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128회 초인들의 세계 Ch 47. 가족 (1)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3.01.17 | 회차평점 0 |
Chapter 47. 가족
그는 세련되고 품위 있는 제복을 입고 있었다.
크고 드넓은 어깨와 커다란 흉근에 팽팽하게 감기는 상의 위로 짙은 문양이 희미하게 새겨진 코트가 있었다. 화려한 색조보다는 검은색과 흰색과 짙은 남색이 위주였으나 디자인도 고상하고 범접할 수 없는 품격도 담겨 있었다. 부담스럽지 않고 현대적이었다. 담백한 형태이면서도 비상함이 느껴졌다.
과연 황제라는 말이 어울릴 법한 멋진 복장이었다.
모든 사람을 자기 발밑으로 내리는 위엄, 억지로 꾸미지 않아도 저절로 흘러나오는 현자의 지혜, 그리고 강인한 야수를 연상하게 하는 전사다움이 확연히 느껴졌다. 옷차림이 아니라 옷걸이가 되는 사람 자체에서 기인한 기운이리라. 생일에 입었던 옷은 근사한 외모를 돋보이게 하는 의복이었다면 이번 차림은 상대에게 은은한 두려움을 심어 주는 쪽에 더 가까웠다.
‘너무 눈에 띌 것 같은데.’
윤혁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이상하리만큼 주변에 정적이 흘렀다. 조금 전부터 거리에 한 사람도 지나가지 않고 있었다. 강윤혁과 카이젤 라흐블뤼크 딱 두 명만이 그 공간에 서 있을 뿐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군.”
그는 동생의 우려를 눈치채고 가볍게 손을 튕겼다. 곧 그의 옷이 입자 단위로 재조립되어 과정조차 보이지 않고 순식간에 형태를 바꿔 버렸다. 평범한 평상복 차림이 된 카이젤, 그러나 외모는 변함없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나노슈트⋯⋯, 인가요?”
“비슷하긴 하지만 좀 더 개량했다.”
바야흐로 웨어러블 디바이스가 트랜드가 된 의류. 옷에 다양한 전자 기능을 탑재하려는 시도는 이미 백 년 전부터 있었다. 현재는 급기야 모든 기술이 극도로 발전하면서 의류의 첨단화 또한 비약적인 속도의 진화에 합류했다.
오늘날은 평범한 사람의 옷조차도 나노 기술이 접목되는 시대였다. 자체 정화 및 수선 기능, 통신 및 컴퓨터 장비를 대체할 수 있는 기능, 항법 및 전자 기기 간섭, 위험으로부터의 신체 보호, 신체 상태 체크 및 정밀 의학 검사, 비상시 부스터 기능에 이르기까지 온갖 기능이 기본적으로 함유되었다. 일부 옷은 불가시 모드나 실드 시스템 및 탐지 기능 같은 특수 기능도 담았다.
형태나 재질을 변화시키는 기능 역시 희귀하지 않았다. 질량 보존 법칙마저 넘어서는 카이젤의 제복 같은 수준은 아니지만, 색상, 형태, 질감, 부피를 일정 부분 바꾸는 정도의 기술은 흔했다.
기능을 높인 특수 의류로는 ‘슈트’가 있었는데 이것은 전투, 탐사, 초고속 이동, 우주 환경 적응 등의 목적에 쓰이곤 했다. 슈트는 대부분 나노 단위의 기술이 접목되어 있었다. 그래서 일반 웨어러블 디바이스보다 더 고차원적인 형태 및 재질의 변화가 가능했고 위력 및 범용성도 현저히 높았다.
여기에서 더 중장비 카테고리로 나아가면 ‘아머’라고 불리는 갑주가 있었고, 더 나아가 아예 전문 목적에 특화해 크기를 키운 ‘외골격’이나 ‘외부무장’ 또한 있었다. 이런 중장비는 몸에는 불편하고 범용성 측면에서도 일부 기능으로 편향되었지만, 그 대신 탑재 기능의 효용성과 위력은 압도적으로 증가했다. 주로 이런 아머나 외골격은 휴먼 솔져들이 이용하였다.
이러한 발전 때문에 오늘날 의류의 가치를 결정하는 요소는 더 이상 디자인이나 형태가 아닌 기능의 첨단성이었다. 사실 형태는 쉽게 모방하고 재현할 수 있으니 당연한 이치였다. 이제는 겉보다는 실, 다시 말해 얼마나 효율적인 성능을 많이 담을 수 있느냐가 의류의 진가를 정하는 시대였다.
‘모르긴 해도 저 제복도 천문학적인 비용이겠지?’
윤혁이 이해한 방식과는 조금 달랐지만 ‘천문학’적인 비용은 맞았다.
무려 ‘천체’와 동등한 가치를 지닌 하이테크놀로지의 집결체였으니까.
“물속에서 있었던 일 이후 경각심이 생겨서 말이야.”
카이젤의 말에 윤혁은 신수의 이빨을 떠올렸다. 아무리 전문 전투가 아닌 수영 목적으로 만들어졌다지만 나름 탁월한 보호 기능을 갖춘 나노슈트를 관통할 정도이니 단순히 물리력이 강한 수준은 아니리라. 특수 기능이 담긴 이빨이었겠지. 형이 경상을 입을 정도였으니 자신이 물렸다면 아마 몸 전체가 흔적도 안 남고 갈가리 찢어졌을 것이다. 그 기억이 떠오르자 조금 기분이 섬뜩했다.
“그래서 그날을 계기로 아예 각을 잡고서 새로운 산업을 개발해서 일반화시켰지. 웨어러블, 슈트, 아머, 외골격 포함해 모든 모드를 자유자재로 오갈 수 있도록 질량 변환 방식 범용 슈트를 만들어봤다.”
“질량 변환까지요?”
동생이 황당해하자 형은 그런 동생이 귀여웠는지 피식거렸다.
‘질량 변환의 기본 베이스가 되는 테크놀로지는 대단히 복합적이지.’
우선 기본적으로 6세대 시뮬레이션 우주의 ‘실체화’ 능력을 통한 기능 부여, 파트들을 차원의 이면에서 소환해 결합하는 디멘션 기술이 베이스가 되었다. 여기에 더해 ‘이매진’이라 불리는 ‘허수 공간’을 다루는 기술, 시공간체 및 아공간 조작 기술, 확률 파동함수 강제 실체화, 슈퍼스트링(초끈) 테크놀로지 등 첨단 기술의 정수가 압축되어 있었다.
‘설명해주려 해도 한 마디도 채 이해하지 못하겠지?’
이미 의류의 본 목적을 아득히 초월한, 공방 일체의 궁극의 만능 아이템이 되어버린 그의 제복. 동생은 몹시 신기해하며 형의 의복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에 카이젤은 “궁금하면 나중에 양산품으로 만들어서 전 세계 의류 시장을 싹 교체하도록 하지.”라고 말하며 충격을 선사하였다. 윤혁은 다시금 형과 자신의 경제 관념 차이를 처절히 체감하였다.
*****
약속대로 모이긴 했으나 둘은 곧바로 여행길에 오르지는 않았다. 윤혁은 훈련을 막 마치고 온 뒤라 육신이 상당한 노곤한 상태였으며 카이젤 역시도 온종일 업무에 시달린 뒤 회복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두 형제는 당장 하룻밤은 윤혁의 집에서 머무르며 휴식한 뒤 다음 날 떠나기로 합의하였다.
그 덕에 윤혁네 세 식구와 카이젤까지 네 명은 식탁에 앉아 다소 어색한 분위기를 견뎌내야 했다. 성한과 유진은 먼데 살던 다른 아들이 다시금 직접 찾아올 줄은 예상치 못한 눈치였다. 애초에 소시민 가정과는 어울리지 않는 상대여서 그런지 더욱더 분위기가 난감했다. 다행히 손님 맞는 심정으로 평정심을 찾은 부부는 자신들이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정성으로 손님을 환대하였다.
“감사합니다.”
다행히 고귀하신 손님은 서민 식탁의 평범한 식사를 거부감도 없이 잘 받아먹었다. 다만, 의외로 잘 녹아드는 카이젤과 달리 상대 쪽은 영 어색해했다. 부부는 아직 윤혁과 달리 카이젤의 비범한 위압감에 완전하게 적응하지는 못한 상태였다. 그나마 아버지 쪽은 초인들을 마주한 적이 있어 나았지만, 어머니는 영락없이 사자가 식사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토끼 신세였다.
“부담 갖지 마시죠. 해치지 않습니다.”
카이젤은 태연스럽게 부부를 안심시켰다.
사실 그는 이들 식구의 안위를 안전히 지켜주려는 쪽에 가까웠다. 실제로 성한의 정체와 라일라와의 내연관계를 기억하던 2세대 원로들이 카이젤을 견제할 목적으로 가족에게 허튼수작을 부리려 했을 때 그는 교묘한 방법으로 그자들의 수족을 제거했다. 최근에는 아예 적절한 명분을 찾아내어 숙청까지 해버렸다. 이로써 함부로 자기 사람들을 건드릴 때 올 형벌을 모두에게 경고했다.
저녁 겸상 이후 카이젤은 테라스에 앉아 아버지의 말동무가 되어 드렸다.
그렇지 않아도 얼굴을 맞대고 나누고 싶었던 말들이 많았다.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았는지, 크게 고생했던 일은 없었는지, 각자의 세대에서 초인들과 사람들의 세계가 어떤 모습으로 변화했는지, 그리고 마음에 담고 있는 서운함이나 미안함은 없는지 등에 대해서 말이다. 조금 낯부끄러운 화제였지만 덕분에 부자 관계는 빠르게 부드러워질 수 있었다. 아비는 아들이 겪은 냉혹한 세계의 쓴맛을, 아들은 아비가 겪어온 세월의 신맛과 고초를 조금씩 엿보았다.
“제게 실망했습니까?”
아들이 부드러운, 그러나 슬픔 섞인 어조로 질문했다.
“혹시 저를 비난하고 싶지는 않습니까?”
완벽한 군주가 되기 위해 자기 안의 따뜻한 정을 게워냈던 카이젤.
“네게 무슨 낯이 있어서 그럴 수 있겠니.”
아버지의 말을 들은 큰아들은 말없이 아비의 애달픈 눈을 바라보았다. 진심 어린 미안함이 전달되었다. 아버지는 왜 내게 사과하는 걸까? 잘못한 건 어머니인데. 저자는 나를 낳은 걸 후회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터인데. 마음속이 괜히 간질거리면서 기분이 몹시 이상했다.
“저는 앞으로도 지금과 같은 일을 멈추지 않고 계속할 겁니다.”
그래서 일부러 스스로에게 선을 정해두고자 냉정히 굴었다.
“그렇다면 부디 네가 좋은 방향으로 향하길 바란다.”
“옳고 그름의 문제는 제가 판단하겠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모두 작게 한숨을 쉬었다.
‘고생이 많은 아이로구나.’
카이젤은 말없이 아련한 표정을 짓는 아버지께 다가가 살짝 끌어안았다.
“부디, 제가 후회하지 않도록 이대로만 있어 주십시오.”
동요하는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너무 가까이 다가오시면 안 됩니다.’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 변수는 동생 하나로 충분했다.
한편 성한은 묵묵히 그를 토닥여주었다. 이미 자신보다도 훨씬 듬직하게 큰 단단한 몸에서 억센 힘이 여실히 느껴졌다. 몸은 다 자랐는데 아직 속은 상처투성이구나. 그걸 가리려고 애써 사람의 모습을 지우고 철인의 모습을 입은 아이. 자신이 키웠어도 이 아이는 지금과 같은 모습이었을까?
“내일 동생을 데리고 멀리 여행을 떠날 겁니다.”
아들은 미리 아버지께 예고했다. 장소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이.
“윤혁이를 안전하게 잘 지켜줄 수 있겠지?”
말릴 수 없는 처지인 성한은 두 아들이 은근 염려되었다.
“제가 있으니 안전은 전혀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그 아이도 이 상황을 은근 원하고 있을 겁니다. 그 의도가 무엇인지 대충 짐작은 가지만⋯⋯. 한 번 기회를 주고 싶습니다. 동생 마음대로 행동하도록 해볼까 합니다.”
마침 자기 동류들의 뻔한 행동 패턴을 읽는 일이 너무 식상해 지루해지려던 참인 카이젤이었다. 동생은 그의 지루함에 물결을 던져줄 좋은 변수였다. 물론 동생이 날개를 펴고서 마음껏 활개치기를 원하는 마음도 은근 있었다. 또한 동생의 행동이라는 변수까지 고려해 인류의 미래를 위한 더 큰 그림을 넓은 관점에서 점검해보려는 공리적인 속셈도 있었다. 초인들의 왕 정도는 돼야 부릴 수 있는 여유로운 변덕이었다.
물론 상대가 동생이 아니었으면 이러한 호의는 베풀지 않았으리라.
“너도 몸조심하고 잘 다녀오렴.”
“어차피 제게는 손쉬운 임무, 누워서 떡 먹기입니다.”
아버지 앞이라 그런지 저도 모르게 자신만만한 센 척이 나왔다. 다른 때의 임무였으면 정말로 쉬운 일이었으리라. 늘 오갔던 자기 영토를 밟는 일은 위험할 턱이 없었다. 그러나 사실 이번 여행 계획은 약간 불확정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계산대로라면 안전하겠지만, 낯선 곳을 방문하는 일이니 신중에 신중을 기할 필요는 있었다. 그래도 아버지를 근심시키고 싶진 않았다.
“그건 그렇고 혹시 이사하실 생각 없습니까?”
“이사라고?”
“봉양의 의무를 다하고 싶어서 말이죠.”
귀찮게 구는 벌레들에게서도 안전히 보호할 겸 아버지네 식구를 편하게 호강시키고 싶었다. 이사를 시키는 편이 카이젤이 보기에는 합리적으로 생각되었다. 가정식 레스토랑은 건물 안에 하나 크게 만들어놓고 지원해줘도 되겠지. 직원들보고 필수적으로 이용하게 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그는 잠시 자신 곁에 그들을 가까이 두는 엉뚱한 상상을 펼쳤다.
“음, 호의는 고맙지만, 우리는 이곳에 정이 들어서 괜찮단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 성한은 경제적인 호의에 대해서는 정중히 거절했다.
“딱히 형편도 어렵지 않고 부족한 것도 없으니 염려 말렴.”
보통은 부자 아들이 있으면 어떻게든 그 덕을 보려고 하는 게 일반적이지 않던가? 어찌 보면 아버지도 확실히 평범한 위인은 아닌 듯했다. 그래도 내심 잘해드리고 싶었던 아들은 약간의 실망감이 섞인 시무룩한 어조로 대답했다.
“역시나⋯⋯,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이에 아버지는 미안해하며 조용히 아들의 넓은 어깨를 상냥히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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