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115회 초인들의 세계 Ch 42. 준동 (1)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2.12.17 | 회차평점 0 |
Chapter 42. 준동
잠깐의 평화로운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바깥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섬 밖에 나온 루디아에게도 이제 귀가할 시간이 돌아왔다. 그녀는 신세 졌던 윤혁네 식구들에게 깊은 감사를 표했다. 열흘 남짓한 짧은 시간, 어찌 보면 아쉬운 시간이었지만 소소한 추억을 새기기에는 충분했다.
윤혁도, 루디아도, 이대로 헤어지자니 어딘가 모르게 아쉽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섬의 출입에는 특수한 허가가 요구된다. 게다가 윤혁은 중립 지대의 위치도 모르고 출입증도 없었다. 진이나 다른 초인의 도움 없이는 좌표를 찾기도 불가능하리라. 둘 사이에 언제 재회가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루디아라면 간혹 이곳을 방문할 수 있겠지만, 윤혁과 동료들과의 모험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그 또한 어려워질 것이 분명했다.
“짧지만 잊을 수 없는 시간이었어.”
“나도. 할아버지들이랑 아이들에게도 안부 전해줘.”
루디아는 오랜만에 아이들을 다시 볼 생각에 들떴다.
“그래도 기회가 된다면 언제든 찾아와도 좋아.”
윤혁이 멋쩍은 표정으로 종종 방문할 것을 종용했다.
“그때는 다른 친구도 소개해줄게.”
“나도 최대한 기회를 내볼게.”
그녀가 화사한 웃음꽃을 피우며 긍정적으로 대답하였다.
곧 운송기가 그녀를 섬으로 반환하기 위해서 집 앞으로 당도했다. 보안 기능에 불가시 기능까지 탑재된 셔틀로 섬의 주인이 원격 조종할 수 있는 장치였다. 루디아가 바깥 세계에서 위해를 입지 않도록 보호할 목적으로 파견된 운송기였다. 불가시 모드를 해제한 셔틀은 허공에서 기척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잘 가.”
루디아가 멀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윤혁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전날 둘이서 나눴던 약속이 떠올랐다. 그는 만약 지금보다 더 넓은 세상으로 여행을 떠날 일이 생긴다면 혹시 함께 갈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조금 망설였다. 끝내 결정은 하지 못했다. 약간의 호기심은 표정에서 묻어나긴 했지만.
‘왜 덜컥 그런 부탁을 제안해버렸을까?’
투명해진 운송기가 저 멀리로 떠나간 뒤 윤혁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나조차도 마음의 준비가 덜 된 상태이건만.’
루디아와의 시간은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편했다. 그녀와 동행한다면 오지로 탐방을 떠나든, 적들의 땅을 밟든 평안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같은 주님을 의지하는 동맹자라서 그런 것일까? 유독 그녀의 영혼과 자신의 영혼에서 발원하는 신앙의 파동은 잘 공명하는 듯했다.
‘잘 지내야 해.’
그 후, 며칠이 더 흘렀다.
윤혁은 또다른 이웃과 작별을 겪어야 했다. 윤혁네 식구들과 제법 친해졌던 신해가 외국으로 떠나겠다며 작별 인사를 하였다. 윤혁에게는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고 세상의 이모저모를 가르쳐준 친구이기도 하다 보니 아쉬움이 들었다. 어느새 이웃사촌까지 되었건만 이렇게 빨리 떠나가는구나. 스쳐 가는 인연치고는 정이 많이 쓰이는 만남이었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형.”
“나야말로.”
친하게 지낼 때는 동네 바보 형처럼 느껴졌었는데 정복을 차려입고 당당한 풍채로 서 있는 모습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새삼 신해가 전쟁 전문가인 휴먼 솔져 출신이라는 사실이 다시금 상기되었다.
“마지막으로 한번 악수만 할까.”
“좋아요.”
윤혁은 의심도 없이 신해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상대는 왜인지 모르게 조금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신해는 눈을 잠시 꽉 감았다. 이내 그는 뭔가를 결심했는지 조심스럽게 악수를 받아들였다.
‘그 사람이 너를 주목하고 있으니까 주의해.’
신해의 오른손이 윤혁의 오른손을 꽉 쥔 바로 그 순간.
‘너를 돕는다고 했지만, 의심스러워. 너무 믿지는 말고 잘 분별해.’
직감적으로 윤혁의 뇌리에 신해의 목소리가 스쳤다.
‘너도 적당히 그를 이용하겠다는 생각으로만 접근해.’
익숙한 느낌이었다. 텔레파시를 전송받을 때의 감각. 윤혁이 황급히 질문하려고 하자 신해는 그저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대며 ‘쉿’ 하는 시늉을 하였다. 그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사인을 보냈다. 윤혁은 영문을 몰랐지만 일단 신해에게 맞춰주기로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
친구와 이웃이 떠나가고 난 뒤로도 윤혁은 허전함을 느낄 틈도 없이 바쁜 일상을 보냈다. 주말에는 리온, 창, 제니, 에일리, 레브와 함께 교정 시설이나 길거리나 구제 시설을 돌아다니며 봉사, 찬양, 전도하는 법을 배웠고 평일에는 간간이 훈련소에서 찬영에게 체력 단련을 지도받았다. 윤혁은 몸의 훈련도, 지식과 정신의 단련도, 영의 연마도 모두 게을리하지 않았다.
수요일이면 기도실을 방문해 어르신께 몇 번 더 깊은 배움을 받았다. 노인은 상담과 더불어 연륜이 묻은 가르침을 많이 전수해주셨다. 그러나 인류 역사, 세계정세, 카이젤에 관한 이야기는 일정 범위 이상으로는 해주시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은 신앙생활과 관련된 고민 상담에만 주력했다.
학교는 조만간 졸업이었다. 졸업 과제도 마무리했기에 이제는 찾아갈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윤혁은 전공과는 별개로 자기 나름대로의 공부는 계속했다. 앞으로 어떤 분야의 지식이 언제 어떻게 쓰일지 알 수 없으니 말이다. 진과의 훈육 이후로 자신의 무식함을 철두철미하게 깨달은 윤혁은 일반인의 범위에서 할 수 있는 만큼이라도 배움에 성심껏 임하기로 했다. 전공이든, 전공 밖이든 가리지 않고 최선을 다해보리라 다짐했다.
‘다음번 형과의 만남을 대비해야 해.’
시뮬레이션 우주에서 봤던 여러 단편적 정보에 대해서도 직접 조사와 분석을 수행할 필요가 있었다. 진은 어디까지나 수박 겉핥기식으로만 보여줬으니까. 게다가 믿기 어려운 이야기는 이중 삼중으로 교차검정 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일차적으로는 어르신과 그때 본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지였다. 그분께는 세계의 흐름을 읽는 지혜가 있으니까. 과학 실력과 신학적 통찰력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데다가 신실하고 믿음직스러운 분이었다.
노인은 윤혁의 이야기를 듣더니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지난번에 들려준 이야기들보다 훨씬 경이로운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급속도로 진화해버리는 초인들의 기술력을 세 세대에 걸쳐 경험해보았기에 이젠 무엇을 접해도 놀라지 않는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심지어 3세대 초인들의 발전상에 대해 첨언을 붙이지도 않았다. 제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낡은 1세대가 현세대의 진도를 따라잡기란 벅찬 모양이었다.
윤혁은 이에 다른 쪽 조언을 모색해보았다.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과도 조금씩 정보를 공유해보는 편이 좋겠지?’
한 사람이 동시에 모든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는 없으니까 여러 영역의 의견을 종합해보는 편이 나을 듯했다. 카이젤과 같은 극히 드문 예외도 있지만 그건 정상 범주가 아니니까. 애당초 형의 행적을 알기 위해 미리 예습하려던 마당에 형의 도움을 불러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윤혁의 주변에는 다방면에서 첨단 공학을 연구하는 동료, 친구, 조교, 교수가 여럿 있었다. 비록 초인들처럼 지식의 최전선에 서 있는 이들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전문적인 조언을 해줄 능력은 되었다.
한 번은 YS 테크에 갓 입사한 신임 연구원 진우를 불러냈다.
이번에는 윤혁 본인이 밥을 사주겠다고 호의를 베풀면서 유인하였다.
윤혁은 제로원에서 접한 다양한 정보들을 아주 제한적으로, 간접적으로, 넌지시, 암시적으로 흘리며 의견이나 첨언을 유도 신문했다. 너무 의심스러울 정도로 고도화된 첨단 지식에 대해서는 대강 ‘저명한 학자들과 우연히 만날 기회가 있어서 이런저런 가설들을 들었다’라는 식으로 일축하여 설명했다. 다행히 진우는 윤혁을 크게 의심하지는 않았다.
진우는 ‘시간 압축’이라는 기술의 실존에 대해서 상당히 놀란 반응을 보였다. 윤혁의 이론 제안에 호기심은 보였으나 온전히 믿지는 않고 반쯤 음모론으로 치부하는 눈치였다. 물론 그 심정은 이해가 되었다. 원래 시간을 다루는 기술은 현대 과학으로도 가장 닿기 어려운 고난이도 영역이니까.
“솔직히 안 믿기기는 하는데 만일 정말로 그런 것이 존재한다면 지금까지 현대 불가사의처럼 여겨지던 거대 구조물들의 존재가 설명되긴 하네요.”
덕분에 윤혁은 초인과 일반인의 지식 및 견문에 상당한 급수 차이가 있음을 확연히 느꼈다. 초인들이 일상적으로 알고 있는 기술마저 일반인 과학자들에게는 불가사의처럼 여겨지는 것이 현실이었다.
“일각에서는 국제 정부가 항성 압축 축퇴로를 보유했다고 주장하더라고요.”
진우가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너무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라 솔직히 지금도 안 믿어져요.”
“하하, 그러게.”
‘사실 그 구조물은 이미 수억 개 이상 존재한단다.’
윤혁은 상대의 의심을 사지 않도록 적당히 맞장구쳐주었다.
“이건 음모론 같은 이야기이지만……, 혹시 외계인이 인류 몰래 우리 가운데 공존하는 중인 건 아니까요? 우스꽝스러운 상상이지만, 지난 한 세기 반 동안 인류가 보여준 비정상적인 발전은 달리 설명할 길이 없거든요. 아니면 미래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여기 숨어든 사람이라도 있을까요?”
초인들은 아직 자기네 부류의 정체를 공식적으로 공개하지는 않았으니 일반인의 선에선 보통 진우처럼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그놈의 외계인과 미래 인류의 정체가 초인이라는 이름의 인간의 탈을 쓴 종족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겠지. 사실 이질적인 존재이자 시대를 앞선 존재이니 외계인으로 취급해도 영 틀린 소리는 아닐 듯싶었다.
‘어째서 초인들이 자신들의 지식을 민간과 공유하지 않는지 이해가 가네.’
아직 대부분의 인간은 지나치게 빠른 발전 속도와 신세계의 급격한 도래에 대응할 준비가 갖춰지지 않았다. 그걸 알기에 초인들도 대중이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만 천천히 문명 발전을 제공하는 것이리라. 당장 윤혁도 시뮬레이션 우주니, 우주 식민지니, 항성 엔진이니 하는 것들은 직접 보고 들은 끝에야 믿게 되었다. 초인들이 아니었다면 평생 가도 몰랐을 것이다.
한편 진우는 에너지 공학자답게 차세대 엔진의 원리에 대해 간략한 개요를 설명해주었다. 진우는 미래 시제로 장차 만들어질 기술을 말해주었지만, 사실 그중 대부분은 이미 실제 우주 곳곳에 상용화된 것이었다. 윤혁은 진이 시뮬레이션 우주상에서 저런 유형의 차세대 엔진들과 그보다 더 발전된 것들을 상세하게 보여주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사실상 초인들은 미래 속에서 사는 셈이구나.’
그리고 카이젤은 그 초인들보다 몇천 년 앞의 미래에 사는 중이겠지.
그래도 엔진의 작동 원리에 대해서는 무지했던 윤혁은 진우 덕에 다양한 지식을 새로 접할 수 있었다. 가끔은 과도하게 앞서나간 지식인보다는 적당히 비슷한 수준에서 눈높이에 맞게 가르쳐주는 친구의 말이 더 유익한 법이다. 진에게 전수받은 ‘이해할 수 없는 영역’들보다는 훨씬 더 받아들이기 편안했다. 덕분에 윤혁은 자기 속의 지식들의 괴리를 아주 조금이나마 줄여냈다.
“혹시 미래에는 영구기관이 만들어질 수 있을까?”
그는 이참에 궁금했던 주제에 대해 떠보았다.
“글쎄요? 현 엔진들도 최대로 잡아봐야 ‘반-영구’ 혹은 ‘준-영구’ 수준이죠. 이론상 진정한 의미의 영구기관, 그러니까 상위 차원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체적으로 창조주의 영역에까지 도달한 영구기관은 불가능하겠죠. 하지만 혹시 또 모르죠. 지금까지 과학 이론이 통째로 뒤집힌 게 한두 번이 아니니까요.”
교과서다운 애매모호한 열린 답변이었다.
‘어쩌면 형은 진-영구 동력원을 개발할 작정으로 연구 중이지 않을까?’
그 사람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으로 여겨졌다.
(다음 회차에서 연속됨)
이전회
114회 초인들의 세계 Ch 41. 닫히는 문과 열리는 문 (3) |
다음회
116회 초인들의 세계 Ch 42. 준동 (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