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148회 초인들의 세계 Ch 54. 두 지혜자 (1)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3.02.15 | 회차평점 0 |
Chapter 54. 두 지혜자
머나먼 옛날, 고대 중동의 어느 작은 나라에 지혜의 왕이 살았다. 신께서는 그의 순전한 기도에 응답하여 전무후무한 수준의 지혜와 지식을 선물하셨다. 그는 그 지혜의 힘을 이용해, 후대에 남을 지혜로운 가르침들을 적었고 거룩한 성전을 봉헌하였다. 그러한 선한 일도 많이 남겼으나, 슬프게도 그는 정반대 방향의 그릇된 일에 지혜를 낭비하기도 했다. 자신의 부귀영화와 나라의 부국강병을 쌓는 일, 그리고 세상의 여러 유혹과 타협하는 일처럼 말이다. 그의 그릇된 선택들은 훗날 그의 사후에 후손들의 나라가 몰락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렇듯 지혜의 왕은 야누스처럼 두 얼굴을 소유하고 있었다. 흰색 면과 검은색 면. 그리고 먼 훗날이 되어 지금 이 자리에는 지혜의 왕의 두 가지 면을 크로마토그래피로 분리하여 추출해낸 뒤 각각 따로따로 응결시켜 증폭해낸 듯한 두 결정체가 자리하였다.
먼저, 이전 세기에 당대 현자들에게마저 지혜를 인정받은 대현인. 절대자를 겸손한 마음으로 인정하며 그의 뜻을 세상에 이루기 위해 선한 지혜를 사용한 자. 사람들을 돕기 위해 학문을 발전시키고, 성경과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며 후학들을 가르쳐온 훌륭한 스승.
그리고 현 세기에 등장한, 전무후무한 최강의 지혜를 자랑하는 위대한 인간. 신이 세워둔 한계를 깨부수기 위해 인간 본연의 힘을 폭발적으로 진화시킨 야심가. 인류의 지배자이자 역사상 가장 막강한 인간. 인간 세계의, 아니 피조계의 유일무이한 특이점이라 불리게 될 위인.
백발의 에드레이 테일란드와 흑발의 카이젤 라흐블뤼크.
흰색의 솔로몬과 검은색의 솔로몬.
두 상반된 속성이 전례 없던 팽팽한 신경전을 이루었다.
“따님께서는 매번 당신에 대해서는 함구하더군요.”
카이젤이 먼저 운을 뗐다. 그는 여유만만하게 범인을 취조하는 기분으로 연약하고 작은 사냥감을 눈으로 요리하였다. 어차피 모든 것을 아는 우월한 입장이라 상대를 가지고 놀기란 너무도 손쉬운 일이었다.
“헛수고했구먼.”
에드레이는 처연한 표정으로 씁쓸히 회상하며 말했다.
“내 딸 아이는 어차피 내가 어디서 뭘 하는지도 모르도록 해두었네. 괜히 애비의 일에 얽히느니 조용히 살아가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말이지. 가여운 아이일세. 남편과 가족들을 잃은 슬픔을 간직한, 나오미와 같은(룻 1:3-5, i) 아이이지. 아무리 무소불위의 권력자라도 그런 어른에게는 공손히 대해야 하는 법일세. 딸아이가 어린 시절 자네한테는 꽤 은혜를 베풀었다고 들었다만.”
그러나 카이젤은 심금을 울리는 사연 호소에도 냉정을 유지했다.
“그분이 사생자는 아니었나 봅니다.”
다소 상처 주기 쉬운 날카로운 언어. 에드레이는 교만한 아이의 도발에도 침착히 온유함을 유지하였다. 어른인 자신쪽이 겸허히 용서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유전자 분석 결과를 보니 말이죠.”
원래는 카이젤도 쉬운 방법을 택하여 했다. 자기 아버지인 강성한을 수색했었던 때의 방법처럼 유전자 정보를 이용한 역 추적으로 에드레이를 찾을 작정이었다. 아쉽게도 그 방법은 줄곧 실패했었다.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다. 에드레이와 유전학적 연결점을 지닌 존재가 세상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거둔 두 명의 딸아이는 내 생물학적 아이가 아닌 입양된 아이들일세. 어떤 교도소의 여인이 성범죄를 당했던 일을 우연히 들었지. 그 불의의 사고로 잉태되어 하마터면 지워질 뻔했던 불쌍한 아이들을 불쌍히 여겨 거두었다네.”
이것은 젊은 시절의 일. 성폭행으로 인해 생겨난 아이를 어미가 강제로 지우려던 차에 그 비운의 소식을 전해 들은 에드레이는 어미를 설득하고자 재빨리 그녀에게 큰 비용을 지불한 뒤 아이의 생명을 건져냈다. 그 후 그는 두 여자아이를 딸로 입양하여 성실하게 키웠다. 다행히 둘 다 훌륭한 사람으로 자라주었다. 그 중의 하나는 오랜 세월 살아남아 최근에까지 생을 유지하였다.
“안타깝게도 나는 생물학적 후손을 갖지 못하는 몸일세.”
노인이 자조하듯 쓰게 웃었다.
“선천적인 이유입니까, 아니면 후천적인 겁니까?”
“허, 무례하고 곤란한 질문이구먼. 젊었을 적에 교도소에 갇혀 있을 때 짖궂은 죄수들에게 폭행당해 남성성을 박탈당했네. 평생 미혼이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지. 궁금증이 해결되었으려나?”
카이젤은 무의식중에 그 고통이 공감됐는지 한쪽 눈을 잠시 찌푸렸다. 같은 처지로서 동병상련을 품자니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의외로 둘은 흥미로운 공통점이 많았다. 어쩌면 이 노인은 외할아버지 이상으로 자신과 공통분모를 많이 지녔는지도 모르겠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이 노인과 혈육으로서의 연결성을 소유한 자는 현재 이 세상에 카이젤 자신밖에 없기도 했다.
“잡담이 조금 길어졌군요.”
“그래, 귀하신 분께서 이런 누추한 곳에는 어인 행차이신가.”
긴장감이 점차 짙어지며 공기가 묵직하게 얼어붙었다.
“먼저 감사 인사라도 드려야 하는 게 예의가 아닐까 해서 말입니다.”
제왕의 도발에 에드레이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녀석, 참 마음에도 없는 이야기를 뻔뻔스럽게 말하는구나.’
물론 그 와중에도 노인의 연약한 몸은 본능적으로 위압감 앞에 움츠렸다. 정신적으로 탁월한 위인의 그릇을 지닌 것과는 별개로 육신은 나약했기에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육체를 소유한 자 앞에서 압도되지 않기란 어려웠다.
“진심입니다. 제가 구조되었을 때 당신도 개입하셨지 않았습니까?”
“옛일을 꺼내기에는 너무 오래 지나지 않았나?”
“저를 죽게 내버려 두실 줄 알았는데 솔직히 의외였습니다.”
스무 살 무렵의 카이젤에게는 불의의 음모에 휘말려 납치당해 목숨을 잃을 뻔했던 시기가 있었다. 당시의 에드레이는 뒤에서 암약하던 시대의 조율자였다. 에드레이는 당시 중립 입장이었던 두 위인과 접촉한 후 음모의 배후를 눈치챘었다. 그는 도박을 무릅쓰기로 했다. 납치 계획과 관련해서 알아낸 정보를 인류연합 측의 카이젤의 부하들에게 흘려보낸 것이다. 그렇게 하여 반역자들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도록 몰래 조정하였다.
그 대가로 에드레이는 죄목이 깊지 않은 중립 두 명이 숙청 대상이 되지 않도록 인류연합 내에서 선처의 조율이 이뤄지는 방향으로 몰래 배후에서 도와주었다. 시대를 꿰뚫는 연륜과 안목을 지닌 그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자네를 좋아하거나 지지해서가 아닐세.”
에드레이는 반쯤 억지로 쓴소리를 일부러 쏟아내었다.
“자네가 불쌍했기에 기회를 주고 싶었을 뿐이지. 무엇보다 솔로브예프 군의 사상이 너무 사악하고 위험천만해서 막을 필요도 있었네. 당장 자네가 죽어버린다면 다음 실력자인 그자가 인류연합을 무너뜨리고 인류를 지배하려 들 텐데, 그렇게 되면 네오 오더의 부활이 이뤄지는 꼴이나 마찬가지 아니겠나.”
“그래서 최악보다는 차악을 선택하셨다?”
“허허, 편할 대로 생각하시게나.”
세 번째 세대의 초인들.
그들 가운데에는 누구보다도 특출한 다섯 위인이 있었다.
시대의 징조와 패턴을 이미 알고 있던 에드레이는 다섯 아이가 활동을 시작하기도 전에 아이들에 대한 개략적인 정보를 파악했다. 제각기 종교관, 사상, 철학, 성향이 완전히 다른 녀석들이었다. 에드레이는 그중 하나가 위버멘쉬가 되리라 추측했기에 줄곧 아이들을 예의주시하였다.
적그리스도로 각성할 후보자인 위버멘쉬, 그 교만의 왕좌는 단연코 카이젤의 차지라고 추정했다. 능력적 격차가 그만큼 컸으니까. 그러나 나머지 넷도 가볍게 생각하며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들도 엄연히 위험한 변수였으니까. 그래서 그들 사이의 미묘한 힘의 대치 균형에 몰래몰래 간섭을 해왔다.
“꼭두각시놀이를 시도하신 재주는 칭찬해드립니다만, 당신의 주제를 벗어난 일이었습니다. 나는 이미 오래전에 이전 세대와 현세대 모두를 압도적으로 뛰어넘었습니다. 외조부님과 이브를 합친 것보다도 훨씬 더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끝없이 발전하는 중이죠.”
카이젤은 에드레이에게 나름 존경심도 갖고 있었다. 자신의 외할아버지인 칼튼에게 질투심을 품었듯이.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이 구세대로서 맡아온 일들에 대한 경의였다. 순전히 절대적인 실력만 놓고 비교한다면 3세대는 이전 세대들과는 아예 궤를 달리했다. 그들은 이전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놀라운 업적들을 이룩해왔다. 우주 정복, 노화와 질병의 정복, 범우주적 규모의 방대한 정보 체계의 확립, 심지어는 자연계의 정복과 조종에 이르기까지.
“허허, 나도 그건 알고 있다네. 자네는 그 오만함만큼이나 재능의 크기도 거대하다는 사실을 말이야. 허나 연륜이란 또 다른 개념이라네. 이 늙은이의 재주가 자네들 보기에는 하찮아 보이겠지만 말이지.”
“그렇습니까?”
카이젤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외종조부님은 모르시리라. 문제의 그 연륜이라는 것도 이미 앞선 세대들을 초월했다는 사실을. 신문물에 둔한 옛날 분이라서 그런지 타임필드라는 기술의 본질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신 듯했다. 하지만 굳이 바로잡아 드리고 싶진 않았다.
“때로는 ‘어린아이 같은 자’들이 자네 같은 가장 지혜로운 자조차도 깨닫지 못하는 걸 쉽게 깨닫기도 한다네. 참된 지혜는 겸손한 자에게 주어지는 법이지. 인간의 지혜란 하나님의 지혜와 다른 법일세.”
이번에는 카이젤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어린아이라⋯⋯. 혹시 강윤혁 같은 아이들을 말하는 겁니까?”
“자네가 편할 대로 생각하게나.”
이에 갑자기 카이젤의 제복이 형태를 변조하였다. 위압적이고 엄숙하고 두려움을 심어주는 모습으로. 단순히 모습만 변한 게 아니었다. 사방으로 결계가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땅이 진동하였다. 사방의 빛의 경로들마저도 왜곡되어 신기루처럼 배경이 바뀌었다. 나이 든 노인의 몸으로는 압박감을 견뎌낼 수 없었다. 에드레이는 한쪽 무릎을 땅에 떨어뜨리고 불가항력적 중력에 고개를 숙였다. 온몸이 땀을 흘렸다. 그러나 그는 도리어 평온한 모습으로 웃었다.
“초자연계의 간섭도 없이 오로지 순수한 인간의 지식과 힘만으로 이런 것을 구현하다니, 너는 참 대단한 아이로구나. 우리 세대와는 차원이 달라. 소싯적의 칼튼이 널 보았더라면 자신이 평생 머릿속으로 그려온 이상향이 현실로 화하였다며 감격했겠구나.”
그 이름이 언급되자 카이젤의 눈이 아주 잠시 질투로 물들었다.
“자신의 몸에서 나온 아이이니 더 자랑스러워했으려나?”
내내 무덤덤했던 금안이 섬뜩한 빛을 발하였다.
“그러고보니 벌써 당신의 생명이 소진되고 있군요.”
카이젤은 에드레이에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
“당신에게는 적법한 보답을 드리죠.”
그러자 그의 의도를 알아차린 노인은 놀라서 뒤로 몸을 빼려고 하였다.
“부질없이 저항하지는 마십시오. 당신의 수명을 늘려드릴 겁니다. 저는 노화를 억누르는 걸 넘어서 역행시키는 데도 성공했고 인류 육체의 한계도 정복했습니다. 세상과 작별하신 모양이신데 그렇게는 곤란합니다.”
“내게서 손을 떼거라!”
에드레이의 눈에 이전의 온화함과 사뭇 온도가 다른 분노가 깃들었다. 카이젤은 강제로 노화 억제를 시행할까 고민하였다. 그러다가 울분에 차서 눈물을 흘리는 노인을 보고 씁쓸한 기분에 저도 모르게 혀를 차며 손을 거두었다.
“당신!”
“부탁일세 초인들의 왕. 이 늙은이를 욕보이지 말아 주게나.”
노인은 힘겹게 말 한마디 한마디를 이었다.
“자네에게 베푼 그 사소한 은혜를 보아서라도 부탁하네.”
“어르신. 그런 식으로 애원한다고 제가 들어줄 걸로 생각하십니까?”
“허어, 자네를 위해서 울어줄 수 있는 사람도 있다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카이젤은 눈빛을 조금 가라앉혔다.
“부디 그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더는 위험한 길로 가지 말게,”
주변을 짓누르던 에너지장과 특수 결계도 잠잠한 바다처럼 차분해졌다.
“어차피 지금 시대는 나 같은 낡은 존재는 필요로 하지도 않겠지.”
거친 숨을 고른 후, 노인은 젊은이에게 본색을 드러낼 것을 요구했다.
“자네가 날 찾아온 진짜 목적을 말해보게나.”
“대충 짐작하신 모양이군요. 번거로운 말은 더 필요 없겠습니다.”
카이젤도 그에 반응하여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것은 어디에 있습니까?”
오랫동안 행방을 찾아왔던 바로 그 물건.
“여섯째 날의 돌, 어디에 숨겨두셨습니까?”
그는 단서를 이 노인에게서 찾아낼 수 있으리라고 확신하였다.
(다음 회차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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