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150회 초인들의 세계 Ch 55. 유언 (1)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3.02.20 | 회차평점 0 |
Chapter 55. 유언
에드레이 테일란드.
그는 21세기의 걸출한 현자요 이름조차 남기지 않은 채 뒤에서 묵묵히 일해왔던 위대한 일꾼이었다. 그런 그에게도 숨기고픈 과거가 있었다. 그는 네오 오더를 구성하는 핵심 가문 중 하나인 유럽 지역 레드실트 가(家)의 소생이었다. 그는 가문의 종노릇을 함으로써 세상에 온갖 착취와 경제적 왜곡을 낳았다. 주께서는 그를 회개시키기 위해 징계를 내리셨다. 그는 모든 것을 잃고 창살에 갇힌 후에야 인생 밑바닥에 도달했고 그때서야 주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 후, 성령께서는 그에게 거듭나는 체험을 주셨고 나아가 그의 지혜를 더욱 충만하게 넘치도록 만드셨다. 다른 1세대 초인은 모두 ‘네오 오더를 향한 강한 적개심’과 ‘능력을 펼치려는 내적 야망’을 트리거로 삼아 각성했다. 그러나 에드레이는 달랐다. 비록 육체 자체는 일반인처럼 평범한 반쪽짜리였으나 아무런 트리거 없이도 뛰어난 지혜를 각성할 수 있었다.
그렇게 주님의 역사적 섭리를 통해 선물 받은 지혜를 통해 에드레이는 성경에 담긴 온갖 숨은 보물들을 발견했다. 또한, 그는 세상 지식에 대해서도 탁월함을 발휘하였다. 오로지 한 분야에 몰두한 덕분이긴 했지만, ‘과학자로서의 능력’ 한정으로는 당대 최고의 초인이었던 동생보다도 잠시나마 근소 우위에 있었을 정도였다. 후일에는 금세 역전당하긴 했지만.
에드레이는 그 값진 지혜를 오로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데에만 이용하자는 일념으로 많은 일을 성취해냈다. 병든 사람들을 치료하는 보조 의료 기술, 오염된 환경을 정화하는 테라포밍 기술, 뇌에 손상을 입은 사람들도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인지 기능을 회복시키는 인공 뉴런 조직기술까지. 그는 다양한 분야에서 눈부신 성취를 이루었다. 이 과정에서 동료인 다른 1세대 초인들과도 협업하여 서로 지식과 발견과 아이디어를 주고받았고 ‘시대의 혁신’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끎으로써 함께 기뻐하고 보람을 공유했다.
또한 에드레이는 사악한 옛 원수인 네오 오더를 막기 위해 동생을 도와 기꺼이 싸우기도 했다. 청년들을 도와 방어 시스템을 완성해서 음흉한 핵전쟁 음모를 막아내었고 네오 오더 세력이 범한 각종 비윤리적 실험들과 프로젝트들도 뒤집어엎었으며 그들의 경제 범죄 또한 폭로하였다.
동생의 사후에는 두 번째 세대를 뒤에서 묵묵히 도왔다. 당시에는 초인들끼리의 권력 다툼이 세상에 온갖 재난을 일으켰다. 에드레이는 인간이 과학 기술의 오용으로 인해 멸망치 않도록 힘겹게 뒷바라지를 해주었다. 그리고 세 번째 세대에 이르러서는 정보를 얻는 데만 집중하였다. 초인들의 준동, 갈등, 행보를 면밀히 살피고 신중히 대응했다. 이미 앞 세대의 패턴을 경험해봤고 그 배후의 진실도 알고 있던 그였기에 지혜로운 대처가 가능했다. 그는 이렇게 세 번의 최종 국면에 거쳐서 보이지 않는 그림자로써 활약했다.
‘일생에 걸쳐서 분투해왔거늘 이제는 몸을 움직일 힘조차 없구나.’
눈을 들어 앞을 바라보니 흐릿한 시야 너머로 윤혁이 보였다. 그는 다소 침울한 표정이었다. 그 옆에는 다른 청년이 있었는데 어딘가 모르게 낯이 익어 보였다. 몇 년 전에 조금 닮은 아이의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 노년이 돼서도 초인답게 탁월한 기억력을 유지했던 그는 이 청년의 외향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사진에는 아름답고 청순한 여인을 가운데 두고 양옆에 해어진 옷을 입은 두 어린 남자아이들이 있었다. 그 사진 속의 여성은 노인의 감시 대상이었다. 에드레이는 자기 직감을 확인해볼 겸 유도신문을 해보았다.
“이집트에 있었을 때 그녀가 네게 무엇을 가르쳤더냐?”
“네?”
“종교에 대한 가르침이었느냐?”
“그런……, 어르신께서 그 이야기를 어떻게?”
리온은 처음 보는 분이 자신을 오래 알던 것처럼 말하자 말문이 막혔다. 윤혁은 친구에게 간략히 사정을 설명했다. 예전에 자신이 소개해주려 했었던 그 노인이 바로 이분이다. 믿을만한 분이니 의심치 않아도 좋다. 이번 세대를 오랫동안 감찰해오셨던 분이니 정보력이 뛰어나도 놀라지 말아라. 윤혁의 설명을 듣고 나자 그제야 리온도 경계심을 놓았다. 윤혁의 입으로 노인의 지혜를 들었던 리온도 탁월한 통찰력과 정보력을 마주하자 범상치 않음을 느꼈다.
“네 이름이 무엇이더냐? 실례가 안 된다면 가르쳐주겠니?”
에드레이가 다시 정중하게 물었다.
“리온 마흐무드입니다.”
에드레이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때 사진에서 본 아이와 동일 인물이구나.’
“그렇다면 너는 이 세대에 마지막으로 남은 전도자 중 하나겠구나. 최근에 너희의 동료들이 활약상에 대해선 소문을 전해 들었다. 쫓기고 숨어다니던 신세라서 그들과 직접 함께할 기회는 없었다만, 아쉽구나.”
일이 이렇게 엮이는구나. 에드레이는 신을 향해 외경심을 품었다.
“네가 바로⋯⋯, 티아라가 잠깐 거두었었던 그 아이로구나.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티아라의 제자가 이렇게 선한 길을 걸으며 올바르게 성장하게 될 줄이야. 오래 살고 볼 일이구나.”
리온은 속으로 흠칫 놀랐다. 조금 전 이야기도 그렇지만 어떻게 이분께서 그녀를 알고 있는지 영문을 몰랐다. 캐묻고 싶은 것이 많았으나 어르신의 얼굴이 지쳐 보였기에 더 괴롭히기가 미안해졌다.
“얘야, 나를 네 집에 데려다줄 수 있겠니?”
에드레이는 윤혁에게 부탁했다.
“병원으로 가지 않으셔도 되겠어요? 지금 매우 편찮아 보이세요.”
“시간이 없구나. 부탁이니 제발 내가 원하는 대로 데려다주렴.”
지금은 반드시 윤혁의 집을 방문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유언을 함께 들어야 할 사람이 그곳에 있으니까.’
조금 전 청년의 형을 만났다. 상황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각하니, 청년뿐 아니라 당사자인 청년의 아버지에게도 알려야 했다. 에드레이는 말로 해명하지 않고 눈빛으로 부탁했다. 윤혁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리온과 함께 둘이서 에드레이를 부축하여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
유진은 아들과 아들의 친구가 어떤 낯선 노인을 부축해오는 것을 보더니 화들짝 놀랐다. 그녀는 아들에게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황급히 질문했다. 아들 곁의 노인은 병원에서의 치료가 급할 만큼 쇠약해 보였다.
“윤혁아, 무슨 일이니? 이분은 누구시고?”
“엄마, 어서 편하게 누울 곳으로 어르신을 옮겨 드려야 해요.”
상황을 설명할 시간이 적었기에 많은 말이 생략되었다.
“윤혁아?”
시의적절하게 아버지인 성한도 내려왔다.
“허허, 잘 됐구려. 젊은이.”
성한을 발견하자마자 에드레이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신호를 주며 말했다. 성한은 뭔가 기색을 느낀 것인지 멈칫하였다. 아내와는 달리 그는 노인에게서 데자뷰를 느끼는 듯했다. 명료하게 기억나는 얼굴은 아니었다. 직접적인 구면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이 머릿속을 강타했다.
“이보시오, 젊은이. 아니 이제 당신도 나이를 많이 먹었겠군.”
에드레이가 성한에게 직접 말을 건넸다.
“어, 어르신! 제가 명료하게 기억하지는 못합니다만, 어디에선가 제가 어르신을 잠시 뵈었던 것 같은 기억이 듭니다. 혹시 이게 제 착각은 아닌지요? 아니면 저희가 혹 구면이었던 것일까요?”
쭈뼛거리는 성한은 흡사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어색해했다.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소. 물론 나는 그때보다 나이를 더 많이 먹었으니 그대가 몰라보는 게 당연하지. 하지만 당신은 그때 그 모습에서 조금도 변하지 않았군. 젊음이 축복인지 속박인지는 모르겠지만.”
에드레이는 과거 2세대를 감찰했던 시절을 회상했다.
“혹시 당신이 그녀를 따라 신국을 방문했던 날을 기억하시오?”
그제야 성한은 무언가가 퍼뜩 기억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젊은 시절, 라일라는 한반도 전체에 간섭했던 적이 있었다. 물밑에서 정보를 빼앗고 자신의 적대 카르텔을 분쇄하기 위해 정부 관료들 사이의 갈등 관계를 꼭두각시처럼 조종하고 있었다. 성한이 그런 그녀에게 동조한 이유는 그만큼 그도 부패한 권력층을 향해 증오심을 품고 있던 탓이었다.
그녀의 수족으로서 성한은 그녀에게 정보를 전해주기 위해 몇 번 외국에 머물던 그녀를 방문했던 적이 있었다. 당시 라일라는 주로 북미와 신국을 누비던 초인 중 하나였다. 그 때문에 성한도 신국을 방문할 기회를 종종 얻었다. 당시에는 폐쇄적이면서도 특이한 문명을 갖춘 신비로운 대륙이었다.
바로 그 시절, 한 번은 누군가가 접촉해온 적이 있었다. 라일라와 관련된 세력인 줄 알았는데 전혀 다른 제삼자였다. 아마 라일라와 성한 자신의 연결고리로 인하여 접촉해왔으리라 여겼다. 참 바람처럼 영문 모를 만남이었다. 그때 찾아온 자는 정체를 명료하게 밝히지도 않았다. 그저 어떤 일련의 정보를 담은 쪽지를 넘겨주고는 안개처럼 어딘가로 사라졌었다.
‘주의하시오. 그녀의 당신을 향한 진짜 목적은 따로 있는 것 같소.’
쪽지 속에는 이런 메시지와 함께 비밀 자료가 동봉되어 있었다.
그 자료는 라일라가 소위 ‘완전한 인간’이라는 프로젝트를 모방해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는 물증들이었다. 아울러 그녀가 많고 많은 사람 중에서 하필 성한에게 접촉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심증까지도 있었다. 또한 어떤 실험 데이터 일부도 사진으로 찍혀 동봉되어 있었다.
당시에는 의문의 접촉자가 전해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아니 알려는 의지조차도 없었다. 지금에 와서 당시의 상황을 돌이켜보자니, 어쩌면 그녀가 자신의 유전자를 빌림으로써 ‘강력한 아이’를 만들어내기를 원했던 것이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그녀는 정말로 자신만의 생명공학 프로젝트를 시행했던 것일까? 파묻혀버린 진실은 그녀만 알리라.
“그날 메시지를 주신 그분이 당신이었군요.”
“그렇소.”
“그때 어르신 말씀을 좀 더 귀 기울여 생각했어야 했습니다.”
“지나간 일들을 고민해도 의미가 없는 법이오. 이미 너무 늦었소.”
“제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흠, 우선은 이곳에서 마무리하도록 허락해주셨으면 하오.”
기색을 보아, 마치 최후의 유언을 남기려는 듯했다.
만류하고는 싶었으나 노인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먼저, 에드레이는 윤혁의 아버지, 성한에게 이야기하였다. 두 사람 다 반쪽짜리 초인이었다. 하나는 불로장생의 육체, 다른 하나는 탁월한 지혜를 지녔다. 초인들이 보기에는 불완전한 존재였다. 그러나 에드레이의 평생의 성찰에 의하면 반쪽짜리가 태어난 ‘진짜 의미’는 사실 따로 있는 듯했다.
“이미 많은 것을 보고 들어 알고 있을 테니, 간략하게 말하겠소.”
성한은 낮은 자세로 노인의 말을 경청했다.
“초인들은, 아니, ‘카인의 후손’들은, 심령이 딱딱히 굳은 자들이오.”
그 말에 성한은 정신이 번뜩 들었다.
“그래서 겸손한 자들과는 달리 구원에 이르기가 극히 어렵다오. 부자들이 하늘나라를 보기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기만큼 어렵다 했던가? 초인들의 경우는 고래가 바늘귀를 통과하기만큼 어렵다오.”
노인의 말이 너무도 엄숙하고 진지해서 숙연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에드레이가 성한에게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런 완악한 자 중에서도 일부를 골라 은혜를 허락하셨소. 당신과 나처럼 불완전한 자들 말이오.”
바로 카인과 아벨의 혼종, 소위 ‘반쪽짜리’라고 불리는 자들. 선악과를 품고도 그것을 먹지는 않게 된, 지극히 예외적인 존재들. 심히 사악한 삶에서 건전한 신앙의 삶으로 완전히 인생을 탈바꿈하는 체험을 겪은 극적인 존재들. 성한과 유사한 여정을 밟아온 에드레이였기에 상대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에게도 기꺼이 유업을 물려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니까⋯⋯, 늘 그 은혜에 깊이 감사하시오.”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선물인 당신 아들을 신실하게 돌보시오.”
“명심하겠습니다.”
지혜만 지닌 반쪽짜리 초인인 에드레이는 자녀를 갖지 못했지만, 육체만을 지닌 반쪽인 강성한은 자신에게 내재된 두 가지의 상반된 속성인 ‘카인의 속성’과 ‘아벨의 속성’을 유전이라는 방식으로 가장 순수하게 정제하여 두 결실을 만들어내었다. 하나는 위버멘쉬, 그리고 다른 하나는 억제자로. 그런 그이기에 둘을 올바로 다스려줄 책임도 있었다.
“그리고 첫째 아이도⋯⋯, 너무 어려워하지는 말아 주시오. 그 아이도⋯⋯, 불쌍한 애요. 물론 그렇다고 그가 지금껏 행해온 일들과 앞으로 행할 일들이 하나님의 목전에서 정당화될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처음부터 에드레이는 카이젤에 관해 이야기할 작정으로 이곳에 찾아온 것이었다. 성한도 그 사실을 눈치챘다. 라일라를 알고 있었다면 당연히 그녀의 아이도 주시하고 있었겠지. 하지만 첫째 아들은 이미 그의 손에서 벗어나 버렸거늘 무슨 방법으로 실수를 돌이킨단 말인가. 갑갑했다.
“어르신 보시기에는 그 아이가 결국 어찌 될 것 같습니까?”
성한이 무거운 심정으로 질문했다.
“그 답은 윤혁이 알고 있소. 다만, 적극적으로 둘째 아이를 도와줄 생각이 아니면 차라리 진실을 들춰보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오. 정말 미안하지만, 당신은 당신 아들만큼 심지가 굳지 못하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그 막중한 부담을 그 아이의 동생에게 맡겼을지도 모르겠소.”
구구절절 옳은 소리였기에 가슴이 쓰라렸다.
“저와 그녀의 잘못이 큽니다. 첫째 아이에게 어떻게 사죄해야 할까요?”
에드레이가 해줄 수 있는 답변은 정석밖에 없었다.
“모든 것을 이기는 힘은 ‘십자가 위의 사랑’에서 나온다오.”
비단 카이젤이 아니더라도 누구에게든 동일한 해답이리라.
“만일 첫째를 구할 마음이 있다면 포기하지 말고 사랑으로 대해주시오.”
“잘 해낼 수 있을지 자신은 없지만, 노력해보겠습니다.”
에드레이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아이의 아버지에게까지 이런 식으로 무거운 짐을 씌우는구나.’
마음속으로 심히 미안함을 느꼈다. 그러나 아직은 강윤혁 혼자서는 무리라고 생각되었다. 3대째 위버멘쉬의 완악한 마음을 깨트리기 위해서는 아버지와 동생 모두가 필요했다. 때가 되면 그걸 이해하게 되겠지.
(다음 회차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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