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113회 초인들의 세계 Ch 41. 닫히는 문과 열리는 문 (2)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2.12.12 | 회차평점 0 |
(이전 회차에서 연속됨)
-언니, 무슨 고민 있으세요?
-표정이 아련해 보여요.
-우리가 언니 도움을 해결해드릴게요.
요정들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로봇들과는 달리 요정들과의 커뮤니케이션에는 특수 재능이 필요했다. 마리아는 요정 제작과 관련된 지식뿐 아니라 요정 언어 관련 재능에서도 남들과는 차별화되는 천재성이 있었다. 그렇기에 인류연합의 요정 관련 산업에서 그녀가 많은 지분을 맡게 된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 왜 이렇게 넋 놓고 있어, 요정왕 언니?
“키레이아.”
키레이아라고 불리는 인간보다 조금 덩치가 큰 요정이 등 뒤에서 마리아를 껴안았다. 그것은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푸른 빛을 발하였다. 겉모습은 어여쁜 동화 속 요정의 모습이었지만 본질은 인간이 만들어낸 요정 중 손에 꼽히는 우수작 병기로 높은 에너지 출력과 만능에 가까운 특수 능력들을 지니고 있었다.
“언니는 잠시 혼자 쉬고 싶은걸.”
-쳇, 나는 언니랑 놀고 싶은데.
마리아는 토라진 요정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상위 차원에서 추출한 신물질로 만들어진 육체라 특수 장갑을 착용하지 않으면 만질 수도 없고 설령 장갑을 착용해도 요정과의 교감도가 높지 않으면 화상을 입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마리아의 손은 생채기조차 없이 멀쩡했다.
-난 알 것 같은데? 언니는 지금 연애 문제 때문에 고민에 빠진 거야.
연한 불꽃 재질의 다른 요정이 나타났다. 제13세대 요정 중에서도 특수한 목적으로 생산된 요정 아종인 ‘정령 시리즈’의 일원, 녀석은 제124유형 정령인 ‘플레임 정령’에 속한 개체였다.
“플레아케이라!”
낮고 엄숙한 목소리가 불타는 정령을 꾸짖었다. 그러자 장난꾸러기 정령은 배가 터지도록 웃었다. 그리고는 그녀를 놀려대며 공중을 마구 날아다녔다. 마리아의 장갑에서 특수한 결계가 발동되어 그것의 목덜미를 붙잡기 전까지는.
-미안해요. 안 그럴게.
정령이 토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정신 연령은 영락없는 어린아이지만 사람과 다르게 감정에 쉽게 동화되고 교감을 이루는 것이 요정 종의 특징이었다.
-나 누군지 알아요.
이번에는 등에 13쌍의 화려한 반투명 날개를 단 용 형태의 요정이 나타났다.
젤리 같은 유동성 재질의 몸이 유체처럼 유려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때 그 갈색 머리 형 맞죠.
“하아⋯⋯.”
감정 문제에서만큼은 요정을 속이기가 힘들었다.
‘아가들에게 눈높이 맞추어주는 것도 참 힘들구나.’
마리아는 묵묵부답으로 발코니에서 턱을 괬다.
그녀는 지금으로부터 약 15년 전의 일을 회상했다.
그 무렵은 유력한 3세대 초인들이 본격적으로 세계무대에서 활동을 개시하던 시기였다. 일반인들은 이러한 진짜 실세들의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초인끼리는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서로의 움직임을 면밀히 주시했다. 그들은 새로운 지도자가 나타날 타이밍을 숨죽여 기다렸다.
이내 새로운 지도자들이 인류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자 어린 천재들은 각자의 실력을 새 주군에게 인정받는 일, 그리고 새로이 모실 차세대 리더를 택하는 과제에 신경을 잔뜩 곤두세웠다.
마리아 역시 일찍이 자신이 따를 자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 휘하에 편입되기 위해 자신을 피알했다. 그녀는 최상위 초인이었다. 비록 최강자 자리까지 도달할 그릇은 아니었지만, 스스로의 분수를 읽고 미래의 세력 판도를 내다볼 지혜로운 혜안은 있었다. 그녀는 조만간 누구의 손에 세계가 제패 될 것인지를 정확하게 간파했고 그에 맞춰 지혜롭게 처신했다.
타고난 지력과 자질 덕에 당연하게도 최고의 인재로 평가받은 마리아. 그 덕에 그녀는 차기 지배자의 소환을 받아 직접 대면할 영광을 얻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같은 날, 다른 소년 하나가 차기 왕의 부름을 받고 왕을 찾아왔다. 그도 역시 매우 뛰어난, 보기 드문 인재였다.
다소 무덤덤해 보이는 그 곱상한 동양인 소년. 같은 급수의 실력자인 그녀가 보기에도 고작 ‘현명하다’라는 표현 정도 평가하기에는 아까운, 훌륭하기 그지없는 그릇이었다. 그녀는 친구뻘인 그에게 살갑게 다가갔다.
“얘, 너는 나이가 어떻게 되니?”
소녀 마리아의 호기심 어린 관심과 질문에.
“저희 나라 기준으로는 열두 살입니다.”
예의 바른 듯, 무심한 어조로 대답이 돌아왔다.
“넌 참 어른스럽네.”
“칭찬 감사합니다.”
곧 둘은 차기 왕과 대면하였다. 그들은 왕께 지혜를 평가받았다. 그 후, 정세를 논하고 미래를 위한 계획을 세우면서 시간을 보냈다. 왕은 둘 모두를 높게 평가하며 칭찬했는데 특별히 동양인 소년 쪽에 유난히 관심을 보였다. 누구보다 뛰어났던 왕은 타인의 한계와 잠재력을 간파하는 데도 능숙했다. 그는 갈색 머리 소년에게서 단순한 능력이나 재능 이상의 무언가를 읽었다.
“성운.”
“네.”
“너는 좀 특이한 재능을 하나 갖고 있군.”
평소 무심한 표정을 고수하던 성운도 그때는 심리적으로 흔들렸던 것 같다. 그는 왕의 예리한 눈빛에 빨려 들어갔다. 자신보다 고작 한두 살 정도 많은 분일 뿐인데도. 사소한 현상 하나도 놓치지 않는 관찰력과 끝을 가늠하기 어려운 그 능력에 성운은 심히 긴장했다. 외경심이 성운의 동공에 깃드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태연한 기색을 유지했다. 마리아는 그 의지력에 감탄했다.
“아직 그것을 드러낸 적이 없었습니다만.”
“난 초인의 능력을 간파하는 분석력이 원래 예리해. 그리고 이제 너도 내 울타리 안에 들어온 내 사람이니 알아야겠지만, 나는 타인의 재능을 파악하고 흡수하는 특색을 소유했다.”
차기 왕의 말에 성운이 긴장하는 동시에 흥미를 기울였다.
“풍문으로 들어본 적 있습니다. 이벨리아와 같은 유형의 재능 아닙니까?”
“아니, 내 쪽이 천 배 이상 더 상위 계통이지.”
왕에겐 다른 초인들을 굴복시키는 특유의 통솔력과 지배력도 느껴졌다. 마리아처럼 갈색 머리 소년도 왕에게 깊은 위압감을 느끼는 듯 했다. 왕의 태양을 연상시키는 밝은 채도의 금색 눈이 성운의 폐부를 예리하게 꿰뚫었다.
“너도 나처럼 통찰력과 육감이 예민한 모양이군.”
“…….”
차기 왕은 턱 밑에 손가락을 괴며 여유롭게 흥얼거렸다.
“미안하지만, 네 재능도 예외는 아니야.”
마리아는 대체 유성운이라는 소년이 가진 특수한 재능이란 게 뭘지 궁금했다. 전에도 종종 그녀는 최상위 초인과 교류를 나누곤 했는데 그들 중에는 다른 어떤 인간도 보유하지 않은 ‘고유 재능’을 보유한 경우가 드물게 있었다. 아마 유성운이란 소년도 동류인 듯했다.
왕은 성운과 대화를 계속해서 나눴다.
“확률 연산이라……. 인간에게도 그런 게 가능할 줄은 몰랐군.”
“순식간에 본질을 분석하시다니, 역시 차원이 다르시군요.”
“아마도 너만 갖고 태어난 특별한 재능이었겠지.”
왕은 무엇이 그리 기쁜지 콧노래까지 불렀다.
“아, 조금 전에 모방했으니까 나까지 두 명인가?”
왕은 성운을 몹시 흥미로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혹시 실례였다면 사과하지.”
“실례라니, 무엇이 실례란 말입니까?”
“네가 연마한 너만의 고유 재능, 한순간에 모방당한다는 건 억울하겠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사실 초인이란 존재 자체가 인류라는 종의 입장에선 반칙이나 다름없으니 저 또한 억울할 자격은 없습니다. 도리어 제 미약하고 보잘것없는 능력이라도 차기 위버멘쉬가 되실 당신께 작은 밑거름이 되었다면 감사히 여길 따름입니다.”
성운의 말은 아부라기보다는 너무도 진지한 충언 같이 들렸다.
“재미있는 친구로군.”
높은 분께서 몰아붙이기 화법을 선보이는데도 성운은 동요조차 없었다.
“그래, 널 별도로 평가할 필요는 없겠군.”
“좋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네 자유의지로 나와 손을 잡겠는가?”
“물론입니다. 아니, 그 이상입니다. 세계를 통합할 그릇을 지닌 위인은 당신뿐입니다. 나머지 네 인간은 무르거나 도를 지킬 줄 모르니 도태될 것입니다.”
대답이 흡족했는지 보스는 둘과 계약을 맺고 둘을 부하로 삼았다.
그리고 그날의 만남 이후 마리아는 성운과 소꿉친구처럼 가까워졌다. 둘은 친교를 맺고 활발히 교류하였다. 정치든, 기술 연구든, 사업이든 둘은 서로 합이 잘 맞았다. 그들은 협력하여 불가능에 가까운 미션들을 해결했고 여러 거대 사업체를 일구어 지구 바깥에까지 영향력을 뻗쳤으며 각자가 맡은 섹터 내에 소속된 국가들을 인류연합의 지배권 아래에 차근차근 복속시켰다.
성운은 여러 방면에서 초인들이 보기에도 비범한 인물이었다. 자신보다 어리석고 낮은 자들에게도 유순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대립 관계에 있는 세력과의 징검다리를 자처할 만큼 친화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마리아는 이렇게 추측했다. 성운의 이런 특성은 가족의 존재 때문이리라.
초인은 대체로 가족이 없었다. 어릴 때 친가족을 잃거나 처음부터 버려진 출신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한 ‘고아’라는 속성이 각성 트리거의 일부로 작동했는지는 분명치 않았다. 어쨌건 그들 중 고아 출신이 많은 것은 사실이었다. 이는 혼돈의 시대 때의 대규모 국가 분쟁 및 초인 분쟁 탓이었다.
성운은 드문 예외 중 하나였다. 그에게는 아버지, 어머니, 다섯 동생이 모두 생존해 있었고 그들 모두 한국에서 안정적인 가정을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초인에게 가족이란 곧 약점이나 다름없었다. 약점을 지닌 자는 자연히 몸을 사리고 신중하게 행동해야 하며 자연히 화합을 중시하기 마련이다. 성운이 강경함과 유순함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리라.
-누나, 그 형한테 좋아한다고 고백 한 번 해봐요.
“일리아, 누나한테 혼난다고 했지.”
마리아는 날개 달린 요정용의 목덜미를 붙잡고 꿀밤을 먹여주었다. 하지만 요정의 말대로 그녀는 성운에게 개인적인 관심이 있었다. 다만 그는 눈치채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무시하는 것인지 항상 철벽을 쳐왔다.
“미안합니다. 아직은 마음이 없습니다.”
성운은 연애나 결혼 관련 문제에 대해서는 시종일관 이렇게 대답했다.
‘가족을 형성한다라.’
보통 3세대 초인은 일반인과 연을 맺지 않고 자기들끼리 의형제를 맺거나 결혼한다. 지켜야 할 짐짝보다는 협력할 수 있는 대등한 동료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독 성운은 그런 작위적인 관계를 선호하지 않았다. 일반인 가족들과 의절하지 않고 함께 생활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리라.
*****
그 시각 성운은 소형 함선 안에서 창밖을 내다보며 사색했다.
‘보스가 요새 점점 강윤혁에게 휘둘리기 시작하는 것 같군.’
불과 수 시간 전 대화가 머릿속에서 선했다. 업무를 점검받고 공적인 일들을 논하려 평소처럼 보스를 만나고 왔더니 돌연 평소의 보스답지 않게 엉뚱한 질문들만 늘어놓았었지. 애써 일 쪽으로 관심을 돌리려 했으나 보스는 그런 건 얼마든지 해결해주겠다며 구태여 사적인 대화로 끌고 갔다. 성운이 다른 부하들보다 편해서 그런 것일 테지만, 기분이 왠지 어색했다.
“넌 친동생들이 많다고 했었지? 모두 일반인이고 말이야.”
“그렇습니다.”
“흐음, 보통 형제들끼리는 어떻게 해야 잘 지내는 건가?”
“네?”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너처럼 일반인과 초인이 함께 지내는 경우는 별문제 없나?”
성운은 바보가 아니었기에 그 질문의 의도를 당장 파악하였다. ‘어떻게 하면 강윤혁에게 위화감이나 이질감을 주지 않은 채 일반적인 형제간의 우애 관계를 형성할 수 있겠는가?’ 하고 묻는 것이겠지.
‘하필 제일 뛰어난 초인과 그런 초인 자체를 경계하는 일반인이라니.’
확실히 쉽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 년 전만 해도 저런 팔불출 같은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는데.’
원래 가족 간의 정이라는 감정은 보스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면모였다. 그는 오로지 자기 정의관과 원칙에 따라서 이성적으로 움직이는 인간이니까. 그런 그가 스스로에게 변화를 입히려 하다니, 참으로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성운은 개인적으로 그런 보스의 변화도 낯설면서도 흥미로웠으나, 다른 초인들이 알면 경을 칠지도 모르겠다는 걱정도 들었다.
이윽고 성운은 한국에 있는 자기 가족들의 본가에 도착했다.
‘오랜만이군.’
그가 소유한 개인 저택에 비하면 작은 규모이지만 그래도 평균 수준보다는 훨씬 훌륭한 외관이었다. 성운이 직접 건축한 건물이었다. 그는 식구들을 고이 모셔놓은 뒤 집에 높은 수준의 강력한 보안을 걸어두었다. 자신 때문에 가족들이 다른 이에게 해코지당하는 일을 방지하도록 말이다.
(다음 회차에서 연속됨)
이전회
112회 초인들의 세계 Ch 41. 닫히는 문과 열리는 문 (1) |
다음회
114회 초인들의 세계 Ch 41. 닫히는 문과 열리는 문 (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