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103회 초인들의 세계 Ch 38. 크리스마스 (5)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2.11.19 | 회차평점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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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련함과 미련이 반반씩 섞인 회상을 마친 카이젤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슬슬 성가신 잔소리를 할 시간이로군.”
그는 보좌하는 세 비서를 바라보았다.
“싱클레어, 룩스, 마크로스, 너희는 물러나서 편히 즐겨라.”
“알겠습니다.”
그의 의석은 연회에 참석한 모든 이를 한 번에 내려다 볼만큼 높은 층에 놓여있었다. 또한 행성급 전략 병기로도 파괴할 수 없는 재질로 된 특수 유리가 옥좌와 방문객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아랫사람들을 내려다보는 일은 그에게 있어서 매우 익숙한 일이었다.
잠시 후, 시스템이 보안 해제를 허가했다.
{대표님, 준비되었습니다.}
“알겠다.”
유리가 격자 단위로 해체되어 사라지고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반갑습니다.”
정장 형태 제복과 코트를 입은 그는 숨 막힐 정도로 두려웠고 동시에 아름다웠다. 스스로를 일반인과 격이 다른 존재로 여기던 오만한 초인들이 한순간에 정적 속에 얼어붙었다. 그들은 자신들보다도 높은 격의 존재 앞에서 경외와 두려움과 동경에 사로잡혔다.
‘다들 긴장했군. 하긴 대표님 앞에선 본능적으로 그럴 수밖에.’
데미안은 식은땀을 흘렸다. 인류연합 대표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 가면 너머의 얼굴을 인식하도록 허락받은 건 비서들과 TFE 일원들뿐이었다. 시각 인식 코드를 받지 못한 나머지는 그저 칠흑같이 시커먼 가면만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그들에게는 그 칠흑이 두려움으로 다가오리라. 그리고 자신처럼 주군의 얼굴을 본 자들은 태양 빛의 섬뜩한 금안 때문에 얼어붙겠지.
“자리를 같이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카이젤이 운을 떼기 시작했다. 그는 주저리주저리 길게 연설하는 것은 썩 좋아하지 않는다. 본래 언변의 실력에 자신 있는 자는 단 몇 마디의 핵심 연설이면 충분히 청중을 위압할 수 있는 법.
“편안한 마음으로 연회를 즐기시길 바랍니다.”
매혹적이지만 거역할 수 없는 힘이 담긴 중저음의 큰 목소리.
“함께 하지 못한 분들도 있어서 아쉽군요.”
산군(山君) 호랑이 앞에 선 늑대들은 조용히 꼬리를 내렸다.
“성실하게 자기 일을 하느라 못 온 이들도 있습니다만.”
가면을 통해 여러 자연 언어들과 인공 언어들이 동시에 발성되었다.
“옛 친구들은 안타깝게도 불미스러운 일 때문에 이 자리에 없군요.”
나근나근하고 온건한 말투임에도 모두가 일제히 오싹함을 느꼈다. 초인의 세계의 원칙은 실력우선주의, 즉 뛰어난 자가 책임을 떠맡는 것. 그리고 또 하나의 원칙이 있었으니 그것이 승자 독식, 이른바 독재 시스템이었다. 최고의 자리를 두고 경쟁하다가 밀려난 패자가 승자에게 복종하기를 끝까지 거부한다면 승자 독식 원리에 따라 모든 것을 박탈당해야 한다.
과거 3세대 초인의 정점에 서기 위해 경쟁했던 다섯 명이 있었다. 한 명은 최종 승자가 되었고 둘은 끝까지 반항하다가 모든 것을 빼앗기고 축출되었으며 둘은 항복하여 가까스로 중립만 유지하게 되었다.
SSS 클래스를 능가하는 그 넷마저 그렇게 되었으니 나머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허튼 꿈을 꾸지 말라는 부드러운 카이젤의 경고가 초인들의 마음에 절대적 질서를 상기시켰다. 그들도 패배자들의 결말을 봤으니까. 순종하고 협조하면 일한 만큼의 큰 대가를 누리게 될 것이나 시스템에 도전하면 그에 상응하는 응징으로 체제에서 배제당하는 비극을 체험하리라.
“인류가 지금의 위치에 오르기까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해온 수많은 이의 헌신적인 열정, 특별히 여러분의 공로가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나는 그 헌신의 가치를 귀중하게 여깁니다. 아울러 여러분이 오늘의 성과에 안주하지 않고 내일을 위해 더욱 앞으로 나가리라고 기대합니다.”
당근에 이어 곧바로 채찍이 제시되었다.
“만일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내가 단지 스스로의 탐욕을 채우기에 바빴던 이전의 허다한 어리석은 지도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면 얼마든지 힘으로 끌어내려도 좋습니다. 그런 이유라면 저도 환영입니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었다. 어느 나라의 왕이 자기 자격을 신하들더러 함부로 재단해도 좋다고 선뜻 제시하겠는가. 그러나 지금 그는 진심을 말하고 있었다. 그만큼 자기 자신에 대해 자부심과 확신이 있었기에 신하들에게 평가를 받더라도 겁낼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혹은 자신이 지금의 내 역량을 뛰어넘었다고 믿는다면 그분의 도전도 환영합니다. 나는 이중 잣대를 싫어합니다. 누구든 저보다 탁월한 ‘인간’이 있다면 얼마든지 그를 위해 봉사할 생각이 있습니다.”
현존하는 인간 중 그러한 자가 존재하지 않음을 모두가 알기에 이 선언 역시 큰 의미가 없었다. 한 시대에는 오직 한 명의 위버멘쉬만 존재한다. 전대가 죽어야만 새로운 위버멘쉬가 나타난다. 이것은 지난 세기에 귀납적으로 확인된 진실이었다. 앞으로도 그를 넘어설 인간은 나타나지 못하리라.
‘아니, 나타나더라도 의미가 없지.’
지금의 3대째 위버멘쉬는 현재진행형으로 폭발적인 성장과 진화를 거듭하는 중이었다. 앞으로도 그와 나머지 초인들과의 실력 차이는 더 격심하게 벌어질 것이다. 이는 후발주자로 태어날 초인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럴 일도 없겠지만, 설령 그 이상의 재능을 지닌 자가 태어난다고 한들 그땐 이미 카이젤의 재능이 더 높은 경지로 성장해 따라잡기도 불가능한 위치에 있을 것이다.
“그런 이유가 아니라면 충실하게 자기 위치에서 일하십시오. 지식과 문명과 문화라는 인류의 자산을 더 풍성하게 발전시키고 많은 이들이 더 풍요로움을 누리도록. 나아가서 우리를 예속하던 제약들을 극복하도록 노력하십시오. 내가 아닌 인류 전체를 돕겠다는 각오로 일하십시오.”
그는 힘과 권위로 누르는 것만이 아니라 - 그걸로도 충분했지만 - 고고한 이상, 매혹적인 정치 철학, 훌륭한 인망과 언변으로 사람의 마음을 구워삶아 자발적 충성을 유도하는 데에 탁월했다. 실제로 그와 함께 일하면서 인류가 시간, 공간, 신체, 경제적 제약을 하나씩 뛰어넘으며 성장하는 모습을 똑똑이 봤던 초인들은 지도자의 철학과 태도와 능력을 강하게 확신하였다.
연설을 마칠 때쯤 그의 최면 같은 웅변이 평탄한 음으로 돌아왔다. 잔뜩 고조되었던 초인들은 그제야 잠시 긴장의 끈을 느슨하게 하고 평안을 되찾았다. 카이젤의 입에서 나오는 여러 언어가 공용어 하나로 통일되었다.
“이런 날에 결의를 재차 나누게 되어서 더할 나위 없이 기쁘군요.”
그는 매년 이렇게 초인들의 결의를 탄탄히 굳혀왔다.
“남은 시간 즐겁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이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건배와 동시에 축사를 마쳤다.
*****
어느 낡고 큰 교회 건물 안.
“윤혁도 도착했으니 이제 시작해도 되겠지?”
에일리와 레브가 불을 끄고 곧이어 진행될 행사를 위한 준비를 개시하였다. 옆에서 제니와 창도 일손을 거들어주었다. 잠시 후, 지역 교회 연합 예배를 마친 윤혁이 막 도착했다. 그는 친구들이 과연 무슨 준비를 했을지 몹시 궁금했다. 기대감에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뭔가 큰 이벤트라도 준비한 건가?”
“너무 기대하면 실망할걸. 네 기준에선 평범한 축제거든.”
리온이 황급히 손을 저었다.
“그저 오늘의 만남을 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리려는 것뿐이야.”
그래도 다들 나름 비장한 표정인 것을 보아 단단히 준비한 모양이다.
“전 세계의 선교사 대부분이 이 자리에서 만날 거야.”
레브가 잔뜩 신이 나서 윤혁에게 말했다.
“정말로 전부 다?”
“아마 눈으로 보는 편이 더 나을걸.”
리온이 싱긋 윤혁에게 눈짓하며 레브 대신 대답했다.
시설 채비가 모두 완료되자 다섯 명의 청년들, 아니 윤혁까지 포함해서 여섯 명은 손을 뻗어 생체 정보를 주입했다. 곧이어 빛이 퍼져나가더니 넓은 예배당 건물 내부에 마치 새로운 장소가 덧씌워진 듯 배경이 바뀌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수백 명의 사람 형상이 나타났다.
“이야!”
젊은 사람부터 중장년층, 드물게 나이 든 어르신들도 몇 보였다. 윤혁은 은근 감격했다. 현재 이 지구에 아직 남아 활동하는 선교사들이 홀로그램 네트워크를 통해 전원 동시 집결했다. 비록 같은 공간에 있는 건 아니지만 마치 살아있는 실체처럼 생동감이 넘쳤다.
‘원시적이긴 해도 이게 더 감동적이네.’
“모두 메리 크리스마스! 그리고 이 땅에 오신 주님께는 감사 찬양을!”
각 팀의 대표들이 축하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이어서 생면부지의 여러 사람이 축복으로 맞대응했다.
“우리는 매년 이날이 오면 전원이 모여서 함께 찬양을 나눈 뒤 올해 어떤 하나님의 일하심을 선교지에서 체험했는지 공유하면서 내년에 대한 계획을 함께 세워. 모두가 다 함께 힘을 공유하는 자리이지.”
에일리가 부연 설명을 해주었다.
“물론 그렇다고 딱딱한 회의를 하는 건 아니야.”
“서로의 간증과 기쁨을 나눈다고 보면 돼.”
제니와 레브도 덧붙였다.
각기 다른 지역에서 활동하는 세계 곳곳의 용맹하고 젊은 십자가 군병. 오직 사랑의 힘으로 겸손하게 진리를 전파하면서 어렵고 소외된 영혼을 돌아보는 이들. 비록 출신도 각기 다르고 각자의 연약함을 힘겹게 짊어진, 세상 사람 보기에는 오합지졸인 무리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시공간을 넘어 한 분을 축하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다.
“우리의 참 주인이 되어주신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를!”
“만왕의 왕께 찬양을!”
“경배받기에 합당하신 그분께 영광을!”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을 나타내신 그분께 우리의 영혼을!”
“어린 양께 존귀와 능력과 지혜가 속했으니.”
“온 세상 영혼들을 그분께 이끄세!”
“우주의 왕! 인간의 왕! 영(靈)들의 왕! 신들의 신!”
“하나님 아버지의 겸손하고 거룩하신 종!”
“교회의 머리, 성도들의 맏형, 이스라엘의 신랑!”
“나의 모든 것, 우리의 모든 것, 모두의 모든 것 되신 분!”
“피조계와 영계의 창조자!”
“보이는 만물과 보이지 않는 만물의 주권자!”
“죄를 없애신 구원자! 피 값으로 우리를 사신 구속자(救贖者)!”
“궁극의 심판자! 공의로우신 만유의 재판관!”
“영원무궁한 왕국의 통치자!”
원시적인 기술력의 홀로넷 통신, 많은 듯 적은 듯 애매한 수의 인원, 그리고 제각기 다른 특성과 재능, 객관적으로 보면 이 세계의 선두가 되기에는 너무도 부족하고 약점도 많으며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겉보기에는 초인들 같은 이 세상의 머리들과는 달리 꼬리에 불과한 집단이었다. 하지만 이 모임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순수한 자리였다. 적어도 윤혁은 그렇게 믿었다.
‘그래. 교만한 머리가 되느니 신실한 꼬리가 되어주자.’
중요한 건 세상의 시선이 아닌 하나님의 시선.
‘이 시간을 축복해주소서, 아버지.’
청년들은 각지 회심자의 신앙 간증을 담은 영상을 나눴다. 복음 전파를 위해 만든 선교 영상들도 방영했다. 그리고 기쁜 목소리로 주님을 찬양하는 찬송을 불렀다. 이 모든 장면이 퍼즐 조각처럼 가슴 속에 차곡차곡 쌓였다. 성도의 연합된 모습은 눈 내리는 바깥 풍경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연상시켰다. 마치 명화 속으로 들어간 듯한 착각이 들었다. 생애 처음으로 동료들과 나눈 그 순간은 그렇게 잊지 못할 추억으로 박제되었다.
그것은 청년의 삶에 있어 앞으로의 여정을 예고하는 작은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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