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125회 초인들의 세계 Ch 45. 냉전 (3)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3.01.09 | 회차평점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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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시각 부로 부대표는 컨트롤 타워에 좌정했다. 그는 지구 규모 경쟁의 판과 구도를 조율하는 그의 임무를 본격적인 실천으로 옮겼다. 인류가 관리해야 할 영토가 넓어지면서 수도인 지구 본성 내부의 사병 세력 대치 구도를 제어하는 일은 진작에 부대표에게로 넘어간 상태였다. 이 일에 있어서도 부대표는 늘 그래왔듯 대표의 뜻을 충실히 이행하였다.
비록 이면에서는 사실상의 세계 통합이 이루어졌지만, 아직 표면상의 지구는 샐러드 혹은 혼재 상태에 가까웠다. 물론 인류연합의 힘을 이용한다면 당장에라도 국가제도를 폐지하고 우주와 지구를 통합하는 단일 정부를 세우고도 남았다. 하지만 급하지 않은 표면적 통합을 조금 미뤄두고 겉으로나마 미약한 대결 구도를 허락하는 대표의 의지였다. 여기에는 나름의 철학이 기반이 되었다.
‘냉전의 목적은 경쟁을 통한 진화 추구.’
역설적이게도 지난 역사를 돌아보면 인류 문명은 전쟁의 때와 같이 경쟁 구도에 놓였을 때 빠른 발전을 이룩해왔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통한 과학 기술 혁명, 네오 오더를 무너뜨린 초인들의 혁명, 그리고 혼돈의 시대 때 벌어진 초인들 간의 대립을 통해 발생한 비약적 과학 발전, 그 모두가 훌륭한 씨앗이 되어 현재의 우주 개척 시대를 지탱하는 밑바탕이 되어주었다. 따라서 아무리 위험성이 높다 해도 경쟁이라는 가치를 포기하거나 등한시 할 수는 없었다. 인류연합이 모든 세력을 통합해 ‘팍스 휴머니티’를 이뤄낸 오늘날조차도.
“인간의 창조성을 온전히 끌어내려면 적당한 스트레스가 필요해.”
대표는 늘 이렇게 주장했다. 부대표 역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동의했다. 당장 통합부터 이루면 자연히 주민들의 마음가짐은 나태해질 것이다. 일반인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지도층인 초인들도 평화와 굴종에 길들다보면 나약해질 위험이 있었다. 물론 대표 혼자서 인류 문명 전체를 견인하면 별 문제 없겠지만, 지도자에게만 의존하여 앞으로 나아가면 인류 전체의 실질적 역량은 나태와 나약함으로 인해 오염될 것이다. 그것은 대표가 바라는 이상이 아니었다.
“무력 전쟁 같은 예측 불허의 변수는 철저히 제어해야 하겠지만, 적당히 건강한 수준의 스트레스나 경쟁은 의도적으로 야기해도 괜찮을 겁니다. 물론 백중 천중의 안전장치를 설치해둬야 하겠지만요.”
부대표는 중도(中道)적인 타협안을 제안하였다.
‘위버멘쉬의 말씀대로 경쟁은 필수불가결.’
인류에게 몸을 의지할 행성라곤 지구 하나밖에 없던 시절에는 무턱대고 무차별적 경쟁을 벌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작은 경쟁으로 파생된 스파크와 불씨가 자칫하여 전쟁으로 번지면 감당이 안 되니까. 그렇게 되면 설령 어찌어찌 전쟁은 수습한다고 해도 그로 인해 남을 후유증을 감당하기 어려워질뿐더러 회복에 많은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인류는 지구를 대체할 만한 여러 외계 행성 후보들을 찾았다. 더욱이 꼭 타 행성이 아니더라도 인공 콜로니 생성과 운영이 얼마든지 가능한 시대였다. 또 항성과 행성의 물리적 조건을 맘껏 재구성할 만큼의 테라포밍 기술도 갖추었다.
아울러 수천 년 이상을 거뜬히 견딜 분량의 안정적인 환경 자원 공급도 가능케 되었다. 기계 시스템을 통한 안정적인 무력 진압 및 치안 유지의 여건도 갖춰졌다. 하늘도시의 인구수도 본성의 인구를 아득히 넘어선 덕에 장래 세대라는 보증도 충분히 마련되었다. 지금의 인류에겐 억만 가지 종류의 생명 보험이 있었다. 그 어떤 모험도 맘 편히 도전할 수 있을 정도의 보험들이.
이렇게 완벽한 안전 조건들이 갖추어지자 이제 지구 위에서 가벼운 분쟁 정도는 얼마든지 안전하게 제어할 수 있을 정도의 여건이 되었다. 이에 대표는 부대표에게서 나온 구체적 제안, 곧 자신의 ‘경쟁 철학’을 실천할 프로젝트를 받아들였다. 일단 그는 지구 내부 한정으로 국가 간의, 정확히는 섹터장들끼리의 패권 대결을 허락하기로 결정했다.
여기서 말하는 패권 경쟁이란 일종의 정형화된 링 위의 격투기와 같은 맥락이었다. 심판은 인류연합이며 선수들은 섹터장들인 셈이었다. 각 선수는 각기 창의적인 방식으로 경쟁에 임했다. 신기술 개발, 자원 확보, 우주 식민지 권리 획득, 문화적 매체, 경제와 자본을 비롯한 모든 영역이 경쟁의 채점 수단으로 쓰였다.
선수들은 연합의 손바닥 위에서 노는 묘기용 원숭이에 불과했다. 그들은 철저히 정해진 규정를 준수하며 연합이 구축한 질서 안에서 놀아야 했다. 조금이라도 규정을 어기는 자에게는 가차 없이 엄격한 철퇴가 내려졌다. 허수아비 심판관이었던 과거의 유물, 국제연합(UN)이 당대 초강대국들의 힘을 전혀 제어하지 못한채 종이호랑이처럼 굴었던 추태와는 사뭇 대조적이었다.
덕분에 ‘링 위의 대결’의 목표는 특정 세력이 좀 더 많은 패권을 가져가는 치졸한 경쟁에 놓이지 않을 수 있었다. 냉전의 궁극적 목표는 오로지 인류 전체에 유익이 되는 창조성과 아이디어를 창출하는 것에 맞춰 설정되었고 이 의도는 매우 효과적으로 실현되었다. 선수들의 이기심과 밥그릇 싸움은 인류연합과 그 지도자의 섭리에 가까운 컨트롤 능력 아래 철저히 제어되었고 모든 유익은 오로지 인류 공공의 차원으로 회수되었다. 그 덕분에 그간 벌어졌던 냉전의 승자는 항상 인류 그 자체뿐이었다.
안정적으로 잘 제어된다고 해서 경쟁 방식이 부드럽고 안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군사적 수단 또한 하나의 경쟁 영역이 되었다. 다른 영역보다 더 철저하고 엄격하게 감시되긴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사 행동 역시 제한적으로나마 허용되었다.
물론 개인의 사병 컨트롤 권한에는 한계가 있었다. 모든 무력 개체들의 최종 지배 권한은 위버멘쉬에게 있었고 엠페러들과 섹터장들은 단지 임시적인 권한만 휘둘렀다. 그래서 그들의 행동에는 제약이 따랐다. 보여주기식으로 서로를 위협하는 수준을 넘어 실제 피흘림이 벌이는 일은 거의 불허되었다.
이러한 군사 경쟁 이벤트는 대개 2년을 주기로 이루어졌다. 휴전기가 끝나고 냉전 시기를 알리는 신호탄이 울리면 섹터장들은 기다렸다는 듯 1년간 준비한 야심 가득한 군사 계획들을 궤도 위로 쏘아 올리곤 했다. 이렇게 1년간 냉전 모드가 전개되면 그 결실로 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숱한 독창적인 기술들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어떤 의미에서는 인류를 위한 축제 이벤트에 가까운 시기였다.
“위버멘쉬께서 바이오닉 솔져들의 친선 경기를 관람하시는 것과 비슷하죠.”
현실을 투영해놓은 거대한 홀로그램 가상 지도를 바라보며 원격 조정술로 장기 말들을 간접적으로 조심히 움직이는 한 남자. 에녹 아담즈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게임 최종 조율에 임하며 짙푸른 눈동자를 번뜩거렸다. 그 옆에는 업무 인계를 위해 대표와 부대표 사이에서 번갈아가며 일하는 공동 비서관, 데미안이 곁에서 보조하며 뒷일을 정리하고 있었다. 데미안은 실시간으로 신속히 작업을 정리하며 에녹에게 승인 작업이 필요한 업무들을 넘겨주었다.
“지구 바깥의 세상에서는 철저히 하나로 통합된 자동화 시스템을 유지하되 정작 지구 안에서는 인간들의 경쟁 심리를 부추겨 적절한 수준의 긴장감을 늦추지 않는다라. 결국은 이것도 절묘한 밸런스의 문제로군요.”
데미안이 감탄하듯 감상평을 읊었다.
“네, 그걸 감시하고 통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에녹은 카이젤이 바이오닉 솔져들을 얼마나 능수능란하게 평가했는지를 떠올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런 예술적인 컨트롤 솜씨는 현재의 자신으로선 무리라 판단되었다. 앞으로 실력이 성장한다고 해도 그때는 인류 경영과 관련된 업무의 규모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질 테니 따라가기도 벅차겠지. 하지만 지금 맡은 임무 정도라면 당장 자신의 역량으로도 충분했다.
“감시의 끈을 놓치지 말고 이상 사항이 발견되면 보고해주시죠, 룩스,”
에녹이 사뭇 냉철하고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인공지능들과 시스템들의 판단만을 믿고 대충 넘어갈 수는 없으니까요.”
“일단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냉전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기하급수적으로 스케일이 커지는 데 과연 지구 본체가 견딜 수 있을지 조금 염려됩니다. 따로 대응책이라도 있으신지요?”
“그야 물론입니다. 최소한의 방비도 갖추지 못해서야 인류를 지도할 자격은 없겠죠. 우리는 이미 은하 너머까지 넘보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일개 한 행성의 내부를 제어하는 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금의 패권 대결은 진짜 대결이 아닌 그저 어린애들 장난이자 민방위 훈련이죠.”
실제적인 패권을 손아귀에 틀고 쥔 존재는 오직 위버멘쉬 한 명뿐.
그가 모든 것을 통제함을 잘 아는 에녹은 달리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행성 안정성에 대해서도 걱정할 것 없습니다.”
제로원이 건설되는 과정을 곁에서 보았던 에녹으로서는 우스울 따름이었다.
“현재 지각 10km 이하의 맨틀부터 내핵까지의 지구 중심 구조물은 제로원의 심장으로 개조된 상태입니다. 제로원이라는 초 반칙급 기술이 지구라는 구조물을 지탱하는 셈이죠.”
행성 지구로부터 제로원이 보호받는 것이 아닌, 시설 제로원이 지구를 보호하는 형국.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아이러니였으나 인류의 초 고등 테크놀로지는 이 같은 모순을 현실로 만들어버렸다.
“게다가 제로원에는 준 은하급 무력도 견뎌내는 인류 최대 방어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행성 전체를 피격해도 제로원은 멀쩡히 남죠. 여차하면 모든 인간을 그곳으로 대피시키면 그만입니다. 아니, 그러지 못한 최악의 경우라도 머지않아 우주 인류가 번성할 테니 보험은 얼마든지 있죠.”
다시 말해 지구는 완벽한 안전성을 갖춘 운동 경기장이니 마찬가지인 셈.
더욱이 인류연합의 지도부가 후방에서 엠페러들의 세력 균형을 조율해줄 예정이기에 승자도 패자도 없으리라. 굳이 승자를 들자면 싸움을 유유히 관람하면서 최신식 기술과 각종 전략 전술 데이터를 주워 먹을 인류연합이리라. 패자는 이 거대한 흐름 속에 몸을 맡겨야 하는 보통의 국가들, 즉 새우들이고.
“그리고 룩스, 냉전을 설정하고 조율하는 건 단지 인류의 경험과 지혜를 단련시키려는 목적이 전부가 아닙니다. SSS 클래스 초인들의 성장에 더 초점이 있습니다. 이건 그들이 나태해지지 않도록 하는 훈련이죠.”
후천적으로 초인으로 각성한 우주 식민지 출신의 철인왕들은 이미 경쟁 경험이 풍부하다. 반면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각성한 지구의 초인들은 상대적으로 경쟁 경험이 적다. 출생 시부터 사람들의 머리 꼭대기 위에 서 있었으니 총력을 다해 경쟁할 기회가 적었다. 그렇기에 카이젤로서는 그들의 부족함을 주기적으로 보강해줄 필요가 있었다.
“지구가 그 훈련을 위한 최적의 장소라는 말씀이군요.”
“맞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은하계 단위로 일을 벌이고 싶지만 그렇게 하면 통제에서 벗어나는 자들이 발생할 위험이 크죠. 물론 앞으로 전 우주를 정복해서 단일 정부를 세우면 은하계 단위 훈련을 벌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극도로 오만한 초인만이 꺼낼 수 있는 발상이었다. 세계를 무대로 벌이는 체스 게임을 단지 훈련 용도로 사용한다니. 그 거대한 게임으로 인해 발생할 미시적 부작용들은 그저 사소한 것으로 치부한 채 말이다. 과연 보통의 범인들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광기는 세계를 논하는 전쟁 꾼이 되기 위한 필수 자질이지.’
데미안은 복잡하게 얽혀가고 있는 지구 체스판을 구경했다. 악질적이지만 기발하고 창의적인 전략들, 전에 보지 못한 새로운 형태의 전투 유닛, 그리고 그 계획에 자신도 모르는 새 얽혀서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는 수많은 사회 단위까지, 참으로 가관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점은 바로.
‘세상 모든 설화를 오로지 기술력만으로 버젓이 현실화시켰어.’
섹터장들과 초인들이 빚어낸 갖가지 유형의 신식 사병들이었다.
먼저 인간형 인조 유닛 호문쿨루스 군대와 신수(神獸) 군단들이 보였다. 여기에다 요정과 그 아종인 페어리, 님프, 엘프, 트롤, 정령, 요정 용들도 있었다. 그리고 자율형 에너지 구체인 도깨비불, 프라나 코어, 차크라 핵, 드래곤 하트가 있었다. 움직이는 무기들인 신기(神器), 마스터피스, 다용도 위성 병기, 보석 병기 시리즈도 보였다. 마지막으로 인간의 정신과 공명하여 조종되는 ‘인형 시리즈’가 화룡점정을 찍었다. 초인들은 이렇듯 신화를 연상시키는 갖가지 발명품들을 실전 형태로 개조하여 지구 영토 곳곳에 도배해둔 상태였다.
‘취향도 악질이군. 판타지를 통째로 지구에다 심어놓다니.’
정규군의 권한은 오로지 한 명의 지도자, 위버멘쉬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통상 병기나 거대 전함 등의 화력 병기, 그리고 휴먼 솔져 시스템은 결코 사유 재산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초인들로서는 감히 이런 정규 병력을 모방해낼 엄두를 낼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사병 시스템은 정규군과는 속성이나 이미지가 겹치지 않는, 개개인의 독특한 창의성을 반영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다만 인간의 상상력에 한계가 있는지라 대개는 기존에 알려진 설화 요소들이 모티브가 되었다. 그 결과, 아이러니하게도 과학의 시대에 신화가 판을 치게 되었다. 과연 과학과 마법을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한 시대다웠다.
‘그나마 다행인 건 생명공학 산물은 실전 이용이 금지되었다는 점인가?’
율법으로 제어가 가능한 기계 계열과는 달리 마물, 뱀파이어, 키메라, 늑대인간같이 생명공학 기술로 빚어낸 수많은 괴생명체는 연구 목적으로만 쓰일 뿐 바깥세상에는 공개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런 종들은 대개 무인 행성들에 철저히 봉인되어 있었다. 영영 이용되지 말라는 보장은 없겠지만.
‘여하튼, 여러모로 난장판이군.’
비서는 냉전과 초인들과 그들의 발명품들이 자아내는 난장을 구경하며 순수하게 경탄했다. 그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인간의 폭주하는 욕망이 만들어낸 각종 산물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땅을 활보하며 본격적인 행동을 개시하였다. 자신들의 주인인 인간의 야심과 경쟁심을 충족시켜드리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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