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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126회 초인들의 세계 Ch 46. 혈투의 봄 (1)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3.01.11 | 회차평점 0 0

 

 

 

 

 

Chapter 46. 혈투의 봄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났다.

  지구 북반구에는 어느덧 따스한 봄기운이 흐르기 시작했고 조금씩 꽃이 필 기미도 보였다. 하지만 계절과는 별개로 싸늘한 혹독한 대립의 징후는 여전히 심화 중이었다. 곳곳의 보이지 않는 기세 싸움은 가중되었다.

  물론 일반인 대부분은 그 미묘한 온도 변화를 제대로 인지하지도 못했다. 어차피 자기들이 살아가는 매일의 일상에는 큰 변화가 없었으니 그들로서는 당장 피부로 긴장감이 안 와 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알든 모르든 지구라는 세계는 잠잠히 흐르는 거대한 조류(潮流) 가운데 은연중에 흔들리고 있었다. 일반인과 다른 세계에 사는 높은 지위의 사람, 그중에서도 초인들은 그 냉전의 영향력을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선명하게 받고 있었다.

  한편, 냉전의 흐름을 방관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중에는 이 잔잔한 태풍을 영 달갑지 않게 여기는 예민한 감정의 소유자들이 꽤 있었다. 그들은 바로 초야에 묻혀 지내는 전직 전쟁꾼, 휴먼 솔져 퇴직자들이었다.

  진호와 리아는 북미 섹터의 어느 도시에 있는 야외 카페에 앉아 보드카를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흑발에 따뜻한 인상을 지닌 진호는 올해로 막 한국을 떠나 북미 연합으로 옮긴 참이었다. 연인인 리아는 오랫동안 동고동락했던 동료였다. 옅은 금발에 초롱초롱한 눈빛이 매력적인 그녀는 보기와 달리 강인한 성격으로 진호와 함께 산전수전을 겪어온 훌륭한 전직 전사였다.

  지구 시민권은 그간 열심히 일한 데 대한 보상이었다. 이 보상을 얻으려고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기나긴 경력을 쌓았으며 고난이도 임무들도 해결했었다. 현역 시절의 그들은 은하 곳곳에서 벌어지는 기계 및 인공 생명체들의 예측 외 행동을 진압하였고 과거의 잔해들도 꾸준히 치워왔었다.

  그렇게 보상을 받아 지구에 정착한 이후론 최초로 정박했던 국가인 한국에서 몇 달간 머무르며 그곳 식 이름을 채택하였었다. 자연히 전에 쓰던 이름과 솔져 전용 코드네임은 버렸다.

  그들은 스스로를 인간의 긍지로 여겼다. 차디찬 기계 시스템에 모든 것을 맡기지 않고 인간의 자력으로 사회를 굳건히 지켜내려는 의지, 그 의지의 결정체인 휴먼 솔져 제도의 명예와 책임감이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은퇴하여 후발주자에게 일을 맡긴 지금까지도 그들은 과거의 업적과 성취를 명예롭게 회상하며 자부심을 느끼곤 했다.

  하지만 고난의 연속이었던 과거의 우주 전장은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트라우마의 기억이기도 했다. 그렇게 ‘휴먼 솔져’라는 그들 인생의 굵직한 커리어는 한편으로는 명예로, 한편으로는 트라우마로 남아 퇴직 이후의 삶에서도 양가감정의 근원이 되었다.

  이런 쓸쓸한 퇴직 생활 중 종종 전쟁터의 플래시백을 유도해내는 옅은 향기들이 주기적으로 나타났으니, 그것은 바로 지구에서 벌어지는 은밀한 게임, 곧 냉전이라고도 하는 ‘링 위의 게임’이었다.

  은하계를 주 무대로 임무를 수행해 온 잔뼈 굵은 전쟁꾼인 전직 솔져들은 미련한 대중과는 달리 지구 전체를 뒤덮은 냉전의 향기를 선명히 맡을 수 있었다. 신화 속의 존재들을 재현시킨 기이한 전쟁 병기도 그들에게는 익숙한 것이었다. 지금 지구에서 가동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위협적이고 창의적이고 강력한 군대도 많이 봐왔으니까. 그러므로 전직 솔져들은 냉전을 무시하지도, 그렇다고 무력한 겁쟁이처럼 벌벌 떨지도 않았다.

  “본성에 오면 전쟁이 없을 줄 알았는데 좀 의외네.”

  리아가 푸르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모든 국가가 무장 해제된 상태인데도 말이야.”

  “역시나 완전히 평화로운 세상을 기대하는 건 역시 무리일까.”

  곁에 있던 진호가 대답했다. 

  “물론 우리가 겪었던 지옥도에 비하면 아이들 장난이긴 하지.”

  솔져가 맡는 현직 전쟁 임무들은 이런 행성 내부의 사소한 전투와는 차원이 다르다. 우주에서 벌어지는 싸움은 국지전조차도 최소 여러 행성을 부술 화력이 오가는 수준에 이른다. 이렇듯 경험의 질적 차원도 높지만, 경험의 양 또한 상당했다. 여러 번의 실전 임무에 더해 시뮬레이션 우주 및 가상현실을 통해 겪은 간접 학습까지 포함하면 각 개인당 최소 십만 번 이상의 대전쟁 경험에 그 배는 되는 소 전쟁 경험을 기본적으로 탑재하고 있었다.

  “그래도 이곳 행성 주민들에게는 제법 큰 영향을 줄걸?”

  리아가 쓴웃음과 함께 작게 실소를 흘렸다.

  “그럼 뭐 개입이라도 할 생각이야?”

  “아니, 아무리 인간을 지키는 일이 명예롭다지만 이젠 지쳤어.”

  진호의 물음에 리아가 즉답했다.

  “이제 싸움이라면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야.”

  “그래. 이제 우리에겐 나서야 할 의무가 없어. 너와 함께 평범한 삶을 살게 되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명예니, 가치니 하는 것들을 추구하는 싸움일랑 전부 다 내려놓고 보통 사람처럼 살아가자. 충분히 할 만큼 해왔어.”

  진호는 상대의 손을 조용히 에워 잡았다.

  “전쟁이란 어떤 의미에선 그들의 리그야.”

  예전 현역 때는 싸우는 이유에 여러 가지 명예나 정당성을 부여했었다. 하지만 한 발자국 물러나 보니 그때 그 이유가 과연 정당한 것이었는지 의구심이 자꾸 치솟았다. 자신들이 전쟁을 바라보는 관점과 세계 지배자들이 전쟁을 이해하는 관점에는 큰 간극이 있는 것만 같았다. 역사가 늘 증명해왔던 것처럼 전쟁에 참여하는 당사자들 앞에서는 그럴싸한 가치나 명분을 부여하면서 정작 전쟁을 기획한 자들의 마음속에는 전혀 다른 꿍꿍이와 논리가 있었으리라.

  “초인들은 왜 서로 싸움을 벌이는 걸까?”

  리아가 다시금 의심을 표출했다.

  “그들은 이성적인 존재를 자처하잖아.”

  진호는 그녀의 질문에 말없이 씁쓸한 기분을 체감했다.

  “그런 그들도 남들을 힘으로 짓누르고 위에 올라서고 싶은 걸까?”

  “나도 잘 모르겠어.”

  이유 없는 싸움이란 없는 법이다.

  “우리 같은 평범한 족속들이 납득할 수 있는 이유는 아니겠지.”

  직접적인 전쟁 수행자들은 각자 가슴 뜨거운 사정을 내세우곤 한다.

  “어쩌면 초인들은 정말로 이성적이기에 이러한 판을 짜는 것일지도?”

  하지만 전쟁을 움직이는 진정한 원동력은 차가운 이익의 논리일 뿐이다.

  “수십 년 전에는 초인들도 패권을 겨루며 목숨 건 진짜 싸움을 벌였다고 들었어. 그 여파로 수많은 일반인이 피해를 보았지. 그렇게 싸운 끝에 지금처럼 통합된 체계를 이루었으면 싸움을 멈춰야 하지 않을까?”

  리아는 풍문으로 전해 들은 과거 지구의 역사를 떠올렸다.

  “높으신 분들에게는 전쟁도 일종의 사업이니까 그렇겠지.”

  진호는 이 분야의 생리가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 지 꽤 해박했다.

  “우리가 배출된 우주 식민지들의 인간들이 독립을 꿈꾸지 못하도록 전제주의 기계 군대 시스템을 만들었던 것처럼, 그리고 기계의 힘을 견제하고 인간의 자주성을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휴먼 솔져를 만든 것처럼, 군대와 군수 산업이란 늘 그렇게 어떤 목표를 위하여 기획되는 법이지.”

  “냉전도 그런 맥락이라 이건가?”

  “응, 아마 경쟁을 통해서 예민한 감각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인류를 단련시킬 목적이 있었을 거야. 그 과정에서 쓸 만한 영웅들을 배출해내거나 새로운 혁신을 얻는 것은 덤이겠고.”

  예로부터 전쟁이란 의외로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경우가 많았다.

  초인 시대 이전에도 전쟁은 정치적, 경제적 수단이 되곤 했다. 네오 오더는 전쟁을 이용해 포화한 지구 인구를 감축하려 시도했었다. 그 후에 등장한 초인들은 각자의 정의, 명예, 가치관을 피력하며 하나로 통합된 온전한 시스템을 이루기 위해 무력 대결을 벌였다.

  우여곡절 끝에 통합을 이룬 지금까지도 훈련 경기라는 명목으로 인류의 경쟁력을 기르기 위한 싸움이 자행되고 있는 형국이었다. 평화가 계속되면 나약해진다는 명목이라나. 참으로 한탄스러운 연쇄였다.

  지난 한 달 내내 해상과 공중에서는 보이지 않는 기 싸움이 벌어졌다.

  직접적인 충돌은 거의 없었지만 긴장감은 점차 팽팽하게 고조되었다. 서로가 상대측 전략 병기들이 어떤 능력을 탑재했는지를 모르기에 물밑에서 정보전도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따금 충돌이 벌어지면 파괴된 병기의 잔해를 분석해 새로운 대응 기술을 개발하기도 했다.

  이런 과정이 거듭 반복되면서 모든 진영에서 괄목할 만한 지식 진보와 실력 향상이 이뤄졌다. 처음 인류연합이 목표했던 바가 달성된 셈이었다. 그 과정에서 휘말린 피해자들에 대해서 신경 쓰는 이는 별로 없었지만.

  그렇게 두 남녀의 분위기가 무겁게 흐르던 중.

  “여어, 여기 다 모여 있었네!”

  대화하던 중에 주황색 머리의 건장한 남성이 둘이 모인 카페에 찾아왔다. 그는 사이좋게 앉아 연애 행각을 벌이는 친구들이 꼴사납다는 듯 노려보았다. 이런 따뜻한 봄날에 홀로 연인 없이 지낸다는 건 쓸쓸한 일이었다.

  “애인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그는 반 장난으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신해, 안녕.”

  진호가 정다운 목소리로 젊은 청년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그래, 인마.”

  최근 한국을 떠난 뒤 신해는 이웃처럼 지내던 그 집 식구들과 완전히 연락을 끊은 채로 칩거하였다. 진의 명령대로 윤혁에게 텔레파시 채널까지 넘겼으니 더 함께할 이유는 없었다. 용병 일도 완전히 정리한지라 관료들과의 커넥션도 전부 차단하였다. 앞으로는 강화된 법률에 따라 용병 운용을 제지당할 터이니 미리 시끄러워질 소지는 끊는 편이 나았다. 아울러 괜히 그 집 식구들도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아무튼, 신해는 당분간 철저히 몸을 사릴 생각이었다.

  ‘분명 그럴 작정이었는데…….’

  그러나 사병 군단이 살풍경한 경쟁을 벌이기 시작하자 맘이 뒤숭숭해졌다.

  “냉전 양상은 어떻게 돌아가는 것 같아?”

  리아가 소식통이 빠르고 민첩한 신해에게 물었다.

  “물밑 싸움의 전개 과정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어.”

  신해는 짤막한 대답과 함께 오른팔에 이식된 사이보그 암을 내려다보았다. 광역 특수 관측 기능이 내장된 덕에 행성 규모의 거시적인 전황을 분석하는 데 상당히 편리한 물건이었다. 신해는 이것 덕에 냉전의 여파를 미리 파악할 수 있었다. 아울러 휘말리지 않도록 신속하게 몸을 피할 수도 있었다.

  물론 그 팔은 때에 따라서는 더 유용한 목적에도 쓰일 수도 있었다.

  ‘가급적 쓸 기회가 없었으면 좋겠지만.’

  “우리 은퇴자들은 더 조심해야 해.”

  진호가 신해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말했다.

  “우린 전투 경험이 압도적으로 많으므로 별다른 무장 없는 지금 상태로도 충분히 변수로 간주될 수 있거든. 함부로 움직이면 녀석들이 우리를 제지할 거야. 특히 신해 너 같은 특수 계급은 주목의 대상이야.”

  진호의 말에 리아도 맞장구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기분 참 복잡하군.’

  신해는 지금의 전황이 영 떨떠름한 기분이었다.

  “상부에서는 이번 일을 기회로 숙청까지 쭉 진행할 작정인 것 같아.”

  그는 수집해온 은밀한 정보들을 풀어주었다.

  “U-society 간부들 사이에서?”

  진호가 매우 놀라며 되물었다.

  “당연히 그렇겠지? 아마도 아직 숙청되지 않고 남은, 중앙 권력층에 비협조적인 기성세대들이나 문제를 자주 일으켜 현 세계에 불화를 일으키는 블랙리스트 위주로 처리 작업이 들어가겠지.”

  냉전 시행에는 이런 소소한 이유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른바 조직 내부의 가지치기. 통제에 잘 따르지 않는 분리주의자들을 걸러내고 그들의 권력 기반을 몰수하여 위험 요소를 미리 거세시키는 작업이었다. 아울러 이상 행동이나 범법적 행위를 벌이는 자들을 숙청하려는 목적도 포함되었다.

  이런 불순분자들은 평소에는 조용히 묻혀있다가도 적당한 군사 경쟁 판도만 깔아주면 자의로든 타의로든 양지로 튀어나오게 되어있었다. 허가되지 않은 사병을 보유한 자, 기계 시스템에 해킹으로 불법 조작을 가하려던 자, 그리고 허가되지 않은 생체 실험을 시행하는 자, 인류연합 측에서는 이번 기회에 이런 부류들을 첩보전으로 모조리 색출하여 효과적으로 무력 진압할 작정이었다.

  “도덕 집행력과 윤리적 지성에 있어서 기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었다는 초인들도 결국 권력의 원리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구나. 그들도 사고를 일으키고 서로를 제압하는 모습을 보이는 걸 보면 우리랑 매한가지야.”

  리아가 냉소적으로 악평을 내렸다.

  “그 작자들도 인간의 본성을 타고났으니까.”

  진호가 반 동조의 어투로 답했다.

  “사실 숙청 판도는 우리 같은 전직 솔져들에게는 유리한 측면도 있지.”

  분리주의적 성향이 강한 여러 초인 관료들은 종종 우주 식민지 출신의 후방 솔져들을 꼬드겨 용병으로 삼거나 과도한 간섭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자유와 권익을 미끼로 유인하면서 말이다. 그 과정에서 잘못 얽혀든 용병도 제법 적지 않았다. 신해 일행도 몇 차례 이런 고용에 휘말릴 뻔했었지만 현명한 판단력과 동료 간의 신뢰 덕에 가까스로 벗어날 수 있었다.

  “벨제뷔트 같은 위험인물들도 당분간은 몸을 사리겠지?”

  “그런 인간들은 차라리 이번 기회에 나방처럼 불길에 뛰어들었으면.”

  불쾌했던 기억을 회상하며 혀를 차는 진호와 리아. 어차피 그들 같은 일반인은 초인의 잔꾀를 이겨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초인들끼리 서로 싸워 서로를 처리해주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그렇게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초인 사회의 질서가 연장되겠지만, 속은 아주 조금 시원하리라.

  한편 신해는 홀로 조용히 과거 행적을 떠올렸다.

  현직에 있을 때 그는 여러 팀에 소속되어 분쟁에 개입해왔었다. 기계나 인공 생명체들을 제거했었고 분란을 일으키는 솔져를 처단해야 했던 경우도 있었으며 식민지 내부에서 벌어지는 이상 움직임을 진압했던 적도 있었다. 요컨대 그는 철저히 개처럼 일했었다.

  예비역으로 들어갔을 때는 용병의 일도 겸하였다. 온갖 다양한 임무들을 맡았고 현상금 사냥도 수없이 자행했었다. 어떨 때는 의중을 알 수 없는 교활한 초인들과 계약하여 위험한 임무에 휘말리기도 했었다.

  슬프게도 이런 경험 덕에 상당 수준의 행동력과 실력을 연마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에게는 어설픈 지구 내부 경쟁에 개입할 만한 충분한 능력이 있었다. 비록 냉전 자체에 큰 변화의 흐름을 일으키지는 못하겠지만, 첩보나 게릴라 미션을 통해서 나비 효과를 일으킬 수는 있었다. 마음만 단단히 먹는다면. 비록 무기는 압수당했지만, 오른팔의 봉인 코드만 해제하면 충분한 화력도 이용할 수 있었다. 신수 같은 기이한 군단에 대응해본 경험도 풍부했다. 어떤 위험한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 감각까지 단련했었다.

  ‘어떻게 할까?’

  그는 지구에서 벌어지는 무책임한 싸움을 만류하고 싶었다.

  “혹시라도 개입할 마음이 있더라도 관둬.”

  그러나 신해의 마음을 눈치챈 진호가 먼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너 얌전히 살겠다고 나랑 약속했잖아. 예전의 비극들을 다시 겪지 않았으면 좋겠어. 지금 이 행성 내에서의 싸움은 순전히 높으신 분들께서 원해서 직접 벌려놓은 유희야. 우리 같은 낡은 군견들이 개입할 문제가 아니야.”

  “과연 그럴까? 정말 그렇게 생각해?”

  진호의 말에 즉각 신해가 반문하였다.

  “휴먼 솔져의 존재 의의는 단지 상부의 개에 불과했던 걸까?”

  지금까지는 인간을 안전하게 지키고 보호하는 것을 최고의 명예로 생각하지 않았던가? 그것 때문에 수많은 지옥 같은 싸움도 담담히 견뎌온 것이 아닌가. 신해는 내면에서 깊은 갈등이 소용돌이침을 느꼈다. 상부의 의도대로 개답게 가만히 수그리고 있어야 할까? 아니면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전쟁과 상관없는 사람들이 휘말릴 위험을 최대한 줄여야 할까?

  “거듭 부탁하지만, 판을 엎으려고 시도하지 마.”

  진호가 다시 한번 경고했다.

  “네가 개입하는 순간 두고두고 안 좋은 전례를 남기는 꼴이야. 전직 솔져에 대한 나쁜 인상은 말할 것도 없고. 윗선에서는 휴먼 솔져들을 신뢰하지 않게 되겠지. 아마 더 철두철미한 통제 시스템을 만들어 굴레를 씌울 거야.”

  그는 신해를 조용히 타이르며 설득했다.

  “설령 비인도적인 목적으로 전쟁 유희가 벌어져도 우리 임무가 아닌 한 개입하지 마. 은퇴한 우리들이라면 더더욱 고개를 숙여야 해. 일반인에게 솔져 시스템의 존재를 공개적으로 알려서는 안 되니까.”

  “그래. 겨우 자유로운 삶을 얻은 대가로 ‘침묵’을 요구받았잖아.”

  리아도 그 의견에 동조하며 설득했다.

  ‘쳇!’

  침묵의 의무를 상기한 신해는 멈칫했다. ‘둘도 없는 전투의 귀재라 해도 그 재능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쥐 죽은 듯 가만히 지내야 한다.’ 뼛속까지 각인된 억압의 명령이 그를 억눌렀다. 치기 어린 의분은 현실의 벽 앞에서 허무하게 무너졌다. 힘이 있어도 불의한 일을 내버려 둬야 했다. 자유를 얻고 시민이 된 지금도 여전히 그들은 묶여 있었다. 변함없는 시스템의 종인 셈이었다.

  “젠장, 마음대로 되는 게 없네.”

  막막한 마음으로 나직이 한탄의 한숨을 내쉬며 쓴 욕설을 내뱉었다. 신해는 지난 몇 달간 그 따뜻한 가족과 지내면서 자기 가치관이 조금씩 변해버린 것을 체감했다. 정부 대신 이웃을 위하려는 마음이 저도 모르는 새에 심장 속에 스며들었다. 따뜻함을 배운 후 마음은 변했지만, 여전히 시스템의 목줄은 그를 구속하였다. 두 마음의 대립이 갇힌 처지의 그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다음 회차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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