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104회 초인들의 세계 Ch 39. 디아스포라 (1)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2.11.21 | 회차평점 0 |
Chapter 39. 디아스포라
친구, 나는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이해가 잘 안 돼.
그래. 나는 지혜를 선물 받고 그것을 사용하는 명철을 익히고 오랜 시간 연단을 거치며 연륜을 쌓아왔어.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앞날을 내다볼 수 없었지. 가까운 내일조차도, 아니 한 치 앞조차도. 주께서 허락하실 때는 장래 일을 이해하도록 이끄심을 받았으나, 그 역시도 온전하고 순수하게 겸손할 때만 가능했지. 나이가 들고 약해진 지금, 내 육신은 쇠했고 세상은 한 치 앞도 알아볼 수 없도록 소용돌이에 휩싸였어. 떠나갈 날이 가까울수록 나는 내가 얼마나 연약하고 무지하고 무식한지를 더 절감하게 돼.
그런데 넌 어떻게 해서 그때 그렇게 먼 앞날까지 선명히 내다보았던 걸까?
네가 그때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비록 내게는 기회가 없었겠지만, 네게는 더 긴 시간이 주어졌겠지. 그리고 우리가 더 오랫동안 동료로서 추억을 쌓았을 거야. 너는 그걸 기꺼이 포기했었지.
지금에 와서야 돌이켜 생각해보니 모든 흐름이 처음부터 그분께서 계획하셨던 것임을 알 것 같아. 나는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한 도구였고 생각지도 못한 곳까지 사명을 받았지. 중간에 포기할 뻔도 했지만 결국은 그분께서 주신 마지막 분량까지 일을 이루게 하셨어.
그런데 나비의 날갯짓에 태풍이 만들어지듯 내 작은 행동들의 합계로 인해 역사의 흐름까지도 크게 틀어져 버렸어. 이제 나와 내 아우가 남긴 흔적들이 씨앗이 되어 또다시 태동하는 중이야. 내 시대보다 더욱 거대한 흐름으로 변해서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있지. 그들은 나조차 예측지 못할 변동을 만들 거야. 내 아우보다 더 강력한 위험이 이 세상에 탄생했고, 나보다 더 뛰어난 사슬이 뒤따라 만들어졌지.
주님께서는 이것을 모두 계획하셨을까? 분명 그러셨겠지? 너는 주님께 비전을 받았던 걸까? 너는 얼마만큼 내다보았지? 그때의 결정은 네 순전한 선택이었니? 아니면, 그저 자기 자신을 내려놓은 온전한 순종이었나?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그분의 뜻 앞에 이성을 내려놓았던 건가?
이제 조금 있으면 네 곁으로 가게 될 테니까 곧 알 수 있겠지.
그때까지 그곳에서 행복하게 잘 있어 줘.
나의 친애하는 친구.
혹한의 겨울날에 신께서 내게 주신 축복의 선물.
노인은 평소처럼 조용히 노트 위에 일기를 작성했다. 언제부터인가 일기 작성이 습관이 되어버렸다. 노년의 나이까지 이어진 이 버릇은 꽤 유용한 면이 많았다. 이렇게 그는 옛 친구의 노래를 기록했고 예언에 관한 통찰을 기록했으며 후세 사람들에게 보물이 될 만한 수많은 귀중한 발견과 아이디어를 박제했다.
어느덧 이제 그는 일생의 황혼을 바라보는 시점에 놓여있었다. 그는 반쪽짜리였다. 아벨의 후손과 카인의 후손, 그 두 부류의 중간 언저리. 그렇기에 그에게는 평범함과 비범함이 공존했다. 지혜에 있어서는 당대의 현자였으나 육신은 일반인과 동일한 나약한 몸이었다. 보통 사람보다는 아주 조금 건강한 편이었으나 백이십 세를 훌쩍 넘겨버린 지금은 가까스로 버텨내기도 무리였다.
“어르신.”
“윤혁아.”
젊고 건실한 청년이 노인을 부축하여 책상으로 옮겨드렸다.
“고맙다.”
“무리하지 마세요.”
“난 아직 정정하단다.”
“알아요. 그래도 제게도 섬길 기회를 주세요.”
“허허, 녀석도.”
노인은 미리 준비해온 다과 상자를 꺼내서 청년 앞에 베풀었다.
“나이 들어서 주책스럽게 제과에 조금 취미가 생겼단다. 머핀, 크루아상, 티라미수 전부 다 있으니 적당히 원하는 대로 골라 먹으렴. 나는 나이 때문인지 소화가 잘 안 되는구나. 네가 잘 먹는지 구경만 하마.”
“감사합니다.”
다행히 맛은 괜찮았는지 청년의 표정에서 만족감이 우러나왔다.
“허허, 크리스마스가 그의 생일이라니.”
노인은 허탈한 표정으로 웃었다.
“형도 삐지셨던 것 같더라고요.”
그때 본 형의 시무룩한 표정이 윤혁의 눈에 선했다.
“처음으로 가족이랑 같이 보내는 생일을 기대했었나 봐요.”
“허허허, 그랬겠지.”
“미안한 기분도 들었죠. 그래도 인간미는 있구나 싶었어요.”
노인은 손주의 재롱을 감상하는 기분으로 은은한 너털웃음을 지었다. 눈앞의 청년은 제법 형제와의 인연을 진정성 있게 빚어나간 것 같았다. 과거의 자신보다 더 훌륭하게. 청년은 형제와의 ‘인간적인 인연’ 혹은 ‘연민에 따른 끌림’에 충실하게 반응하는 듯했다. 상대의 작은 변화에도 의미를 부여하며 어떻게든 소망을 찾아내려고 애쓰는 모양새였다. 긍정적인 면이기도 하지만 우려도 됐다.
‘사실은 불안감을 숨기고 있겠지.’
연륜이 잔뜩 쌓인 그의 눈에는 보였다. 청년이 형제를 용서하고 싶어 어떻게 해서든 처절히 발버둥 치고 있음을. 쉽지 않으리라. 그리고 지금처럼 불안을 억누르고 애쓰는 일을 계속하다간 언젠가 와르르 무너져버리고 말겠지. 부디 자신처럼 쓰라린 시행착오를 경험해서는 안 될 텐데.
‘형제가 두렵기도 하겠지.’
단순히 강한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 규격을 벗어난 괴이한 존재가 인간성이라는 틀 안팎에서 줄타기하는 것을 목격하며 받은 위화감으로서의 두려움. 청년이 체험한 감각은 분명 그것이었으리라. 아이는 분명 그 ‘무서운 존재’를 자신의 울타리 안에서 마음으로 녹여 품어줄지, 아니면 인류의 본질적 의무를 위반할 규격 외의 대적자로 판단하고 대응할지 마음속에서 처절한 갈등을 겪고 있으리라. 저 자신조차도 그 갈등의 깊이를 다 인지하지 못하고 있겠지.
‘내 때보다 더해. 그 아이의 ‘자기 의(Self-righteousness)’은 그래도 인류 보편적 성질을 띠기라도 했지, 이번 세대 지배자가 정의한 의(義)는 탈인간적이고 이질적이다. 악성도 보편성도 아닌, 지나치게 입체성이 큰 예측 불허의 코즈믹 호러야.’
어르신의 표정이 무거워져가는 것을 청년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것참 기이하군.”
노인은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점차 노골적인 시대의 징후가 나타나는구나.”
청년이 알아들을 듯 말 듯 작게.
“……네? 어르신?”
“아아, 아니다. 신경 쓸 것 없단다.”
노인은 황급히 모면의 웃음을 지으며 손을 저었다. 윤혁은 뭐가 지나갔는지 의아해하며 눈을 껌뻑거렸다. 분명 뭔가 심상치 않은 기시감이 스쳐갔는데?
“아, 그나저나 어르신께선 이젠 한국에서 지내시기로 작정하신 건가요?”
윤혁은 일부러 화제를 돌려보았다.
“으음, 아무래도 사실상 그렇다고 봐야겠지?”
“사실상요? 음, 어쨌든 지내시긴 편안한 나라죠?”
“전반적으론 그렇더구나.”
아무래도 어르신이 정착하신 이유가 자신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이 들었다. 어르신은 처음 만난 날 분명 무언가를 찾아 이곳에 왔다고 했었다. 그 찾는 것이 무엇이라고는 똑 부러지게 설명해주시진 않았으나 지금까지의 만남의 맥락으로 보아 윤혁 자신과 관련된 것은 확실해 보였다.
‘내가 인류연합 대표의 형제라서?’
곰곰이 궁리해봐도 다른 이유는 떠오르지 않았다.
“아, 참. 메시아닉 유대인들을 만났어요.”
불현듯 번뜩 떠오른 기억에 화제가 또 전환되었다.
“중립 섬에서요. 난민 생활을 하다가 중립 지대에 살게 되셨더라고요.”
노인은 중립 지대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는 것인지 듣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다만, 유대인들의 이야기가 나오자 무언가 관심이 깊은 것인지 대단히 또렷이 눈빛을 밝혔다. 윤혁은 어떤 조언을 들을 수 있을지 기대했다.
“메시아닉 유대인이라……, 때마침 참 흥미로운 주제로군.”
“어르신께서도 아시는 것이 있으시죠?”
기대감이 점점 더 고조되었다.
“세월의 산증인이시니까요.”
“급한 마음이 드는 건 이해한다만, 천천히 이야기하자꾸나.”
노인은 직접 끓인 고급 커피까지 꺼내 윤혁의 잔에 따라주었다.
“그래, 얘야. 무엇이 가장 궁금하더냐.”
“메시아닉 유대인들은 왜 고향, 그러니까 이스라엘에서 쫓겨난 건가요?”
“디아스포라(Diaspora).”
노인은 차분하고 진중한 목소리로 역사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너도 알겠지만 사도 바울은 로마서 후반부에 예언을 적어두었단다.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가 찰 때까지는 유대인들의 마음이 완악해져서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했었지.”
“네, 저도 그 말씀에 관해선 배웠어요.”
“거꾸로 말해서 그 ‘충만한 수’가 차면, 그 완악한 ‘눈가리개’가 벗겨져 유대인들의 회개와 구원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리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 마치 바울 자신의 봉인된 눈이 비늘이 벗겨지면서 열렸던 것처럼 말이다.”
“흐음, 하지만 전 아직도 그 예언의 올바른 해석을 잘 모르겠어요. 그리고 어르신이 말씀하신 디아스포라가 이것과 무슨 관련인지도요. 역사적으로 일어났다가 종결된 그 현상이 바울의 예언과 연결되었다는 뜻인가요?”
아니, 그 전에 루디아와 해변가에서 나누었던 허심탄회한 토론이 다시금 윤혁의 마음속에 걸림돌이 되었다. 이방 세계의 부흥과 유대인의 회개, 과연 이 두 현상은 시소처럼 오르락내리락하는 상충의 양칭일까? 한쪽이 오르면 다른 쪽이 가라앉고, 다시 한쪽이 내려가면 다른 쪽이 올라가는 식으로? 하지만 실제 역사를 보면 그렇게 단순하게 귀결짓기에는 복잡다단한 역학 관계가 많았다.
“유대 민족의 미래에 관한 예언에 대해선 여전히 세부적인 면에서 논란의 여지가 많긴 하단다. 하지만 종말을 예측하는 징조, 최소한 간접적인 징후 중 하나임은 분명하단다. 당장 어느 경점에 이르렀을 때 주님의 재림이 임박한다고 딱 단정 지을 수는 없겠지만.”
“목회자분들과 신학자분들마다 견해가 너무 엇갈려서 헷갈려요.”
“내 때도 그랬단다. 물론 그때는 종말의 징후가 덜 뚜렷했지만.”
막상 종말의 징후가 몹시도 뚜렷해진 지금은 그것을 감상할 신자의 수가 줄어들었다. 과거의 영민했던 영적 위인들이 이 시대의 ‘풀린 실타래의 본 모습’을 보았더라면 무릎을 '탁' 치며 깨달음을 얻었을 터, 참 아쉬운 노릇이었다.
“저는 어르신이라면 그래도 근접한 해답을 알고 있으리라 기대했어요.”
“허허, 미천한 나를 과대평가해줘서 감개무량하구나.”
“아니요, 과장이 아녜요.”
윤혁은 이제 눈앞의 이 사람이 이전 세대 인류 역사의 중심 현장에서 싸워온 진짜 위인 중의 위인임을 알게 되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영적 대척점인 형의 입으로까지 검증을 받았다. 그렇기에 이제는 노인이 그간 자신에게 베푼 연륜 깊은 가르침도, 그의 영적 지혜도 의심 없이 온전히 신뢰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어르신은 성경 예언에 대한 이해가 매우 깊을뿐더러 초인들의 세계에 대해서도 매우 잘 알고 있었기에 믿음이 갔다.
‘그 두 가지면 말 다 했지.’
윤혁은 이제 진실을 배우기를 간절히 추구했다.
“저와 제 믿음의 동료들, 그리고 유대인들까지, 그들 모두 올바른 방향을 알아야 만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을 수 있어요. 어르신의 경험과 지혜와 가르침이 필요해요. 부디 말씀해주실 수 있거든 뭐든 말씀해주세요.”
학생의 태도가 만족스러웠는지 노인은 자애롭게 말문을 열었다.
“유대인 회심 현상의 본격적인 기폭점은 21세기 무렵부터란다. 물론 1948년 경에 이스라엘이라는 물리적 국가가 기적적으로 부활하긴 했지. 하지만 영적인 회복, 즉 유대인의 메시아에 관한 예언인 이사야 53장, 곧 수난받는 종이신 예수님에 관한 예언이 유대인들의 마음속에서 믿어지게 된 것은 21세기 무렵부터였지.”
윤혁은 자신이 복음을 맨 처음 받아들이게 되었을 때 큰 인상을 주었던 ‘수난받는 종의 노래’를 다시 회상하며 속으로 묵상했다. 유대인들도 그 노래의 본질을 깨달으면서부터 메시아를 보는 눈이 열렸던 모양이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5-6)
“그토록 긴 세월 동안 귀중한 구약성경을 갖고 있으면서도 정작 그 내부에 담긴 귀중한 보배인 ‘예수에 대한 예표’를 알아보지 못한 유대인들, 비로소 그들이 장님이 눈을 뜨듯 진리와 마주 보게 된 셈이었지
“아름다운 일이네요.”
“물론이다. 그리고 그 시기는 이미 세계 곳곳에 복음이 전파되어 이방인들이 충분히 믿음의 반열에 들어온 시기와도 맞물린단다.”
여기까지는 훈훈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그런데 참 오묘하게도 말이다, 유대인들이 구원의 길에 이르기 시작하고 이방에 복음이 충만히 전해진 그때, 세계정세도 하필 그 시기에 ‘최종적 국면’이 가동되기 시작했단다.”
의미 모를 불길한 용어의 등장에 윤혁은 당황하였다.
(다음 회차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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