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120회 초인들의 세계 Ch 43. 기성세대 (3)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2.12.28 | 회차평점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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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음⋯⋯.”
카이젤은 문득 다른 데에 생각이 미쳤다.
“네 부계 유전자는 아시아 쪽이었다지? 마침 나랑 같은 경우로군.”
“일본인입니다.”
“일본이라. 그 나라는 최근에 성운이 무인 식민지 비슷하게 바꿔버리지 않았나? 이름도 아예 지워진 줄 알았는데 오랜만에 듣는군. 그러고 보면 너도 용케 그렇게 하는 걸 허락했었군?”
현 일본은 만주와 북중국과 더불어 성운 관할의 섹터에 속해있었는데 이름이 거의 불리지 않는 상태로 무인 식민지나 마찬가지였다. 언젠가 성운이 ‘시베리아처럼 만들지 않은 것만 해도 감지덕지해야 한다’라고 말했었던 것 같다.
“제가 상관할 문제가 아닙니다. 유성운 섹터장의 개인감정 문제입니다.”
“하여간 로스트엠페러 녀석들은 초인답지 않게 타민족에 대한 보복 심리가 강하다니까. 신기한 녀석들이지. 딱히 애국심이나 애민심도 없어서 내가 지구 해체를 하겠다니까 좋아 어쩔 줄 몰라 했으면서 말이야.”
“그들의 각성 트리거가 ‘민족 단위의 집단무의식적 원한’이니까요.”
선천적이건 후천적이건 초인이 탄생할 때는 대개 일련의 ‘트리거’가 각성에 관여한다. 트리거는 복합적 요소들로 이뤄졌는데, 그 요소는 특정 경험일 수도 있고 혹은 집단 무의식의 영향력일 수도 있다.
특별히 최상위인 SSS 클래스 초인은 개인 단위 트리거만으로는 잘 탄생하지 않았다. 보통은 여러 시대에 걸친 수많은 사람 혹은 민족의 감정이나 한이 트리거로 작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로스트엠페러들이 그 예시였다.
“아무튼, 너는 네 친부에 대해서 별 감정이 없다는 거군.”
“제게 큰 의미는 없는 사람입니다. 애정도 없고 증오도 없습니다.”
자신을 탄생케 해주었으나 태어나기도 전에 사라져버린 부모. 에녹에게 있어 부모란 정체조차 모를 과거의 잔상에 불과했다. 반면, 에녹과 달리 카이젤에게는 아직 돌아갈 수 있는 가족들이 남아 있었다. 아버지 강성한, 이복동생 강윤혁. 물론 단순히 없는 사람치고 외면해버릴 수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둘과 인연을 이어나가는 길도 하나의 선택지이다.
“이제 남은 공무를 진행해야 합니다. 실례했습니다.”
체스가 끝나자마자 푸른 눈의 훤칠한 미남자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이런, 너무 빡빡하게 사는 것 아닌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께 그런 소리를 듣고 싶진 않군요.”
“하하! 피차일반이군. 남 말할 처지가 아니었어.”
친구가 자리를 뜨는 모습을 보며 카이젤은 쓰디쓴 실소를 흘렸다. 두 친구가 체스를 벌인 시간은 지극히 방대했으나 바깥에서는 1초도 채 흐르지 않은 상태였다. 이들이 보통 공식적으로 업무를 인수인계하는 데 쓰는 이 장소는 사실 현실 공간이 아니었으니까. 물리적 한계를 넘어 극한의 정신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시간마저 조정이 가능한 곳, 바로 최고 심도 시뮬레이션 우주였다.
*****
윤혁은 옥상 테라스에 누워서 별들을 바라보았다. 비록 실드에 굴절되어서 원래의 빛 그대로는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별들의 모습은 근사했다. 밤하늘을 수놓는 화려한 별들. 은하계의 항성들. 핵융합을 통해 타오르는 천체. 이런 상상부터 떠오르는 걸 보면 자신도 영락없는 공학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학적인 소양이 좋은 사람들은 저것을 보고 상상의 나래를 펼칠 것이다. 루디아는 제법 감상적인 사람 같아 보였는데, 그녀는 별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그 섬에서는 결계 때문에 별의 온전한 모습을 보기는 어려우려나? 언뜻 보았을 때 유독 한국에서보다 별이 적었던 것 같은 기억이 났다.
그러나 단순히 아름다운 빛으로 보건, 타오르는 플라즈마 덩어리로 보건, 저것들이 창조주의 위대한 창조물임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저 별들도 혼이 있을까? 인간처럼 영(靈)을 지니진 않겠지만 동물도 혼을 지니고는 있으니까. 별의 경우는 어떠할지 궁금했다.
‘저 많은 별 중 어느 하나도 똑같은 것이 없네.’
마치 눈송이가 하나하나 다른 결정 구조를 지닌 것처럼.
‘저것들을 일일이 분간해서 세려면 얼마나 오래 걸릴까?’
은하계에만 해도 수조 개의 항성들이 있으며 그 항성마다 딸린 행성과 위성도 여럿 있다. 하물며 그 은하계조차도 전체 우주에 비하면 지극히 작은 존재에 불과하다. 광학적으로 관측 가능한 ‘가시우주’에만 해도 천억 이상으로 추정되는 은하들이 존재하는 형국이니까.
그런데 이것도 어디까지나 옛날이야기고 현재는 관측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그 너머에 존재하는 더 많은 은하까지 발견되는 추세였다. 현재는 우주 공간의 크기가 ‘무한’이라는 사실에 학계 전체가 동의하고 있었다. 그 무한한 공간이 바로 소위 말하는 ‘누벼이은 우주’.
더 놀라운 점은 이 무한 공간마저 ‘상위 차원’에 비하면 티끌과 같은 곳이라는 점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인간이 발견했거나 예측하는 영역만 해도 그 정도이고 미지의 영역까지 더한다면 더욱 넓어지리라. 진은 시공간 축, 설정 축, 홀로그래피 축의 총 세 가지의 버전의 세계관 확장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사실 그것이 전부일지 아니면 더 많은 확장이 존재할지도 미지수이리라.
윤혁은 무궁무진 크기의 우주 앞에 압도되었다.
은하, 은하들, 우주, 우주들, 그리고 무한히 확장되는 상위 차원의 세계관.
‘과연 그 끝은 어디일까?’
그는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쳐보았다. 인간의 역량으로는 어디까지 닿을 수 있을까? 한계가 있을까? 그 한계 너머는? 그 너머 영역이 바로 영들의 세계일까? 그리고 그 모든 영역을 전부 포괄하는, 피조계와 영적 세계를 아우르는 최대 범위의 영역이 아마도 천국이 아닐까? 그 모든 것 너머에는 오로지 하나님께서만 존재하시는 ‘영원의 절대 영역’, 곧 보좌가 있으리라.
이렇게 생각해보니 인간의 세계가 너무도 왜소하게만 느껴졌다.
문득 초인들이 불쌍하게 여겨졌다. 저 아름다운 별들이 윤혁 같은 그리스도인에겐 창조주의 영광을 발견할 증거물이겠지만 초인들에게는 그저 질 좋은 자원 덩어리 혹은 정복해야 할 영토에 불과하리라. 형에게도 이런 아름다운 피조물을 만드신 분의 솜씨에 경탄할 겸손함이 있었다면 좋으련만.
‘하긴 이미 은하를 휘저은 마당에 별을 감상할 여유는 없으려나?’
지상에서 인간이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별은 대부분 우리 은하에 속해있는 천체이다. 은하계 외부의 별은 관측 장비를 통해서만 바라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지금 맨눈으로 보고 있는 저 별들은 이미 인류 측에 정복된 영역 속의 별들, 대부분은 요새로 개조되어 이용되는 자원들이리라. 지금 보이는 모습은 먼 과거에서부터 온 빛이니 정복당하기 이전의 깨끗한 본연의 모습이겠지만.
“그나저나 과거에는 우주와 지구의 시간 속도가 달랐었다니.”
머나먼 거리의 별빛과 광속의 문제를 생각하다 보니, 문득 진이 알려준 ‘우주 시간의 흐름’에 관한 내용이 떠올랐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시간 흐름의 격차, 그리고 그 현상을 인간이 모방해서 만든 ‘시간 압축’ 기술. 우주는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신비라는 감상이 들었다. 물리적 우주조차 다 이해하지 못하면서 우주보다 거대한 영적 세계를 인간이 무슨 수로 이해할 수 있을까?
상상을 펼치다 보니 여러 다른 잡념이 들었다. 그중에서도 윤혁은 어르신의 행방 문제가 가장 걱정되었다. 별일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하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법. 그분도 언젠가는 세상을 떠나실 터다. 자신이 그 유지를 이을 만큼 성장할 수 있을지 다시금 고민이 되었다.
“주님, 제가 겸손한 마음으로, 그러나 당신을 믿는 담대한 믿음과 당신이 주시는 강한 용기로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저와 똑같은 소원을 품은 모든 청년을 그와 같이 도와주소서.”
청년은 별들을 바라보며 창조주를 묵상하는 마음으로 조용히 기도드렸다. 주님께서 어르신의 운명도, 자신의 운명도, 인류의 영적 미래도 모두 책임지고 돌봐주시리라는 생각이 들자 조금은 심리적 부담이 사라졌다.
그때였다.
“반갑습니다, 강윤혁 씨.”
별안간 갑자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입니까?”
“제대로 닿은 게 맞는군요. 다행입니다.”
“당신 그나저나 지금 어디 있는 거죠?”
“위치는 은하 외곽의 행성, 지금은 특별한 연결을 통해 통신 중입니다.”
“이것도 설마 텔레파시입니까?”
“텔레파시에 더해서 제가 발명한 다른 기술도 조금 첨가했죠.”
어쩐지 그때와는 텔레파시의 느낌이 미묘하게 달랐다.
“아무래도 차신해 군이 채널을 잘 넘겨준 모양이네요.”
진의 천진난만하고 해맑은 웃음이 여기까지 전달되는 기분이었다.
‘설마 그때 악수하면서 텔레파시를 전해줬던 게 이 목적 때문이었나?’
하여간 교활한 전략이 과연 진다웠다.
“걱정하진 마시죠. 당신에게 남겨둔 정신 간섭형 텔레파시는 소멸하였습니다. 지금 이 채널은 영속성과 원거리 기능은 있지만, 정신에는 간섭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원할 때만 통신할 수 있고 서로의 마음에 영향을 주지는 못합니다. 당신께는 꽤 좋은 조건이죠?”
“하아.”
겨우 호전되었던 두통이 다시 재발할 것만 같았다.
“대체 무슨 의도이시죠?”
“협력!”
진의 즉답에 윤혁은 흠칫하며 놀랐다.
“당신의 계획이 무엇이든 제가 그 일을 대가 없이 도우려 합니다.”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한 윤혁. 아무런 대가도 없이 초인이, 그것도 무려 철인왕이라는 작자가 자신을 돕겠다고 나선다? 저자는 윤혁이 무슨 일을 하려는 지 이미 알고 있는 것인가? 그 일의 막중한 의미를 알긴 알려나? 심히 미심쩍었다. 진에게 농락당하는 기분이 들어 영 뒤숭숭했다.
“당장 대답할 필요는 없습니다.”
진은 호객을 구워삶는 장사치처럼 상냥히 말했다.
“거래하려는 건 아니니 걱정하실 필요도 없고요.”
“그러면요?”
“일방적으로 제가 돕겠습니다. 당신은 그저 받아먹기만 하면 됩니다.”
당해본 입장에서는 의심을 도저히 지울 수가 없었다. 저 철인왕은 능구렁이 같은 사람이다. 일반인의 아이큐 단위로는 측정조차 불가능한 지능을 가진 괴물 중의 괴물이다. 저런 사람을 믿어도 되는 것인가?
“의심하는 건 이해합니다, 강윤혁 씨.”
“본인도 본인 행적을 잘 아시네요.”
“하지만 생각해보시죠. 제가 뜯어먹을 만한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분명 사실이었다. 진처럼 소유물이 많은 사람이 구태여 소시민인 윤혁을 돌아볼 이유는 없었다. 굳이 딱 한 가지를 들자면 윤혁의 형과 관련된 일뿐이리라. 그 형이라는 문젯거리가 가장 중요하긴 하지만.
“좀 제대로 설명해보시죠.”
“이런, 죄송합니다. 너무 늦기 전에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죠.”
“어이, 이봐요!”
윤혁이 뭔가를 제대로 질문해보기도 전에 진은 자기가 하려는 말만 본론부터 던져놓고는 황급하게 채널을 닫았다. 마치 무언가에 쫓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진과의 통신 채널은 잔흔조차 남지 않고 자취를 감추었다. 추적당하지 않도록 보안을 철저히 해둔 모양이었다.
잠시 후에야 윤혁은 진이 연락을 끊고 도망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과연 천하의 진마저 경계할만한 인물이 통신상으로 불쑥 접근해왔다. 기척조차 없이 자연스럽게. 호랑이도 제 말을 하면 온다고 하던가?
{강윤혁 님께서 통신을 수락하였습니다.}
윤혁은 뇌파 수신을 허가한 뒤 잠시 숨을 고르게 다듬었다.
“오랜만이다, 윤혁아. 무사히 잘 지내고 있겠지?”
“형!”
항상 자신을 긴장하게 만드는 존재. 하필 이 타이밍에 연락이 올 줄이야. 급작스럽게 정신 접속을 당한 직후인지라 괜히 불안감이 더 들었다. 게다가 그는 진보다 몇 단계 위의 실력자이니 얼마든지 머릿속을 파고들어도 이상하지 않다. 도둑질하다가 걸린 현장범의 기분이 이해되었다. 다행히 형은 정신 간섭을 금하겠다는 약속을 지킬 작정인지 아무 질책도 하지 않았다.
“우리 4월에 만나는 건 잊지 않았지?”
선교 여행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형을 방문하기로 약속이 되어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중요한 만남이 될지도 모를 모임. 전신의 긴장감이 바짝 조여졌다. 형이 눈앞에 없는데도 기합이 쫙 들었다.
“네, 기억하고 있어요.”
“그래, 고맙군. 다음번에는 제로원 대신 지구 밖에서 만나지.”
“……네?”
순간 심히 당황스러웠다. 제대로 들은 게 맞겠지?
“혹시 우주 쪽에는 좀 흥미가 있을는지 모르겠군?”
하필이면 이 시점에 우주여행? 윤혁의 입이 떡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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