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81회 초인들의 세계 Ch 33. 심연과 창공 (1)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2.10.17 | 회차평점 0 |
Chapter 33. 심연과 창공
윤혁은 무거운 몸 하나를 엎쳐 매고 가까스로 수면 밖으로 올라왔다. 다행스럽게도 슈트에 장착된 인공지능이 상황을 감지하고 부력을 증폭시킨 덕에 가라앉지 않을 수는 있었다. 그는 해변 위로 크게 상처를 입은 형의 몸을 끌어내 즉각 생체 징후를 살폈다. 조금 전까지 낙심하며 실망했던 건 금세 잊은 채 다급한 마음에 형을 두드리며 외쳤다.
“형, 괜찮으세요? 정신이 드세요?”
다행히 카이젤은 잠시 콜록거리더니 숨을 몰아쉬었다. 심장 박동이 조금 빨랐지만, 정상 동율동(Normal Sinus Rhythm) 범위 이내였다. 슈트가 생체 징후를 감지하더니 주인의 상태를 파악하고 곧장 자율 치료 및 수술을 시작했다.
“통증은 좀 간만이군.”
“지금 그런 말이 나와요? 어서 뒤돌아봐요.”
그는 마지못해 부상당한 부위를 동생 쪽으로 돌렸다. 윤혁은 찬찬히 살펴보았다. 천만다행인지 치명적인 관통상은 없었지만 깊이 찢어진 열상이 여러 군데 있었다. 넓고 길었다. 깊이를 가늠해보니 거의 근육에 닿을 정도인 듯했다.
“의료용 메디컬로이드가 있으면 빨리 불러요.”
“참 이상하군.”
조바심 내는 동생과 달리 카이젤은 의연히 다른 고민에 잠겼다.
“텔레파시 네트워크에도 약간은 불확정성은 존재하긴 하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제어를 벗어나는 예는 불가능하거늘. 마치 무언가가 개입이라도 한 것처럼 말이야. 나보다 강력한 정신 감응력을 가진 개체는 없을 텐데.”
그는 의아해하며 혼자 중얼거렸다.
“빨리 치료하셔야 해요. 출혈이 심하잖아요.”
윤혁은 다급하게 외쳤다. 그러나 카이젤은 고개를 저었다.
“걱정할 것 없어.”
그제야 윤혁은 형의 상처가 빠른 속도로 자가 재생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상처에서 무언가 보이지 않는 실이 솟아나 자율적으로 봉합을 하는 것 같았다. 근섬유와 피하조직이 원상복구 되고 있었다. 흉터나 염증도 전혀 남지 않도록.
“이, 이건?”
“피코머신들이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웬만해선 큰 부상도 흉터 하나 남지 않고 치료할 수 있다. 물론 슈트에도 의료기능이 있고. 머리만 빼고 몸 전체가 없어져도 금세 복구해낼 수 있어.”
과장인지 농담인지는 몰라도 정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주 연한 흉터만 남았다. 아니, 나중에는 그 흉터마저 서서히 지워지면서 평소처럼 흠 하나 없는 매끈한 피부로 채워져 재생이 완료되었다. 처음 구경하는 초재생이었다.
“자기 몸을 소중히 여기시는 분께서 왜 그렇게 무모하셨어요.”
윤혁은 미안함 반, 불평 반을 섞어 타박했다.
“널 구하려다가 다친 것 말이냐.”
카이젤은 무덤덤하게 말하며 곰곰이 고민했다.
사실 그의 머리로도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왜 그렇게 행동했지? 평소의 그라면 절대로 선택하지 않을 행동 방식이었다. 자신의 위험까지 무릅쓰고 구해야만 할 객관적 가치가 강윤혁에는 없을 터. 그럴 일은 없겠지만, 자신이 죽거나 의식 불명이 되면 인류에게 얼마나 큰 타격이 될지 뻔히 아는 데도. 냉정히 판단하는 것이 원래는 당연했을 터인데 왜였을까?
“그래도 이제는 좀 살만하군.”
그는 스트레칭을 하며 찌뿌둥한 몸을 풀었다.
“아까는 출혈이 좀 심해서 힘들었는데.”
“수혈이라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 정도까지는 필요 없어.”
“자기 진단은 위험해요.”
윤혁의 잔소리에 카이젤이 허탈한 듯 웃었다. 그는 원래 인간 의사든 로봇 의사든 자신의 몸을 쉬이 안 맡긴다. 자기 자신이 곧 자기 몸의 주치의니까. 물론 보조해야 할 손은 필요하니 인공지능과 로봇들의 보조 정도는 받는다만, 지금껏 자기 치료는 자신이 책임져왔다. 의식 불명 상태여도 ‘기계 신’과의 일체화를 쓰면 얼마든 자가 치료가 가능했다.
“난 내 몸을 내가 직접 수술할 수도 있지.”
“하지만…….”
그래도 주변 사람에게 건강 걱정을 듣는 건 또 새로운 느낌이었다.
“걱정해줘서 고맙다. 지금 내 상태는 멀쩡해.”
“그래도 그렇죠, 괜찮으실까요?”
“내가 타인의 경험과 재능을 흡수할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지? 의술 또한 예외는 아니야. 아니 나 스스로도 열심히 의술을 연마해왔지. 내게 있어서 제1의 실험체는 나 자신이니까. 남을 희생시키는 일은 지양해야겠지.”
바보 같으니. 적어도 아플 때는 남에게 의지해도 되는데. 그가 얼마나 인간을 불신하는지 알 법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쓸데없는 책임감과 정의 의식이 얄밉고 얄궂었다. 그렇게 보편적인 가치관을 인간 멋대로 초월해보려고 발버둥 치는 사람이 왜 이럴 때는 짜증이 나리만큼 어른스러운 걸까. 그 역설적이고 모순적인 모습에 윤혁은 마음이 불편하고 아렸다.
“조금 어지럽군.”
아주 타격이 없는 건 아닌지 카이젤은 몸을 가누길 어려워했다.
“부축 좀 부탁해도 될까?”
“물론이죠. 제 어깨 위로 팔이라도 얹으세요.”
사실 로봇이나 무인 장치를 써도 되었다. 하지만 왠지 다른 사람에게 부축받는 기분은 어떠할지 호기심이 들었다. 연약함에 몸을 내주고 잠시 주저앉으려니 이상한 기분이긴 해도 나쁘진 않았다.
순진무구하고 착실한 동생은 비틀거리는 형을 부축한 채로 수영장 바깥으로 나섰다. 몸이 몹시 무거웠지만 못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한없이 차가우리라 생각했던 그 사람도 의외로 체온이 따뜻하게 전달되었다.
*****
윤혁은 기분이 이상했다. 조금 전에 형에게서 정신 간섭 및 정신지배 기술에 대해 사실상의 자백을 들었을 때는 실망감과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형이 최소한의 교만의 선을 넘지 않았기를 바랐건만, 그 기대감이 실망이라는 부메랑으로 날아왔나 보다. 인간의 존엄성과 피조물의 본분을 조금이나마 기억하고 있기를 작게나마 기대했는데 그 마음이 무참히 짓밟힌 게 속상했다.
그런데 그랬던 그가 위기에 처한 자신을 즉각 구해주었다. 일말의 계산이나 냉정함도 없이. 그것도 자기 귀한 몸에 상처가 생기는 것까지 감수하면서. 제아무리 초 재생 능력을 갖췄다고 해도 순간적으로 쉽게 내릴 결정은 아니었으리라. 고맙다고 인사라도 해야 하는 데 민망한 마음에 쉽게 말을 꺼내기 힘들었다. 형을 향한 기묘한 양가감정이 생겨 혼란스러웠다.
‘나와 똑같이 피와 마음을 가진 한 명의 사람.’
분명 형제의 심령은 정반대 방향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유대감의 가능성을 뿌리 뽑지는 못했던 것 같다. 둘은 저도 모르게 서로에 대한 유대감에 휘말리고 말았다. 갈등의 마음에 온기까지 부자연스럽게 혼합되고 말았다. 동생은 형에게, 형은 동생에게 무의식적으로 사람됨을 증명해버렸다. 큰 위기 가운데 그의 또 다른 면모를 확인해버린 윤혁은 형을 미워할 수가 없게 되었다.
“죄를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말자꾸나.”
선량하신 부모님은 윤혁을 늘 그렇게 가르쳐왔다. 여태껏 그분들의 가르침을 단순한 차원으로만 생각해왔는데 막상 자신의 삶에서 이런 문제를 직면하게 되자 그 교훈이 심각한 내적 고뇌를 유발하는 가르침임을 인정치 않을 수 없었다. 지혜로운 가르침을 주신 부모님과 주님께 감사가 흘러나왔다.
“저기 그러니까……, 정말 감사했습니다.”
윤혁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무얼 말이지?”
“조금 전 도와주신 일이요.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아, 그건 내 탓도 있으니 오히려 내가 사과해야 하지.”
카이젤은 애써 무던하게 손을 저었다.
“괜히 그런 장소로 데려오는 게 아니었는데…….”
이럴 때까지 시니컬할 필요까지야. 못 말리는 형이었다.
“다음부터는 좀 안전하고 평범한 곳을 마련해보지.”
누군가에게 고개 숙여 사과하는 카이젤 라흐블뤼크, 그 자신에게는 몹시 익숙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카이젤은 점점 알 수 없는 노릇이라며 속으로 혀를 찼다. 동생이란 인간이 자신의 궤도를 생각보다 너무 빠르게 흔들고 있었다. 그 변화가 불쾌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좀 씻을 필요가 있겠네요.”
형도, 자신도 피로 더러워진 것을 알아차린 윤혁.
“제가 모셔다드릴게요.”
둘은 먼저 몸부터 씻기로 하고 샤워실로 이동했다. 로봇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오늘은 왠지 동생의 도움을 거절할 마음이 안 드는 카이젤이었다. 세면실에 도착한 둘은 나노 슈트로 된 수영복을 해제했다.
‘아직 좀 회복이 더디신가?’
상의를 벗은 형의 등 쪽에 가벼운 흔적처럼 남은 옅은 흉터가 보였다. 감염이나 염증이나 반흔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일반적인 병리 현상이 아니라 신수의 특성과 관련된 것으로 보였다. 기세로 보아 내버려 두면 곧 회복되겠지만 조금 걱정이 되었다. 다행히 슈트에 내장된 시스템이 측정해준 체액 성분 검사 및 신체 내부 데이터에 의하면 빠르게 정상화되는 양태였다.
“신수의 세포는 특수한 물질로 구성되어 있어.”
“역시나 그랬군요.”
“물리면서 내부에 조금 주입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게 조심하셨어야죠.”
“피코머신이 다 정화해낼 수 있지만 좀 시간이 걸리겠지.”
그 때문에 회복이 진행될 동안은 당장 기운을 내기 어렵단다. 압도적인 재생력의 피코머신 시스템이 대단한 건지, 그걸 교란한 신수들의 특수 물질이 대단한 건지, 모순(矛盾)이 따로 없었다.
윤혁은 거동이 불편한 형을 돕기 위해 세신실 안으로 들어갔다. 둘은 완전히 탈의한 후 적절한 온도의 물줄기로 더럽혀진 몸을 씻어내었다. 편안히 바닥에 앉은 카이젤은 물줄기를 맞으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차가웠던 심해와 달리 편안감을 주는 목욕실. 윤혁도 벌렁거렸던 심장이 조금 안심되었다.
‘그나저나…….’
씻던 중 윤혁은 헛기침을 하였다.
‘진짜 열심히 단련하셨나 보네.’
전에도 언뜻 보긴 했지만, 실로 비할 대상 없는 완벽한 피사체였다.
‘하긴 운동에 진심이셨지. 특등품 초인의 육체이기도 하고.’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해도 워낙 이미지가 강렬해서인지 시선이 끌렸다. 창조주의 최상의 솜씨가 잔뜩 담긴 귀중한 조형물을 감상하는 듯했다. 인간이 이런 예술품을 만들어내기란 불가능하겠지. 웬만해선 체격에서 쭈그러들지 않던 윤혁도 왠지 자신의 체격이 비루하게만 느껴졌다.
“쳇.”
반면 카이젤은 이 상황이 다소 익숙하지 않은지 작게 투덜거렸다. 부축을 받아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임을 알기에 잠자코 용인하고 있었지만, 그는 본래 타인에게 전라를 보이길 꺼리는 사람이었다. 그나마 상대가 이상하리만큼 본인의 마음의 방벽을 잘 뚫고 들어오는 편안한 자여서 망정이었다.
‘나도 참 무뎌졌군. 형제란 게 대체 뭐라고.’
“아, 죄송합니다.”
예술품 감상하는 듯한 시선 때문에 상대가 불편했을까?
문득 그런 생각에 미치자마자 서둘러 사과했다.
“아니야, 괜찮다.”
사실 카이젤은 일곱 살 이후론 타인 앞에서 벌거벗겨진 적이 없었다. 딱 한 번의 치욕스러운 경험을 제외하면. 그 사건 이후로는 얼굴조차 함부로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몸이야 말할 것도 없었고. 얼굴을 가리는 건 비밀주의적 성향 때문이었지만 몸을 가리는 건 커다란 치부와 트라우마 때문이었다.
“척 보기에도 흉한가?”
나지막이 기분 상한 듯 내뱉은 말.
“눈을 불쾌하게 해서 미안하군.”
“네?”
윤혁은 형의 말이 이해되지 않아 잠시 고개를 꺄우뚱거렸다. 저 몸이 흉하다고? 무슨 의미로 말한 것인지를 알아차리기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윤혁은 그 문제의 근원지를 발견하자마자 얼어붙었다. 동공이 떨렸다. 떡 벌어진 근사하고 아름답고 완벽한 근육질 육체 가운데 이질적이고 고통스러운 결손이 있었다.
‘전에 신체적인 콤플렉스가 있다고 말했던가?’
진실 게임에 쓰인 약이 진짜이긴 했나 보다. 형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조금은 수치스럽군.”
심하게 손상되고 마모된, 흉하게 망가지고 일그러진 생식기관.
“죄송해요. 저는!”
“괜찮다. 이런 사정은 몰랐었으니까.”
카이젤의 눈이 회한과 수심으로 잠겼다.
그 부위는 마치 잔뜩 찢기고 베인 뒤에 괴이한 모양으로 들러붙기라도 한 듯 흉터로 가득했다. 불에 지져져 화상이라도 입은 것인지 피부도 흉했다. 말라비틀어져 쭈글쭈글한 상태였다. 크기 또한 심각히 왜소했고 형태도 흉측했다. 도무지 제 용도로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흉터투성이로 쪼그라든 주머니는 허전했으며 정소 한쪽은 아예 없었다.
윤혁은 당황했으나 재빨리 놀란 기색을 숨기려 했다.
‘무슨 일이라도 겪으신 걸까?’
카이젤은 깊은 한숨을 쉬며 사정을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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