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87회 초인들의 세계 Ch 35. 루디아 (1)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2.10.23 | 회차평점 0 |
Chapter 35. 루디아
창공을 가르며 고속 질주하던 비행선은 바다 위 어느 구역에 도착했다. 밖은 안개가 자욱했기에 향방을 알 수가 없었다. 중력과 관성을 무시하고 자유롭게 공간을 횡단하던 비행선이 갑자기 추진력을 잃은 것처럼 느려졌다. 인공지능 역시 항법 기능을 잃고 혼란스러워하였다.
“드디어 계약 영역에 도착했군요. 강윤혁 씨, 어서 갑시다. 여기서부터는 우리가 직접 이동해야 합니다. 외부 존재가 들어올 때는 비행선이며 로봇이며 포함해서 인공지능이나 기계류는 전부 두고 가야 하죠.”
당황스러운 폭탄선언.
“하지만 여기는 바다 한 가운데인데 어떻게요?”
“아, 한 가지 말하려다 잊은 게 있군요.”
갑작스럽게 졸음이 몰려왔다. 최면인지 아니면 모르는 사이에 수면 가스를 이용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진이 강제로 수면을 유도한 것은 분명했다. 역시 함부로 믿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감이 잠시 몰려왔다.
“이곳의 구체적인 좌표는 외부 인간이 보지 못하도록 계약이 되어 있어요. 주인에게 따로 허가를 받지 않는 한 말이죠. 그래서 무례하지만 불가피하게 이런 방법을 쓰게 되었군요. 야속하게 생각하진 마세요.”
뭐라고 항변을 해보기도 전에 깊은 잠이 엄습하며 눈앞이 흐려졌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보이던 풍경은 해변이었다.
자신이 모래사장에 누워 있는 것을 발견한 윤혁은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지금껏 구경해온 여느 해변보다도 훨씬 더 아름다운 자연경관. 참으로 고운 황금빛 모래가 경탄스러웠다. 안개는 온데간데없었다. 하늘에서부터 내려오는 따스한 햇빛은 찬란했고 맑고 푸른 하늘은 선명했다. 마치 이런 생각도 들었다.
‘휴양지로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겠네.’
진은 분명 중립 지대를 ‘섬’이라고 말했었다. 기존 세계에 알려진 곳일지 아니면 인공적인 섬일지 궁금했다. 하긴 이미 유사 자연을 구축하는 테라포밍 기술까지 존재하는 마당이니 섬 하나를 뚝딱 만들어내었다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으리라. 당장 카이젤도 바다 하나를 지하 건물에 제작했었으니까.
윤혁은 사람이나 사람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머나먼 저편까지 쭉 이어진 해변은 기대했던 것보다 넓어 보였다. 사람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는 좀 더 많이 걸어야 할 듯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사람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햇빛 때문에 이마에서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윤혁은 잠시 쉬고자 걸터앉아 바람을 쐬며 먼 바닷가를 바라보았다. 그는 며칠 간의 경험으로 생긴 잡념을 편안히 내려놓았다.
자신이 너무 멀리 나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어디에서나 볼 법한 평범한 삶을 살던 자신. 그리고 촌구석이나 마찬가지였던 작은 고향. 남들처럼 진로 고민을 하던 대학생과 소시민적인 가정. 그랬던 일상이 어느 날 갑자기 이상한 일들에 휘말려버렸다. 정확히는 형을 만나면서부터.
바로 그때를 기점으로 마치 전부터 미리 계획되기라도 한 양 주변에서 사건 사고가 숱하게 터졌다. 보통 사람은 평생 한 번 만나기도 힘든 초인이라는 비범한 능력자들과 수없이 접촉하였다. 이제는 그자들이 시시각각 자신에게 눈독을 들이며 주시하고 있는 처지였다.
예전의 일상으로 똑같이 복귀하기에는 너무 멀리 나와 버린 게 아닐까? 이젠 조용하게 살기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여겨지자 미약한 탄식이 나왔다. 물론 이것 또한 하나님께서 준비한 다른 계획일지도 모른다는 기대는 들었으나, 여전히 윤혁의 마음의 그릇은 연약했다. 그는 자신이 그런 무거운 짐을 감당할 만한 그릇이 될는지 아직 자신감이 없었다.
‘아니야. 긍정적인 변화도 분명 있었지.’
이를테면 선교팀과 함께하기로 마음먹은 것처럼. 젊은 시절을 헌신하여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힘을 보태고자 하는 소망이 생긴 것은 확실히 아름답고 고무적인 변화였다. 만약 자신에게 아무런 이변도 없이 평범한 일상만 있었다면 그런 일에 참여할 기회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코드네임 알레프(א)라고 하셨던가.’
그 어르신께서는 왠지 자기 과거를 윤혁에게 투영시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공통점이 있으니 그랬으리라. 둘 다 세계의 지배자를 이복형제로 두었고 젊은 시절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 그분은 윤혁에게 자기 일들을 이어나갈 것을 부탁하려 했을까? 다만, 어르신이 자신과 청년의 그 공통점을 어떻게 그리 기가 막히게 알아차리셨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였다.
‘어르신께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 부탁이 부담스러운 건 어쩔 수 없어.’
혹시 자신이 너무 어려운 부분만 바라보며 지레 겁먹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았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가족이나 친구와의 관계에서 얼마든지 선한 일을 만들 방법이 있는데도 말이다. 윤혁은 성찰해보았다. 지금까지 그런 작은 임무 하나하나에 정말로 충성해왔을까? 당당히 말할 자신은 없었다. 마땅히 남들을 사랑해야 할 때조차도 부족했던 적이 너무 많았다.
‘먼저 작은 일에 충성해야, 주님께서도 큰일을 맡기시겠지.’
찬찬히 돌아보았다. 당장 할 수 있는 쉬운 일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버리고 남에게 양보하는 것, 비판하고 판단하기 전에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 예수님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고 친구들에게 전도하는 것 등등. 무엇보다 이웃을 사랑하고 부모와 형제를 아끼고 공경하는 일도 있었다. 평범한 소시민으로서 감당해낼 임무도 산더미처럼 많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제라.’
이번에도 또다시 그 인간 생각이 나자 속에서 자조적인 실소가 흘러나왔다. 그래, 영혼의 형제들도 형제지만 육신의 형제도 분명 형제는 형제지. 윤혁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카이젤의 빈틈없는 마음속 철옹성에 미세한 균열을 만들었다는 사정은 알지 못했다.
윤혁은 다시 모래 위에 누워서 다시 하늘을 보며 눈을 감았다.
최면 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고민을 많이 해서인지 잠이 쏟아졌다.
*****
다시 눈을 떴을 때,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응?”
눈에 아른거리는 그 장면은 신기하리만큼 묘했다. 동화 속 세계에 들어온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현실감이 강렬히 일었다. 잠깐 자신이 환상을 보는 건가 하는 엉뚱한 상상까지 들었다. 하지만 이내 바닷바람이 볼에 닿는 촉감이 현실감을 일깨워줬다. 분명 그는 말똥말똥 깨어있었다.
소녀, 아니 윤혁과 또래 혹은 조금 더 어려 보이는 나이대의 그 여인은 단출하고 수수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도시의 화려한 여인들과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고 아직 삭막한 문명 세계의 때가 묻지 않은 듯이 순수함을 머금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현숙한 인상을 주었다.
‘여기도 사람이 있었구나?’
만약 그녀가 자신을 다리를 얻어 머나먼 바다로부터 올라온 인어라 소개한다 해도 묘하게 설득력이 있을 것 같았다. 눈에 띄는 화려한 외적 아름다움은 없었지만, 이국적인 매력과 자연스럽게 전원적 배경에 녹아드는 어울림이 있었다. 그녀는 호기심 가득한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윤혁에게 말을 걸어왔다.
“이곳 사람이 아니시네요?”
“……네?”
그녀의 목소리가 그림 같은 해변 풍경에 입체감을 더해주자 그제야 윤혁은 번뜩 졸음에서 깨는 느낌으로 현실로 돌아왔다. 분위기가 몹시 어색했다. 말을 더듬거리는 어수룩한 남자가 된 기분이었다. 쑥스러움에 혀가 꼬일 것 같았다.
“아, 네! 일단은요. 다른 곳에서 왔죠.”
윤혁은 고개를 긁적이며 시선 처리를 고민했다.
“반가워요. 그럼 이 섬이 처음이겠네요? 낯설죠?”
대답 대신 조용히 고개만 끄덕거렸다. 윤혁은 자꾸 저도 모르게 몇 초간 넋 놓고 있음을 자각하고는 순간 진의 최면 때문에 머리에 이상은 생기지 않았나 하는 쓸데없는 걱정까지 들었다.
그때 소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기에서 가까운 곳에 몇몇 주민이 같이 사는 마을 공동체가 있어요.”
그러자 윤혁은 사흘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진의 말이 기억났다. 숙박할 수 있는 텐트나 식량도 따로 준비해주지 않은 것을 보면 애초에 섬 주민들에게 충분히 신세를 질 수 있음을 상정한 것일까? 진에게 그런 배려심이 있었는지는 확인할 도리가 없었다.
“저야 감사하지만……, 괜찮으신가요?”
정작 의아한 부분은 따로 있었다. 윤혁은 소녀의 순진무구함에 놀랐다. 그녀의 분위기와 너무 잘 어울리는 순박함이긴 했다만, 낯선 자신을 너무도 의심 없이 울타리 안에 포용하는 그녀에게서 신기함까지 느껴졌다.
“괜찮다뇨?”
소녀가 정말 모르겠다는 투로 되물었다.
“저는 낯선 이방인이잖습니까? 그것도 신원도, 들어온 경로도 잘 모르는 사람이죠. 제 입으로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수상한 사람을 함부로 공동체 안에 받아들이는 건 위험할 수도 있잖아요.”
당장 낯선 남자, 그것도 윤혁처럼 건장한 남자와 대화하는 것도 객관적으로 봤을 때는 썩 안전한 시도가 아니었다. 윤혁 본인이야 자신의 결백을 알지만, 소녀는 윤혁을 전혀 알지 못할 테니까.
“어머, 사려 깊으신 분이네요.”
소녀는 소리 내어 작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별로 걱정할 일은 아니에요. 저도 마냥 미련하진 않거든요.”
얌전해 보이는 겉모습에 비해 활달하고 밝은 사람이구나.
윤혁은 마음속으로 긍정적인 첫인상을 받았다.
“이곳에는 국경선이 두 개 있어요.”
그녀가 해변 모래 위를 총총 뛰며 말했다.
“하나는 섬을 포함한 해역 전체를 두르는 결계고, 다른 하나는 섬 중앙부를 보호하는 결계에요. 자세한 원리는 저도 잘 모르지만요. 아무튼 요점은 그런 국경 때문에 바깥사람들은 내부에서의 허락 없이는 입장하지 못한다는 점이죠.”
청년은 저도 모르게 그녀의 총총걸음을 따라 빠르게 걸었다.
‘그래서 경계하지 않은 건가?’
아무래도 진이 자신과 더불어 윤혁까지 섬의 외곽부에 들어올 수 있도록 이 섬의 주인이란 자에게 모종의 허락을 받은 모양이었다. 외부인의 의심스러움을 올바로 간파할 정도면 현명한 사람임이 분명하겠지.
“정말 위험한 사람이라면 이곳에 발을 딛지도 못했을걸요.”
중립국 혹은 중립 지대라고 했던가?
“아가씨께서는 폭력적인 수단을 싫어하시거든요.”
소녀의 말을 들어보니 정말인 듯했다.
‘작은 비행선까지도 허가가 되지 않는 완전한 비무장 지대.’
이런 곳이라면 내부 주민들도 안심하고 생활할 수 있겠지.
“그러면 실례할게요. 저는 이곳에서 사흘만 신세를 지면 됩니다.”
윤혁이 고개를 숙여 공손히 부탁했다.
“먹을 것, 마실 것, 지낼 곳을 빌리는 대신에 값을 지불하겠습니다.”
부모님은 늘 그에게 이웃의 은혜를 소중히 여길 것을 가르쳐왔다.
“괜찮아요.”
소녀가 절레절레 손을 저었다.
“우리는 이 땅을 방문하는 분들께는 값없이 베풀어요.”
“하지만!”
“저희도 이곳에서는 나그네 처지거든요.”
소녀가 자신들을 유순하게 ‘나그네’라 표현했지만, 실상 이는 ‘난민’을 뜻했다.
십여 년 전, 전쟁이 종료되고 세계 경제가 활성화되긴 했지만, 놀랍게도 난민 문제는 그 후로도 꽤 오랫동안 남아있었다. 현시대는 자연재해나 기근보다는 주로 종교적 이유에서 난민이 발생했고 대부분은 중동 중앙부 출신이었다.
“얹혀사는 처지에 베풀지 못할 이유는 없죠.”
중동 중앙부는 두 세기 전부터 분쟁이 끊이지 않던 땅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현시대 들어서는 십여 년 전의 ‘복잡한 정치 경제적 문제’로 인해 내부의 종교적 갈등이 매우 극심해져 버렸다. 일단 현재는 내전이 강제 종료되었지만, 국토 전체가 폐허가 되어 문명 혜택에서 멀어졌고 인류연합도 그곳을 계륵으로 여겨 사실상 폐기 지대로 지정한 상태였다.
윤혁이 만난 소녀는 그곳에서 떠나온 사람이었다.
두 남녀는 해변 길을 따라 모래사장을 벗어났다. 바다 근처에 자리한 몇 개의 마을이 보였다. 좀 더 내륙 쪽으로 들어가자 더 규모가 큰 마을들이 보였다. 그곳들은 마치 바깥 문명이 닿지 않기라도 한 것처럼 아늑했다. 그렇다고 마냥 원시적인 모습은 아니었고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기는 적당한 촌락이었다. 급변하는 바깥 세계와는 달리 시간에서 벗어난 듯한 정적인 마을이었다.
그때 별안간 소녀가 흥얼거렸다.
‘노래? 이국적인 느낌인걸?’
그녀의 목소리는 경쾌한 아기 새의 울음소리를 연상시켰다.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경박함이 아닌 매우 깊이 숙성된 묘한 슬픔이 섞여 있었다. 장조의 음률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정서는 귀를 쫑긋 기울이지 않으면 알아보지 못할 만큼 정교하게 숨겨져 있었다. 흡사 껍데기 속에 묻힌 진주처럼. 그리고 노랫말은 공용어가 아니었다. 그 언어를 배운 적은 없었으나 번역 장비 덕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히브리어?’
그러고 보니 노래의 음 역시 이스라엘의 민요 특성을 조금 담고 있었다. 저 소녀는 이스라엘 출신일까? 고향 땅에서 떠나 먼 이국의 땅에서 살고 있다면 역시나 중동의 난민 출신이려나? 윤혁은 현대 중동사 시간에 배운 내용들을 떠올렸다. 혹여나 실례가 될까 봐 소녀에게 불편을 줄 만한 질문은 하지 못했다.
“어느 나라에서 오셨어요?”
고맙게도 그녀 쪽에서 출신지를 먼저 물어봐 주었다.
“아시아 출신 같으신데, 맞죠?”
“네, 한국에서 왔습니다.”
둘은 서로의 이름, 연령, 출신지, 그리고 이곳에 온 경위에 대해 간단히 주고받았다. 소녀의 이름은 루디아. 나이는 한국 기준으로 스무 살. 이스라엘 본토에서부터 쫓겨난 난민 출신으로 지금으로부터 약 8년 전에 이곳에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꽤 아파할 만한 기억인데도 그녀는 전혀 민족적 정체성이나 출신에 대해 부끄러움을 보이지 않았다.
“편하게 ‘룻’이라고 불러도 돼.”
“너도 편하게 불러줘.”
둘은 그렇게 금세 가까워졌다.
(다음 회차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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