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90회 초인들의 세계 Ch 36. 기술적 특이점 (1)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2.10.26 | 회차평점 0 |
Chapter 36. 기술적 특이점
섬 중앙부는 결계 간섭 현상 덕분인지 외부에서는 관측되지 않았다. 마치 사진상에서 특정 존재가 없는 것처럼 보이도록 사진 일부를 도려내는 식이었다. 그러면서도 도려내고 남은 배경들은 자연스럽게 봉합되었기에 이질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방식. 섬 중앙부는 그런 패턴으로 은폐되었다.
정확히 사흘이 지나자 기다렸다는 듯 진이 윤혁에게 전음을 보냈다. 그는 약속 장소의 좌표를 지정해주었다. 그가 지정한 장소는 산지로 올라가는 중턱에 있었다. 약속 장소에 도달한 윤혁은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장벽에 이르렀다.
‘저 너머에는 중립 지대의 심장부가 있겠지’
막다른 곳에 도달한 그는 잠시 멈춰 섰다. 내심 게이트와 비슷한 문이 열리거나 공간 재구성 현상이 벌어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전개는 전혀 색다른 방식으로 이어졌다. 마치 RPG 게임을 하는 것처럼 눈앞에 상태 창이 홀로그램 형태로 나타났다. 실제 영상인지 환각인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S-Unvs 3,102,189,209,398,765-20,298,342,100에 접속하시겠습니까.}
무슨 의미인지는 몰라도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잠시 고민한 뒤 수락했다.
‘아마도 사흘씩이나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 저것이겠지?’
곧 주변 모든 배경이 사라지면서 눈앞이 어두워졌다. 눈을 깜빡거리자 배경 전체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그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흰 배경에 서 있었다. 오감은 동일하게 느껴졌지만, 현실과는 기묘하게 다른 느낌이었다. 스스로의 몸이 다른 사람의 몸처럼 느껴졌다.
“다행히 늦진 않은 모양입니다.”
목소리와 함께 환영이 나타나더니 곧 생동감 있는 실물이 되었다.
“편하게 쉬셨는지요?”
진이었다.
“이곳은 가상현실 같은 겁니까? 이런 형태는 처음 보는데요?”
“음, 아주 조금 비슷하지만, 더 어려운,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아마 지구 시민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을 겁니다. 접속할 기회 자체가 많지 않을 테니까요.”
금발의 잘생긴 남자가 뜸을 들이며 눈웃음을 지었다.
“시뮬레이션 우주입니다.”
“……네?”
“공학 전공자니 처음 듣는 이야기는 아니겠죠.”
윤혁은 영화관에서 형이 언뜻 혼잣말로 언급했던 단어를 기억하였다.
“하하, 물론 통상에서 쓰이는 용어랑은 의미가 다르겠지만요.”
“시뮬레이션 우주라니. 가상현실의 상위 개념이라도 되는 겁니까?”
가상현실을 이용해 하나의 세계관을 완벽하게 인공 구축하는 방식일까? 어떤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인간이 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지. 아예 현실 세계도 사실은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시뮬레이션이 그 정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 주장을 믿진 않았지만, 괜히 이렇게 소환되고 보니 불길했다.
“이런, 그렇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진이 한심한 학생을 마주하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래도 상위 세계에 대한 이론부터 다시 가르쳐야 할 것 같네요.”
그 태도가 기분은 나빴으나 할 말은 없었다.
“설명이 좀 길어지겠군요.”
과연 진은 인류를 통틀어 손꼽히는 천재 과학자였다. 그리고 그는 눈높이에 맞춰 친절하게 가르쳐주는 교육 실력도 훌륭했다. 충분히 잘난 척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랄까. 윤혁은 유치원생이 된 어색한 기분으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론 물리학과 그것을 입증할 실험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상위 차원들의 일부가 벌거벗겨져 드러났습니다. 물론 거대한 실체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한 수준, 수박 겉핥기이자 빙산의 일각 수준이지만요.”
그는 허공에 홀로그램 도면을 그렸다.
우리 우주와 그보다 높은 차원의 세계들이었다.
“작은 공 안에 벌레 한 마리가 갇혀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이 벌레가 만약 작은 공 안에서 풀려난다면 세 가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날아갈 수 있습니다.”
“가로, 세로, 높이?”
“네, 맞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도 비슷해요. 3차원의 공간과 1차원의 시간으로 구성된 게 통상의 시공간입니다. 우리는 공에 갇힌 벌레나 마찬가지죠. 그런데 우리가 통상 시공간 그 너머의 세계로 향하면……, 총 세 카테고리의 방향들로 확장되는 큰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마치 공 밖으로 벗어난 벌레가 자유로이 하늘을 날아다니듯 말입니다.”
전문가가 아닌 윤혁에게조차도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대화 주제였다.
“첫 번째 부류의 확장, 시공간 차원 개수(Dimensional number) 확장입니다. 과거의 초끈 이론은 기존 3차원의 공간을 9차원의 공간으로, 막(m-brane) 이론은 10차원의 공간으로 확장했죠.”
“그건 저도 들어봤습니다.”
“그리고 이후로도 더욱 상위의 이론들이 창설되었죠. 심지어 상당 부분 실험으로 입증되기까지 했죠. 그러한 상위 이론들 덕분에 밝혀진 차원 개수가 더욱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늘어나고 있고요. 어쩌면 앞으로는 더욱더 늘어날 가능성이 크겠죠.”
윤혁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상위 차원을 어떻게 직접 관찰하죠?”
“게이트와 포탈은 상위 세계와 이어지는 일종의 통로 역할을 하죠. 우리는 오랜 세월에 걸쳐 게이트 기술을 발전시켰습니다. 그것을 통해 상위 차원과 그곳 물질의 기본 단위, 물리법칙, 시공간의 형태 등을 관측하였습니다.”
진의 손가락이 게이트 모델들을 허공에 생성하였다.
시뮬레이션 우주라서 그런지 무엇이든 생성 가능한 듯했다.
“그 관측 사실들을 기반으로 또다시 새 이론을 확장해냈죠. 이러한 선순환이 반복되었습니다. 현재까지만 이론상으로는 2천억 개 이상의 공간 차원 축들이, 실험적 관측으로도 다섯 자릿수 이상의 차원 수의 고차원이 증명되었습니다.”
과학사(科學史) 전개에 따른 비약적인 세계관 확장 속도. 일반인 윤혁은 긴장감에 식은땀을 흘렸다. 이 정도 지식은 일반 대중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영역이었다. 과학자들조차도 저 수준까지 가면 이론을 감당하기도 복잡한 나머지 두손 두발을 다 든다는 이야기를 언뜻 들은 것도 같았다.
‘역시 이런 연구를 감당할 수 있는 존재는 초인밖에 없겠지.’
진은 한 수 더 뜨는 이야기를 하였다.
“솔직하게 말하면 방금 말한 건 제가 아는 범위에서의 차원 개수.”
금발 미청년은 어깨를 으쓱였다.
“아버지라면 어쩌면 그 이상의 지식도 알고 계실 수 있겠죠.”
“참 간담 서늘해지는 이야기네요.”
기껏 좁혔던 형과의 심리적 간격이 급속도로 멀어졌다.
“뭐, 당신도 나름대로 추측하고 있던 것 아니었습니까?”
“제가요?”
“당신은 신을 믿잖습니까?”
“그것과 상위 차원에 관한 과학적 연구이 무슨 관련이죠?”
“이런. 자연계 너머의 초자연적 존재를 믿는 분이라면 당연히 3차원 위의 상위 차원들의 개념도 받아들이기 쉬워야 정상 아니겠습니까? 어리석고 무지한 무신론자나 유물론자들이라면 모를까, 기독교는 상위 차원 개념과 가장 잘 합치하는 종교라고 생각했는데요?”
언제 자신이 기독교를 믿는다고 말해줬던가?
‘하여간 마인드리딩은 불편하다니까.’
이후 계속 이어지는 가르침은 더욱더 충격적이었다.
“이건 아직은 이론으로만 제기되었고 ‘저는’ 증명하진 못했습니다만, 공간축만이 아니라 시간이라는 차원에도 1개보다 더 많은 개수의 차원축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귀납적 증거상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세상에! 시간까지도요?”
“증명되지 않은 심증뿐이죠. 제게는 말이죠.”
진은 이번에도 ‘제 범위에서는’이란 사족을 붙임으로서 찝찝함을 남겼다.
“시간은 아직 우리로서도 가장 다루기 힘든 영역 중 한 가지입니다.”
참 의미심장하게도 다루기 ‘힘들다고’ 말할 뿐 다루기 ‘불가능하다’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윤혁은 살짝 한쪽 눈썹을 찌푸렸다. 형과 함께 지하의 제로원을 방문한 이후 시간 기술의 존재에 대한 의심이 점점 더 굳어졌다.
‘형은 이미 어쩌면 2차원 이상의 시간을 발견했을지도?’
그 지식을 응용한다면 제한적이나마 시간을 제어하는 것도 가능하려나?
현재로서는 그저 추측의 영역일 뿐이었다.
“아무튼, 공간과 시간의 차원 개수 확장은 세계관의 지평을 넓혔습니다. 인류는 확장된 세계관, 곧 상위 차원의 세계에 물리적으로 접속하여 에너지, 물질, 시공간의 활용 범위를 새로운 수준으로 끌어올렸고 이를 통해 괄목할 만한 기술력 성장을 이룩해낼 수 있었습니다.”
열역학 제1법칙; 고립된 자연계의 물질, 에너지 총량은 일정하다.
열역학 제2법칙; 고립된 자연계의 무질서도(엔트로피)는 계속 증가한다.
여태까지 이 두 법칙 때문에 인류는 우주에서든 지구에서든 유한한 자원이란 속박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 두 한계를 조금이라도 우회하기 위해서 찾아낸 편리한 타개책이 있었으니, 바로 더 높은 차원의 세계로부터 물질과 에너지를 끌어다 사용하자는 아이디어였다.
실제로 지금 시대에 상용화된 각종 첨단 엔진과 동력원은 원리 자체는 다를지언정 상위 차원의 힘을 기반으로 한다는 원리상의 공통분모가 있었다. 이 외에도 상위 차원으로부터 유익을 자아내는 기술력은 각 산업 분야에 모두 존재했다. 윤혁도 여기까지는 공학도로서 얕게나마 알고 있었다.
이제 진은 강의의 화제를 돌렸다.
“그래도 첫 번째 종류의 확장, 즉 시간축과 공간축의 개수 확장은 비교적 잘 알려졌지만 두 번째 종류의 확장으로 인한 상위 세계는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뮬레이션 우주도 사실 넓은 의미에서는 이 두 번째 종류의 확장과 관련 있죠.”
어려운 개념이 나오자 윤혁은 어리둥절 해했다.
“잘 이해가 안 되는데요? 알기 쉽게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이런, 죄송합니다.”
진은 일반인의 우둔함을 잠시 잊어버린 자신을 속으로 책망했다.
“누구든 한 번쯤은 상상해보셨을 겁니다.”
그가 손바닥 위에 책 모양의 형상을 생성했다.
“소설 속 세계로 들어가는 이야기 같은 것 말입니다.”
“아, 구운몽(九雲夢)처럼요?”
“취향이 참 고전적이군요. 보통은 소설 빙의 판타지 소설을 떠올리던데요?”
꿈속이나 픽션의 세계에 현실의 인물이 진입하는 스토리. 사실 진부할 정도로 자주 사용되는 픽션의 단골 주제이다. 그런데 만약 정말로 그러한 소설 속의 세계가 실존한다면 어떨까? 그 경우 현실 세계는 상위 차원이 되고 상대적으로 소설의 세계는 하위 차원이 될 것이다. 이것이 진이 제시한 비유였다.
“음, 알 듯 모를 듯 아리송하네요.”
"당신이 좋아하는 신학을 써서 비유해드리죠. 예를 들어 신이 한 세계를 창조했다고 생각해봅시다. 비유컨대 신은 상위 차원에 존재하는 작가요, 인간은 하위 차원에 존재하는 캐릭터들이 되는 셈이죠.”
“조금 기분 나쁜 비유이긴 한데, 완전히 똑같진 않아도 얼추 비슷하네요.”
진은 퉁명스러운 윤혁의 대답에 피식거렸다.
“좋습니다. 바로 그 ‘가장 높은 창조주’인 ‘절대적 작가’가 소속된 영역에 편의상 무한대(∞)라는 값으로 매기고 우리가 속한 영역에는 0이라는 숫자를 매겨봅시다. 그 작가가 당신이 믿는 그 신인지는 모르겠지만요.”
“흠흠,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이해해주시죠. 어쨌건 0과 무한대라는 숫자를 매겼으면 그사이에는 무수히 많은 중간 단계들이 존재합니다. 양의 실수(positive real number) 전체죠. 그러한 ‘양의 실수’에 대응되는 중간 영역들이 존재치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놀라운 변증이었다. 불신자의 무례한 변론이 신경 쓰이지 않을 만큼 획기적이었다. 윤혁은 진의 말을 듣고서 상상의 나래를 활짝 펼쳐보았다. 문득 떠오른 것은 영적 존재들의 세계, 혹은 천사들의 세계였다. 그들도 0보다는 높되 무한대보다는 작은 존재들 아니었던가?
“우리 세계의 물리법칙은 초월하되 궁극적 진리 앞에서 볼 때는 더 높은 법칙에 속박된 신세에 불과한 영역, 중간 단계들이란 게 그런 개념인가요? 우리를 지배하는 법칙보다 높은 법칙의 지배를 받는 세계?”
“이제야 조금 이해력이 향상되셨군요.”
진은 손바닥을 마주치며 손뼉을 쳤다.
(다음 회차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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