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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109회 초인들의 세계 Ch 40. 청춘 (1)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2.12.03 | 회차평점 0 0

 

 

 

 

 

Chapter 40. 청춘

 

 

 

 

 

 

  그녀의 눈에는 너무도 낯선 광경이었다. 눈 내리는 아름다운 도시의 화려한 경관. 상공을 덮는 반투명한 보호막. 물론 이곳도 세계 전체 기준에서는 지극히 낙후된 일개 중소 도시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런 사정을 모르는 그녀로선 그저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항상 형편이 부족한 마을에서 자급자족이나 지원을 통해 생계를 유지했던 그녀에게는 그야말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녀는 타인에게서 대여한 항법 장치에 의존해 목적지를 향해서 정처 없이 걸었다. 가는 길마다 진풍경이 시선을 빼앗았다. 화려한 건물들이 수풀처럼 우거져있었고 저 공중에는 투명한 도로를 따라서 달리는 수많은 차량이 빠르게 시야를 스쳐 지나갔다. 미로처럼 복잡한 도시의 구조 탓에 몇 차례나 길을 잃을 뻔했다.

  ‘이렇게 늦다가 밤이 되는 건 아니겠지.’

  괜히 기우까지 스멀스멀 들었다. 다행히 걱정과 달리 어렵잖게 길은 찾았다. 그녀는 비교적 낙후되었지만, 소시민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동네에 도달했다. 마치 박물관 속 미니어처처럼 이전 세기 도시의 모습을 박제해놓은 것 같았다.

  벌써 누군가를 만나고픈 기대감이 가슴 속에서 부풀었다. 혹시라도 그가 자리에 없으면 어떡하지 하는 또 다른 쓸데없는 기우가 들었지만, 그런 부정적인 염려는 이내 제쳐두기로 마음먹었다.

  ‘정말 아름답고 아늑한 곳이야.’

  미래와 현재와 과거가 교차하는 동네였다. 철거되지 않은 이전 세대 낡은 건축물들이 가운데 간간이 섞인 현대적인 양상의 건물들. 문명과 자연의 적절한 어우러짐. 도시 중앙부에 있는 초고도 문명의 세계와는 선명히 대조되었다.

  마침내 그녀는 마침내 찾던 장소를 발견했다. 이 주소가 맞겠지? 여러 차례 반복해서 확인한 후에야 마음이 놓였다. 그녀가 문 앞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자신이 살던 마을에 출입할 때 허락이 필요한 것처럼 이곳 역시도 그렇겠지? 약간의 걱정을 안고 문을 두드렸다.

  그때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키가 크고 훤칠한 남성이었다. 서른 살 정도로 보였는데 시선을 확 끌 정도로 대단한 미남이었다. 만일 오랜 시간 더 아름다운 피사체를 감상해옴으로써 미(美)에 대한 면역력을 키우지 않았다면 그녀도 쉬이 충격을 감당하지 못했으리라.

  “아, 식사하러 오셨나요, 아가씨? 지금은 조금 애매한 시간이라 준비하려면 늦어질 테지만 그래도 추우니까 안으로 들어오시겠어요?”  

  나긋나긋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배우를 했더라면 세계적으로 성공했을 마스크였다. 탄탄하고 올곧은 체형도 경탄스러우리만큼 수려했다. 그런데 어딘가 모르게 그의 모습에서 익숙한 기시감이 전해졌다. 그녀로서는 외적인 아름다움보다 그 부분이 더 눈에 밟혔다.

  “저, 아니에요. 저는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이곳에 왔어요.”

  그녀는 어색해하며 황급히 양손을 휘저었다.

  “폐가 되지 않는다면 일손이라도 거들 테니 기다려도 될까요?”

  “어허, 손님에게 일을 시킨다니요. 안으로 들어와서 기다리시죠.”

  그 남자는 매우 친절했다. 또 어른스럽고 인품이 원숙했다. 나이 차이가 좀 나는 다정한 오라버니가 있다면 꼭 이런 느낌일까? 그런데 이런 모습도 왠지 누구에게서 본 것 같은 익숙한 감을 주었다. 습관도 그렇고 말투도 그렇고 꼭 누구와 판박이였다. 설마 가족일까?

  “아, 그런데 누구를 찾으시나요, 아가씨?”

  “그, 그게……, 분명 여기가 맞다고 들었는데…….”

  그녀는 한참을 망설이더니 간신히 용기를 내었다.

  “호, 혹시 동생이 있으신가요?”

  “네?”

  긴장한 나머지 너무나 솔직한 속마음을 말해버린 그녀. 남자는 머리를 얻어맞은 듯 한동안 멍을 때렸다. 정신을 차린 그는 그제야 정황을 이해했다. 그녀가 뭘 찾아온 것인지 깨달았다.

  “아빠?”

  과연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위층에서 다른 이가 내려왔다. 그는 준비할 틈도 없이 기습적으로 손님과 마주쳤다. 잠시 시간이 멈춘 듯한 정적이 흘렀다. 윤혁은 한 달 만에 다시 보는 얼굴의 등장에 잠시 얼이 나갔다.

  “안녕.”

  루디아는 수줍게 웃으며 인사하였다.

  “룻? 설마 직접 올 줄은…….”

  이렇게 일찍 재회하리라고 누가 알았겠는가. 사람 간의 인연이 우연의 연속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인연은 능동적인 선택과 행동을 통해 발전하는 법. 오늘 루디아는 이를 증명해 보였다.

  “너를 보고 싶어서 찾아왔어.”

  그녀는 낯선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의지력으로 극복하고 과감히 발걸음을 뗐다. 자신을 가두는 울타리인 섬을 떠나 이방인 청년이 거하는 세상을 방문했다.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 그의 세상과 자신의 세상을 교차하기 위해서.

 

 

 

 

 

 

*****

 

 

 

  두 사람은 응접실에서 편히 앉아 한참을 두런두런 대화하며 휴식을 취했다. 그간 겪었던 일들부터 일상생활의 안부까지, 이런저런 할 이야기는 많았다. 윤혁은 그녀가 여기까지 찾아오기까지 겪은 우여곡절의 여정과 모험을 듣더니 마지막 대목에서 쾌활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 그러니까 우리 아빠가 내 형인 줄 알았다는 거지?”

  “난 정말로 그분이 아버지이신 줄은 몰랐어.”

  “다들 처음 보면 똑같은 반응이더라. 워낙 동안이셔서 말이야.”

  사실 성한의 실제 나이를 감안하면 단순히 동안이라는 말로 대충 얼버무릴 수준은 아니긴 했다. 하지만 제대로 설명하려면 초인의 육체 같은 난해한 개념도 언급해야 했기에 윤혁은 은근슬쩍 넘어갔다. 괜히 서로 머리만 복잡해질 듯했다. 다행히 루디아는 곧잘 믿는 눈치였다.

  한편 윤혁은 루디아가 동행인도 없이 혼자 나왔다는 말을 듣고는 한바탕 잔소리를 쏟아냈다. 아무리 치안 시스템이 고도화되었다고 해도 젊은 여자가 모르는 땅에서 혼자 다니는 건 위험한 일이지 않겠는가. 게다가 그녀에겐 이번이 첫 도시 지역 방문 아닌가.

  문득 그녀의 안위에 남달리 신경이 쓰이는 자신을 발견한 그는 스스로가 낯설게 느껴졌다. 왜일까? 그녀 역시 성인이니 혼자 다닐 자유가 있거늘. 왜 이렇게까지 사소한 부분까지 걱정이 되는 것일까?

  “걱정해줘서 고마워. 하지만 난 정말로 괜찮아.”

  “그래도…….”

  “아가씨께서 떠나기 전에 미리 이런저런 도움을 주셨어.”

  루디아는 안전에 무감각한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그녀는 미리 만반의 준비를 하고자 많은 지원을 입었다. 이를테면 그녀가 현재 입은 여행복에만 해도 여러 장비가 내장되어 있었다. 안전 상태를 확인하는 기능과 항법 기능은 물론, 위기 시에는 대응할 수 있는 수단까지 있단다.

  “돈은? 경제 시스템을 이용할 수 없다고 했잖아.”

  “임시 대여된 포인트도 옷에 장착되어 있어.”

  “그것도 여주인, 그러니까 아가씨라는 분이 챙겨주신 거야?”

  “응, 신기하지?”

  자랑스러워하는 루디아의 말에 윤혁은 혀를 내두르며 감탄했다.

  “그분, 전에 너한테 들었을 때부터 느꼈지만 참 대단한 분인 듯해.”

  윤혁은 얼마 전 어르신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몇 년 전 유대인들이 음모에 휘말려 막 확립된 신식 경제 시스템으로 배제되었을 때, 오류를 복원하는 작업이 어찌나 복잡했던지 인류연합마저 진즉 포기했었다지. 그만큼 고치기 힘든 오류이거늘, 비록 임시방편에 일시적 궁여지책이라긴 하지만 경제 시스템의 혜택에서 원천 축출된 유대인에게도 자본 포인트를 대여해줄 방도를 찾아내다니.

  ‘애초에 진 같은 최상위 초인도 깎듯이 스승 대우를 했었지.’

  난민들을 보호한 선량한 인품도 인품이지만, 그녀의 거대한 지혜와 학문적 이해력이 더 경탄스러웠다. 어느 경지일지 가늠이 안 되었다. 실력만으로 상대를 판가름하는 최상위 초인이 굽힐 정도면 십중팔구 카테고리 분류 불가의 초인으로 추측되었다. 크레센트의 선지자 같은 위험천만한 인물과는 달리 유대인들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실력자도 세상에 존재한다는 점은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나저나 룻, 머무르며 숙박할 곳은 좀 찾았어?”

  정작 지금 가장 걱정되는 부분은 이것이었다. 경제 시스템 이용 문제는 둘째치고 신분조차 명확하지 않은 루디아가 고도로 체계화된 현대 사회 속에서 거하려면 필연적으로 여러 부분에서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다. 인정이 삭막해진 이 시대에 이방 땅에서 호의 베풀 이를 찾기도 쉽지는 않을 터인데 말이다.

  “혹시 아직 숙소 계획이 없다면…….”

  윤혁은 최대한 신중히 운을 뗐다.

  “이 건물에도 우리 가족이 사용하지 않는 3층이 있거든. 게스트룸 비슷하달까? 손님이 찾아올 일이 별로 없어서 방치되긴 했지만 제법 깨끗하고 시설도 편리해. 거기서 머무르는 건 어떻게 생각해?”

  루디아는 솔깃하였다. 그러나.

  “그렇지만……, 네 부모님의 허락은?”

  손님 입장에서 폐를 끼칠까 염려는 들었다.

  다행히 그 걱정은 기우로 밝혀졌다. 성한과 유진은 루디아가 아들과 어떤 경위로 만났으며 그녀의 공동체가 아들에게 어떤 호의를 베풀었는지를 아들에게서 듣더니 일절의 망설임 없이 머무르는 것을 허락해주었다. 나아가 지내는 동안 무엇이든 불편함이 있으면 채워주겠다고 약속했다.

  “보답의 차원을 떠나서 귀한 손님을 대접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죠.”

  “처음부터 그럴 목적으로 3층을 마련했거든요.”

  부모는 아들이 언제 이런 친구를 만났는지 세상 참 신기하다고 여겼다. 은근 그들도 루디아를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두 분께 너무 죄송한데…….”

  “전혀 부담 가지실 필요 없어요, 아가씨.”

  “3층은 저희 생활 공간과 별개이니 마주치는 불편함도 없을 겁니다.”

  부부는 게스트룸으로 쓰이는 그 편안한 공간을 실제로 보여주었다. 과연 한 사람이 혼자서 안전하게 지내며 사생활을 보호받는 데에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루디아로서는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그럼 제가 머무는 동안 간단한 소일거리라도 도우면 안 될까요?”

  그녀는 송구스러운 마음에 타협안으로 아이디어를 냈다.

  “우리 공동체 식구들은 집안일을 다 같이 분담하거든요.”

  루디아의 공동체는 늘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는 가르침을 충실히 따라왔다. 형편이 좋지 않으므로 어찌 보면 필연적인 일이기도 했지만, 그들은 그런 삶의 방식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왔다.

  “저희와 비슷하네요.”

  이 점에 있어서는 무위도식이 허락되는 풍요의 세상에서 사는 윤혁네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성한은 처음에는 손님의 일손을 정중히 거절하려 했으나 루디아가 강한 의지를 보이자 결국은 허락해주었다. 그녀에게는 마음의 빚을 더는 쪽이 편해 보였다. 게다가 소일거리란 험한 삶을 살아온 그녀에겐 손쉬운 일이었다.

 

 

 

 

 

 

*****

 

 

 

 윤혁은 부모님께 루디아를 만난 일화는 들려주었으나 그녀와 그녀 민족의 과거 사정까지는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그녀가 수치를 느끼거나 상처를 되새길까 걱정된 탓이었다. 괜히 동정을 표하다가 상처만 줄 수도 있으리라. 다만 그는 그녀와 그녀의 식구들이 선하고 믿음직한 분들이라는 사실만은 확실히 숙지시켜주었다. 아들의 사람 보는 판단력을 신뢰하던 부모는 걱정을 내려놓았다.

  사실 그런 간접적 증언을 다 떠나서 갖은 세상 풍파를 통과해온 어른의 시선에서 보았을 때 아들을 만나러 온 소녀는 참으로 정직하고 매력적이었다. 정숙함, 친절함, 예의범절, 타인을 함부로 평가하지 않는 신중함, 매사에 불평불만보다는 감사로 일관하는 태도까지,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었다. 일을 도울 때는 어찌나 성실한지 무리하지 않도록 억지로 말려야 할 지경이었다.

  윤혁은 루디아네 동포들의 안부를 물었다. 내심 기도실의 어르신께 유대인의 과거 역사를 전해 듣고 나니 그 민족이 마음에 걸렸던 참이었다. 다행히 루디아의 말에 따르면 마을 어르신과 아이들은 요새 별 탈 없이 지낸다고 한다. 섬 중앙에서의 지원도 마을의 환자들이나 빈민을 돕기에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는 충분한 수준으로 원활히 이뤄진다고 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여행을 나올 생각을 다 하게 되었어?”

  윤혁은 그녀의 결의의 배경에 무엇이 있었을지 궁금했다.

  “그저 바깥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들었거든.”

  물론 그때 윤혁과의 만남을 통해 이방인에게도 호감을 느끼기 시작한 덕도 있었다. 그녀는 부끄러워 그 고백까지는 슬그머니 생략하였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해보고 싶었어.”

  인연과 교제를 확대하고 두려움의 틀을 깨트리는 것. 그녀는 이러한 소원을 안고 섬 밖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중립 지대의 주인도 루디아의 이런 변화를 긍정적으로 보았는지 반가워하며 기꺼이 모든 안전 지원을 마련해주었다. 경계를 넘나드는데 필요한 증표와 이동에 쓰일 교통수단 편까지 마련해주었다나.

  그런데 막상 용기를 내어 나오고 보니 찾아갈 만한 사람이 많지 않았다. 아니 단 한 명, 윤혁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몇 년간 중립 지대의 유대인 마을을 방문한 사람은 윤혁 말고는 없었으니까. 섬의 방문자가 간혹 있더라도 용무가 있다면 대개 진처럼 섬 중앙으로 직접 찾아가서 주인과 마주하지, 난민들의 마을을 찾는 경우는 없었다.

  “기껏 나왔는데 우리 집에만 머무르긴 아쉬울 텐데?”

  윤혁은 궁리 끝에 한 가지 제안을 꺼냈다.

  “혹시 같이 여행이라도 가고 싶은 곳 없어?”

  멀리서 온 손님에게 이왕이면 좋은 추억을 선사하고 싶었다.

  “이왕 귀한 발걸음을 했는데 여기서만 지내면 시간이 아깝잖아?”

  “하지만 너도 바쁘지 않아?”

  “전혀. 나 이제 졸업 시험까지 마쳐서 학교 나갈 일도 별로 없어.”

  여행이라니. 루디아에게는 익숙지 않은 개념이었다. 난민으로서 떠돌아다니는 것이면 모를까, 자유로운 신분으로 떳떳하게 세계를 둘러본 적은 여태껏 한 번도 없었다. 친절한 윤혁과 함께라면 더욱더 즐겁겠지. 기대감이 들었다.

 

 

 

 

 

(다음 회차에 연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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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이번 챕터는 쉬어가는 편안한 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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