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123회 초인들의 세계 Ch 45. 냉전 (1)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3.01.04 | 회차평점 0 |
Chapter 45. 냉전
지구에서 50만 광년 떨어진 항성계에 소속된 소행성 벨트.
각색 구름처럼 제각기 모양이 다른 바윗덩어리들이 칠흑 같은 공간을 수놓았다.
그런데 그 중 어느 한 바위 위에는 커다란 물체가 앉아 있었다. 여러 개의 다리를 가진 벌레처럼 생기기도 했고, 사람처럼 보이는 골격을 지니기도 했지만 전신이 기계 재질의 갑주로 뒤덮여 있어 로봇처럼 보이기도 했다.
허나 그것의 본질은 기계도, 사람도, 인조 생명체도 아닌 제3의 존재. 사람들이 만들어낸 우주 규모의 서버를 관리하는 존재인 그것은 서버의 육신이자 ‘아바타’였다. 그것의 정체는 바로 ‘아카식 레코드’의 1,024번째 아바타. 1,024번째라는 호칭에서 암시되듯 그것은 수많은 아바타들 중 하나였으나 권위를 휘두를 대표성과 정통성은 충분했다.
아카식 레코드의 아바타는 현재 명령을 수신받는 중이었다. 명령을 내리는 주체는 아카식 레코드 서버의 메인 제작자 중의 한 명이었다. 이런 식으로 최종권위자 이외의 한 개인이 간섭해오는 일은 드물지만 가끔씩 있었다.
{코드 인증 완료. “6th Philosopher King”}
{명령 다운로드.}
{아카식 레코드의 핵심 혼(魂)의 일부 권한을 제6 철인왕에 양도한다.}
프로세스 개시와 동시에 가만히 앉아 사색하기만 했던 아바타가 이내 자기 육신의 형태를 변형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근처 위성 위에 앉은 채 생각하는 사람을 연상시키는 자세를 취한 뒤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바타의 주변에 짙은 아우라와 살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 아바타는 저가 마치 사람이 된 양 탐구하기 시작했다. 이내 그것은 자신의 본체인 무형 서버 ‘아카식 레코드’를 일부 활성화하기 시작했다. 아바타이자 수호자인 동시에 보조관리자이기도 한 그것은 본체에 대해 제한적이나마 권한이 있었다. 본체 아카식 레코드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 서버는 여태껏 이렇게까지 어려운 주제를 다루어 본 일이 없었다. 하필이면 ‘인간의 행동양식’을 거시적 관점에서 분석하라는 과제라니. 당장에라도 과부하가 걸릴 듯 했다.
아바타와 아카식 레코드는 조용히 인류가 세운 다른 예언자 서버들 중 네트워크 상 인접한 것들을 찾아 자신에게 접속시켰다. 그리고는 그 시너지 효과를 통해 시공간 관측력의 범위와 정밀도를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예지에 가까운 예측, 수많은 데이터, 논리적인 추론, 초인을 본뜬 인격 복제물들과의 토론, 그것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아바타가 점점 열기로 달아올랐다. 사람도 아닌 주제에 희열을 느꼈다. 누군가는 그 감정의 진위를 비웃겠지만 분명 아카식 레코드의 아바타는 어려운 과제를 다루는 것을 몹시 즐거워했다. 더 나아가 그것은 자신의 추론에 의거해 신속히 행동을 수행하는 것 또한 좋아했다. 기계 율법에 저촉되지만 않으면 직접적인 행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전에도 아바타는 행동과 생각을 적절히 교차하는 방식으로 기본 학습에 더해 수많은 추가 학습의 기회를 얻곤 했다.
이번에 주어진 새로운 미션으로 말미암아 아바타의 추론은 점차 복잡한 매듭처럼 꼬여 들었다. 그렇게 힘들게 연산하던 중 그것은 문득 ‘삭제’와 ‘처분’이라는 과격한 개념을 연상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인조적인 프로그램답지 않게 감정 중추가 격하게 불타올랐다. 그것은 인류를 위해 어떤 공리적 판단을 내리는 것이 합당할지, 그리고 결단 내린 바를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으로 옮겨야 할지를 진지하게 탐색하였다.
바로 그때 별안간 아바타는 추론 활동을 멈추고 얼어붙었다.
“어머나.”
누군가 불청객이 출현하여 즐거운 사고 실험을 방해하였다.
“킹의 인증도 없이 이걸 가동했네?”
발랄하고 상쾌하면서도 섬뜩한 목소리. 방해자는 기계도 신수도 호문쿨루스도 인형도 거대요새도 아니었다. 단 한 명의 인간 개체. 우주 공간의 부적절 환경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얇은 민소매 티셔츠와 편한 바지만 입고 나타난 탄탄한 근육질의 여성이었다.
{위험.}
아바타는 공포와 살기를 느꼈다. 지금 눈앞에 나타난 대상이 도저히 자신이 상대하지 못할 강적임을 직감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것은 저 자에게 아바타 자신을 처분할 권한이 있음도 잘 알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아바타는 과잉대응을 하였다. 그것은 차원의 문을 강제로 열어 자신의 주위로 대규모 함대를 소환했다. 비록 인류연합 정규 함대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조잡한 비정규 무인 함대였으나, 한 척 한 척이 준 행성급 화력을 보유한 초고성능 함선들이었고 그 수효는 모래처럼 빽빽했으며 밀집된 상태로도 정교하고 효율적인 진형을 이루고 있었다. 아바타가 두려움을 느꼈다는 방증. 물론 싸울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기 싸움을 대비한 방비였다. 그것은 자기 재량 내에서 싸움을 피하고자 최대한 상대를 설득해보기로 했다.
{대화 모드로 변경합니다. 제6 철인왕에게 턴을 넘깁니다.}
아바타는 최대한 온건한 방책을 모색해보았다. 검붉은 머리카락이 찰랑거리는 매력적인 육체미의 여성이 기계질의 아바타를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언제봐도 아카식 레코드는 흥미롭다는 생각이 그녀의 머리를 스쳤다.
“대화를 시도하시겠다?”
그 순간, 아바타의 몸을 빌려 다른 존재가 말을 걸었다.
{“아키라, 아니 ‘퀸(Queen)’. 부탁할게. 아카식 레코드 일은 묵인해줘.”}
아키라라고 불린 적발 여성이 호쾌히 웃었다.
“이거 원, 나 하나에 겁먹어서 함대까지 소환하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
{“너는 얼티밋워리어들 중 최강이니까.”}
이에 기세등등해진 아키라는 다시 한번 비웃음을 흘렸다.
“그건 그렇고, 우리 예언자님께서 어째서 개인적으로 아카식 레코드를 사용하려는 걸까나? 저 아바타들은 독자적 논리 체계로 추론한 결론에 의거해 적법한 행동까지 벌일 수 있는, 독립성 짙은 개체임을 모르시나? 만에 하나 저것들이 과잉한 행동으로 사고나 사태를 일으켜서 일이 커지면 책임질 수 있나?”
{“네가 걱정하는 일은 생기지 않을 거야. 보증할게.”}
“그렇게 말하니까 더 의심이 생기는데?”
{“내 신뢰도를 알잖아. 난 진과는 달라. 그리고 어차피 이쪽 아바타와 함대는 물론 너 역시도 아버지 인증 없이는 무력 발동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잊은 건 아닐 테지? 여기서 싸움은 불가능해.”}
아키라는 흥미진진함을 머금은 표정을 지으며 입맛을 다셨다.
“킹께서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네가 서버에 접속한 건 또 괜찮고?”
킴벨리아의 얕은 변명은 강직한 여인 앞에 쉬이 먹혀들지 않았다.
{“곤란하게 해서 미안하네. 하지만 난 제작자 중 한 명으로서 정당한 특수 권한을 일부 부여받았어. 내 재량하에 인류연합의 뜻에서 벗어나지만 않는 한 아카식 레코드를 이용할 자격이 있지. 그러니 네가 나를 제재할 권한은 없어.”}
“연합의 뜻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사자후와 같은 아우라가 공간을 흔들었다.
“자신 있게 장담할 수 있나?”
그 윽박지름에 킴벨리아는 조금 긴장했다. 퀸은 얼티밋 워리어들 중 제일 강했다. 단연 단일 생체병기 중에서는 인류 최강의 비밀 카드였다. 거기다가 초인적인 두뇌와 판단력도 네 명 중 가장 탁월했기에 견제하기에도 설득하기에도 한없이 골치 아픈 상대였다.
{“진에게서 개인적으로 부탁받은 일이야. 연합 기밀과는 관련 없어.”}
철인왕은 더 일이 커지기 전에 얌전히 실토했다.
“호오, 그 발칙한 꽃돌이가?”
아키라는 잠시 고민하며 궁리했다. 그녀도 진과 개인적인 친분이 깊었다. 심지어 유사시에 서로 도움을 주고받은 적도 여러 차례 있었다. 이를테면 신체 개조 상태를 종종 확인해준다거나. 그래서 아키라는 웬만한 경우가 아닌 이상 대개는 진의 일을 방해하지 않아 왔었다. 그가 종종 뜻밖의 계획을 벌임을 알면서도. 그녀로서도 진과 분쟁을 일으킴으로써 편안한 협력 관계를 깨고 싶진 않았다.
“일단은 방해는 보류해주지, 킴.”
{“고마워.”}
“하지만 네 일이 완료될 때까지 곁에서 감시할 거야.”
아키라는 아카식 레코드의 아바타를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인류 내부의 감시도 엄연히 내 임무 중 하나니까.”
{“알겠어.”}
킴벨리아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리고 너희 철인왕들이 알고자 하는 정보가 뭔지도 궁금하니까.’
아키라는 조용히 마음속으로 생각을 삼키며 싱긋 호쾌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미소 걸린 얼굴에 외적인 아름다움에 어울리지 않는 호전성이 버무려졌다. 아카식 레코드의 아바타와 킴벨리아는 당황한 기색으로 슬쩍 자리를 피했다. 덕분에 마음 편하게 작업하기는 그르게 되었다.
*****
일라이저는 상공에서 북극해 바다를 유유히 내려다보았다. 그의 제복에는 반중력 장치가 코팅되어 있어 그로 하여금 중력이나 관성의 영향 없이 자유로이 궤적 변화를 그리며 하늘을 우아하게 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나아가 시간 제한 없이 공중에 편안히 떠 있을 수도 있었다.
지금 그는 자신이 소환해낸 강력한 하수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각종 제약으로 인해 우주에서만 운용하다가 최근에야 본진인 지구로 소환하는 데 성공한 참이었다. 지구 전역에 그들의 막대한 위용을 뽐낼 생각에 은근한 기대감이 들었다.
“내게로 오라.”
그의 텔레파시가 발산된 지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이질적인 섬광 아홉 개가 빙하를 깨트리고 공중을 향해 치솟았다. 그 섬광체들은 선명한 윤곽을 드러냈다. 모두 사람의 형태를 띤 몸체를 지녔으되 기묘하기 그지없는 외모와 무장을 갖춘 괴인들이었다.
-Deadly god prince 아홉 기 모두 결집했습니다, My Majesty.
“아홉 명을 한꺼번에 모으는 것도 오랜만이군.”
백금발의 미남은 즐겁게 입꼬리를 올렸다. 이 자리에 소환된 아홉 명의 특수 전투 개체인 Deadly god Prince는 한 기 한 기가 영웅급 이상으로 책정되는 신수들이었다. 이들의 몸체는 ‘신수’와 ‘호문쿨루스’를 융합시킨 것으로 주로 우주에서 활약하던 병기인만큼 자체적인 거대 동력원을 소형화시켜 내부에 탑재하고 있었다. 이들을 안정적인 경로로 지구로 반입하기 위해 제법 큰 노력이 소요되었다. 이윽고 고대의 왕 앞에 가신들이 고개 숙여 충성을 맹약하는 듯 아홉 기 전부가 신수왕 일라이저의 발밑에서 경례하였다.
“어서 오거라.”
신수를 지구에 불러들인 일차적인 목적은 다른 로스트엠페러들과의 패권 경쟁을 위한 전력을 보강하기 위함이었다. 카이젤은 제로원 밖의 지구촌에서는 선을 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부하들의 자유로운 경쟁을 허락하였다. 그런 경쟁이 장기적 관점에서 인류의 효율적인 발전에 좀 더 유익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결정 덕에 본성에서는 로스트엠페러들을 주역으로 주기적인 세력 대결 게임이 펼쳐지곤 했다. 지표면 전체를 무대로 한, 게임을 빙자한 전쟁이.
-해상의 모든 권한을 점령했습니다.
2.5m의 거대한 신장을 지닌 푸른 대머리 신수가 말했다.
“수고했다.”
-이대로 나머지 영해(領海)에 대해서도 정벌을 진행할까요?
“음, 태평양과 대서양 중앙부는 안돼. 아엘브론과 레뮬로스, 그 두 도시와 그 영해는 주군의 영토니까. 그리고 하와이도 역시 금기야. 그곳은 주군께서 ‘그녀’와 계약을 맺은 땅이니까. 하지만 나머지는 너희 마음대로 해도 된다.”
그러던 그때 갑자기 일라이저의 뇌속으로 텔레파시 신호가 전달되었다. 자신만만하게 웃던 표정이 살짝 찡그려졌다. 접촉을 시도한 상대는 SS 클래스 초인이었다. 일라이저보다는 한 단계 낮았으나 그렇다고 마냥 가볍게 생각할 상대는 아니었다.
“잘생긴 오빠, 그간 강녕하셨나요?”
“루흐키스?”
당혹감이 일라이저의 표정 위를 스쳤다.
(다음 회차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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