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107회 초인들의 세계 Ch 39. 디아스포라 (4)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2.11.28 | 회차평점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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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대화 주제를 바꾸었다. 윤혁은 제로원에서의 일에 관하여 말해주었다. 자신이 새롭게 알게 된 세계 이면의 정보들에 대하여, 그리고 보고 듣고 배운 온갖 이야기들에 관하여.
정신 간섭에 대한 부분은 이미 반쯤 확신하고 있어서인지 노인도 별다른 감정적 동요가 없었다. 제로원의 본체인 지구 내부를 개조해 만든 거대 구조물, 시간 압축 기술, 그것을 기반으로 건설한 수많은 우주 콜로니 같은 이야기는 조금 신기하다는 눈초리만 보이고 그쳤다. 애초에 본인이 탁월한 과학자라 그런 미래를 어렵지 않게 예견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장차 임할 하늘의 왕국에만 시선이 고정된 덕분에 이생의 것에는 별 감흥이 없는 것인지도.
‘어느 쪽이건 존경스럽네.’
그런데 카이젤과 제로원 상공에서 나눈 대화에 관한 대목에 이르더니.
“하하하, 그것참 통쾌하게 잘 대답해주었구나.”
어르신의 무덤덤함이 그치며 즉각 기쁨의 감정 반응이 나타났다.
“칭찬해주셔서 감사하지만, 제 언변이 뛰어나서 그랬던 건 아니에요.”
“아니다, 얘야. 네가 사용했던 논지는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실 때 쓰셨던 논지와 상당 부분 일맥상통한단다.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지. 너도 그분의 제자다운 모습으로 훌륭히 성장하는 중이구나.”
의식한 건 아니었지만, 본의 아니게 그런 모양새가 됐던 건 사실이었다. 신학 지식에 통달했다고 자신할 정도는 아니어도 늘 성경을 삶의 기준으로 삼겠노라고 뜻을 정해왔던 게 조금은 보람이 있었다. 무려 세계 최강의 지식인을 상대로 당당함을 잃지 않았으니 말이다.
“성령님께서 입술을 움직여주신 덕이죠.”
“그래, 그렇게 그분을 의지하면 그만이란다.”
노인은 손주같은 아이가 여간 자랑스러웠는지 칭찬을 그칠 줄 몰랐다.
“본래 인간은 풍요만으로 살 수는 없는 법이지. 영혼의 생명이 채워지지 않으면 결국 끝없이 방황하다 자신의 존재를 잃어버릴 뿐이야. 그런 진리를 잘 아는 그리스도인들이 막상 세상의 부귀 권세 앞에서 당당히 답하지 못하고 주눅이 드는 현실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 그들이 널 닮았으면 좋았으련만.”
“괜히 쑥스러워지네요.”
“우리를 대표해서 세상 영광의 정점과 맞대응해줘서 고맙구나.”
원래 이 자리에 오기 전 윤혁은 노인에게 우라노폴리스의 시간 감옥과 그곳에 갇힌 무수한 인간들에 관해서도 고백하고 조언을 구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부분만은 입이 열리지 않았다.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뇌에서 어떠한 신호가 그 내용을 대화 중 꺼내지 못하게끔 간섭했다. 자유의지가 억눌린 것은 아니나 건망증이 생겨나듯 해당 요점을 잊어버렸다.
그것은 진이 텔레파시를 통해 심어 넣은 암시였는데 윤혁은 그 망각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이 대화가 끝난 후 나중에 자신이 중요한 말을 꺼내기를 잊어버렸음을 알긴 했으나 그것이 인위적인 간섭인줄은 깨닫지 못했다.
다행히 다른 주제에서는 대화의 진전이 이루어졌다.
“과연 정신 간섭은 오늘날 어느 범위에까지 적용되고 있을까요?”
“최면, 텔레파시, 호감이나 충성심을 몰래 심어 넣는 것, 범죄의 억제, 그리고 군인들의 반역 억제 등의 용도로는 이미 매우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으리라고 추측한다. 진실은 네 형만 알겠지.”
“아직까지는 심각한 수준은 아니지만, 미래에는 위험해지겠네요.”
“그래, 정신 기술은 내가 처음에 ‘짐승의 표’의 추측했던 후보 중 하나였단다. 그 외에 다른 후보로는 ‘경제 시스템’을 의심하기도 했었지. 그 영역에서는 과거에 내가 간섭하여 차단하긴 했지. 최근 나타난 피코머신이나 뇌에 이식하는 퀀텀 브레인이 후보일 수도 있겠지만, 아직 단정 지을 수 없지.”
예수를 주님으로 믿는 신자들이 종말의 미래를 떠올릴 때 가장 두려워하는 요소 중 하나가 바로 받는 영혼을 필연적 멸망으로 인도한다는 ‘짐승의 표’이다.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예언이기에 마냥 상징으로 치부할 수도 없지만, 또 그만큼 거짓 괴담이 만들어지기도 쉬운 주제였다. 설왕설래가 많긴 했지만, 아직 그것의 실체는 베일에 덮여서 아무것도 확답할 수 있는 바가 없었다.
“어르신께서는 짐승의 표에 대해서 추측하시는 바가 있으신지요?”
“이것도 확답할 수 없겠구나. 그것은 물리적인 과학 기술력에서 유래할 수도 있고 아니면 사탄에게서 유래한 초자연적인 요소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 두 가지가 모두 기여할 수도 있지. 아니면 정말 어떤 물리적인 실체가 아닌 사탄에게 충성을 바치는 삶을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고.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지금은 그것이 존재하지 않아.”
“그렇게 확답하실 수 있는 근거는요?”
“현재로서는 그 어떤 과학 기술력이나 악마 들림(Demonic Possession)도 주 예수를 믿는 믿음이 주는 구원을 원천적으로 차단하지는 못하기 때문이지.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막을만한 수단이 없어.”
듣고 보니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나마 한 줄기 희망은 있는 셈이네요.”
“게다가 한 가지 더, 그 표식은 반드시 자유의지로 받을 수 있는 무언가여야 하단다.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건 그것을 받는 행위가 곧 하나님에 대한 반역임을 누구든지 선명히 인식할 수 있어야만 하지.”
“그 말씀인즉 어떤 형태이든 ‘강제적으로’ 심을 수 있는 물건은 짐승의 표 후보에서 제외해도 좋다는 뜻이군요. 이식만 했다고 영혼 구원을 차단해버릴 수 있다면 사탄으로서도 그리스도인들을 전부 납치해서 표만 주입하면 모두를 지옥으로 끌고 갈 수 있을 테니까요.”
만일 그런 짐승의 표라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라고 선언한 로마서의 가르침에 어긋나리라. 참된 구원을 그렇게 편리한 방법으로 취소시킨다는 것도 어불성설이고.
“당장은 그렇지.”
노인도 얼추 공감하였다. 다만.
‘뭐, 미래에 극도로 기술이 진보한다면 어떨지 모르겠지.’
이번 세대는 뭔 일을 해낼지 도통 예상이 안 서니 불안은 들었다.
다른 한편 윤혁은 잠시 식민지 주민들에 관해 생각했다. 그들이 현재 어떤 식으로 구속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의 영혼을 구할 가능성이 아예 없진 않으리라는 고무적인 희망이 들었다.
물론 식민지 주민들에 관해 생각하면서도 진의 암시 최면 때문에 이 중요한 이슈를 멘토인 어르신과 논의해야겠다는 생각은 좀처럼 들지 않고 순간 순간 망각에 삼켜지듯 잊혀졌다. 당사자조차 그 부자연스러운 단기 건망증에서 위화감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교묘한 최면이었다.
어쨌건 어느덧 윤혁은 어르신에게서 받은 귀한 가르침들을 심령 속 깊은 중심에서부터 곱씹고 있었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그를 스승으로 존중하는 자신의 마음을 발견했다. 사실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훌륭한 사람이기도 했다. 노인 역시 청년이 마음에 들었다. 이제 일을 인계해주기 전 마지막 한 단계만 더 넘으면 되는 지점. 다만 그 단계에 도달하려면 양쪽 다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미뤄두자. 아이가 제 형과 한 번 더 만날 때까지.’
시간이 촉박해 초조하긴 했으나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만 한다는 확신이 인내심으로 이어졌다. 노인은 마지막으로 청년에게 꼭 필요한 사랑 어린 당부로 대화의 매듭을 맺었다.
“요즘은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응답이 잘 들리더냐?”
“음, 아주 약간은요. 육성으로 들리는 게 아니라서 그분이 주시는 메시지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어려워요. 때로는 저 자신의 목소리인지 그분께서 하시는 말씀인지 헷갈릴 때도 있고요.”
“그래서 성경 앞에 겸손하게 순종해야 한단다. 자기 편견과 고집을 내려놓고 말씀이 전하는 메시지를 열린 마음으로 받으려 노력해야 해. 단순 감상을 넘어서 체계적인 탐구에 노력을 기울이는 게 좋단다.”
노인은 손자 같은 청년에게 성심껏 가르쳤다. 성경은 완악한 마음으로 볼 때는 단순한 텍스트의 나열에 지나지 않지만, 마음을 열면 진리가 발견되는 보배 중의 보배.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이성을 통해서도, 감성을 통해서도 성경이란 책이 사람에게서 유래한 것이 아닌, 창조주에게서 유래했음을 깨닫고 되는 법이다. 노인 자신이 체험해온 바였기에 확실히 보증할 수 있었다.
“잊지 말아라. 성경은 이 우주에서 단 하나뿐인 ‘절대자의 책’이란다.”
“최선을 다해 공부해볼게요.”
“그래. 내가 네게 직접 도움을 줄 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스스로 묵상해보는 게 좋겠구나. 결국 네게도 진리와 너 자신 사이의 일대일 개인적 관계를 형성해나가야 할 의무가 있으니까.”
노인은 때가 이르면 자신이 평생 쌓아온 성경적 깨달음과 진리를 남김없이 아이에게 물려주리라 마음먹었다. 단, 그 아이가 깊은 진실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온전히 된 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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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대 의과대학 라운지.
일 년 내내 매일 험난한 공부 일정에 지쳐있던 학생들은 방학을 눈에 앞두고 들떠 있었다. 곧 3학년 학생들은 국가고시를 보기 전 마지막 휴가인 짤막한 몇 달간의 여유를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일부 학생들은 이 여유 시간마저도 연구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보낼 예정이었다. 현 의사 양성 시스템은 철저히 첨단 의학 연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라운지에서 논문을 읽는 짙은 갈색 머리의 남성. 회색 머리의 다른 남성이 그 곁에 다가갔다. 그는 친구의 등을 후려치며 놀래 줬다. 당사자는 평소에 늘 그랬듯 무덤덤하게 쳐다만 보았다.
“이 시간까지도 공부하고 있냐?”
“왔어?”
“연구 축제, 세미나, 거기다 학회까지 전부 끝났는데 좀 쉴 것이지.”
“슬슬 내년 일정도 미리 준비해야지.”
“어휴, 졌다 졌어.”
회색 머리 청년 채인우는 별종을 본다는 눈빛으로 혀를 찼다. 단짝 친구는 단순히 공부벌레라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었다. 수시로 뒤바뀌는 2위 ~ 4위와는 달리 불변의 넘버원 자리를 지키는 괴물. 암기력이나 이해력이 우수한 차원을 넘어 의학 본질을 꿰뚫어 보는 타고난 현명함. 차세대 인재상에 걸맞은 영민한 창의성과 행동력까지. 해도 너무한 친구였다.
그때 흑발의 다른 여학생이 뛰어와 대화에 끼어들었다.
“인우 오빠, 태헌 오빠. 이번 겨울에는 따로 여행 갈 계획 없지?”
재치 발랄한 인상에 생기 가득한 웃음이 돋보이는 여성이었다.
“오랜만에 세계 일주 어때?”
“이야, 너무 무리하게 계획하는 거 아니야?”
그렇게 말하는 인우 본인도 은근 들떠 있었다.
“뭐 어때! 요새는 지구촌도 좁아서 하루면 다 둘러보고도 남아.”
“하긴 그렇지.”
“앞으로 틀어박혀서 연구만 할 텐데 이럴 때일수록 견문을 좀 넓혀야지.”
“난 괜찮은데 이 녀석은 어떨까 싶다.”
인우는 은근슬쩍 태헌 쪽을 흘깃 흘겨보았다.
“벌써 내년 프로젝트 준비 중이라던데? 하여간 대단해.”
태헌은 그제야 현아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안경을 벗었다.
“현아야, 안녕.”
“태헌 오빠는 또 이번 겨울에도 랩에서 보내게?”
그녀는 조금 토라진 표정으로 말했다.
“이해해줘라. 원래 이런 녀석이잖아.”
인우도 어깨를 으쓱거리며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그때 태헌이 평소의 그답지 않게 의외의 대답을 꺼냈다.
“세계 일주라. 그것도 나름 재밌겠네.”
이에 단짝 친구들은 그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조금 궁금했거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태헌의 표정.
“앞으로는 얼마나 멀리 떠나게 될지 모르는데.”
다소 의식의 흐름을 타는 듯한 태헌의 중얼거림.
“미리 둘러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 말이야.”
사람들은 종종 태헌의 총기 넘치는 얼굴을 볼 때면 좀처럼 그가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 파악하기 힘든 묘함을 느끼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그는 똑똑한 두뇌만큼이나 어디로 튈지 모르는 창의성이 돋보였다. 이렇게 가끔 엉뚱한 방향으로 대화 주제를 이끄는 것도 태헌의 습관이었다.
“멀리 간다니? 아, 나중에 유학 생각하는 건가?”
이해하지 못한 인우가 되물었다.
“그 생각도 없는 건 아니지만……, 지구촌으로는 너무 좁지 않겠어.”
“뭐어?”
이번에는 현아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기색이었다.
(다음 회차에 연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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