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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86회 초인들의 세계 Ch 34. 진 (3)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2.10.22 | 회차평점 0 0

 

 

 

 

 

(이전 회차에서 계속)

 

 

 

 

 

  진에게서 나온 돌발 질문에 카이젤은 잠깐 손을 멈추었다.

  “타인의 가정사에 간섭이라. 별로 보기 좋지 않아.”

  차분하고 태연한 말투였지만 무게가 실려 있었다.

  “그렇습니까?”

  진은 곰곰이 궁리하는 기색을 보이며 위험한 호기심을 표출했다.

  “그렇다면 왜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아바타를 처음 발아시키셨을 때 미래 예지 시스템들이 그런 행동을 보였을까요? 그들은 대체 무엇을 보았을까요?”

자칫 선을 넘는 것으로 판단될 수 있는 발언.

  “아버지의 사업이 미친 여파를 감지하는 일 정도는 제게도 어렵지 않죠.”

  “진.”

  한층 더 목소리가 굵고 낮고 묵직해졌다.

  “겉만 보면 아무런 특이한 점이 없는, 심지어 초인의 능력과도 전혀 무관한 사람인데 말입니다. 보통 사람 기준에서 봐도 평범하죠. 그런데 그가 당신께 어떤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을까요?”

  다른 초인이 아닌 진이기에 표출 가능한 당돌함.

  “머리가 좀 컸군. 벌써 그런 데까지 신경을 쓰고 말이지.”

  카이젤의 경고음이 더 짙어졌다.

  “객관적 증거들도 있습니다. 직접 제작에 관여해봐서 알지만 예언석들은 절대 비이성적인 판단을 내리지 않습니다. 어떤 이유로든 명백한 근거를 띤 판단만 하죠. 강윤혁 씨는 당신에게 있어서 무엇입니까?”

  카이젤은 자료집을 툭 덮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진을 정면으로 주시했다. 기 싸움에 밀린 진의 눈동자가 떨린다. 그러나 진은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그에게 주어진 역할이 이러한 것이기에 아버지를 위해서라도 충성할 수밖에 없었다.

  “지켜주어야 할 소중한 가족입니까?”

  견제와 탐색의 역할.

  “자신의 존재적 기틀을 흔들어놓는 색다른 위협?”

  하고 싶지 않았음에도 아버지에게서 직접 전수된 임무.

  “이도 저도 아니면 그저 흥밋거리? 어느 쪽이죠, 아버지?”

  왕에게 간언을 주고 왕의 독주를 훼방하는 역할.

  이런 일은 언제 해도 적응이 좀처럼 되지 않았다.

  “당신에게 변수가 생기면 당신으로 끝나지 않아요. 인류 전체에 나비 효과가 되어 돌아올 겁니다, 아버지. 그리고 그건 장차 우주적 영향을 미치겠죠. 사물의 이치를 분석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저로선 그 잠정적 여파를 미리 알고 조언을 해드려야 할 의무와 권리가 있습니다.”

  ‘강윤혁이라.’

  그 질문은 사실 카이젤 본인도 간절히 해답을 찾는 중이었다.

  최근 들어서 그는 자기 마음에 균열이 생겼음을 깨달았다. 이미 인간성을 벗어 내던지고 궁극체가 되었다고 자부했던 것이 십 년도 훨씬 전. 그런데 사라졌다 믿었던 불필요함이 최근 들어 다시 재발하는 듯했다. 완벽한 이성과 감정을 조화시킨 가치관을 바탕으로 합리적 판단만 추구하던 그가, 전엔 생각도 못 했던 동생이란 존재 때문에 흔들리고 있었다. 지도자, 현자, 전사로서의 정체성이 지금까지 자신의 전부를 꿰차고 있었는데 이제는 가족이라는 역할이 비집고 들어왔다.

  “내게 그런 변화 같은 건 의미 없다.”

  그는 솔직한 속마음과 다르게 말했다.

  “나에게 있어서 약점이란 없어.”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포장했다.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겠습니까?”

  진은 의심스러워했다. 그는 홀로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했다.

  ‘하지만 과연 강윤혁 씨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그 아이의 생각이 너와 무슨 상관이지?”

  진의 뇌리를 방사선 영상처럼 관통해낸 카이젤이 냉담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어이쿠, 이런.’

  진은 더 궁지에 몰릴까 무서워 웃음으로 무마하며 손을 저었다.

  “주제넘게 함부로 떠든 점은 사죄드립니다, 아버지.”

  대답 대신에 혹독한 서릿발 같은 침묵만 돌아왔다. 역시 아버지는 친절할 때도 엄격할 때도 항상 일관되게 무서웠다. 이 망할 견제와 탐색의 역할도 오래는 못 해먹을 일이라는 생각이 절실히 들었다.

 

 

 

 

 

 

*****

 

 

 

  예정대로 카이젤은 별도의 공지도 없이 조용히 일주일간 자리를 비우게 되었다. 윤혁은 형이 정말로 부재한지를 확인한 뒤 혹시나 형의 다른 감시가 붙지는 않았는지 재차 확인하였다. 안심해도 되겠다고 판단이 선 다음에야 윤혁은 다시금 진과 미리 약속해놓은 자리로 나왔다.

  “반갑습니다.”

  “……네.”

  마지막으로 헤어진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뭐가 그리 반가운지 진은 싱글거리며 윤혁을 반기는 표정이었다. 아직 진을 신뢰해도 될지 확신이 서지 않은 윤혁은 조금 떨떠름한 느낌으로 짤막하게 인사만 했다.

  “진.”

  “궁금하신 점이라도 있습니까?”

  짧은 망설임 후 윤혁은 본론을 신중히 던졌다.

  “혹시 당신도 바깥의 세상, 그러니까 우주 식민지에서 왔습니까?”

  이에 진은 예상했다는 듯 싱글거렸다.

  “아마도 그럴 겁니다.”

  “아마도라뇨?”

  왜 불확실한 말투로 이야기하지? 영 심상치 않았다.

  “저는 조금 특별한 경우니까요.”

  점점 더 앞뒤가 안 맞는 듯한 난해한 대답만 나왔다.

  “그게 무슨 뜻이죠?”

  “제게는 출생한 고향에 대한 기억은 없고(데이터로는 알지만요) 그 이후의 중간 과정들만 기억하거든요. 저처럼 초인으로 각성시키기 위해 어릴 때부터 따로 선별된 아이들은 별도의 장소로 이동해서 대부분의 일생을 거기서 보내죠.”

  “각성된 초인이라고요?”

  윤혁은 형이나 어르신에게 들은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3세대 초인들은 대부분 태어날 때부터 각성했다고 들었는데?’

  “제법 우리 사정을 많이 아는군요.”

  진이 윤혁의 사고 전개 과정을 끊었다.

  “아버지께서 알려주셨군요? 그렇죠?”

  윤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이 혹시라도 그때처럼 더 깊은 독심술을 벌였다가는 어르신에 대해서까지 추론이 닿을지도 몰랐다. 그 부분이 염려된 윤혁은 일부러 어르신과 만난 기억을 의식하지 않았다.

  “선천적 초인은 주로 지구 출신들입니다.”

  진은 고맙게도 일정 선을 넘어가진 않았다.

  “우주에서 태어난 친구들은 후천적으로 각성했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렇군요.”

  윤혁이 안심하는 것을 본 진은 골똘히 그의 표정을 살폈다.

  “아하, 정신 간섭을 걱정하는 모양이군요. 걱정할 것 없습니다. 죄송한 일이기는 한데 이미 제가 지난번에 몇 번 시도해봤잖습니까? 그거 아마 흔적이 남았을 겁니다. 원래 그런 기술이거든요. 이 이상 당신께 손대면 아버지가 나중에 반드시 눈치챌 겁니다. 저도 그렇게까지 간이 크진 않아요.”

  독심술, 정신지배를 포함한 정신 간섭 능력은 원래 개인이 사사로운 일로 남용하지 못하게 되어있었다. 기본적으로 모든 정신계 기술 및 관련 장비들은 연합 최상부의 제어 아래에 있으며 공공 목적이라는 명목 한정으로 매우 엄격한 평가를 통과해야만 이용이 승인된다고 한다.

  “그나마 독심술이나 텔레파시는 상대 쪽에 영향이 없으므로 조금 유연하게 허락됩니다. 반면에 반영구적 세뇌를 일으키는 작업은 금기에 가깝죠. 연합 회의, 아버지의 허락, 그리고 시스템과 인공지능들의 협조까지 있어야만 허가되죠. 그것도 아주 제한적으로 가끔씩만 허가되고요.”

  안심해도 좋다는 제스쳐였다.

  “일단은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해줘도 경계심을 아예 풀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윤혁은 아직 반신반의의 눈초리로 상대를 직시했다.

  “그나저나 보여주시겠다고 하신 것은 어떻게 됐죠?”

  “시간이 아직 좀 필요합니다.”

  “이미 거의 다 완료되었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렇긴 한데, 추가 승인 절차도 필요해서요. 한 5일 정도면 충분하겠군요.”

  “그렇게까지 길게 필요한 일입니까?”

  윤혁은 뚱한 표정으로 진을 바라보았다.

  ‘가벼운 척 히죽이는 게 영 탐탁지 않아.’

  그래도 5일이라면 형이 지구로 돌아오기 전까지는 충분히 용건을 마칠 수 있으리라 판단되었다. 그래서 일단은 승낙했다. 무엇 하느라 그렇게까지 긴 준비 기간이 필요한지는 궁금했지만.

 

  이야기를 마친 둘은 미리 진이 준비한 소형 비행선을 타고 나섰다. 진에게는 통행권이 기본으로 장착되어 있는지 제로원의 아공간 차폐를 포함해 모든 장벽을 별도의 번거로운 절차 없이 손쉽게 통과할 수 있었다. 워프 중개소에 도달한 그들은 비행선의 조종 인공지능에 입력된 좌표대로 워프 되었다.

  “차신해 씨를 당신에게 보낸 것도 바로 저입니다.”

  워프가 진행되는 도중에 진이 느닷없는 말을 살며시 꺼냈다.

  “알고 계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나중에 화내시면 안 될 테니까요.”

  “그 말인즉 당신은 기계들의 이상 행동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는 뜻이군요.”

  “아버지의 주요 프로젝트 중 적잖은 수에는 제가 관여되어 있으니까요.”

  진은 희희낙락하며 흥얼거렸다.

  “초 극비만 제외하면 대부분 개요 정도는 간파하고 있습니다. 아, 물론 아버지의 기술력을 파악할 정도는 아녜요. 어디까지나 수박 겉핥기식으로 맥락이나 파생 여파의 일부를 측정할 정도죠.”

  어쩌면 유 회장 같은 지구권의 최상위 초인들보다 전문적인 영향력만으로는 진이 더 대단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거물들을 너무 자주 만나는 것 같다는 감상도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정신적으로 피곤하거늘.

 

  “그런데 우리가 지금 향하는 곳이 어디입니까?”

  가장 중요한 질문이 뒤늦게야 떠올랐다.

  “중립의 섬, 현존하는 유일한 중립 지대입니다.”

  “중립 지대요?”

  그런 곳이 있었나? 일반적으로 ‘중립’이라는 말의 의미는 특정 국가들과 파벌을 형성하지 않음을 뜻한다. 하지만 인류연합이 버젓이 존재하는 지금 중립이란 개념이 허락될 수 있을까? 이 의문에 진이 답해주었다.

  “네, 중립국이죠. 지구와 우주를 포함한 인류가 다스리는 모든 영토 가운데 유일하게 진정한 의미의 ‘자치권’과 ‘중립권’을 소유한 땅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안전한 곳이죠. 아버지의 시선으로부터 말입니다.”

  참고로 중동 일부 지대와 이스라엘도 따로 행정 섹터 구분이 없긴 했지만, 그곳들은 중립국이라기보다는 방치된 폐기물에 가까운 개념이란다. 그 와중에 진의 설명 중 이스라엘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윤혁은 즉각 흠칫했다. 지금의 이스라엘은 과연 어떤 모습이 되었을까?

  “중립의 섬, 그 땅의 주인은 아버지와 중립 조약을 맺었습니다.”

  조약이라는 낱말에 힘을 주어 발음하는 진.

  “제게 다양한 학문을 가르쳐준 사부님이기도 하죠.”

  진이 스승이라고 부를 정도의 인물이라면 분명 상당한 사람일 터.

  윤혁은 그 사람의 정체가 갑자기 궁금해졌다.

  ‘어쩌면 형에 버금갈 위상을 지니고 있으려나?’

  그때 진이 윤혁에게 말했다. 이번에도 윤혁의 속생각에 반응하여서.

  “지금의 당신은 그분을 만날 수 없습니다.”

  분명히 정신 간섭을 안 하겠다고 했는데? 단순한 심리 추론일까?

  여하튼 이래서 진이라는 인간과의 대화는 썩 상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스승과 대면하는 일은 제가 하죠. 섬 중앙부에 가서 그녀의 허가와 후원을 받아 별도의 준비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적어도 사흘 이상 걸릴 것입니다. 그동안 강윤혁 씨 당신은 섬의 외곽 지역에 혼자 머물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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