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112회 초인들의 세계 Ch 41. 닫히는 문과 열리는 문 (1)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2.12.10 | 회차평점 0 |
Chapter 41. 닫히는 문과 열리는 문
“다녀왔습니다.”
짙은 갈색 머리에 그을린 피부를 한 청년이 실내로 들어왔다. 키는 평균보다 조금 작은 편이었지만 다부지고 날렵한 모습에서 총명한 기운이 뿜어졌다.
“그래, 어서 오너라.”
“에이든은요?”
“자기 방에서 자고 있단다.”
“그렇군요.”
그 청년, 리온 마흐무드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근심에 차 있었다. 그는 현재 네 명의 친구들과 사역을 시작한 지 어느덧 이 년이 되었다. 그간 여러 대륙의 낙후된 지역들을 돌아다니며 근거지를 옮겨왔다. 최근에는 동아시아 지역 선교를 위해 이 지역을 순회하고 있었는데 마침 가족인 켄과 에이든도 한국에 거주하는 중이기 때문에 리온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별다른 열매를 거두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중동 같은 곳에서 선교할 때는 드물게 몇 사람의 마음을 기적적으로 되돌릴 수 있었지만, 지금은 도무지 말도 설득도 먹히지 않았다. 다행히 동행할 이곳의 신자들을 찾기는 했지만 큰 보탬이 되진 못했다. 현실적인 여건이 좋지 않았기에.
“얘야, 너도 고민을 많이 했겠지만⋯⋯, 다시 생각해보는 게 어떻겠니?”
켄은 손자에게 잠시 멈춰갈 것을 권유했다.
“때로는 곁을 돌아보며 재정비하는 것도 필요하단다.”
청년은 자신 친할아버지의 말을 듣고 대답 없이 묵묵히 서 있었다.
“하나님의 일을 반대하려는 건 아니다. 하지만……, 현장에서 뛴 네가 더 잘 알겠지만 뚫을 길이 이제는 더 남아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열정적인 본래 성격대로 반발할 수도 있겠지만 그는 할아버지가 오랜 시간 연단된 혜안과 현명함을 지닌 분임을 알았고 또한 자신이 처한 어려운 현실을 잘 이해했기에 일단 그 말을 경청했다.
“예전과 비교해서 너무도 많은 것이 달라졌다. 알잖니.”
과거 18세기부터 20세기 무렵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교사들의 노력에 힘입어 세계 각국에 전파되고 그에 반응해 회개와 믿음의 부흥이 곳곳에서 일어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근본적으로는 성령의 역사하심이겠지만, 현실적인 측면에서도 갖가지 기회가 될 틈새가 많았다.
먼저 당시 복음 미개척 지역들이 처해있었던 어려운 환경을 들 수 있었다. 그런 지역에는 세계열강의 실수로 인해 큰 고난을 받았던 개발도상국들도 있었고, 고립되어 있던 오지도 있었다. 그 같은 나라들에 한 번도 듣지 못한 놀라운 사랑의 메시지가 전해졌으니, 세상 가르침과는 차원이 다른 예수 사랑의 소식에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기가 쉬웠다.
물론 열강 정치인들의 제국주의적 만행이 순수한 마음으로 봉사했던 선교사들의 평판까지 선입견으로 더럽힌 면도 있었지만, 선교사들은 분명 떳떳했다. 또한 식민지 정책은 어디까지 2차 대전 이전의 관행, 그 이후에는 아프리카를 비롯한 극빈국에 인도주의적 지원이 후히 베풀어졌고 선교사들은 이를 통로로 성경을 전하였다. 많은 아이들이 그 감동에 이끌려 예수를 접했다.
“확실히⋯⋯, 지금 세계는 많이 다르죠.”
22세기에는 교통 통신 기술이 초월적으로 발달했다. 그리고 평균만큼만 살면 누구나 세계 곳곳을 누비며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이전처럼 선교하기 위해 발로 뛰어 고생할 필요는 없었다. 누구나 보고 들을 수 있는 통신 매체도 도처에 널려있었다.
그러나 그 대신 사람들은 선교사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배가 부르고 큰 고난도 없다 보니 자연스레 하나님이니, 성경이니 하는 고리타분한 이야기에는 관심이 사라져 버렸다. 아울러 복음을 너무 쉽게 접할 수 있게 되다 보니 그 귀중함을 인식하지 못해 한 귀로 흘려듣게 되었다.
하다못해 예전에는 의료 지원과 봉사를 통해서라도 다가갈 명분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무제한에 가까운 첨단 의료 지원이 이뤄지기에 병으로 고통받을 필요가 없다. 물론 그것 자체는 선하고 좋은 일이긴 했지만 어쨌건 진리를 전하려는 자들에게는 그만큼 틈새와 기회가 사라졌다.
더욱이 이기주의의 팽배로 인해 누구도 자기 집에 낯선 타인을 초대하려 들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또한 가구마다 최첨단의 보안 시스템이 존재했는데 이 시스템은 특수 인공지능을 힘입어 어떤 형태로든 종교를 전파하는 시도는 원천적으로 차단해버렸다. 거짓 종교들이 전도될 기회가 사라진 좋은 점도 있었으나 진리의 길도 그와 함께 막혔다.
거리에서 노상 전도를 하는 일도 사실상 쓸모가 없어졌다.
이 역시 법률적 제재보다는 기술적 발전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이제 유비쿼터스화된 옷을 통해서 자신이 원하는 외부의 정보만 선택적으로 취할 수 있었다. 핸드폰 없이도 홀로그램 화면을 허공에 띄워 남들이 보지 못하는 화면을 혼자서만 보며 조작할 수 있으며 이어폰 없이도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통신 기술의 발전도 완전한 도청 방지와 더불어 뇌 정보의 직접적인 교환까지 허락되는 수준에 이르렀다.
길거리의 행인들은 자기가 보고 싶지 않은 정보는 의도적으로 차단할 수 있었다. 자신의 시야 위에 특수 인터페이스를 띄워 특정 오감 정보는 걸러내고 특정 정보는 극대화할 수 있었다. 흡사 각 사람의 사고 체계 위에 실시간 유비쿼터스 가상현실이 덮어진 것과 같았다. 덕분에 투명 인간을 대하는 듯 불쾌하고 듣기 싫고 귀찮은 정보를 고의로 무시하는 일도 가능해졌다. 안타깝게도 전도는 대표적인 차단 대상 정보 중 하나였다.
더욱이 이제 가장 가난하고 낙후된 도시마저도 이러한 최첨단 문물의 혜택을 충분히 누리고 있었기에 파고들 만한 블루 오션 자체가 원천적으로 박멸되었다. 대부분의 국가 정부는 겉으로는 자유로운 활동을 허락했으나 실상 종교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런 마당이었으니 오늘날의 기술력 발전은 그들에게 있어 호재였다. 더는 선교사들을 우려하지 않아도 됐으니까.
이런 이유로 배교해버린 대형 교단들이나 여러 거짓 종교들은 일찍 감지 포교를 포기하고 각국 정부 및 거대한 세계 정부 측에 협조하거나 종교 통합적 흐름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끝까지 남아서 가망성 없는 싸움을 지속하는 측은 신념이 투철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뿐이었다.
“희망이 없는 걸까요? 요새는 저도 갈피를 못 잡겠어요.”
“아가야, 네 열정과 헌신은 나도 기쁘게 생각한단다. 하지만 성경에도 예언되어있잖니? [인자가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라고 주님께서도 직접 한탄하셨지. 마지막 때가 거의 문 앞에 이르렀단다. 주님이 그 문을 따고 강림하시기 일보 직전이야. 어쩌면 지금은 자기 자신의 믿음을 순전하게 지키는 것조차도 발등에 떨어진 불처럼 다급할 게야.”
할아버지 말대로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 현숙한 다섯 처녀처럼 자기 등불에다 기름을 채우는 것조차 빠듯한 시기일지도 모른다. 남의 것을 챙겨주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그럴 만한 여건이 갈수록 없어지는 중이었다. 하지만 리온은 속단하기에 앞서 재차 스스로를 되돌아보았다.
“그래도 정말로 믿는 자라면……, 이웃을 진심으로 안타깝게 생각하여 구하려 안간힘을 써야 하지 않을까요? 불길을 향해 다가가는 어린아이들을 말리지 않는다면, 주변의 어른은 그 책임을 물어야 하겠죠.”
믿는 자로서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세상에서의 형통이나 세상에서의 고난이 진정한 본질적 문제가 아님을. 한 사람이 생을 마친 이후, 혹은 창조주께서 다시 피조 세계에 강림하는 날에 모든 개개인의 행위에 대한 심판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심판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다.
“그래. 네 말이 맞는구나.”
켄 역시도 한숨을 쉬었다. 뾰족한 현실적인 수가 생긴 건 아니었지만.
“네 열정에 대해서는 나도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하지만 나는 진심으로 걱정될 때가 많단다. 한 번 너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고 점검해보렴. 정말로 너를 움직이는 열정의 원동력에 순수함만이 있는 것인지를.”
“저는!”
리온은 할아버지의 말에 대답하려다가 말문이 막혀서 멈추었다.
‘사실 나도 어렴풋이 알고 있다.’
자신의 책임감이 얼마나 과거의 그 날에 얽매여 있는지를.
이는 리온이 아직 이집트에서 살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리온이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 ‘마라크’와 함께 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어린 시절 은인이었던 사부도 함께했었다. 그 당시는 참으로 평화로웠다.
그런데 둘이 열네 살이 되던 해에 발생한 비운의 사건이 평화를 무너뜨렸다. 러츠 집안의 가옥에서 폭발 사고가 발생해서 에이든 러츠를 제외한 모든 가족이 죽었다. 친구 마라크 러츠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그 시절 사부는 사건에 대해서 해명도 해주지 않은 채 행방불명이 되었다. ‘너희는 나와 얽매여서는 안 된다.’라는 암시만 남긴 채 짧은 인연을 끊어버렸다. 붙잡고 캐물어 보고 싶었으나, 그녀는 접촉 자체를 회피했다.
그 후 리온은 줄곧 그녀를 원망하고픈 마음에 빠졌다. 물론 그녀 잘못이 아님은 알았다. 실제로 사부는 하나님을 섬기지는 않아도 세상 사람 기준에서는 가장 선량한 성품과 친절함을 지닌, 봉사와 구제와 화신이었으니까. 하지만 어쨌건 그 사건을 기점으로 리온과 그녀의 간극은 완전히 멀어졌다. 가뜩이나 다른 방향을 바라보던 사제는 돌아올 수 없는 거리만큼 분리되어 버렸다.
지금은 떠나간 마라크는 그리스도께 헌신하던 신실한 친구였다. 그는 줄곧 ‘비록 우리는 가난한 지역 출신이지만, 기죽을 필요 없어. 번영한 다른 세상 나라들을 찾아가 그곳 시민들 앞에서 거룩한 증인의 삶을 보임으로써 그들도 하나님께로 인도하자.’라고 말하며 거창한 꿈을 키워나가던 친구였다. 그러나 녀석은 그 꿈 언저리에도 가보지 못한 채 죽어 버렸다.
리온 자신이 이토록 헌신의 임무에 매여 있는 이유?
‘솔직히 순전한 열망 때문만은 아니겠지.’
혹 친구에 대한 죄책감이 은연중 같이 섞여 있는 것이 아닐까?
‘하나님 앞에서 이래도 되는 걸까?’
거듭 부채감으로 힘들어하느니 차라리 잠시 멈춰서는 게 나을까 하고도 고민이 들었다. 내심 영혼의 기운이 빠지면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해결책을 간구하는 기도는 벌써 수차례나 드렸다. 주님께서는 왜 아직도 침묵하실까? 혹시 마음속에 섞인 불안감과 부담감이 응답을 가로막고 있는 것일까?
*****
요정왕(妖精王).
그녀를 칭하는 칭호나 직함은 많았지만, 요정왕만큼 유명한 건 없었다.
범 지구-은하 교역 연합의 설립자, 제4 메이저 섹터 수장, 남미 연합의 리더.
이런 비즈니스적이고 딱딱한 명칭보다는 요정왕이 훨씬 더 낭만적으로 느껴지지 않겠는가. 지구 위의 국가들을 통솔하는 자답지 않게 그녀는 동화 속 요정 이야기를 좋아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미신을 믿는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었다. 그녀는 ‘실존하는 요정’들을 만들어 통솔하는 자였다.
우우우우웅.
위이잉.
펄럭펄럭.
팅커벨처럼 생긴 작고 귀여운 소형 요정들이 제각기 다양한 색깔의 형광을 내뿜으며 날아다녔다. 이런 유형의 요정들만 최소 수만 마리 이상이었다. 좀 더 큰 인간 형태의 반투명한 요정들도 날아다녔다. 날개의 형태도 새, 박쥐, 나비 등등 매우 다양했다. 웅장한 실내는 각양 요정들로 충만했다.
요정들의 무리가 잔뜩 수놓아진 이 공간은 거대 인공 정원이었다. 대기권 위에 세워진 수백 개의 거대한 인공 섬들이 거미줄 같은 브릿지를 통해 촘촘히 연결되어 형성된 공중 도시의 한복판에 놓인 초대형 정원.
이곳은 일반인들의 미적 감상을 목적으로 건설된 곳은 아니었다. 이곳은 마리아 살바도르의 개인 정원인 동시에 실험실이며 그녀가 요정들과 교감을 하는 만남의 장이었다. 그녀가 다스리는 요정들의 거주지와 번식지는 이곳 말고도 많지만, 이곳만큼 그녀의 까다로운 미학을 충족시키는 곳은 드물었다.
정원 아래쪽으로는 거대 창고가 있었다. 그 창고는 아공간 기술과 차원 간섭 기술을 통해 건설되었기에 안에 함축된 공간은 바깥에서는 보이는 것보다 훨씬 넓었다. 이 요정 수납고에는 거대한 시험관들이 무수히 진열되어 있었고 그 안에는 다양한 크기의 요정들이 있다. 그들은 촘촘한 인공 신경 다발에 연결되어 잠들어 있었다. 일부 개체 중에는 전함에 준하는 급도 있었다.
마리아의 요정들은 색상과 채도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었고 투명에 가까운 육신을 지닐 수도 있었다. 그들은 중력이나 관성 같은 물리력의 강제로부터 자유로운 특성이 탑재되었기에 인간과는 달리 공간을 마음대로 활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심장에는 강력한 에너지원이 함축되어 있었다. 로봇의 동력원과는 조금 원리가 다른 동력원으로 요정에게만 특화된 것이었다.
요정들의 정신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기계에 이식된 인공지능과는 원리상의 차이가 있었다. 그 작은 차이점으로 인해 빚어진 결과가 바로 ‘유사 의지’였다. 말 그대로 무언가를 간절히 갈망하고, 소망하고, 기도하는 마음. 인간의 영혼이 가진 ‘진실한 의지’와는 달리 인공적으로 모방해낸 가짜였지만 분명 살아 작동하는 또 다른 양태의 의지였다.
요정 육체에는 소위 초인들이 칭하는 ‘마법 공학’이 걸려 있었다. 이 ‘마법’이란 ‘초자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독특한 양상으로 발전한 ‘특수 공학’을 의미했다. 마도 공학이라고 부르는 편이 나을 것이다.
고도로 첨단화된 인류 문명은 특이점을 넘은 이후 여러 종류의 분파들로 나뉘어 일부는 신비한 유형의 기술을 만들어냈는데 그 가운데는 기이한 것도 있었다. 특수한 운용 방식이 필요하거나 형태나 작동 원리에서 기이함을 지닌 것들, 이런 류는 ‘마법’ 또는 ‘마도 공학’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사실 충분히 발전한 과학은 겉보기에는 마법처럼 보일 수 있기에 그리 신기한 일도 아니었다.
아름다운 꽃들이(사실 이 꽃들도 특수한 실험체였지만) 만발한 이 거대 정원의 발코니에서 기댄 채 휴식을 취하고 있는 한 여성. 마리아 살바도르는 반곱슬의 흰 머리카락에 짙고 매력적인 연갈색 피부와 건강한 육체미를 동시에 지닌, 만인이 인정하는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모두의 사랑을 한 몸에 받던 그녀는 여걸인 동시에 우아하고 고상한 레이디였다.
(다음 회차에서 연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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