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95회 초인들의 세계 Ch 37. 시뮬레이션 우주 (1)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2.10.31 | 회차평점 0 |
Chapter 37. 시뮬레이션 우주
누구나 한 번쯤은 인생을 지나오면서 이런 백일몽을 꿔본 적이 있을 것이다. 가상의 세계, 이를테면 책 속 세계에 직접 들어가는 상상. 혹은 세월을 거슬러 시간 여행을 하는 상상, 혹은 자신 혼자만 기억을 그대로 간직한 채 세상의 시간을 되돌리는 상상. 그도 아니면 죽은 후 다른 인간으로 환생하거나 다른 세계에 빙의되는 상상. 대부분은 무익한 망상이다. 실현 가능한 것이 단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일개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이 배인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망상의 현실화에 도전하되 전혀 색다른 패러다임으로 접근하려던 자들이 있었다. 물론 그들도 정말로 시간을 되돌리거나 환생을 가능케 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대신 그것과 유사한 무언가는 만들어낼 수는 있었다.
처음에 그들은 ‘가상세계’라는 이름의 뇌 속에서 구동하는 거짓 세계를 창조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만족감을 주는 것 이외에는 별 가치가 없었다. 마약과 본질적으로 다를 게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진정으로 실존성을 지닌, 유의미한 발전의 상호교류가 허락되는 세계였다.
결국 우주의 차원축 구조에 관한 연구를 거듭한 끝에 해답의 실마리를 찾아낸 초인들은 기존의 가상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개념의 세계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현실 속에 존재하는 실체는 아니되 그렇다고 헛된 망상도 아닌 세계, 존재론적인 의의나 형이상학적 의의는 다르긴 해도 분명한 법칙이 실재하는 세계를. 그 산물이 바로 시뮬레이션 우주였다.
그것의 발명은 일반인 과학자나 수학자는 물론 철학자나 신학자도 전혀 알지 못했던 ‘설정축’의 발견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아쉽게도 그 발견은 그림의 떡에 가까웠다. 가장 가치가 높은 ‘설정축 상의 더 높은 좌표의 세계’는 단편적이고 불완전한 관측만 허락되었을 뿐 직접적인 간섭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꿩 대신 닭이라고, ‘설정축 하위 좌표’에 위치한 세계는 조금 사정이 달랐다. 설정축 상 하위 좌표에 위치한 세계(세계라고 부르긴 애매했지만)는 인간의 무의식과 초의식을 매개로 현실 개변을 일으키는 일이 가능했다.
초인들은 설정축 하위 좌표의 ‘미개척지’를 변개하는 방법을 연구했다. 몇 가지 단서를 바탕으로 공식과 방정식을 알아내 데이터베이스에 축적했다. 원리만 이해하면 컴퓨터 프로그램을 조작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본질의 조작법이었다. 방법론의 복잡도와 연산량은 압도적이었지만. 초인들은 이 기술을 극비리에 감추고 인류의 유익을 위한 ‘시뮬레이션 우주 프로젝트’를 준비했다.
‘그 시절이 떠오르는군요.’
발탁된지 채 얼마 지나지도 않아 아버지와 함께 그 걸작을 빚어내는 과업에 동참했던 그 영광스러운 때. 그 시절의 회상을 마친 진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 프로젝트의 초기 멤버 중 하나로서 그는 자신있게 선언할 수 있었다. 인류 역사는 S-unvs 이전과 이후로 능히 나눌 수 있노라고. 진은 시뮬레이션 우주 초기 시절의 구세대 작품을 직접 보여주겠다며 윤혁을 깊은 심도의 세계로 초대했다.
“다소 충격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비극적인 세계관이거든요.”
“비극적이라뇨?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요?”
“직접 보셔야 알 겁니다.”
그들은 공간을 찢고 어딘가로 이동했다. 이윽고 웜홀같이 생긴 통로를 거쳐 어떤 세계에 도착했다. 현실의 지구와 상당히 유사하게 생긴 장소였다. 단순한 컴퓨터 프로그램과는 확연히 달랐다. 모든 물리 법칙들이 아주 정교하게 설계된 곳이었고 오감과 직감과 육감도 선명하게 전달되었다.
“우리는 현실 세계와 ‘21세기까지의 역사’까지만 공유하는 세계관의 S-Unvs 속에 진입했습니다. 참고로 이 S-unvs는 초기 모델 중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영화로 비유하자면 최초의 기념비적인 흑백영화쯤에 대응되겠군요.”
곧 윤혁의 머릿속에 빠르게 그곳 세계관의 역사에 대한 정보가 주입되었다.
과연 그 세계는 과연 진의 말대로 지극히 비극적인 곳이었다. 비극은 10년 전 어느 한 교도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한 극악무도하고 교활한 살인자가 있었다. 그는 부와 권력과 잘생긴 얼굴을 소유한 자였으나 도리어 그 장점들을 활용해 많은 여인을 죽인 사악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 죗값으로 무기 징역에 처해졌으며 교도관들에게 폭력과 학대로 응징받았다. 복역하던 중 그의 내면에는 더욱 악의와 증오와 광기가 싹 텄고 이는 그의 신체를 서서히 변형시키기 시작했다.
문제의 사달이 난 계기는 사형수 급 범죄자를 대상으로 자행되던 국가 차원의 기밀 생체 실험이었다. 그 실험 사건이 발단이 되어 그 살인마의 폭주가 시작되었다. 교도소 안에서조차 광기와 발작으로 문제가 일으켰던 이 살인범이 하필 교도관들의 눈 밖에 나 비밀 생체 실험의 실험체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교도관들 입장에서는 악에 대한 합당한 응징이라고 여겨졌으리라. 그러나 결과론적으로 그 실험의 대상으로 그 살인마를 뽑은 것은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그 생체 실험은 가히 치사율 100%에 육박하는 위험한 것이었지만 너무도 큰 악의와 광기와 분노에 사로잡힌 자에게만은 아주 드문 확률로 예외적인 생존을 넘어 폭발적인 변이 반응을 일으킬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살인범은 실험의 극렬한 고통을 이겨내고 살아남았으며 괴물로 거듭났다. 아니, 그것을 넘어 재앙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그는 타인의 생명력을 흡수해 미라처럼 말라비틀어져 죽게 만든 뒤 흡수한 생명을 기반으로 자신의 신체 능력을 증폭시키는 이능을 획득했다. 사람의 영역을 탈피해버렸으니 그에게는 비극이기도 했고 동시에 복수할 기회를 얻었으니 다른 의미로는 천운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감시하던 교도관 둘이 희생양이 되었다. 오랫동안 식사도, 잠도 제대로 못 이루어 비쩍 말랐던 살인범은 실험 직후 단숨에 단단한 근육질의 육체를 얻었다. 이후 사태를 확인하러 온 여덟 명의 교도관이 죽었고 동시에 괴인은 격투기 선수를 뛰어넘는 괴력과 괴이한 재생능력을 획득했다.
이윽고 더 많은 교도관이 죽어나갔다. 괴인은 벽을 부수고 교도소 전체를 돌아다니며 죄수와 간수들을 가리지 않고 죽였다. 섬뜩한 지옥도가 펼쳐졌다. 결국, 교도소는 폐쇄되었고 괴인은 인간을 아득히 뛰어넘는 괴수가 되었다.
그날의 사건 이후로 근방 도시들에 비상 계엄령이 내려졌다. 사태는 점점 악화되었다. 괴인은 심히 지능이 뛰어났기에 은밀한 곳에 숨어서 하나둘 사람들을 덫으로 포획해 잡아먹으며 폭발적으로 강해졌다. 종국에는 괴물 같은 신체 능력마저 뛰어넘어 이질적인 초능력까지 소유하게 되었다.
재앙은 점점 더 번져나갔다. 도시 단위에서 주(州) 단위로, 나중에는 국가 단위로까지. 괴인은 본국 정규군들마저 학살하며 무소불위의 괴물이 되었다. 더 무서운 점은 이 괴인이 과거 자신의 자아와 기억을 그대로 유지하였다는 점이었다. 괴인은 순수한 악의와 사악함으로 사람들을 학살했다. 그를 제지할 수단은 없었다. 그는 희생자를 죽임으로써 더욱 강해지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악마의 현신을 연상시켰다.
종국에는 인류 전체가 그것과 전쟁을 벌였고 끝내 행성 인구의 삼분의 이에 달하는 수의 죽음이라는 희생을 치르고서야 가까스로 괴인을 봉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 죽음도 아닌 고작 봉인이었다. 그는, 아니 그것은 이미 불사에 근접한 육체까지 손에 넣어버린 상태였기에 도무지 죽이는 것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여기까지로 끝났으면 좋았으련만.
인류의 비극은 또다른 곳에서도 엄습했다.
여러 외계 행성의 외계 종족 가운데도 그 괴인과 유사한 원리로 각성한 개체가 다수 발생했다. 각 종족의 개체 중 가장 사악한 존재가 불법적으로 힘을 얻어 자기 동족을 송두리째 잡아먹고 막대한 힘을 축적하여 괴물로 재탄생했다. 탐욕에 눈먼 각성 개체는 동족 전체를 먹은 것으로도 모자라 다른 세계의 종족마저 집어삼키려 하였다.
선전포고가 여러 외계들 사이에서 왕래했다. 지구 역시 그 궤적에서 피해가지는 못했다. 탐스러운 생명 자원들로 가득한 지구였기에 탐식에 눈이 먼 괴물들이 혀를 낼름거리며 입맛을 다지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외계 폭군의 공개적인 침략 예고가 메시지로 도래하자 다시 한번 지구는 큰 충격에 빠졌다. 괴인 사태가 벌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더 큰 재앙이 다가온다니. 허나 현실을 부정하기에는 절망의 나락이 너무도 생경했다. 괴수화된 외계 개체들은 종족들을 닥치는 대로 흡수하며 몸집 부풀리기 경쟁에 나섰다. 그렇게 몇몇 패권 개체가 나타나 수많은 행성을 뒤흔들어 놓았고 살아남은 종족들의 존망을 위협하는 큰 두려움으로 자리매김했다.
침략이 머잖은 시점에 이르렀을 때 타개책이 딱 한 가지뿐임을 지구인 모두가 직감했다. 이이제이(以夷制夷). 봉인해뒀던 그 악한 괴인을 풀어주는 것. 더 정확히는 그것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빌어 살려달라 청하는 것. 죽기보다도 하기 싫은 일이었지만 의외로 많은 사람이 막상 멸망 위기가 눈앞에 닥치자 죽는 것보다는 불의와의 타협에 마음이 끌렸다.
“킥킥, 그거 재미있겠네.”
감옥에 봉인되었던 괴인이 비웃었다.
“그런데 내가 왜? 너희를 왜 도와주지?”
그는 교섭을 시도해온 사절단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이 다 죽건 말건 무슨 알 바이지?”
“당신이 협조해준다면 당신에게 자유를 주겠소.”
“뭐래, xx. 내가 마음만 먹으면 너희를 몰살하는 건 일도 아니야.”
“그렇다면 무얼 바라시오?”
괴인의 제안은 간단했다. 그는 인류에게 다음의 두 가지 선택지를 내밀었다. 첫 번째, 매년 자신에게 몇 명을 뽑아서 제물로 바칠 것. 이것만으로도 기겁할 망발이었는데 더 가관은 두 번째 제안이었다.
“싸워줄테니 대신 ‘그 녀석’의 자식을 나한테 바쳐.”
괴인이 말한 ‘그 녀석’이란 오래전 그의 살인 범행을 알아낸 뒤 체포에 이르기까지 수사를 직접 지휘했던 정의로운 형사를 지목하는 말이었다. 그는 그 살인범에게 죽임을 당할 뻔했었다가 구조 받은 여배우와 결혼한 뒤 자녀도 낳고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아가던 중이었다. 날벼락 같은 괴인 사태 이전까지는.
말하자면 괴인은 인류에게 이렇게 요구한 셈이었다. ‘정의로운 자를 인신 공양으로 악인에게 바쳐라. 그 대가로 나머지 인류는 살 것이다. 살고 싶다면 이기적인 모습을 보여라. 군중이여, 너희의 추한 본색을 보여줘라.’
그 참상을 관람하던 윤혁의 눈에 울고 있는 부부가 밟혔다. 제물이 될 아이의 부모님이었다.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아이를 구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미 대중은 그들을 너무도 쉽게 포기한 상태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 죄 없는 아이를 악마에게 바치는 것을 용인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자녀를 희생하라며 부모를 협박하거나 공격하기까지 했다.
그동안 괴인은 아무런 강요도 하지 않았다. 인간들이 순전히 자유의지에 의거해 무죄한 자들을 압박하고 학대하는 추태를 그저 구경하기만 했다. 처음에는 이건 비도덕적인 짓이라며 항거하던 자들마저도 외계 괴수들이 행성을 압박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자 차차 비겁한 선택지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괴인의 손도 아닌 세상 사람들의 손에 아이를 억울하게 빼앗기게 생긴 부모는 극도로 절망하여 비참한 공황 상태에 빠졌다. 아무리 정의를 외치고 울부짖어도 민중은커녕 국가조차도 그들의 신원을 들어줄 의지가 없었다. 다소 비도덕적일지라도 아이 하나만을 희생하여 모두가 평안하길 바랐다. 공리주의적인 사고방식과 두려움이 그들의 도덕성을 철저히 망가뜨린 것이었다.
“이 무슨 흉악한 일이!”
해당 시뮬레이션 우주의 역사를 ‘비디오 빨리감기 방식’으로 빠르게 관람한 직후, 윤혁은 참담한 심정이 된 나머지 도무지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인간의 본성이 이토록 악할 줄이야. 원래 집단사고란 어리석음으로 떨어지기 쉬운 것이라지만, 저렇게까지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니. 원죄의 존재를 믿는 윤혁도 이렇게까지 생생하게 악을 체험하기란 처음이었다.
“과하게 몰입하진 마시죠, 강윤혁 씨. 이것은 실제 세상이 아닙니다. 이곳에 있는 캐릭터들도 실존하는 인간이 아닙니다. 만들어진 세계관입니다. 시뮬레이션 우주란 원래 그런 것입니다.”
“아니, 도대체 이런 광기 어린 세계관을 무슨 이유로 만들어냈죠? 비록 실제 사람은 아니라지만 가상 세계와는 다르게 실체인 세계라면서요? 이건 누가 제작한 것입니까? 형인가요, 아니면 다른 초인인가요?”
그는 현실이건 가상이건 불의의 실재함에 진심으로 분노하였다.
“진정하시죠. 물론 처음 시뮬레이션 우주 프로젝트를 주도한 것은 분명 아버지가 맞지만, 지금 보는 세계관의 구체적인 내용을 구상한 분은 그분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분의 의지와는 별개로 생성된 것입니다.”
“그럼 누가 창조했단 말입니까?”
“지금 본 이 이야기에 등장한 괴인입니다.”
“뭐라고요?”
“바로 그자의 뇌리에서 생성된 세계입니다.”
순간 당황한 윤혁은 턱을 떨어뜨렸다. 이어지는 설명은 더 경악스러웠다. 이 세계관에 등장한 괴인은 원래 실존 인물이었다고 한다. 열다섯 살의 카이젤이 에우로페 제국의 지그문트에게 형벌 집행권을 넘겨받은 신국 출신 사형수. 그는 이 시뮬레이션 우주에서와 설정과 똑같은 죄목을 현실에서도 자행했던 자였다.
“사형 직전 아버지는 특수 실험을 감행했습니다. 그분은 사형 수단으로 특수 기술력을 활용하셨죠. 지금은 폐기된 방법이라 저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마 사형수의 깊은 악의와 증오심이 담긴 무의식을 강제로 증폭하는 원리 같습니다. 그 후 사형수의 뇌를 부검해서 확보한 뒤 거기 남아있는 전기 신호를 기반으로 미리 접속해둔 ‘백지 배경의 시뮬레이션 우주’ 위에 덮어씌운 듯합니다.”
“그 말인즉 이 세계관의 모습은…….”
“사형수의 복수심과 내적 갈망이 반영된 무의식을 구체화한 세계죠. 물론 구체적인 세계원리, 물리법칙, 그리고 세부 설정들은 따로 아버지가 새겨 넣어야 했지만요. 중심 주제는 사형수의 뇌가 만든 것이 맞습니다.”
윤혁은 얼마 전 영화관에서 형이 중얼거렸던 혼잣말을 상기했다. 그때 그는 무수히 많은 영화를 제작했던 적이 있었노라고 말했었다. 그게 영화관에서 상영하는 영화가 아닌 이러한 부류, 곧 시뮬레이션 우주들을 의미했던 것일까?
(다음 회차에 계속)
이전회
94회 초인들의 세계 Ch 36. 기술적 특이점 (5) |
다음회
96회 초인들의 세계 Ch 37. 시뮬레이션 우주 (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