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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91회 초인들의 세계 Ch 36. 기술적 특이점 (2)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2.10.27 | 회차평점 0 0

 

 

 

 

(이전 회차에서 계속)

 

 

 

 

 

  “이제야 조금 이해력이 향상되셨군요.”

  진은 손바닥을 마주치며 손뼉을 쳤다.

  “하지만 죄송스럽게도 방금 당신의 생각을 읽긴 했는데, 당신은 아마 초자연계를 떠올리신 것 같습니다. 그것과 ‘두 번째 종류의 차원 확장’은 다소 다른 개념입니다. 초자연계는 우리의 이해 영역마저 벗어난 세계죠. 제가 말씀드린 차원 확장은 어디까지나 이성으로 이해 가능한 자연계 안에서의 확장입니다.”

  “흐음, 무슨 말씀인지는 대충 알겠습니다.”

  “액자 형식을 떠올리시면 편합니다. 몽중몽(夢中夢)이랄까요? 소설 속에 또 다른 소설이 들어가고 그 소설 속에 또다른 소설이 들어가는, 그런 식의 연쇄가 반복되는 모습을 상상해보시면 됩니다.”

  이 정도까지 퍼먹여 주자 윤혁도 약간은 이해할 수 있었다.

  “고전 영화 인셉션(Inception) 같은 것이로군요.”

  “아, 쉬운 비유로 몽중몽을 든 것이지 실제 시뮬레이션 우주는 다릅니다. 꿈속의 꿈, 소설 속의 소설은 어디까지나 자연수(自然數)의 개수만큼만 단계가 나뉘죠. 하지만 지금 우리가 위치한 시뮬레이션 우주가 놓인 확장 세계관은 다릅니다. 자연수가 아니라 실수(實數)만큼이나 많은, 연속적인 단계들이 존재하죠.”

  “더 빽빽한 셈이군요.”

  여기서부터는 일반인의 제한된 사고력이 따라가질 못했다.

  “아무튼 우리 세계를 소설 속으로 여기는 ‘상위 세계’가 무수히 존재한다면 반대 방향으로 우리가 속한 세계보다도 ‘하위 법칙에 놓여있는 영역’ 또한 존재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영역을 이미 탐험하였고 실제로 일부는 정복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그 영역 일부를 가공해 인조물로 만들었죠.”

  “아하, 그 영역이 시뮬레이션 우주라는 겁니까?”

  “아주 머리가 나쁜 건 아니라서 다행이군요.”

  지금껏 윤혁이 상상한 방식, 거대한 컴퓨터 프로그램을 통해서 세계관을 인공 구축하는 가상현실 방식의 시뮬레이션과는 완전히 개념이 달랐다. 시뮬레이션 우주는 엄연히 분류하면 ‘상위 차원’이라기보다는 ‘하위 차원’으로 분류하는 편이 옳지만, ‘두 번째 부류의 차원 확장’과 관련된 상위 차원을 발견해내는 과정에서 부산물로서 얻어낸 것이었다.

  ‘소설 속의 소설, 가상현실 속의 가상현실, 이런 액자식 연쇄는 불연속적이고 자연수의 개수만큼만 연쇄가 이어진다. 그러나 실제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에서는 액자식 연쇄가 실수의 개수만큼 빽빽하게 이어진다 이건가?’

  그리고 바로 그 ‘빽빽하게 이어진 실제 액자식 연쇄’ 상에서 현실보다 낮은 단계에 속한 영역, 그것이 바로 시뮬레이션 우주인 듯했다. 가상현실 같은 가짜와는 달리 엄연히 신께서 창조하신 영역 안에 속한 실존하는 세계. 패러다임 자체는 비슷해도 실존성에 있어서는 천지 차이였다.

  “우리는 이런 ‘두 번째 부류의 확장’을 ‘시공간 축’과 구분해서, ‘설정축’이라고 부릅니다. ‘리얼리티-시뮬레이션 축’이라고도 부르죠. 시뮬레이션 우주란 ‘R-S 축’ 상에 대응되는 현실 세계의 값을 감소시켰을 때 도달하는 영역입니다.”

  요컨대 z축 대응 값을 2에서 1로 낮추면 고도 2가 고도 1로 낮아지는 것과 같단다. 그런 의미에서 이해하면 시뮬레이션 우주라는 것 자체는 하위 차원이라기보다는 단지 R-S 축 상에 대응되는 값이 다른 단면이라 보는 편이 옳았다. 시뮬레이션 우주와 현실 세계를 둘 다 포함하는 ‘포괄적 집합체’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상위 차원이라고 보아야 하리라.

  “설정축이라면 혹시 소설의 ‘설정’ 말할 때 쓰는 그 ‘설정’ 맞습니까?”

  “같은 맥락이긴 하죠.”

  의아하고 흥미로운 주제였다. 그러나 진이 증거를 보여주지 않으니 무턱대고 믿기는 어려웠다. 정말로 그런 게 실존한단 말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믿는 윤혁으로서도 과학적인 발견에 대해서는 의심의 태도를 지울 수 없었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훨씬 더 높은 차원인 초자연적 세계는 믿으면서 훨씬 더 낮은 설정축의 존재는 믿기 어렵다니.

  “설정축 상에서 상위 높이에 있는 세계들은요?”

  문득 낮은 영역 말고 높은 영역은 어떨지 궁금해졌다.

  “그 세계들 관점에서는 오히려 현실이 소설이 되는 겁니까?”

  왠지 ‘시뮬레이션 다중우주론’을 주장하던 허무맹랑한 과학자가 된 것 같아 기분이 찝찝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전지전능한 신의 관점에서는 피조 세계가 시뮬레이션이나 다름없지 않겠는가. 직접 마음으로 교류하신다는 점만 빼면.

  “간접적인 관측만 가능할 뿐 간섭은 불가능합니다.”

  진도 그쪽은 엄두가 안 나는지 말끝을 흐리며 얼버무렸다.

  “하지만 설정축의 하위 높이는 간섭하거나 조작할 방법이 무궁무진합니다.”

  그로서는 시뮬레이션 우주에 대한 이야기밖에는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그 하위 계를 일종의 도화지로 삼아서 그림을 그리면 가상 세계들이 생성되죠. 우리들은 그곳을 인공적으로 가공하고 다듬을 수 있죠. 현실의 인간으로서는 허상처럼 느껴지겠지만, 엄연히 실존하는 영역이라는 차이가 있죠.”

  맥락을 주의 깊게 들어보면 단순히 작가가 특정 픽션을 지어내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프로세스임이 분명해 보였다. 컴퓨터 프로그램의 제작과도 다른 듯했다. 진은 이러한 시뮬레이션 우주 제작 기술이 단순히 인간이 신 놀이를 할 목적으로 제작한 게 아니라고 증언했다.

  “우리가 그걸 만든 목적에 대해서는 곧 자세히 알려드리겠습니다.”

  “흐음.”

  끝까지 ‘설정축 상 높은 높이의 영역’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회피하는 진.

  ‘아버지라면 언젠가 그곳까지도 정복하시겠지.’

  윤혁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진의 푸른 눈을 응시했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그 설정축이란 것의 존재에 대한 증명은요?”

  “그걸 해주려고 온 게 아니겠습니까? 이곳이 바로 시작점입니다. 시뮬레이션 우주에 들어온 것을 환영합니다. 지금은 고작 ‘심도 1’이지만 차츰 더 깊은 심도까지 들어갈 것입니다.”

  “심도라면?”

  “말씀드렸던 ‘설정축 상에 대응되는 높이’로 보셔도 됩니다.”

  완전히 똑같진 않지만 얼추 비슷한 개념이란다.

  ‘따라가 봐도 문제없겠지?’

  석연치는 않았지만 속는 척 믿어보기로 했다.

  “그건 그렇고 ‘세 번째 종류의 차원 확장’에 관해서는요?”

  시뮬레이션 우주에 정신을 팔고 있다가 문득 빼먹은 것이 떠올랐다.

  “아하, 호기심이 충만하시군요. 그건 기회가 되면 가르쳐드리죠. 지금은 두 번째 종류의 확장과 관련된 시뮬레이션 우주만 공부해도 엄청나게 시간이 오래 걸릴 테니까요. 굳이 힌트를 하나 주자면⋯⋯.”

  진은 잠시 턱에 손가락을 괴었다.

  “혹시 플라톤 철학을 공부하신 적은 있으신지요?”

  뜬금없는 플라톤 철학 이야기에 윤혁이 잠깐 눈을 깜빡거리자 진은 한심하다는 듯 ‘어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겉보기의 젠틀한 성격과는 달리 초인 특유의 오만함은 어디 가지 않았다. 문득 형이 연상되었다.

  “이데아(IDEA). 동굴 속의 그림자, 이러면 감이 잡힙니까?”

  “음? 아하! 이제 기억이 났습니다.”

  플라톤이 창안한 철학에는 이런 개념이 있다. ‘이데아’, 곧 사물의 본질이자 본체인 것. 그림자가 물체의 허상이듯, 플라톤은 실존하는 물체 역시 이데아의 허상 그림자라고 이해했다. 쉽게 말해 동굴 속의 사람이 움직여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우리가 보고 듣는 현실 세계 역시 이데아가 움직여 만든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이론이었다.

  ‘플라톤 철학이 초대 교회 기독교 속에 많이 침투하였다고 했었지?’

  그 때문에 영지주의(Gnosticism) 같은 이단도 생겼다고 했던가?

  “어딘가 모르게 시뮬레이션 우주 개념이랑 비슷해 보이기도 하는데요?”

  “그렇습니다. 공통점이 있죠. 하지만 미묘하게 구분됩니다.”

  진과 윤혁의 몸체는 깊은 심도의 세계로 로켓처럼 나아갔다.

  “세 번째 확장과 관련된 '홀로그래피 우주'에 관해서는 기회가 되면 얘기해보죠. 다만 홀로그래피 우주에 관한 연구는 아버지만 제대로 알 뿐 사실 아직 우리에게도 알려진 바가 많지 않습니다. 그러니 큰 기대는 접어두시길.”

  ‘이번에도 형이 맞닿아있구나.’

  윤혁은 시뮬레이션 우주여행 중 잠깐 다른 생각에 잠겼다.

 

 

 

 

 

 

*****

 

 

 

  “본격적인 시작을 하기 전에 묻겠습니다.”

  도착 지점이 가까워지자 진이 불쑥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무엇을 알길 원합니까?”

  진의 금속 질 푸른 눈이 격자 선을 내뿜으며 빛을 발했다. 윤혁은 자기도 모르게 마법 속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현자의 눈은 단순한 테크놀로지 이상의 위화감을 뿜어내는 기묘한 힘이었다.

  “왜 그걸 제게 물으실까요?”

  “때에 따라서는 답을 할 수 없는 것도 있고 알려드릴 수 있는 것도 있겠죠.”

  윤혁은 움찔했다.

  “그러니 미리 선을 정해두는 게 서로 편리하지 않겠습니까?”

  “그 전에 저도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왜 저를 도우려 하시는 겁니까? 무슨 목적으로 그렇게까지 하시는지 저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이건 형의 의도입니까? 아니면 당신의 독자적인 의지입니까?”

  질문에는 역질문으로 맞서는 편이 정석.

  “후자에 가깝다고 해두죠.”

  진은 당당하게 말했다.

  “하지만 제가 당신에게 주목하는 이유는 설명하자면 복잡합니다.”

  “그러고 보니 신해 형에게 저를 감시하도록 지시한 사람도 당신이었다고 말했었죠. 기계들과 관련이 있어서 그런 겁니까? 경찰 안드로이드가 저를 공격했던 일들이요. 그 내막에 혹시 당신이 포함되어 있었습니까?”

  신해에 관한 이야기는 일부러 던져준 단서였다.

  진도 윤혁이 이 추리에 도달하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하고 있었다.

  “맞습니다.”

  “역시!”

  “오해하지는 마시죠. 그 일은 제 탓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의도했던 어떤 계획이 예기치 못한 부작용을 한 가지 낳았습니다. 그 세부 배경은 언급할 수 없습니다만, 결론만 떼어서 말하자면 예지 능력을 지닌 슈퍼컴퓨터들이 주범입니다. 그들의 이상 행동 원인은 저도 정확히 파악하지는 못했지만요.”

  그 당시의 일이 떠오른 윤혁은 잠잠히 눈을 꼭 감았다.

  “당신은 이미 평범한 삶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버렸습니다.”

  이제 진마저도 그가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확인 사살해주었다.

  “그건 제가 그 사람의 동생이라서 그렇게 된 건가요?”

  “글쎄요. 과연 어떨까요?”

  마지막 말과 동시에 진의 ‘현자의 눈’이 더욱 현란한 빛을 발했다. 그리고 그 눈에서 뻗어나간 푸른 방사형의 선들이 수십 회 꺾이며 어지럽게 사방을 수놓았다. 마치 디지털 세계를 송두리째 재현하는 것 같았다.

  “질문은 그게 전부입니까?”

  윤혁은 이를 꾹 악물었다.

  “죄송하지만 별로 실용적인 답을 주지 못할 것 같군요.”

  자신의 일생은 초인들과의 접촉 때문에 혼돈 속에 내던져졌다. 이젠 전으로 되돌아가지도 못하게 되었다. 정작 당사자들은 위에서 내려다보며 웃고 있겠지. 상대에게 필요한 정보는 함구한 채 장난만 치는 저 사람처럼. 분했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기에 감정을 억눌렀다. 이것도 하나님의 섭리라면 의연한 자세로 수용해야 할까? 루디아와 그 식구들의 의연함이 존경스러웠다.

  “알겠습니다.”

  진과 신경전을 벌여서는 이득이 될 일이 없었다.

  ‘어차피 저 사람도 일개 부하에 불과하니까.’

  “일단 말씀하신 대로 무엇을 물을지 여기서 정하겠습니다. 현재까지의 우주 개발과 우주 개척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진정한 내막과 원리, 그리고 식민지 주민들과 그들을 컨트롤하는 인류연합 시스템에 대해서 가르쳐주시죠.”

  철인왕의 눈에 탐구자의 이채가 감돌았다.

  “곤란한 질문을 주셨군요. 모든 것을 밝히지는 못하겠지만.”

  그는 손가락을 튕겼다.

  “특별 서비스로 인심을 베풀죠.”

  시뮬레이션 우주의 공간이 찢어지면서 퍼즐처럼 재구성되었다.

  “당신이 나름 만족할 만한 재미있는 것들을 보여주지요.”

  동시에 새로운 형태의 공간이 덮어 씌워졌다.

 

 

 

 

 

(다음 회차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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