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100회 초인들의 세계 Ch 38. 크리스마스 (2)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2.11.12 | 회차평점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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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 있어서 ‘신(god)’이란 곧 그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대상을 의미한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추구할 가치가 있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은 것. 어쩌면 그 열렬히 추구하는 마음을 ‘신앙심’으로 정의해도 되리라.
대부분의 경우 그 신은 ‘자기 자신’이다. 그 증거로 많은 사람이 자기 삶의 주인공은 자기 자신이라 여긴다. 간혹 이타심이나 선한 가치를 추구하는 인생도 있으나 결국 궁극적으로는 그런 행위도 ‘나’를 위한 행위인 경우가 대부분. 이렇듯 모든 사람이 자신을 주인공으로 둔다. 그러나 정작 세상의 중심에는 누구도 서 있지 않다. 세상은 어느 특정 사람을 중심으로 돌아가진 않으니까.
한편, 어떤 사람들에게는 소중한 사람이 신이 되기도 한다. 친구, 형제, 연인, 부모, 자식처럼.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부유함, 명예, 가치 등이 신이 된다. 어떤 이들에게는 자기 자신도 올바로 알지 못하는 마음속의 허상과 공상이 경배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렇듯 각자가 마음속에서 섬기는 신은 제각기 다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신, 곧 자화상에 불과하다. 자신이 신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들, 그저 마음속에 빚어낸 그림에 지나지 않는다.
크리스마스라는 날은 한 해 가운데 가장 특이한 날 중 하나이다. 이날 지구상의 모든 인간은 자신 속의 신을 솔직하고 열렬하게 섬긴다. 사람들은 유독 크리스마스만 되면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대상을 본능적으로 찾아간다. 일에 목숨을 거는 일벌레들은 직장 전선으로, 낭만주의자들은 시와 음악과 축제가 있는 곳으로 떠난다. 또한, 많은 이들이 연인이 있는 자리로 찾아간다. 이 모두가 사람들 각자에게는 신이요, 경배의 대상이요, 자신의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대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이날 ‘신’을 찾아 경배한다. 인간이 만들어낸 신이 아닌, 인간을 만들어낸 신을. 누구나 가슴속에 신을 모시고 산다. 그런데 그 신이 인간을 지은, 자기 자신을 창조하여 삶 속에 의미를 부여한 바로 그 신과 동일하다면, 그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
“우리 아들, 내일이면 한국에 돌아오는 건가.”
성한은 일을 하던 도중에 문득 생각이 떠올라 중얼거렸다. 곁에서는 그와 함께 성탄 예배 준비를 돕는 아내가 있었다. 현재 둘은 가업의 특색을 살려 성탄절 예배 모임 때 성도들과 나눌 애찬의 음식을 장만하는 중이었다.
“무사히 잘 도착했으면 좋겠네.”
내일은 그들이 거하는 이 지역 부근의 신실한 교회들이 함께 모여 연합 예배를 드리는 날. 기독교가 쇠락한 이 시대에 이런 경축의 날은 1년 중 기껏해야 추수감사절, 부활절, 성탄절 정도였다.
“가뜩이나 좋은 날인데 아들도 가족들과 함께해야지.”
슬프게도 이런 좋은 날을 같이 누릴 자들도 이젠 얼마 없었다. 대다수 교회가 자취를 감추거나 배교한지 수십 년도 넘었다. 지난 세기 초 청년들이 대거 교회를 떠난 뒤 세대가 교체되면서 예배당들은 황량해졌다. 그 후 혼돈의 시대에는 나라 간의 크고 작은 분쟁과 이기적 과학기술이 낳은 사태로 인해 교회 역시 파멸적 피해를 보았다. 그 시기에 거의 모든 종교는 광포하게 변질하거나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예배당을 포함한 종교 건축물들도 대거 철거되었다. 올바른 믿음의 사람으로 남은 자부터가 극소수인 마당에 건물은 큰 의미도 없겠지만.
‘시대가 시대인만큼 불가피한 일인가.’
생각해보면 이미 21세기 이래로 신앙의 몰락은 예고되어 있었다. 위버멘쉬라는 걸출한 위인이 이 세상에 나타나 대활약을 벌이면서부터 사람들의 믿음의 대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신에서 눈에 보이는 위대한 지도자로 바뀌었다. 신 같은 것은 찾을 여념도 없었고 그럴 마음도 사라졌다.
최초의 위버멘쉬가 떠난 이후로도 이러한 현상은 한 발자국도 옮겨지지 않았다. 매번 새로운 위버멘쉬가 그 자리를 이어받아 우상이 되었고 이는 지금까지도 이어졌다. 지금 그 우상의 옥좌에는 성한의 아들이 있었다.
중동이나 아프리카 등지 같은 과거 핍박이 성행하던 곳에서는 도리어 아직 소수의 신실한 자들이 남아 활약하고 있었지만, 이들의 활약도 말 그대로 마지막 단말마였다. 몇몇 청년들이 이토록 안간힘을 쓰고 있음에도 복음의 열매는 소멸 직전의 상황에 놓였다.
물론 이렇게 소수 정예만이 살아남는 것이 나름의 유익한 측면도 있었다. 변절하고 배교한 종교 세력이 떠나가고 사라짐으로써 누가 진정 그리스도의 편이었는지가 분명해졌으니까. 씁쓸한 현실이었다.
그런 가운데에도 감사하게도 여전히 성탄절은 공공 기념일로 남아 있었다. 오랜 세월 인류 문명 위에 자취를 드리웠던 축제의 날은 그림자의 형태로나마 영향력과 존재감을 잃지 않았다. 신자들에게는 물론이거니와, 교회 밖 세상 사람들에게도 그날은 기쁨의 날이었다.
물론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12월 25일’이라는 특정 날짜가 특별한 의미의 날로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12월 25일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실제 날짜도 아니며 중요한 본질은 그분의 오심을 기념하는 일 그 자체이니까. 그렇기에 실제로 어떤 신자들은 주의 역사 속 강림을 감사하되 날짜 자체는 다른 날짜에 더 의미를 두기도 했다.
메시아닉 유대인들이 대표적인 경우였다.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기념하도록 주신 날들이 있단다.”
이 무렵, 섬에서는 아렌 노인이 식탁에 앉아 네 명의 아이들에게 토라(모세 오경)를 가르치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아이들에게 말씀을 들려주되 아이들 스스로 소리 내어 읽고 익히게 하는 유대인들의 전통 교육법, 쉐마(Shemma, 히브리어로 ‘듣는다’ 라는 단어). 이 교육 방침은 예슈아를 메시아로 믿는 오늘날의 유대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전승됐다.
“유월절은 우리 조상이 이집트에서 해방된 날이지. 이날은 또한 우리를 죄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해 주신, 피 흘리신 어린양 예슈아, 그분의 십자가 사역에 감사하는 날이란다. 유월절에서 시작해 이어지는 일주일인 무교절 기간에는 누룩 없는 빵을 먹지. 이 일주일간은 예슈아의 무덤에 묻히심을 기념하며 죄로부터 자신의 삶을 분리하는 거룩함의 삶, 곧 성화(聖化)를 깊이 생각하려무나.”
어려서부터 거듭 들었던 이야기.
“초실절에는 무덤에서 일어나 부활하셔서 생명의 첫 열매가 되신 예슈아를 기억하면서 우리 수확의 처음 소산물을 하나님께 바치지.”
아이들은 그 이야기를 거듭 뇌리에 새겼다.
“오순절은 성령님께서 우리 민족과 이방 세계의 모든 믿는 자들에게 오신 날이란다. 우리는 평생 그분을 우리 속에 모시며 인도함을 받지. 오순절은 한편으로는 시내 산에서 모세가 율법을 받은 날이기도 하단다. 모세는 돌판에 법을 새기셨지만, 성령님은 그 율법을 우리 심령에 새겨주시는 분이란다.”
루디아도 가르침의 자리에 함께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초막절은 우리 조상들이 일 년 중 가장 큰 추수를 거두는 추수감사절의 날이란다. 그날에는 또한 훗날 예슈아께서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정의로운 통치를 집행하실 ‘왕국’을 소망하는 의미도 담겨있단다. 조상들은 이 절기에 천막에서 생활하며 과거 40년 광야 시절을 추억했지. 우리도 이 땅에서는 잠시 광야 천막생활을 하는 것이나 매한가지란다.”
‘소망이라.’
식사 대접을 돕는 와중에 루디아는 얼마 전 자신들을 방문했던 한 청년을 생각하였다. 단정하고 예의 바르면서 씩씩하고 올곧았던 그 젊은 사람. 이런 각박한 세상 속에서 그 같은 사람을 또 만나기란 쉽지 않으리라. 그도 분명 잠시 거쳐 가는 이 세상이 아닌 ‘왕국’을 소망하던 사람이었지.
‘한 번 더 만날 기회가 있으면 좋으련만.’
아니다.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용기를 내어 직접 찾아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세상의 적의와 낯섦이 두려워서 피해 다니기만 했다. 하지만 아픈 기억을 극복하려면 적극적으로 부딪혀 봐야 하지 않을까?
‘아가씨께서도 흔쾌히 허락해주실 거야.’
항상 섬 안에만 갇혀 지내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으니까.
‘바깥세상에 빚져야 하는 부분은 마음에 걸리지만.’
인어공주가 육지 인간들의 세상으로 나와 그들 안에 소속되기를 원했던 것처럼, 그녀도 유대인 난민 마을이라는 폐쇄적이고 고립된 곳에서 한 발자국 나와 좀 더 넓은 곳에서 새로운 형제들과 함께하기를 바라는 소망을 품었다. 바깥에도 아직 분명 믿음의 형제들이 남아 있으리라. 이방인이 용기를 내어 다가왔듯, 이제는 유대인들도 마음의 문을 열고 발을 디뎌야 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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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 당일 오전, 약속대로 윤혁은 겨울옷 차림으로 한국의 부모님 집에 도착했다. 기온이 완벽하게 조절되던 곳에서 지내다 밖으로 나오자 찬 공기가 몸에 닿아 금세 살갗이 부르르 떨려왔다. 하늘에서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기상 현상을 제어할 만한 행성 시스템을 갖춘 이후로는 매년 이 날이면 세계 각국에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눈이 내렸다. 낭만적이긴 했지만, 그 덕에 화이트 크리스마스란 말은 희소성을 잃게 되었다.
“엄마! 아빠! 다녀왔습니다.”
“윤혁아, 수고했다.”
“어휴, 그동안 밥은 잘 챙겨 먹었고?”
성한과 유진 부부가 달려와서 장성한 아들을 포옹하였다.
식구들은 해후를 간단히 마친 후 곧이어 있을 신앙 공동체 모임에 참여할 채비를 했다. 재작년에도 그랬듯 근방 세 개의 중소 도시에 자리한 소규모 지역 교회 열 개가 함께 모이는 연합 예배가 있을 예정이었다. 규모는 작았으나 매년 이 모임을 통해서 성도들은 성경 말씀도 배우고 즐거운 교제의 시간을 나눌 소중한 기회를 얻었다. 믿음이 사라져가는 시대임에도 남은 이들은 이런 기회를 통해 서로를 더욱 굳게 붙들며, 함께 떡을 떼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추억하였다.
윤혁의 가족과 다른 가정들은 예배의 한 자리에 모였다. 오늘 그들은 주님께서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념하는 가르침을 들었다. 이어서 어린아이들과 청년들이 준비한 연극과 찬양을 감상하며 기뻐했다. 그 후 점심 만찬을 나누면서 각자의 삶에서 체험했던 하나님과 동행한 경험을 공유하였다.
‘이 자리에 모일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매년 이날은 윤혁의 뇌리에 좋은 추억을 남겨왔다. 남들처럼 크리스마스에 만날 연인은 없었지만, 윤혁에게는 이렇게 여러 성도가 주님 안에서 모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할 일이었다. 신앙이 쇠퇴하여가는 이 안타까운 시대에 성탄절은 그에게 늘 소망을 상기시켜 주곤 했다. 시대와 상관없이 변함없이 함께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다시금 기억나게 해주는 날이었다.
문득 윤혁은 이 자리에 함께 있었으면 하는 사람이 떠올랐다.
‘지금도 잘 지내고 있겠지?’
얼마 전에 동화 속 이야기 같은 따뜻한 곳에서 만났던 그들. 아마 유대인들이니까 크리스마스는 기념하지 않겠지. 그들에게는 좀 더 친숙한 전통들이 있고 그 역시 하나님께서 직접 기념하도록 주신 날들이니까. 어차피 같은 주님을 믿는 형제이니 날짜 자체는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래도 한 번쯤 문화를 공유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다음번에는 메시아닉 유대인들을 성탄절에 교회로 초대해보고 싶었다. 이방 세상 사람들에게 많은 상처를 입은 이들이니 쉽게 문을 열어줄지는 모르겠지만, 기회만 된다면 그들에게 이방인들의 따뜻함을 가르쳐주리라.
그러다가 무심코 다른 곳에도 생각이 뻗었다.
‘하늘도시들은 바깥과 단절된 시간축 속에서 살아간다지?’
즉 하늘도시의 주민들에게는 지구의 날짜 개념이 적용되지 않는다. 바깥의 한 시간이 그 안에서는 수백 년도, 수천 년도 될 수 있다. 거기다가 아예 태양계 외부에 있는 곳이니 지구의 자전과 공전 개념 또한 적용되지 않으리라. 내부의 에너지원 혹은 인공 태양 같은 것에 의존하겠지. 그 인공 태양이 임의의 주기대로 일조량을 조절하겠지. 그레고리력 자체가 무의미하리라. 어쩌면 성탄절은 고사하고 생일이나 기념일 같은 개념조차도 없을 가능성이 컸다.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그 세계의 영적 상태야.’
그곳들이 복음 미개척지라는 점이 심히 마음에 걸렸다. 소수 민족만 거하는 오지라면 또 모를까, 그곳들에는 수십 조 이상의 영혼들이 살아가고 있다.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곳이니 태어나고 죽는 순환 인구의 총량을 고려하면 훨씬 더 많겠지. 신해의 경험담으로 미루어 볼 때 그곳들은 전부 하나님을 모르는 세계임이 분명했다. 도리어 그들로선 바깥의 관리자, 곧 인류연합과 초인들이 운명의 주재자나 다름없을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었다.
‘지구의 문화, 언어, 종교는 다 희석되어 없어졌겠지?’
바깥과 분절된 채 수천, 수만 년을 보냈을 테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수십 조의 혼(魂)들이라.’
가공할 숫자의 죽어가는 안타까운 영혼들. 지구의 신자들이 전혀 손조차 쓰지 못하는 그곳들에서 불쌍한 영혼들이 무의미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 현 실태. 설령 물질적으로는 배불리 먹고 마신다고는 해도 참된 소망을 찾지 못한 그들에게는 공허함, 속박, 두려움, 죄의 지배력만 가득할 것이다.
‘진은 그들의 실질적인 속박을 느슨하게 흔들어달라고 부탁했지.’
그자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이니 지극히 정치적인 관점에서 판단하여 그런 요구를 했으리라. 윤혁을 도구로 이용하고자 눈여겨본 것도 그런 정치적 판단을 관철하고자 함이겠지. 하지만 윤혁에게는 무수한 영혼의 비참한 멸망이 더 심각한 문제였다. 이런 고민을 묵상하려니 기분이 울적해졌다.
‘원래는 기쁘게 웃어야 하는 날인데.’
(다음 회차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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