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139회 초인들의 세계 Ch 51. 외부 은하 (2)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3.01.25 | 회차평점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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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도 지금은 비숍보다 더 강한 맹수가 윤혁 곁에 있었다.
“비숍.”
카이젤이 엄중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너는 지금 내 소환을 받고 임무에 투입된 요원. 내 명령에 불복하면 그에 합당한 대가를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부른 내 손님 앞에서는 항상 예우를 지켜 행하라. 의무를 잊지 말도록.”
무소불위의 기세를 자랑하던 비숍조차도 왕의 패기와 권위 앞에 즉각 몸이 굳었다. 물리적인 힘은 왕보다 훨씬 강할 텐데도 말이다. 신체 개조 과정에서 따로 목줄을 씌워놓은 것인지 아니면 세뇌 탓인지 모르겠지만 카이젤은 괴물급의 비숍마저도 번견처럼 완벽하게 길들여 놓은 것 같았다. 단순히 제약이나 두려움으로 사로잡았다기보다는 마음 자체를 굴복시킨 것 같았다.
‘정말 마법처럼 고분고분해졌네.’
카이젤이 지난번 제로원에서 비숍의 무례한 태도를 일부 허용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정식 임무 중이 아니었기에 일부러 목줄을 느슨하게 풀어준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처럼 정식 임무가 주어지면 철저한 상명하복의 질서가 발동된다. 비숍은 즉각적으로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 고개 숙여 복종 선언을 했다.
“킹께서 하사하시는 모든 지시를 수행하겠습니다.”
윤혁은 하필 지금 시점에서 비숍이 소환되었다는 점이 불길하게 느껴졌다. 비숍은 바이오닉 솔져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네 명의 정점 중 하나였다. 그 전투력이 단신으로 위성 붕괴를 일으킬 수준임은 이미 친선 경기 때 보아서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런 자에게 정식 임무를 내려 현장에 투입한다는 건 거대한 전쟁을 벌이겠다는 뜻으로밖에는 해석의 여지가 없었다.
‘내가 이 자리에 있어도 되는 건가?’
슬슬 우려가 생겼다. 그렇지 않아도 은연중에 항해 규모가 증가하는 통에 긴장감이 고조되던 차였다. 태양계에서 출발한 이후 은하계 여러 지점을 경유할 때마다 추가적으로 함대가 합류하는 바람에 본 함대 규모는 점진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물론 우주 개척 시대답게 함선도 다방면에서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지만, 일차적으로 함선이란 전쟁 용도의 물건. 하물며 규모가 큰 함대라면 평화적 목적일 가능성은 더욱 적으리라.
‘왜 전쟁 가능성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았지?’
정말로 전쟁일까? 만일 그렇다면 카이젤은 도대체 어떤 전쟁을 벌일 작정인가? 이미 인류는 일원화된 것 아니었나? 윤혁의 머릿속에서는 마땅히 인류연합과 다툴만한 적의 후보가 떠오르지 않았다. 은하를 넘어서 이동하려는 것도 그 적을 상대하려는 목적에서 나온 계획일까?
‘외계인? 아니면 초자연적 존재?’
온갖 시나리오들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임무 브리핑을 시작한다.”
카이젤은 이 한 마디를 끝으로 입을 닫았다. 대신 그는 다른 언어 체계로 옮겨갔다. 그는 블랙홀 속에 모인 모든 함선을 향해 뇌파와 텔레파시로 명령어를 직접 전달하였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중추적 매개체가 되었다. 각 함선의 선장 인공지능들은 카이젤의 명령어 데이터를 입력받은 즉시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들에게 맡겨진 일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인공지능뿐 아니라 비숍도 별도의 구두 지시 없이 카이젤에게 직접 텔레파시를 받았다. 두 사람의 뇌에 이식된 초지능체는 서로 양자화된 공명을 일으켜 자료들과 지식을 공유하였다. 사실상 이심전심의 상태나 다름없었다. 둘은 최상위 초인 이상만 감당할 수 있는 방대한 연산, 소통, 사고, 상상을 공유했다.
덕분에 일반인인 윤혁만 임무에서 완전히 동떨어진 채 홀로 소외되었다. 상식적으로 당연한 처사였지만 거시적 흐름 앞에서 홀로 무력하게 고립되는 느낌은 썩 편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딱히 불평할 이유는 없었다. 대륙도 행성도 아니고 무려 은하 단위의 군사적 움직임이니 일개 소시민이 관여할 여지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동행하지 않았으면 좋았으련만.
“불안해?”
비숍이 삐딱하게 능글거리며 윤혁의 어깨 위에 팔을 얹고 턱을 윤혁의 머리 위에 괴었다. 키 차이가 커서 그런지 머리통 하나는 거뜬히 윤혁 위로 올라왔다. 큐오즈린과는 다르게 성질이 조금 포악해 보이긴 해도 거리낌 없이 다가오는 점만은 비슷한 것 같았다.
“큭, 하긴 좁디좁은 본성에서 귀하게 자란 온실 속 화초께서 무려 우주 전투를 구경하려니 속이 타들어 가겠지. 벌써부터 쫄 정도면 막상 실전에 들어가서는 곧장 소변부터 지리겠는걸.”
그는 경박한 웃음을 지으며 비아냥거렸다. 기분이 나빴으나 꾹 참았다.
“팔 치우시죠.”
“워우, 워! 너무 까칠하게 구는 거 아냐?”
“딱히 우리는 피차 친하지도 않잖습니까?”
“룩 그 녀석이랑은 잘도 어울려 놀더니, 나만 차별이냐?”
윤혁은 할 말이 없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원래 이런 캐릭터였나, 저 인간?’
솔직히 룩의 경우는 상대 쪽에서 먼저 강아지처럼 동정심을 유발하면서 다가왔기 때문에 받아준 것이지 원래라면 친해질 일도 없었다. 가뜩이나 초인을 잔뜩 보아온 마당이라 이제는 낯선 초인만 나타나면 경계심이 드는 판이었다. 윤혁으로서도 더 이상의 초인은 사양하고 싶었다. 하물며 두뇌에 초능력까지 겸비한 성격 험악한 얼티밋워리어에게 곧바로 친근감이 들리는 만무했다.
“그 녀석이 동생 행세하는 걸 잘만 받아주던데?”
비숍이 토라진 듯 투덜거렸다.
“별 걸 다 부러워하시네요.”
“이왕이면 나도 킹의 가족과 연줄 맺으면 좋지 뭐.”
“너무 속물적인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시는 거 아닌가요?”
“위선적으로 구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
“뭐, 그럴지도요.”
윤혁은 퉁명스럽게 답했다. 비숍은 그런 그가 흥미로운지 짖궂은 미소를 입가에 잔뜩 머금었다. 처음에는 자신을 보고 지레 겁 먹었던 걸 보면 간이 작은 보통의 사람인 건 분명하거늘, 마냥 범부라고 보기에는 또 기묘한 면이 있었다. 저래서 킹께서 눈여겨 봤던 것일까?
“어이, 넌 나이가 어떻게 되지?”
비숍이 능청스럽게 화제를 꺼냈다.
“올해로 스물셋으로 올라갑니다.”
마침 4월 2일이 윤혁의 생일인지라 시기 상 조만간 한 살을 더 먹을 예정이긴 해서 애매했다. 지구의 시간축을 벗어나 타임필드 안에서 오래 지내다 보니 시간 감각이 애매해지긴 했지만. 문득 지구에서는 현재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지 궁금증이 들었다. 카이젤도 이런 식으로 생활하도 보니 나이 개념을 탈피해버렸던 것일까? 자신의 형이 어쩌면 수만 살의 세월을 먹은 대현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윤혁은 기분이 몹시 어색했다.
“흐음, 나랑 대충 비슷하네.”
비숍이 또다시 넉살맞게 이죽거렸다.
“잘됐네. 서로 막역하게 지내는 게 어때, 친구?”
“치, 친구라고요?”
심히 당황스럽고도 추진력 빠른 친화력이었다.
“솔직히 인간은 별로지만 그래도 킹의 동생이니까 특별히 받아줄게.”
딱히 싫은 소리 할 방도도 없었던 윤혁은 울며 겨자 먹기로 잠자코 있었다. 친구 관계를 맺자는 제안은 썩 내키지 않았지만, 괜히 심기를 건드렸다가는 뼈도 못 추릴 것 같았다. 적당히 장단에 맞춰주자. 윤혁은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모호한 태도로 고개만 끄덕여주었다.
‘그나저나 비숍 저 사람이 나랑 동갑이었구나.’
얼굴이 약간 노안이라서 최소 서른 살은 되는 줄 알았다. 애초에 생체병기라서 인간과는 나이 먹는 방식이 개념부터 다를지도? 아니면 비숍도 피코머신이나 타임필드의 영향 탓에 노화라는 개념을 탈피했는지도 모르지. 문득 궁금해졌다. 바이오닉 솔져들은 인간과 얼마만큼의 공통 분모를 공유할까?
‘그나저나 큐오즈린처럼 비숍도 인간을 몹시 싫어하나 보네.’
그도 엄연히 생체 실험을 통해 만들어진 인간이니 충분히 자신을 제작한 작자들을 혐오할 만도 했다. 그런 그가 카이젤에게만은 깎듯이 복종하는 게 참 신기했다. 아무리 제멋대로인 성격이라 해도 자신들을 구해주고 치료해준 자에게는 충성하겠다는 건가? 전쟁 투입을 기꺼이 받아들일 정도의 충성심이라니. 생각보다 바이오닉 솔져들에게 있어서 카이젤이란 존재의 무게감은 큰 듯했다. 그 충성심이 인류에게 선한 방향으로 작용할지는 미지수이지만.
“한즈.”
상념에 빠진 윤혁에게 비숍이 다시 말을 걸었다.
“……응? 한즈?”
“내 본명이야. 코드네임이 아닌 내 원래 이름.”
“그, 그렇구나. 혹시 라스트네임은?”
“라스트네임? 그런 거 없는데?”
비숍, 아니 한즈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래도 본명이 웬만해선 안 쓰는 신분일 텐데 이름까지 선뜻 소개할 정도면 나름 친구 하자는 말은 진지한 제안이었던 모양이었다. 괜히 속으로 거부감만 느꼈던 게 아주 조금은 미안함이 들었다. 큐오즈린의 지적대로 자신도 은연중 인간의 범주를 탈피한 존재에 대한 편견에 물들어 있었던 걸까?
“아, 알겠어, 한즈. 잘 부탁해.”
최대한 용기를 내어 거구의 남자에게 손을 내밀어보았다.
“내 이름은 강윤혁이야. 정식으로 인사하게 돼서 반가워.”
“흐음, 킹과는 라스트네임이 다르네?”
“형님과 난 이복형제거든.”
이에 한즈는 살짝 혀를 끌끌 찼다.
“뭐, 잘 지내보지.”
근육질 워리어는 다시금 은근슬쩍 윤혁 위에 팔을 얹고 기댔다.
“이번 내 임무 중에는 전투도 있지만 널 안전하게 지키는 일도 있지.”
“마침 말 잘 나왔네.”
한즈가 던진 말에 윤혁은 움켜쥐고 있던 의문을 털어놓았다.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말이지. 왜 이 함대는 전투하러 굳이 은하 밖까지 나가는 걸까? 형은 무슨 계획인 걸까? 굳이 내가 동행하는 이유는 뭘까? 나는 사전에 이런 이야기는 전혀 듣지 못했어.”
“큭, 중요한 이야기는 죄다 생략한 채 무턱대고 데려오셨구먼.”
윤혁의 진지한 항변에 한즈는 주군 쪽을 흘깃 보며 비웃었다.
“넌 그걸 또 대책 없이 따라나섰고 말이야.”
킥킥대는 비아냥에 윤혁은 비위가 조금 상했다.
“놀리지 마, 한즈. 난 심각하다고.”
“크큭, 미안, 미안. 그런데 너무 걱정할 것은 없어. 낡고 약해빠진 놈들을 잡으러 가는 거니까. 우리가 패할 가능성은 제로야. 함선 한 척, 아니 유닛 한 기 잃을 가능성조차 전혀 없지. 사실 전투보다는 탐험과 개척이 메인이거든.”
‘이번에도 또 모르는 이야기뿐이네.’
윤혁은 입술을 비죽였다. 결국, 이번 여정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아무것도 모르는 들러리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한즈가 저렇게까지 확신해서 승리를 장담하니 신변에 대해서는 안심이 되었지만 그래도 역시 의뭉스럽고 의아했다. 누가 해명이라도 해줬으면 속이 시원 하련만.
“적의 정체에 대해서는⋯⋯, 아니다, 사정을 다 얘기하려면 너무 길어져.”
한즈의 그 의미심장한 말에 윤혁의 궁금증이 커져만 갔다.
우우우우우웅.
한참 대화 중이던 바로 그때, 갑자기 기함 내부에 큰 진동이 전달되었다. 윤혁은 순간 엔진 이상이라도 생긴 것인가 덜컥 걱정했다. 다행히 아니었다. 그것은 은하를 넘어선 영역으로의 워프를 준비하는 반응이었다.
{잠시 후 웜홀 생성을 시작합니다.}
{87세대 버전 워프 프로세스 준비.}
워프 기술은 21세기 때 기초 이론이 처음 창안된 이후 현재까지 숱한 진화를 거쳐왔다. 가장 최근 버전은 88세대 워프였는데 현재는 아직 실험 중이었다. 실전 적용이 가능한 버전 중 최첨단은 87세대 워프였다. 바로 이 87세대가 팽창하는 은하 사이 공간을 넘어 도약하기 위해 인류가 고안한 기술이었다.
“슬슬 원거리 타임머신을 준비한다.”
카이젤이 나지막이 미소를 지었다. 이제 인류연합 함대는 목적지로 향하기 위해 공간의 장벽뿐 아니라 시간의 장벽 역시 함께 뛰어넘을 것이다. 그 옛날 도입했던 불완전한 전략을 이번에는 완전무결한 형태로 적용할 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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