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127회 초인들의 세계 Ch 46. 혈투의 봄 (2)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3.01.14 | 회차평점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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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청년들은 공동 기도를 마친 후 엄숙하고 가라앉은 표정으로 침묵을 지켰다. 이들은 지금 추모의 시간을 나누고 있었다. 먼 타지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몇몇 동료가 목숨을 잃었다. 한 달 새에 열정 넘치던 소중한 친구 중 열 명 이상이 쓰러졌다. 대개는 불의의 사고로 인한 의문의 죽음이었고 그 원인은 제각기 달라서 공통점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제 작년, 그리고 4년 전과 똑같아.”
나직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리온이 동료들에게 설명했다.
“2년 주기로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군. 냄새가 나는걸.”
“그래.”
그들이 분석한 대로 지금까지 유독 특정 시기에만 전도자들의 의문사가 불현듯 원인 모르게 이루어졌다. 선교지에서 사망하는 예도 있었고 교통수단을 타고 이동하던 도중에 봉변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 때때로 희생자가 자기 가족들과 모여 있을 때 사고가 일어났다. 직감이 남다르게 영민한 리온은 이것들이 단순한 사고사가 아니라 순교이리라는 다소 과감한 판단을 내렸다. 그에게는 보이지 않는 손의 실재가 희미하게나마 느껴졌다.
‘인간들일까?’
정부 차원에서 탄압한 것이라면 이런 번거롭고 치졸한 수단을 쓰진 않았을 것이다. 아니 정말로 그들이 기독교인들을 미워하기로 작정했다면 하루아침에 모두 척살되었어야 마땅했다. 그들에게는 그럴만한 힘이 충분하니까. 그리고 만약 그 정도로 세상이 타락했다면 종말이 이미 임박했으리라.
‘아니면…….’
의혹의 화살은 다른 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저 기분 탓일까?’
현재로서는 그저 심증뿐이었다.
추모 예배가 마무리된 직후, 여러 팀의 리더들은 현장 대책 회의를 위해 오프라인상에서 만났다. 북중국의 낡고 오래된 도시인 IZ 시의 교회가 모임 장소였는데 일부러 통신 장비가 낙후된 건물 한가운데 있는 밀폐된 공간을 토론 장소로 택했다. 모인 리더들의 숫자는 스물다섯 명이었다. 여기에 그들의 동료들,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준 지역 교회 목회자들, 그리고 그 외에 뜻이 있는 자들까지 합치면 도합 백여 명을 조금 넘긴 숫자가 회의장에 모였다.
“우리는 그분들의 희생으로 낙담하지 않을 겁니다. 주님 안에서 잠든 모든 이는 낙원에서 그분과 함께 머물다가 훗날 부활 승리를 얻어 우리와 다시 함께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소망을 품은 우리에게 패배란 없습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들의 아픔을 함께 나눠 짊어지고 싶습니다. 그들이 미처 다 이루지 못하고 맡긴 사명을 우리가 끝까지 이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까지 담대하게 굴었던 그들을 추억하고 본받도록 합시다.”
연세가 지긋한 사역자들이 추모의 말을 전하였다. 이어서 그들은 함께 기도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함께 기도하던 예수의 제자들처럼 합심하여 주님 앞에 나아가 착잡한 심정을 모두 토로하였다.
그 이후에야 회의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이 자리에 올라서기는 부족하겠지만 제 소견을 나누고자 합니다.”
적절한 타이밍이 되었다고 판단한 리온이 다른 리더들 앞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평소 그가 보여줬던 열정, 헌신적인 자세, 그리고 올바른 태도를 익히 알았던 그들은 리온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형제들께서도 이미 잘 아시겠지만, 2년 전 이 무렵과 4년 전 이 무렵에도 비슷한 일이 전개되어 많은 형제가 잠들었습니다. 1년 정도의 시간 동안 선교사들의 희생이 급증했죠.”
그는 잠시 뜸을 들이며 말을 끊었다.
“아마 그 죽음은 단순한 사고가 아닐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에 술렁거림이 일었다.
“악한 자(The Evil One)의 간교한 손이 그 뒤에서 간섭했을 것입니다.”
모두 그의 갑작스러운 발언에 놀라서 눈을 깜빡거렸다.
“다시 말해 사고가 아닌 순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청중들은 처음에는 미심쩍어했다. 하지만 그들은 리온이 단순히 선교에만 매진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정세를 면밀히 파악하는 데에도 적잖은 노력을 기울여 왔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경청의 태도를 내려놓지 않았다. 실제로 리온은 그들 중 누구보다도 세계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이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답답한 마음에 면밀히 조사해보았습니다. 이를 단순히 우연의 일치로 치부하고 넘어가는 것은 돌아가신 분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물론 제 역량에도 한계가 있어서 깊은 부분까지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몇 가지 심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발표를 이어나갔다. 지금껏 선교사들의 사고(리온은 이를 순교라 표현했다)가 집중적으로 증가했던 해에는 유독 다른 영역들에서도 일련의 이상한 사건이 거듭되었다. 항상 그 무렵이면 세계적으로 민간 지역마다 의문의 사고가 발생하는 횟수가 현격히 증가했다. 대부분 인명 손실은 없었지만, 하마터면 위험할 뻔한 일들도 여러 차례 있었다. 시의적절하게 구조단 개입이 없었다면 제법 많은 사상자가 생겼을 뻔한 일들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사건 사고를 전달해야 할 언론 매체들이 마치 제약에라도 걸린 것처럼 사고를 쉬쉬해왔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의심스러운 점. 사고들이 연발한 연도에는 유독 바다와 공중을 통한 교통수단에 대한 정부 차원의 제약이 증가했었다. 어떤 때에는 중앙 당국 측에서 다급하게 특정 교통 경로를 사전 통보도 없이 변경하는 일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전체 사상자 중 선교사들의 비율이 유난히 비정상적으로 높게 나타났다. 다른 의문의 민간 사고들은 사전 조치나 대응이 급속히 이루어졌는데 이상하게도 선교사가 연루된 사고는 이러한 당국 측 대응이 이상하리만큼 태만하게 이루어졌다. 한편, 그 시기에 세계 곳곳에서 민간 폭동이나 범죄 또한 급증했는데 탁월한 치안 시스템 덕에 대부분은 빠르게 조처했으나 선교사들이 있는 지역 공동체에서는 이런 방비 시스템이 부실했다.
‘게다가 참 미묘한 수준의 태만인지라 트집 잡기도 애매하단 말이지.’
만일 이것이 의도된 것이라면 참으로 교활한 전술이 아닐 수 없었다.
“감히 추측하건대 세 가지 점이 의심됩니다.”
리온의 과감하고 거침없는 논설이 시작되었다.
“한 가지는 세계적 규모로 사람들을 위험에 빠트리는 대규모의 보이지 않는 충돌이 존재한다는 점, 다른 한 가지는 이러한 싸움의 여파로 불가피하게 민간에 피해가 돌아갈 때 당국 차원 방비는 취하되 의도적으로 특정 부류의 사람들을 소극적으로 차별하는 선택적 대응이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리온은 뜸을 들인 후 다시 말을 이었다.
“마지막으로 위의 두 일은 우연이나 착각이 아닌, 배후의 진짜 흑막으로부터 의도된 일이 아닐까 의심됩니다. 일차적으로 보이지 않는 충돌을 벌인 주체는 인류연합 정부겠지만, 선교사들을 위기로 몰아넣은 진짜 위협은 아무래도 더욱 배후에 있는 ‘그 존재들’인 것 같습니다.”
‘말 그대로 감히 추측뿐인 불확실한 예측이지만요.’
리온은 입술을 억누르며 조심스레 덧붙였다.
그때 정적을 깨트리고 누군가가 질문했다.
“물론 악령들은 역사 속에서 늘 예수 그리스도의 종들을 집요하게 괴롭히고 망가뜨리려 했었지. 그런 일이 하루 이틀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이렇게까지 대담하고 노골적인 행동까지 보인다고?”
“할 수만 있다면 지금보다 더하고도 남겠죠.”
“하지만 그런 일이 가능할지⋯⋯, 쉽게 믿기지 않는군.”
“그나마 제약 때문에 이 정도 수준에서 그쳤을 것입니다.”
젊은 청년들은 반신반의의 눈초리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각자 자신의 주먹을 꽉 쥐었다. 불신자들의 핍박이야 늘 항상 각오해오던 일이었다. 하지만 공중의 원수들이 직접 공격해왔다면 경우가 다르다. 지금까지는 항상 사람의 마음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공격해왔던 녀석들이 이제는 대놓고 움직일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청년들의 마음속에서 울분과 의분이 부글부글 끓었다.
“모두의 안전한 보호를 위해서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리온이 의분에 찬 청중들을 진정시켰다.
“오늘날 우리를 겨냥하는 위험은 이렇게까지 커졌습니다.”
지금 당장은 이곳의 동료들과 다른 선교사들부터 지켜야 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우리들도 언제든 잡아먹힐 수 있습니다.”
잠시 후, 여기저기서 리온을 향한 역질문들이 쇄도했다.
“그러면 그대는 어떻게 대응할 생각인가?”
“우리 중 정보력이나 행동력으로는 당신을 따라갈 인재가 없죠.”
“당신도 가만히 앉아 있을 위인은 아니리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다음 계획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궁금해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되었다.
“물론 저도 행동할 것입니다.”
그는 겸손한 목소리로 고개를 낮추고 모두에게 부탁했다.
“다만 조금 더 시간을 두고 타이밍을 엿보며 궁리를 해볼 겁니다. 당장은 여러분과 직접적인 정보를 공유할 수 없어서 죄송합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모두와 훤히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리온의 뇌리에 한 명의 동료가 스쳐 갔다.
“그때까지는 조금만 믿어주셨으면 합니다.”
그제야 청중석이 잠잠해졌다.
“좋은 방도가 있는 모양이지?”
확신을 얻고자 한 사람이 물었다.
“네, 제게는 이런 문제를 상의할 만한 조언자가 있습니다.”
궁금증이 청중석을 휩쓸었으나 아무도 선뜻 묻지 않았다.
“꽤 믿음직스러운 친구입니다.”
리온은 확신에 찬 어투로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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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오늘의 훈련을 마친 윤혁은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이제는 제법 감각이 잡혔네.”
옆에서는 코치 역할을 도와주는 찬영이 함께하고 있었다. 훈련소에서 기본 체술과 신체 단련을 시작한 지 도합 여덟 달이 넘어갔다. 그 사이 윤혁은 전보다 체격이 탄탄하게 잡혔다. 아버지나 형에 비하면 보잘것없지만 타고난 근골격이 나쁘지 않고 훈련도 게을리하지 않은 덕에 지금은 상당히 볼만 했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까지 열심이니?”
“떠나야 할 곳이 있어서요.”
지식을 쌓는 일이나 몸을 단련하는 일이나 궁극적으로는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였다. 앞으로 감당할 사명들을 더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그 일을 위해 건강도 필요했고 많은 능력과 지혜도 필요했다.
“어디로 가는데?”
“아직 장소는 정하지 못했어요.”
선교지로 떠난다는 것만 확정되었을 뿐, 그곳이 어디인지는 몰랐다.
“가까운 곳이 될 수도 있고 먼 곳이 될 수도 있겠죠.”
자연스럽게 상상과 사고의 흐름에 몸을 맡겨보았다.
“어쩌면 정말 먼 곳이 될 수도 있겠네요.”
문득 지구 너머의 땅에까지 생각이 닿았다.
“흐음, 무슨 꿈이 있길래 그렇게까지 열정적일까나?”
찬영은 여전히 감이 안 잡히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사람을 구하는 일이요. 형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요.”
“그렇게 말하니 더 궁금해지는걸.”
윤혁은 잠시 망설였다.
‘찬영이 형은 믿음직스러우니 괜찮겠지?’
그는 선교 여행에 대한 비전을 선뜻 말해주었다.
아울러 이 기회에 자신의 신앙 여정도 고백했다. 나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섬기고 믿는다. 그리고 그분 뜻에 따라 거룩한 행실로 남을 사랑하는 삶을 실천하며 나아가는 것이 인생 목표이다. 최근 믿음의 동지들을 만났고 그들과 함께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러 떠날 계획이다. 이 세상에는 아직 창조주를 떠나 헛된 삶을 살다가 죽어가는 이들이 너무도 많다. 그들 중 단 한 명에게라도 인생의 참 주인을 소개해주어 그분을 알게 해주고 싶다.
원래는 짧디짧은 해명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간증이 되고 말았다.
“음, 난 신에 대해서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너만의 떳떳한 신념을 확립한다는 것도 나쁘진 않은 것 같네. 오늘날 사람들은 예수를 싫어하니 어떻게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네가 하고 싶은 일이니 잘 풀리길 바랄게.”
찬영은 의외로 편견 없이 호쾌하게 대답했다.
“기회가 된다면 형에게도 소개해주고 싶은걸요.”
“하하, 하지만 아직 그런 문제들은 잘 와 닿거나 내키지 않는걸.”
찬영은 시간이 되거든 생각해보겠다며 손을 저었다.
‘하지만 우린 내일 일조차 알지 못하는걸요.’
윤혁은 마음속 한구석이 아주 조금은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찬영은 참 선량하고 성실했지만 아직은 참된 영혼의 생명을 만나진 못했다. 그 모습을 보니 조금 안타까웠다. 아직은 그의 마음 문에 틈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훗날 어떻게든 하나님을 만날 기회를 꼭 얻기를 바라며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그의 곧은 품성이 진정으로 쓰임 받아야 할 곳에 올바로 쓰일 수 있도록.
“하지만 단순한 선교뿐이라면 이렇게까지 체력을 키울 필요까지 있을까?”
찬영이 다시 의문을 제기했다.
“요즘은 낙후된 오지도 없고 교통과 통신도 대단히 발달했잖아.”
이에 말없이 윤혁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 하늘에는 성도들의 본향인 천국이 있으리라. 하지만 이 땅과 저 천국 사이를 가로막는 중간 세계들도 있다. 공중 권세를 잡은 자의 거주지인 어두운 영적 차원, 그리고 그 밑에는 물리적 상위 우주가 있다. 정점에까지 이른 인간들의 탐욕은 끝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창조한 별들의 우주를 침탈하여 식민지로 만들도록 했다. 그렇게 빚어진 거대한 바벨탑 속에는 하늘의 천옥(天獄), 하늘도시 또한 존재하리라.
‘형. 가만히 내버려 두진 않을 테니까 각오하고 기다려요.’
하늘도시에 갇힌 주민들을 포기하지 않으리라.
‘당신이 저지른 일들은 괄시하지 않을 거예요.’
이제 윤혁은 확고히 결심을 다잡았다. 이용할 수 있도록 그에게 주어진 자원이라면 그 자체로 하나님 보시기에 잘못된 방식만 아닌 한 기꺼이 써먹기로 다짐했다. 진이라는 의문의 초인도 포함해서 말이다.
‘그리고 형도 이대로 어둠에 묻혀있도록 버려두지 않겠어.’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한번 형을 만나야 했다. 그는 이미 다음번에 만날 장소가 제로원이 아니리라고 예고했다. 3월이 끝나는 마당에 내일 당장 그에게 소환된다 해도 이상할 것 없으리라.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둬야 했다. 형의 딱딱해진 마음을 오만함으로부터 건져줄 필요가 있었다.
윤혁은 찬영에게 마지막으로 감사 인사를 전하고 헤어졌다.
“몸 조심히 잘 지내세요.”
그동안 찬영에게 참 많은 도움을 받았다.
“건강하시길 바랄게요.”
생명의 은인인 건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그래. 너야말로.”
이 인연이 좋은 계기가 되어 찬영에게도 꼭 은혜가 찾아오기를 바랄 뿐이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리라] 라고 약속하셨던 것처럼, 자신의 은인에게도 축복이 흘러 들어가기를 바랐다. 이왕이면 가장 귀한 복에 이르기까지.
운동을 마친 윤혁은 곧 떠나갈 일에 대한 기대와 긴장을 반반씩 담은 뒤숭숭한 마음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귀갓길 내내 생각이 많아졌다. 한참을 고심하면서 천천히 발을 뗐다. 그렇게 집 앞에 거의 도착할 무렵, 몹시 익숙한 느낌에 문득 발이 멈췄다. 이전에도 느껴본 듯한 기시감이었다.
‘그래, 그 사람이 처음 찾아왔을 때도 이런 느낌이었지.’
매혹적인 중저음이 귓가를 두드렸다.
“약속한 시각이 다 되었다.”
“……그게 오늘이었나요?”
참으로 그다운 불시 방문이었다.
“뭐, 오늘이라고 해두지. 그래도 예고는 해뒀다.”
‘미리 마음의 준비라도 해두길 잘했네.’
윤혁은 몸을 뒤로 돌렸다. 과연 큰 신장에 훌륭한 체격을 지닌 가면 쓴 한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가 가면을 벗자 황홀할 정도로 잘생긴 이목구비가 훤히 드러났다. 금빛 눈에 서린 붉은 빛과 푸른빛의 원형 고리도 함께.
“이전에 보았을 때랑은 또 느낌이 달라지셨네요.”
“제법 예민하구나.”
사실 카이젤은 매번 볼 때마다 이전과는 풍기는 아우라가 미묘하게 바뀌곤 했었다. 그간 긴가민가했는데 윤혁도 이번에는 확실히 그 변화를 느꼈다. 과연 형은 실시간으로 변화하고 도약하고 진화하는 존재였다. 그 원인이 인위적인 강화로 인한 것인지, 혹은 초인 자체의 변화하는 특성 탓인지, 아니면 영적인 변화나 정신적 변화로 인한 것인지는 간파할 도리가 없었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형.”
일단 동생은 의구심을 감추고 상대를 반겨주었다.
“나도 반갑다, 내 동생.”
평범한 검은 눈동자와 태양처럼 빛나는 금색 동공이 눈빛을 교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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