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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99회 초인들의 세계 Ch 38. 크리스마스 (1)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2.11.09 | 회차평점 0 0

 

 

 

 

Chapter 38. 크리스마스

 

 

 

 

 

 

  시뮬레이션 우주 접속이 종료된 이후 윤혁은 곧장 워프를 거쳐 제로원으로 송환되었다. 중립 지대라고 불리운 그 섬은 들어올 때는 제한 조건이 엄격했으나 나갈 때는 그와 같은 제약이 없었다. 거창하게 들어온 것이 무색하게 퇴각은 편리하고도 허무했다.

  진은 윤혁을 숙소로 돌려보내 준 뒤, 자신은 배웅도 없이 자취를 남기지도 않은 채 홀연히 떠나갔다. 찝찝한 숙제를 남기고 떠나간 그는 ‘준비를 마치면 나중에 연락을 줄 테니 기다리라’라고 윤혁에게 텔레파시만을 남겼다.

  숙소로 귀환한 이후 며칠간은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딱 잘라 이유를 설명하기 힘든 복합적인 감정과 복잡한 생각들 때문에 힘들었다.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알게 되었다. 고국에서 쫓겨나 섬에 거하는 메시아닉 유대인들, 그리고 하늘도시라는 시간 감옥 속에 갇힌 수많은 식민지 주민들. 한쪽은 영혼의 자유는 소유한 대신 몸이 떠돌이 신세였고 다른 한쪽은 시스템에 사육당하며 일련의 목적하에 이용당하고 있는, 거대 감옥 속에 구속된 죄수 신세였다. 어느 쪽이 더 불쌍할까? 여하튼 윤혁에게는 두 집단 모두 마음의 부담으로 다가왔다.

  “내게 무슨 능력이 있다고 이런 과업을 주실까?”

  루디아와 함께 나란히 앉아 석양을 바라보며 장래의 소망을 허심탄회하게 나눌 때는 모든 고민과 근심이 잊혀졌었다. 영혼의 깊은 밑바닥에서부터 희망이 채워졌었다. 둘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차별 없이 복음 안에서 하나 되는 꿈을 공유하면서 막연히 기뻐했었다.

  그러나 곧이어서 지구 바깥 세계에 관한 비밀을, 저 너머에서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들의 진상을 진에게서 엿들은 직후 윤혁의 자신감은 다시 한번 큰 흐름 앞에 무릎이 꺾여버리고 말았다.

  “참 연약하기 그지 없네.”

  -냐아아아아.

  고양이가 상념에 잠긴 청년의 무르팍 위로 올라와 배를 까뒤집었다. 윤혁은 고양이 태원의 부드러운 복부 살갗을 쓰다듬었다. 아무런 걱정도 없는 동물들이 어떤 의미에서는 조금 부러웠다.

  “갈 길이 너무 막연하니 감이 잘 잡히지 않아.”

  변수를 만들어내느니 형을 변화시키느니 뭐니, 진이 자신에게 던진 말들은 하나같이 당최 이해가 되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기도실의 어르신도 자신에게 그런 수수께끼들을 던지긴 했으나 그분은 그래도 마음을 편안케 해주기라도 했었다. 진의 경우 꿍꿍이를 몰라 더욱 난감했다.

  -크르르르릉.

  이번에는 커다란 호랑이 케일이 어슬렁거리며 다가와 윤혁의 무릎 위에 있는 고양이에게 머리를 파묻었다. 윤혁의 머릿속에 엉뚱한 상상이 하나 들었다. 형도 지금 이 호랑이처럼 자신을 애완동물로 취급하고 있을까? 하긴 체급 차이만 봐도 그럴 만하고도 남는다. 그러니 동생 앞에서는 아무런 경계심도 없이 자신의 소유물들을 당당히 자랑하는 것일 테지.

  ‘진이나 다른 초인들도 나를 그렇게 보았으려나?’

  초인들의 시선에 해부당하는 거북한 일은 이제 사양하고 싶었다. 가치를 규정해줄 잣대라면 하나님의 시선 하나로 충분하거늘. 세상의 판단은, 특별히 모든 것을 소유했다고 자부하는 자들의 판단은 불편했다. 누군가는 윤혁을 애완동물로, 누군가는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으로, 누군가는 도구로 여긴다.

  ‘그런 시선에 갈대처럼 흔들리는 나도 참 한심하지.’

  자조하는 마음이 살짝 스쳤다.

 

 

 

 

 

 

*****

 

 

 

  카이젤은 얼마 후 업무를 마치고 지구에 돌아왔다. 그는 여느 때처럼 친절하게 굴었다. 물속에서 신수의 돌발 행동에 당한 사건 이후로 형제는 이전보다 허울 없이 서로를 대하게 되었다. 윤혁 입장에서는 심해보다도 짙은 안개보다도 더 은밀한 형의 속마음까지는 뚫어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표면적으로나마 두 사람의 친밀감은 확연히 뿌리내렸다.

  ‘이젠 나도 저 사람에게 어찌 선을 그어야 할지 헷갈려.’

  인간적으로는 저토록 부드럽고 자상한 모습을 보이는데도 어떻게 그런 충격적인 경영을 아무렇지도 않게 기획할 수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카이젤이라는 존재를 어떻게 여겨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저 사람의 엄연한 가족이라는 사실이 가끔 원망스러웠다. 그저 양쪽 다 평범했으면 좋았으련만. 보통의 형제처럼 우애를 나누기에는 그 사람의 기묘한 사고방식과 지나친 비범함이 거리감을 만들었다. 그렇다고 그를 위험한 존재로 규정하자니 이번에는 그가 아픈 손가락 같이 느껴져 양심에 걸렸다.

  “내가 없는 동안에 잠시 자리를 비웠다고 들었다.”

  카이젤의 질문에 윤혁은 함구했다.

  “⋯⋯.”

  “그래. 캐묻지는 않으마. 나름의 사정이 있었겠지.”

  침울하리만큼 어색한 침묵이 지속되었다.

  “내게 생각을 읽힐까봐 걱정하진 않아도 돼.”

  그런 걱정을 했노라고 고백한 적도 없거늘, 영 앞뒤가 안 맞는 말인지라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가 나왔다. 하지만 진에게 당할 때처럼 불편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피로 이어진 인연이라서 눈곱만큼의 신뢰감은 남은 것일까?

  “앞으로 네게만은 정신 간섭을 쓰지 않도록 노력하마.”

  형은 동생에게 진지한 태도로 약속했다. 아마도 그는 그 기술 때문에 자기 동생이 자신을 향한 신뢰의 마음을 잃었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그 생각도 영 틀린 건 아니었다. 하지만 윤혁의 뒤숭숭함은 비단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우주 식민지, 정신지배, 이종족, 기계 율법, 이데아까지, 그 모든 현실이 형과 자신의 평범한 우정을 차단하는 장벽처럼 여겨졌다.

  “그러니 나한테는 생각을 들킬까 봐 걱정하거나 억지로 숨길 필요 없다.”

  카이젤이 동생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진심이긴 하구나.’

  만일 그가 속인 뒤 안심시킬 작정이었다면 이 자리에서 즉시 진과 밀회했던 기억을 수색했겠지. 그랬더라면 진도 곤란해지고 윤혁도 곤란해졌으리라. 어쩌면 기억을 지우려 들 수도 있겠고. 자신에 관해 들은 모든 정보를 삭제해버릴 수도 있었으리라.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 것을 보아 당장은 안심해도 될 듯했다.

  “두 번 다시 진실 게임 때처럼 몰아세우지 않을게.”

  카이젤이 형의 모습으로 부드러운 어조로 친근하게 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순간 윤혁은 마음속에는 울컥하는 감정이 반작용으로 치밀어올랐다. 괜히 혼란스럽게 만드는 저 사람이 맘에 들지 않았다.

  ‘저에게만 그렇게 대하시면 안 되죠!’

  당신이 개인적으로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지만 제 자유의지를 존중한다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하셔야 했어요. 어떻게 그 많은 사람의 운명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죠? 이전에는 당신의 행위들을 보았어도 ‘인간을 위해서’라는 명목이라도 있었기에 참을 수 있었어요. 하지만 인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인간들의 운명을 속박하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죠!

  하고 싶은 말들이 산더미 같았으나 한마디도 안 나왔다.

  ‘난 할 말도 똑바로 못하는 겁쟁이로구나.’

  카이젤은 유사 이래로 새로운 바벨탑을 쌓는 데 성공했다. 그것도 모자라 그 탑 내부에 무수한 사람들을 가두어버렸다. 수십조 이상의 라푼젤들을 바벨탑 속에 가뒀다. 혹시라도 언어가 달라져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사태가 재발할까봐 이번에는 아예 구금이라는 전략까지 택했다. 윤혁은 너무도 상심된 마음에 형에게 쉽게 입을 열 수 없었다.

  ‘혹시 내가 형에 대해 미처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라도 있나?’

  차라리 그라는 존재가 빚어진 배경이라도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그것은 무리한 기대였다. 윤혁은 마음을 비우고 모든 비밀이 정직하게 드러날 때까지 잠잠히 있기로 하였다. 윤혁은 자신의 혼을 향해 명령했다. 지금은 낙담하지 말고 그저 때를 기다리라고.

  ‘언젠가 하나님께서 문제를 풀어주시겠지.’

  막연하게 갑갑함을 달래며 스스로를 위안해보았다.

 

 

 

 

 

 

*****

 

 

 

  그렇게 어느덧, 시간이 흘러 집에 돌아갈 날이 가까워졌다.

  “12월 25일에 따로 시간이 낼 수 있나?”

  크리스마스 시즌쯤에 때마침 카이젤이 윤혁에게 질문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아니, 매우 급한 일은 아니긴 한데.”

  “죄송하지만, 저는 가족들과 크리스마스 때 약속이 있어요.”

  싫어서 던지는 핑계가 아니라 사실이었다.

  “저희 지역 교회 식구들과 모여서 예배도 드려야 하고 그날 친구들과도 만남이 있고요. 불가피한 일만 아니라면 약속을 지킬 생각이에요.”

  이번 제로원 방문 전 리온과 그의 신앙 공동체 동료들은 윤혁을 새 동역자로 환영한다는 의미로 올해 성탄절 특별 회담에 윤혁을 초대하기로 했었다. 미리 정해졌던 선약이니 깨트릴 생각도 없었고 개인적으로 본인 스스로도 모임이 몹시 기대되었다. 물론 지역 교회 성도들과 같이 드릴 성탄절 전야 예배도. 몇 안 되는 인원이라지만 한마음으로 모이는 것 자체로 크나큰 의미가 있었다.

  “그래? 그거 정말 아쉽군.”

  카이젤은 호랑이 같은 위엄에 어울리지 않게 꼬리를 축 내린 커다란 대형견처럼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허술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명색이 세계 최고의 미남이라고 평소의 냉정하고 근사한 표정 못지않게 완벽한 그림이 그려지는 것이 참으로 신기했다.

  “너를 초대할 생각이었는데 말이지.”

  “성탄절에 중요한 일이라도 있으시나요?”

  뜻하지 않게 거절한 격이라 미안한 마음도 은근 들었다.

  “아니, 그게 사실은…….”

  카이젤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내 솔직히 입을 열었다.

  “그날이 내 생일이라서.”

  “정말요?”

  형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사교 모임을 썩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가까운 친구들과 부하들이 일 년마다 한 번씩 그 자리를 함께 축하해주도록 허락은 하지. 너와 같은 혈육에게서 축하를 받은 적은 지금껏 한 번도 없었지만.”

  “아.”

  동생에게도 그 자리에 참여해 축하해달라고 부탁하는 말이었구나.

  ‘의외의 면모네.’

  물론 세계 제일의 부와 권력을 지닌 인간이니 그에게 잘 보이려는 부하들이 찾아와서 매번 듣기 좋은 말들을 했을 것이다. 화려한 파티도 열고 진귀한 선물들도 잔뜩 받았으리라. 아니 어차피 재물로는 아쉬운 게 아예 없을 테니까 선물 자체는 큰 의미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가족과 함께했던 적은 없었을 것이다. 그간 그에겐 피를 나눈 혈육이 곁에 없었을 테니까.

  “절대로 강요는 아니야. 네가 선약 때문에 걱정된다면 내가 시간을 조정할 수 있다. 어차피 한국과는 시차도 다르니까 날짜 걱정을 할 필요도 없어. 네가 이동하느라 조금 피곤하긴 하겠지만 그 정도는 내가 편의를 봐주면 돼.”

  문득 한 번 정도는 형을 축하해줘도 되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두려웠다. 분명 그 자리에는 현 인류의 지배층도 잔뜩 모일 것이다. 진이나 성운 같은 온건파를 마주해도 이렇게 금세 지치거늘 나머지 인간들은 오죽 더할까. 하나같이 윤혁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살아가는 부류들인데 그 앞에서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아직 없었다.

  “우리가 많이 불편한가?”

  말하기 불편했던 차에 카이젤이 먼저 선수를 쳤다.

  “그렇군. 내가 처지를 이해해주지 못했군.”

  “미안해요.”

  “괜찮다. 어쩔 수 없지.”

  진심으로 실망하는 모습을 보니 며칠간 그에게 깊이 실망했던 것도 잊고 미안함이 앞섰다. 윤혁은 이렇듯 쓴 뿌리를 오래 담아두지 못하는 기질의 사람이었다. 설령 상대가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가능성을 담은 존재라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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