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92회 초인들의 세계 Ch 36. 기술적 특이점 (3)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2.10.29 | 회차평점 0 |
(이전 회차에서 계속)
{심도 3에 진입하겠습니다. 세부 구역 변경 완료. 차원 확장 완료.}
알림음이 들려오며 사방 배경이 개변되었다.
이윽고 눈에 들어온 것은 빈 우주 공간이었다. 수많은 별들과 은하들이 까마득히 먼 곳에 잔뜩 수놓아진 채 형형색색의 빛을 발하고 있었다. 실제 우주는 아니었지만 단순한 영상도 아니었다. 통상의 ‘존재’ 방식과는 개념이 다르긴 해도 엄연히 ‘존재하는 실체’들이었다.
“먼저 첫 번째 질문부터 답을 드려야 할까요? 제가 태어나기도 전 일이라서 까마득한 과거를 묘사하는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비교적 쉬운 대답이 될 테니까요. 초인이라면 누구나 우주 개발사를 알고 있죠.”
홀로그램 프리젠테이션과 비슷한 광경이 벌어졌다. 차이가 있다면 이번에는 직접 물리법칙과 시간을 뒤흔드는 것 같았다. 진이 손짓하자 그의 눈빛에 반응하여 가상 우주의 시공간의 흐름이 통째로 변동되었다. 원래대로면 빛의 속도 때문에 먼 우주를 관측할 때는 시간차가 발생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진은 시간차를 무시하는 관측을 허가하도록 법칙을 변개하고 있었다. 그제야 정말 시뮬레이션 우주 속에 들어왔다는 사실이 실감이 났다.
“지구 기준으로 반세기보다 조금 더 이전, 비록 원시적인 수준이긴 해도 우주로 진입할 수 있는 기술이 여럿 개발되었습니다. 편법으로 얻었던 태양계 정복 말고 진짜 인류가 자력으로 이뤄낸 ‘태양계 너머의’ 우주 진입 말입니다.”
참고로 여기서 진이 말한 ‘편법’이란 1세대 초인들의 시대에 잠시 태양계 내부에 형성되었던 원인 불명의 웜홀 터널 현상을 뜻했다. 당연히 그 웜홀들은 제한적이었고 인류의 본연의 과학 기술과는 무관한 요행이었다. 인류가 많은 자원을 얻어 더욱 미래 시대로 나아갈 시간 정도는 벌어주긴 했지만.
“초대째 위버멘쉬가 처음으로 이 첫 단추를 맸습니다.”
질량을 가진 물체는 빛의 속도를 넘어서지 못한다. 원래 그것이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의 기본 상식이었다. 하지만 상대성 이론은 자신과 상극인 양자 역학이라는 학문과 만났다. 그 둘의 모순적인 융합이 대통일을 통해 이뤄지기 시작하면서 물리학은 완전히 새로운 국면에 도달하였다. 고전 물리학을 초월해 현대 물리학의 영역으로 넘어왔듯, 또다시 물리학이 초월 계단을 밟았다. 덕분에 인류는 시공간에 대해 몇 수 더 높은 시각을 획득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적은 에너지만으로도 초고속 기동을 할 수단을 강구하게 된 인류. 초광속 기동, 공간 압축, 공간 가속, 초속 타키온 입자 코팅, 좌표 강제 변환 등등이 제안되었다. 전부 다 초기 우주 시대의 항해 기술들이었다. 물론 당시에는 유인 우주선에 적용하기는 어려워서 무인 우주선을 사용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특이점이 찾아왔습니다. 원시적인 단계의 워프 기술과 게이트 기술의 기초 이론이 만들어졌습니다. 인류와 초인들은 환호했죠. 드디어 머나먼 우주에 손을 뻗칠 가능성이 열렸으니까요.”
순간이동이라고도 불리는 기술인 워프(Warp).
그리고 ‘인조 웜홀 통로’라고도 불리는 게이트(Gate).
워프란 통상 공간 바깥에 존재하는 다른 ‘막(M-brane)’을 발판으로 밟아 계산된 외부 좌표로 고속 이동하는 방법이었다. 워프 시에는 아무리 먼 위치로 이동해도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게이트는 원리가 달랐다. 그 기술은 인공 웜홀을 활용하였다. 순간이동이라는 측면에서는 비슷했지만, 자체적 워프가 안 되는 물체들마저 이동시킬 수 있는 좀 더 경제적인 수단이었다. 비유컨대 워프는 도로 밖을 사람이 질주하는 것이라면 게이트는 고속도로를 이용해 화물이 운송되는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두 기술 모두 바깥에서 볼 때는 시간이 전혀 흐르지 않았다.
시간 소요 없이 무제한 거리 이동을 가능케 하는 두 기술.
당시로서는 인류사에 획을 그을 어마어마한 대발견이었다.
“그런데 2세대 초인들이 좀 더 나아가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냈죠.”
“아이디어요?”
“뭐, 우리 세대가 보기엔 원시 기술이긴 해도, 당시로선 획기적이었죠.”
진은 그 아이디어가 무엇인지 알려주었다.
최대한 간략히 풀어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특수상대성이론에 따르면 공간을 가로질러 움직이는 물체는 사실 시공간의 비스듬한 면을 따라 이동한다. 요컨대 A라는 물체로부터 수억 광년 떨어진 곳에 B라는 시계가 존재한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A가 B의 시간을 거리와 무관하게 곧바로 알 수 있다고 가정하자. A가 정지한 상태에서 읽은 B의 시간, 그리고 A가 B를 향해 이동하는 상태에서 읽어낸 B의 시간, 이 둘 사이에는 시차가 존재한다.
그러나 워프나 게이트의 경우에는 상대성 이론을 초월한 기술이었다. 애초에 원리 자체가 공간을 넘어 점프하는 것이기에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두 기술 모두 순간이동 과정에서 시간 소요가 없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출발점과 도착점의 시간이 일치하는 것이다. (예컨대 우주 표준 시간으로 오후 1시에 워프를 시작한 우주선이 3억 광년 너머의 별에 도착했을 때도 시간은 동일하게 우주 표준 시간으로 오후 1시이다)
여기에서 착안해 누군가가 이런 아이디어를 냈다.
물체를 워프시키되 정지 상태가 아니라 미리 고속 이동을 하던 중에 워프를 시켜보자. 그러면 머나먼 거리에 도달했을 때는 우주 표준 시간으로 과거의 시점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움직이는 물체에 대해 ‘동일 시간 단면’을 취해보면 시공간 연속체의 비스듬한 단면이 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PM 2:30 무렵에 한 우주선이 워프를 시작한다고 가정해보자. 정지 상태에서는 백억 광년 너머의 시계가 (현장과 똑같이) PM 2:30을 가리킨다. 하지만 우주선이 고속으로 움직이는 상태에서는 동일한 백억 광년 너머의 시계를 관찰해보면 PM 2:00가 될 수도 있다.
“즉, 움직이는 상태에서 워프하면 과거로 이동하게 되는 결과를 낳죠.”
이것이 바로 워프라는 ‘반칙에 가까운 초 기술’이 개발되지 못했다면 감히 엄두도 내보지 못했을 아이디어, 곧 ‘원거리 경유 타임머신’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발칙하기 그지없는 가능성을 내포한 상상력의 결실이었다.
이 책략이 제안된 것은 21세기 중후반인 혼돈의 시대 초입 무렵이었다. 분쟁으로 시끄러운 와중에도 당시 초인들은 냉전 시대를 우습게 보이게 할 우주 개발 경쟁에 열기를 올리고 있었다. 머나먼 별로 도약할 기초 기술이 막 마련되었던 참에 위버멘쉬마저 사라졌으니 무한한 냉전은 필연적인 수순이었다. 이러한 때에 도입된 원거리 경유 타임머신 아이디어는 2세대 초인들 사이에서 핵폭발과도 같은 충격적 센세이션을 가져다주었다.
이 아이디어를 응용하려는 그들의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자율적으로 자원을 캘 수 있고, 공정을 건설함으로써 자신을 구성하는 유닛 하나하나를 지속적으로 재생산할 수도 있는 개척용 로봇 패키지를 만든다. 그리고 그 패키지를 우주선에 실어 먼 우주로 워프시킨다. 광속에 가깝게 움직이는 상태에서 워프를 시행함으로써 로봇 패키지를 과거 시점으로 이동시킨다. 물론 과거 시점이기는 하되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행성에 떨어지긴 하겠지만.
그렇게 투척 된 로봇들은 프로그래밍이 된 대로 자율적인 행성 개척 및 개발을 수행한다. 자원과 에너지원을 행성으로부터 충분히 확보하여 로봇 개체들의 숫자 또한 늘려나간다. 이같이 패키지는 자율 재생산을 통해 스스로의 규모를 무제한으로 늘려나간다. 어느 정도 규모가 커지면 워프 설비마저 재생산한다.
그 후에 동일한 방법으로 먼 과거 시점의 또 다른 행성으로 로봇 패키지를 워프 설비를 통해 재파견한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 단시간에 엄청난 규모의 식민지와 생산 인프라를 확보하게 된다. 로봇이 개척하고, 자원 채취를 하고, 공정을 건설하고, 자기 자신들을 재생산하고, 문명과 시스템을 건설하는 데 걸리는 막대한 시간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과거 시점’으로 보냈기에 현시점에서는 이미 엄청난 재생산이 완료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꿈의 ‘창조 경제’를 현실화하려면 많은 준비가 요구됐다. 스스로 진화하는 놀라운 경지의 인공지능, 먼 우주 공간을 시간차 없이 관측할 수 있는 양자 확률 측정 기술, 그리고 초고효율의 초소형 첨단 설비가 필요했다. 얼핏 생각하면 탁상공론 같은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선행되어야 할 준비가 산적해 있음에도, 2세대 초인들은 지체 없이, 너나 할 것 없이 도전하여 우주 개발 경쟁에 힘썼다. 한 세대 전에 이미 건설되기 시작하여 이미 상당 부분 개척된 태양계 자원 행성 덕분에 자원 부족 문제는 한숨 돌렸고 남은 건 더 먼 영역으로 도약하는 일뿐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불가능해 보였던 준비를 모두 완료하였다.
그러나 잘 진행되던 타임머신 플랜에 예상외의 걸림돌이 나타났다. 어찌어찌하여 고속 이동 중인 물체를 워프하는 작업은 성공했는데, 도착한 곳의 역행 시간량이 계산했던 것보다 훨씬 적었다. 아무리 먼 별로 보내어도 기껏해야 1초 정도의 타임 슬립이 고작이었다.
“상대성 이론이 예견했던 시공간과 실제 시공간의 구조 차이 때문이었죠.”
“어렵네요. 그래서 해결책은 찾아냈답니까?”
“네. 낭패에도 굴하지 않고 이론을 다시 수정해 끝내 타개책을 만들었죠.”
과연 2세대 초인들의 집착이 대단하긴 했는지 이론적 해결은 어렵지 않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새로운 패러다임의 ‘원거리 타임머신’을 실용화시키려면 ‘초광속 이동 기술’이 필요했다. 아무리 상대성 이론을 초월했다고는 해도 워프 같은 반칙도 없이 공간 상을 직접 초광속으로 이동하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초인들의 집념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었다.
그들은 기존 물리학을 수천 회 이상 갈아엎으며 과학을 끝없이 개량하였다. 타키온 시리즈, 공간 탄성, 역 힉스장 생성, 좌표 변환 등의 초 고등 기술들을 개발하였다. 이 과정에서 소홀히 방치된 지구는 황폐해졌으나 마침내 어찌어찌 초광속 이동은 가능케 되었다. 이 과정에서만 10년 정도가 더 소모됐지만,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대대적인 우주 개발의 길이 열렸다.
하지만 그 이후 여정도 그리 순탄하지는 않았다. 화성과 목성 부지에서 쏘아 올린 초기 정복용 모듈 중 상당수는 과거 시점의 먼 좌표로 이동했음에도 지속적인 재생산의 연쇄를 이루지 못한 채 쇠퇴하였다. 생산의 모판으로 까다로운 조건들을 만족하는 행성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우선 적합한 자원의 충분한 확보가 필요했고 에너지원을 얻을 만한 여건이 있어야 했다. 천체적 현상으로 인한 재난으로부터 안전해야 했고 기계 시스템이 자율적으로 학습하고 진화할 수 있는 시공간적 배경이여야 했다. 이런 조건을 전부 충족하는 행성을 찾기란 바늘을 모래밭에서 찾는 것 이상으로 힘든 일이었다.
“잘해야 백 중 하나둘 정도의 모듈만 재생산을 성공했죠. 그것도 대부분은 기껏해야 시도 정도 수준으로 그쳤지만요. 뭐, 비행기도 처음 발명되었을 때는 불과 몇 초를 날았으니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만.”
“어찌 됐건 성공하긴 성공했네요.”
엄밀히 말하면 이런 장애물들도 초인들의 발목을 영원히 묶진 못했다.
천 번 중 한 번만 성공해도 초인 측에서는 이득이었다. 정복한 별에서부터 다시 새로운 별로 도약하는 무한 연쇄를 반복하면 됐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모든 별을 장악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게다가 이 무렵 항성의 고온 고압을 감당할 신소재들도 대거 발명되었으며 항성 내부의 원소들을 워프 펌프로 견인해 무한 복제에 가까운 증식을 할 수 있는 생산 설비도 준비되었다. 덕분에 행성만 쓰던 때보다 고효율 생산이 가능해졌고 자연스레 최단 시간 내에 우주 전역을 개척할 가능성도 열렸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다른 데 있었죠.”
“그렇게 인간 승리에 가까운 인고의 결실을 거두고도요?”
“네, 기계와 기계 시스템이 통제를 벗어나는 것이 골치였습니다.”
일부 기계들이 외계 항성계에서 너무 빠르게 진화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제어를 거부하는 개체와 집단이 생겼다. 그중에는 자의적인 독립도 있었지만, 기술적인 한계 때문에 연결이 끊기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에는 우주를 실시간으로 완벽하게 제어하기에는 양자 통신 기술의 결함과 오차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2세대의 시도는 반쪽짜리 성공으로 끝났습니다.”
“사실상 실패 같습니다만?”
“아, 훗날 놓친 열매를 거둬들인 분이 나타나셨죠.”
“아하.”
그가 누구인지는 구태여 들을 필요가 없었다.
여하튼 카이젤이 훗날 독립한 기계 시스템들을 모조리 회수해오기 전까지는 우리 은하 곳곳에 어설픈 개척 시도의 잔재가 지저분하게 남게 되었단다. 영 시연치 않은 실패작도 있었고, 통제에 충실히 따르되 연락이 끊긴 것도 있었으며, 아예 독립해버린 것도 있었단다. 회수해온 훗날에는 은하계 정복을 빠르게 시행하는 기틀로 쓰였지만, 그 이전까지는 실용적인 성과로 이어지지 못했다.
참고로 정복 모듈을 쏘아 올리던 시대에 어떤 이는 간악하게도 이런 아이디어를 내었다. 과거 시점으로 워프시켜 보내는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하면 어쩌면 지구의 과거에도 당도할 수 있지 않을까? 타임머신이라는 것이 개발되면 누구라도 욕망할 만한 탐심 어린 발상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렇게 지구 역사의 과거에 접근하려는 시도는 철저히 실패했다. 물리법칙으로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이상한 현상이 지구 근방에서만 벌어지는 바람에 – 덕분에 지구를 특별치 않은 우주의 변두리로 여기는 ‘코페르니쿠스 원칙’이 심각한 도전을 받았다 - 어떤 시도로도 지구 과거 시점으로는 파송할 수 없었다. 정보도 물체도 에너지도 파동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게 ‘인류 역사 변경’이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임을 깨닫게 되었다.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발견이었죠. 지구가 마냥 작고 하찮은 존재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는 큰 의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구 자체보다는 지구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종족의 존재가 이러한 ‘역사 불가변(不可變) 성질’에 있어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추측하는 바입니다.”
그 후, 우주 개척자들은 괜히 시간 여행을 하려는 허튼 시도는 일찍이 깔끔하게 포기하고 현시점의 드넓은 은하계를 확실하게 정복하는 데에만 집중하였단다. 윤혁은 역사 이면의 이모저모를 들으며 기분이 찝찝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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