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144회 초인들의 세계 Ch 53. 멸망의 아들 (1)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3.02.06 | 회차평점 0 |
Chapter 53. 멸망의 아들
이윽고 마지막 워프 시동 준비가 완료되자 기함이 워프 반응을 일으키며 포효를 내뿜었다. 88세대 워프는 은하 중심의 블랙홀을 경유하되 그곳에 직접 다가가지는 않는 기술이었다. 또한 여러 차례의 은하 간 워프를 단 1회로 압축할 수도 있었다. 이른바 초은하단을 가로지르는 첨단 기술인 셈. 장래에 모든 은하를 정복하기 위해 마련해둔 청사진 중 하나였다. 원래 실전 투입은 미룰 예정이었으나 거대한 폭풍우 탓에 여유 부릴 틈이 없게 되었다.
이내 여러 중심 블랙홀을 강제로 연결하는 거대 웜홀이 형성되었다.
“큭, 항상 몸으로 뛰는 역할은 내가 맡는 꼴이군.”
공식 최고 등급인 Ex 랭크 바이오닉 솔져에겐 시공간 능력, 피코머신, 중력 및 관성 조정, 확률 관련 기술이 기본으로 체내에 이식되어 있었다. 허나 그들마저 초월하는 격의 존재인 얼티밋 워리어에게는 위의 네 가지 유형 외에도 극도로 위험한 또 하나의 특수 능력이 체내 융합되어 있었다.
‘바샤크!’
양산 불가의 특수 기술력. 얼티밋 워리어의 강력한 정신력과 생명력이 융합되어야만 발동되는, 감정과 의지를 ‘현상’으로 화(化)하는 무기. ‘강뢰(姜雷)의 비숍’이라 불리는 한즈가 비밀 병기인 ‘바샤크’를 발동했다.
촤아아아아악!
쿠르르르릉.
비숍의 바샤크가 워프하는 기함을 붙들며 보호했다. 그와 동시에 초자연적 폭풍우와 웜홀이 양쪽에서 기함을 덮쳤다. 충격파가 우주 공간으로 흩뿌려졌다. 폭풍이 기함을 집어삼키기 직전, 워프가 아슬아슬하게 발동되었다.
“크윽, 가까스로 살았군.”
“수고했다. 비숍.”
탈출 성공 후 비숍과 카이젤이 텔레파시로 현황을 짧게 주고받았다.
이번 88세대 워프는 여러 은하 중심 블랙홀과 웜홀의 연쇄를 한꺼번에 가로지르면서 막(m-brane)들을 디딤돌 삼는 서커스 방식이었기에 기존 방식과는 달리 이동 과정에서 시간 소요가 발생했다. 예상 시간은 1분이었지만, 폭풍으로 인한 오차 때문에 함선 기준 한 시간가량이 흐를 것으로 계산되었다.
다행히 닻이 내려진 도착 지점의 시공간 좌표는 전혀 어긋나지 않았다. 별다른 추가 변수가 없다면 원래 떠나 온 시간대에서 하루 이틀 정도의 오차 내에서 무사히 착륙할 예정이었다. 기함 내부에서는 보낸 기간은 한 달 남짓했지만 돌아가면 원래의 시간대 그대로이리라.
“많이 지쳤구나.”
카이젤이 동생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네.”
윤혁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동생 녀석, 여행이 길어지는 통에 꽤 쇠약해졌군.’
하긴 우주에 제대로 적응하지도 못한 신체를 가진 주제에 워프와 게이트를 넘나드는 것은 물론이고 블랙홀까지 여러 차례 넘는 여행에 참여했다. 아무리 관성 중화 시설이 완벽하다고는 하지만 엄청난 가속도로 움직여댔으니 관성의 영향도 미약하게나마 받았을 것이다.
거기다가 처음에 사용했던 ‘필라’ 내부의 특수 환경, 특수 슈트 착용의 영향, 그리고 시뮬레이션 우주에 접속할 때 발생한 정신적 충격에 더해 한꺼번에 많은 텔레파시를 수신하며 강제적인 데이터 주입까지 받았으니 그 여파도 상당했을 것이다. 또한 반지와 상자의 공명 때문에 발생한 이데아와의 일시적인 융합도 정신적인 여파를 남겼으리라.
‘녀석이 그래도 나름 성실하게 신체를 단련해서 망정이지.’
형으로서 아주 조금은 죄책감이 들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무너지지도 않고 강건하게 버텨준 것만 해도 기적이었다. 카이젤 자신처럼 타고난 최강의 육체를 소유한 초인이 아닌, 일반인에 불과한 동생 강윤혁. 그런 약한 몸으로도 동생은 지금껏 원치 않는 위험 앞에서 물러나거나 주춤하지 않았다.
“난 좋은 형이 될 수 없겠군.”
새삼 동생의 투철한 용기가 가상했다.
“⋯⋯그건 저도 이미 알고 있어요.”
윤혁은 반쯤 농담조로 입술을 비죽이며 투덜거렸다.
“허허, 이런. 대놓고 인정하니까 형으로서 좀 상처받는군.”
“앞으로 최소한의 노력을 보여준다면 달리 생각할지도요?”
누구나 다 악(惡)이라는 불가항력의 힘 아래 눌려있는 법이에요. 벗어나려고 발버둥 칠수록 더 강하게 옭아매죠. 그럴 때는 힘을 빼고 몸을 맡겨야 해요. 구조해주려는 자의 손을 잡아야 해요. 마음속으로 윤혁은 형에게 전하는 말을 삼켰다. 그는 조용히 눈을 감고 스르르 잠들었다.
‘못 말리는 녀석이로군. 꼭 맹랑한 길고양이 같아.’
허탈한 실소가 절로 새어 나왔다. 유일하게 자기 양심으로 옭아맨 동생. 패배라는 개념을 모르는 카이젤이었지만 언젠가 동생을 상대하게 된다면 아집이 꺾여 패할지 모르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저런 올곧고 좋은 사람에게는 누구라도 패하지 않을 수 없겠지. 그 패배의 순간이 오지 않기를 은근 바랐다.
‘아니, 사실 마음 한구석에서는 오히려 그걸 바라고 있는 게 아닐까.’
동생이 잠든 모습을 보며 형은 씁쓸히 자조했다.
*****
이번에는 감사하게도 악몽이 발생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허락하시는 분께서 윤혁을 굳게 지키고 계시는 듯했다 억눌린 울음을 털어내자 마음의 짐도 조금 가벼워졌다. 숙면 후 개운한 기분으로 눈을 떠보니 모니터 위에 익숙한 우주 항법 지도가 보였다. 태양계 지도였다. 기함은 이제 막 해왕성 궤도에 도달해있었다. 연산된 시간을 보니 지구 달력으로 떠나온 날짜인 4월 1일에서 하루가 더 지난 4월 2일이었다. 딱 하루의 오차였다.
그때 방 안으로 한즈와 카이젤이 들어왔다. 한즈는 조금 지친 기색에 곳곳에 상처투성이였지만 전투 종족답게 기분은 상당히 고조된 것처럼 보였다. 그는 눈을 비비는 윤혁을 발견하더니 실소를 금치 못했다.
“쳇, 고생하는 사람은 따로 있고, 퍼 자는 사람은 따로 있군.”
툴툴거리고 예의 없는 말투는 여전했다. 그는 무사히 함의 침몰을 막아내었고 바샤크의 효과도 확실하게 실증하였다.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신체에 가해진 부담도 거의 없었다. 타고난 육체와 생명력 덕분이었다.
“킹께서도 그렇지만 너도 나한테 빚진 줄 알아야 해.”
“어허, 비숍!”
낮은 목소리로 카이젤이 경고했다.
“쳇, 알겠습니다.”
임무가 종료된 비숍은 근방 요새로 돌아가기로 했다. 지구에도 쉽게 발을 들이지 못한 채 실험실과 전장을 반복해서 돌아다니는 기구한 삶. 아무리 자신이 선택했다고는 하지만 힘든 건 힘들었다. 뒤돌아 떠나가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이제 윤혁도 어렴풋이는 알게 되었다. 룩이나 비숍, 둘 다 생체병기로서의 모습이 진정한 정체성이 아니다. 그들도 자기 의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다. 타인과 상호작용하며 아파하고 후회할 줄도 아는 사람.
‘아빠가 말한 쥰이라는 분께서는 아무리 악한 사람, 아무리 인간 같지도 않은 사람들이라도 포기하지 않고 인간으로서 사랑해주었다고 했었지.’
태어날 때부터 유전자를 조작당하고, 신체가 개조되고, 전장에서 많은 피를 흘렸더라도 그 뿌리가 우리 같은 인간이라면, 마음과 의지와 생각을 갖고 있다면 그들도 똑같은 형제다. 인공지능이나 신수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하나님의 형상을 물려받은 소중한 이웃.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존재. 자신의 판단이 틀린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훗날 더 올바른 증거를 통해 그들에게서 사람의 가치를 발견하고 싶었다.
“나중에 또 만나자.”
“잘 가, 몸조심하고.”
윤혁과 인사 나눈 비숍은 워프로 함 바깥으로 이동하였다. 이후 젠타르콘은 이내 단거리 공간 압축 도약을 시행했다. 순식간에 창 바깥으로 다이슨 구체와 개조된 달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 지구 권역에 돌아왔다.
“윤혁아.”
형의 목소리에 윤혁은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조금 망설이는 듯한 기색이었다.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주저하며 멈칫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윤혁은 잠잠히 기다려주었다. 잠시 후 카이젤이 다시 용기를 내었다.
“저기, 생일 축하한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별다른 내용은 아니었다.
“지난번이랑은 반대로 이번에는 내 차례가 되었군.”
저런 냉혈한도 세심한 면이 있구나 싶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 감사합니다.”
그래도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말뿐인 축하는 의미 없지.”
카이젤은 헛기침과 함께 뜸을 들이며 고개를 돌렸다.
“약속했던 대로 선물이다. 지난번에 약속했던 대로 돌려주어야겠지.”
원래 형에게 생일 선물로 준 반지는 한 쌍으로 된 물건이었다. 친구들끼리도 가벼운 우정 반지 정도는 나누니 형제끼리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준비했었다. 이제는 윤혁의 몫인 한쪽을 돌려줄 차례였다.
“네 선물을 너에게 선물로 돌려주는 꼴이 우습긴 하지만, 그래도 정성껏 준비했으니 가치는 나쁘지 않을 거다. 원래는 더 큰 걸 주려고 했었는데 미안하다. 다음에는 더 귀한 걸 마련해보마.”
“저는 진짜 괜찮아요.”
저 인간이 경제적 과시 행위를 하면 규모가 얼마나 한도 끝도 없이 거대해질지 눈에 선했다. 그런 일은 윤혁으로서도 절대 사양이었다.
“네가 날 따라 위험한 곳까지 와주었으니 그 사과의 의미이기도 하다.”
이것으로 양심의 가책도 덜어 놓을 생각이었다.
“음, 그런데 그 선물은 어디에 있죠?”
카이젤이 아무것도 꺼내지 않자 윤혁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미 넘겨주었지. 그 상자 안에 네 반지가 들어있다.”
“아하.”
윤혁은 상자를 주섬주섬 품에서 꺼냈다.
“원래는 동기화 과정이 따로 필요한데 그 절차를 생략해보려고 네가 우주를 여행하는 도중에 상자를 품에 들고 있도록 한 거다.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기긴 했지만, 이제는 옛일이니 상관없겠지.”
상자는 본체인 반지를 윤혁의 신체와 안정적으로 동기화시키는 장치였다. 실제로 상자는 우주를 횡단하는 동안 워프 인증 코드, 타임필드 코드 등 윤혁에게 필요한 요소들을 실시간으로 반지와 윤혁의 몸에 새겨넣어 주었다. 그 과정에서 이데아와의 융합 등 불필요한 것까지 흘러 들어가긴 했지만.
윤혁이 빤히 상자를 내려보던 중 수정 상자의 껍데기가 나노 단위로 쪼개져 곧 사방으로 흩어졌다. 포장 장치들이 겹겹이 사라지더니 마지막에는 황금 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 원정 때 몇 번 곤경에 빠트렸던 주범이 정체를 드러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질감이 전혀 없었다. 신체와 완벽하게 동기화된 덕인지 컨트롤해도 무리가 되지 않을 듯했다.
“네 반지는 백지와 같다. 여러 기능을 추가적으로 획득할 수 있고 네 몸과 일체이기 때문에 네가 원하는 방향으로 기능을 변형할 수도 있지.”
“그렇군요.”
“그리고 내 것과의 공명도 희미하게 남아 있기에 잘하면 내 반지의 기능을 빌릴 수도 있지. 하지만 그건 추천하지 않아. 연산 과정이 너무 복잡해서 네 신체와 정신에 무리가 가해질 수도 있으니까.”
고전 소설 속의 반지 이야기가 떠올랐다. 마왕의 분신이자 연약한 시민이 짊어질 짐이었던 유일반지. 지금 주어진 건 그것과 똑같지는 않겠지만 주의해서 사용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해 보였다. 문득 받아도 될지 걱정이 앞섰다. 설령 받는다고 해도 자신이 사용해도 될 물건인지는 의심되었다.
“가지고만 있어도 상관없다. 내 것과는 달리 온전한 네 소유이니까 내가 그걸로 너를 옥죄거나 간섭하거나 감시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윤혁이 반신반의의 눈초리로 형을 빤히 쳐다보았다.
“믿지 못하는 눈초리군.”
물론 카이젤도 그동안 저지른 죄가 있으니 할 말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그 물건은 일종의 프리패스이기도 하다.”
“프리패스요?”
윤혁도 이 이야기만큼은 솔깃했는지 귀가 쫑긋 올라갔다.
“그래. 내 제국 안에서는 어디든지 돌아다닐 수 있는 통행권이다. 워프, 게이트, 포탈의 통과는 물론이고 시뮬레이션 우주에서도 버틸 수 있고, 금지 구역만 아니라면 특수 지역 통과 인증도 받을 수 있다. 더 나아가서.”
카이젤은 조금 뜸을 들이더니 이어서 말했다.
“네가 그걸 써서 지구 바깥의 인간들을 만나겠다면 그것 역시도 막지는 않겠다. 이 반지에는 은하계 항법, 출입 인증, 타임필드 동기화 인증 코드까지 포함되어 있어. 네가 과도하게 선을 넘지만 않는다면 어느 곳의 인간이든 만날 수 있을 거다. 그 후의 선택의 책임은 네게 있겠지만.”
윤혁은 어안이 벙벙해서 말을 하지 못했다.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겠지?’
그가 우주의 인간들을 만나도록 허락해주었다. 그것도 기약 없는 약속이 아니라 이 자리에서 곧장 권한을 은택으로 선사했다. 고대 페르시아의 아하수에로 왕이 자신의 왕비에게 허락하였던 ‘긍휼의 홀’(에 5:2, i), 그 홀과 동일한 의미의 무게를 지닌 반지가 바로 이 순간, 윤혁의 손에 주어졌다. 왜 그런 변덕을 부린 걸까? 그토록 기도했어도 풀릴 방법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던 숙제. 그것이 이토록 간단하게 풀려버린다고? 어안이 벙벙했다.
“네가 무엇을 할지는 자유다.”
카이젤이 선뜻 자비를 베푸는 어투로 말했다.
“그들을 흔들어놓겠다고 해도 상관없어. 나는 여태껏 너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강력한 적들을 무수히 꺾어왔다. 또 고작 너에게 흔들릴 정도로 나약하지도 않지. 다만, 네가 무슨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기발한 결과를 만들어낼지 그것 하나만큼은 나도 궁금하군. 무료하던 차에 흥미로울 것 같아.”
네가 나에게 만들어낸 작은 변화처럼 말이야.
“형에게 누를 끼칠 일을 꾸밀 생각은 없어요.”
조심스레 꺼낸 그 말은 진심이었다. 윤혁은 단지 그곳 사람들의 인간관계와 삶이 건강하게 개선되고 회복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로마 제국에서 복음이 한창 전파될 때 신자들은 어느 누구도 제국에 정치적으로 대항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들은 국가에 대한 자신의 의무를 충실하게 다했다. 삶의 주인이 황제에서 하나님으로 옮겨진 것만 달라졌을 뿐이었다. 그러니 이 일도 장기적으로는 형에게 유익으로 작용하는 길이 될 것이다.
“고마워요, 형.”
“그래.”
윤혁은 낯이 뜨거운 나머지 형의 얼굴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했다. 고마움을 표현해야 하거늘 지금까지 보아온 형의 어두운 실체가 잔상처럼 뇌중에 어른거려서 혼란스러웠다. 부디 이 한 쌍의 반지가 형제 중 어느 한 명이 낭떠러지로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는 동아줄의 역할이라도 해주기를 바라는 바였다.
(다음 회차에 계속)
이전회
143회 초인들의 세계 Ch 52. 다잉메시지 (3) |
다음회
145회 초인들의 세계 Ch 53. 멸망의 아들 (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