자 언변의 달인이었던 그는 천천히 영 연방 국가 내부에 자신의 수족을 심어 조금씩 옭아매는 사슬을 구축하였다. 자본, 교통, 자연환경, 에너지 자원 등 모든 영역에서.
과거 대영 제국에 속해 있던 나라들의 주권을 야금야금 빼앗아오는 것은 교활한 왕자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후 과학 발전을 비롯해 눈부신 업적들을 남기며 모두의 칭송을 받게 된 그는 권력을 넘어 정통성마저 차지했다. 왕실을 공식적으로 자기 것으로 복속시켰다.
“너무 옛날이야기로 서두가 길어졌군요.”
“그렇군. 요점만 말했으면 좋겠어. 회의와 관련해서는 따로 할 이야기가 없어 보이던데? 내게 개인적으로 접근한 걸 보면 사적인 거래를 원하는 건가.”
“눈치 한번 빠르군요.”
일라이저는 원래 의도했던 대로 칼리드에게 기술 거래를 제안했다.
“난 당신의 ‘현자의 눈’에 접목된 ‘양자 간섭형 다중 최면’, 그것의 원리를 빌리길 원합니다. 전부가 아닌 파편이면 충분합니다. 주군께는 이미 다 허가를 받았습니다. 제공은 당신의 의사에 달려있습니다.”
“최면 기술을?”
칼리드의 눈에는 여러 가지 특수 기술이 이식되어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양자적 얽힘을 이용한 통신 원리를 직접적인 뇌 신경 전기 조작에 접목시킨 최면 기술이었다. 완벽한 인간 조종까지는 어려워도 기억이나 의지를 일부 미묘히 간섭해 상대가 특정 행동을 하도록 설득하거나 다룰 수 있었다.
‘물론 최면 기술 자체는 이미 많이 연구되어 있지.’
하지만 칼리드의 눈이 특별한 이유는 원거리에서 한꺼번에 수많은 사람을 제어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카이젤을 제외한 엠페러들만의 기술력으로는 아직 그 정도 수준의 최면을 ‘양산화’하긴 무리였다. 자체적으로 연구하면 언젠가 해결은 되겠지만 시간이 꽤 소요될 것이 분명했다.
“어차피 초인들을 상대로는 통하지 않는 능력이다. 게다가 최면이라고 해봐야 내가 아닌 아버지에게 최종 제어권이 달렸지. 내 눈을 써도 그 최면 주권은 아버지께 귀속돼. 네게는 그리 유용성이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이런, 오해하셨군요.”
일라이저가 싱그러운 웃음을 머금고 손을 저었다.
“당연히 사람에게 사용하려는 목적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역시 ‘신수(神獸)’인가?”
“들켰군요. 정확합니다. 부인하지는 않겠어요.”
칼리드는 잠시 고민하더니 상대 쪽에 보상을 물었다.
“제가 제작한 ‘레전드’ 신수 시리즈 중에서 열 기를 무상으로 드리죠.”
“신수 샘플을? 지구 쪽 테크놀로지 중에서도 레어 아이템 아니었던가?”
“네. 그 정도면 꽤 제 쪽에서 출혈이 크다고 생각됩니다만. 직접 운용하셔도 좋고, 해부해서 내장된 기술을 뜯어 가셔도 됩니다. 아마 행성 방위용 거대 신수들을 양산하는 데 성공하신다면 당신의 일 처리도 수월해질 것입니다.”
칼리드는 일라이저의 말을 듣더니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건 그렇겠군.”
“긍정적인 대답으로 봐도 될까요?”
“한 번 고민해보지.”
*****
- 다시 현재 시점 -
카이젤과 윤혁은 바닷물로 입수했다. 수중임에도 모든 배경이 선명하게 보였다. 슈트에 장착된 특수 재질의 시각 시스템 덕분이었다. 산호초를 본뜬 조형물들이 보였다. 좀 더 내려가자 설화나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화려한 풍경의 해저 도시들이 보였다. 물에 잠긴 아틀란티스, 바다 용궁, 인어들의 왕국과 같은 풍경이 동시에 연상되었다.
‘수중 도시를 직접 가보지는 못했지만 저런 모습과 비슷하려나?’
바닷속에 도시를 건설하는 기술이 상용화된 지는 오래되었다. 대게는 특수 방벽으로 도시를 보호되는 방식이었다. 지금 보이는 것처럼 관상용으로 만들어둔 도시와는 원리 자체가 다르지만.
그때 형제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작은 섬을 연상시키는 초거대 거북 비슷한 생명체가 헤엄치고 있었다. 이윽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기이한 형태의 거대 물고기들이 무리를 지어 거북을 따라갔다. 윤혁은 찬찬히 주변을 살폈다. 먼 곳까지 내다보았다. 과연 수천 아니 수만 이상의 다양한 생명체들이 물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동물도감에서 단 한 번도 못 보았고 하나같이 크기가 고래 이상으로 거대했다. 가장 작은 것조차도.
파지지지직.
촉수 하나가 빠르게 윤혁 옆으로 가벼운 충격파를 일으키며 이동했다. 촉수들의 주인은 거대한 연체동물. 오징어라고 표현하기에는 크기가 섬처럼 컸다. 다리 개수도 훨씬 많았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 다리의 재질이었다. 유기체의 부드러운 살덩어리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금속 질의 기계 같지도 않았다. 사이보그처럼 부자연스러운 혼합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이어서 큰 생명체가 아닌 중간 크기와 작은 크기의 존재들도 나타났다.
‘뭐지? 아까 상어들과 동류인가?’
그의 속생각을 읽은 형이 대답했다.
“신수(神獸).”
“……네?”
“이곳에 풀어놓은 저 녀석들 말이다.”
윤혁은 호기심과 경외감이 섞인 기분으로 되물었다.
“신수란 게 뭐죠?”
“특수한 신물질로 된 나노 단위로 조립된 인공 세포, 그것들을 재조합해서 만들어낸 인위적인 생명체다. 아니, 유기체가 아니니 생명체라 말할 수는 없겠군. 조금 전 내가 생물도 기계도 아니라고 했던 이유지.”
그 상어 지느러미들도 신수였던 모양이다.
“이런 걸 만들어서……, 어떤 용도로 사용할 수 있죠?”
점점 기이한 것들과 마주하다 보니 기분이 거북해졌다.
“제법 유용하지. 특히 바다, 깊은 지하, 우주 같은 환경에서는 말이야. 보다시피 생물과는 달리 크기 제한도 없어서 마음대로 거대 개체를 제작할 수도 있지. 또한 생물체의 장점과 기계의 장점을 절묘하게 하나로 합쳤지. 현재는 군사적인 용도에 더해 자원 채취, 건설, 행성 침식과 같은 목적으로 쓰이고 있지.”
“제 눈앞의 저것들도요?”
“아니, 저건 그냥 관상용이다.”
참고로 연구나 실험 용도도 겸한단다.
“신수들도⋯⋯, 형이 처음으로 발명한 건가요?”
“아니, 아이디어는 부하 녀석이 처음 제안했지. 브리타니아 연방의 왕이야. 대중에게도 유명하니 잘 알 거다. 그 친구는 어렸을 때부터 동화 속의 용, 네스 호수의 괴물, 인어와 같은 신비한 환상의 동물들을 좋아했거든. 그러더니 나중엔 인공 세포 기술을 활용해 괴물들을 만드는 법을 고안했어.”
브리타니아 총리는 윤혁도 신문에서도 자주 본 적 있는 유명한 사람이었다. 거대한 대륙 연합의 수장이 정치와 경영을 하기도 바쁠 텐데 저런 기묘한 것까지 발명하다니. 출중한 천재임이 틀림없었다.
‘아마 최상위 초인이겠지?’
카이젤은 무덤덤하게 신수들을 구경하였다.
“현재 바닷속에는 녀석이 운용하는 신수들이 무수히 활보하고 다니지. 물론 우주 공간을 떠다니는 신수들도 많고 말이야. 내 허가하에 있긴 하지만. 그래서 녀석의 별명이 신수왕(神獸王)이야.”
“브리타니아 총리, 아니 왕의 별명이요?”
“그래. 그가 곳곳에 흩어진 연방들을 제어할 수 있는 이유도 신수라는 실질적인 무력 덕택이 크지. 물론 녀석의 큰 그릇에 비하면 지구 위 작은 나라들은 지극히 비좁은 울타리에 불과하겠지만.”
형의 입으로 직접 듣는 정치 이야기는 흥미진진했다.
“그나저나 저것들은 얼마나 강력한가요?”
“군용으로 제작된 건 현대 병기 중 상위권에 들어가기에 부족함이 없지.”
“현대 병기를 기준으로요?”
순간적으로 등골이 오싹해지며 소름이 돋았다.
“설마 우리를 공격하지는 않겠죠?”
“내 명령이 최우선 제어 체계니까 그렇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어차피 여기 있는 것들은 실전에서 쓰이지는 않으니까 약한 편이야.”
그래도 윤혁은 선뜻 안심되지 않았다. 상어가 옆에서 지나다니는 것만 해도 충분히 공포스러운데 상어와는 비교 불허의 괴물들이 철창도 없이 어슬렁거리는 꼴이니 말이다. 엔진 폭주에 기계 돌변까지 체험해본 마당인지라 이제는 예측 불허의 무언가가 나타나기만 하면 경계심부터 들었다.
“이런 부류들을 통틀어 이종족이라 부르지.”
이종족(異種族).
인공 생체나 유사 유기체를 포함한 광범위한 개념.
“기계와 기계들의 정신인 인공지능과는 조금 분류가 다른 체계야.”
여기에는 비단 생명체만 들어가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고유 정신을 소유했지. 그렇기에 조금 다른 통제 방식이 필요해.”
이종족들은 상대적으로 기계보다 자아나 독립성이 강한 편이었다.
“정신 간섭 기술이 발명된 건 이런 것들을 다스리기 위한 목적이 크지.”
“그렇군요.”
카이젤은 애써 태연한 척하는 동생이 속으로는 몹시 떨며 긴장하고 있음을 감지했다. 자신에게야 일상적인 일이지만 처음 보는 이에게는 두렵겠지. 또 정신 간섭이라는 말에 동요하는 게 눈에 선했다. 그 노인이 어떤 바람을 불어넣었는지는 몰라도 (원한다면 강제로 캐낼 수도 있겠지만 동생을 향한 애틋함과 노인에 대한 존경심 때문인지 내키지 않았다) 정신 간섭 기술에 대해 유독 긴장감을 드러냈었지.
“가능한 내 근처에서 멀리 떨어지지 마.”
가벼운 경고를 주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내가 바로 도와주지.”
윤혁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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