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152회 초인들의 세계 Ch 56. 장례식 (1)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3.02.25 | 회차평점 0 |
Chapter 56. 장례식
윤혁이 나이를 한 살 더 먹는 사이 세상에는 여러 급격한 변화가 도래했다. 과학 기술로 인해 견인되는 인류 문명의 성장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가파른 상승세를 이루었다. 앞으로도 그 속도는 더욱더 가속될 것으로 예측되었다. 전성기라는 용어 자체도 무의미했다. 매일 기록을 경신하며 한계를 깨부수는 인류의 도약은 마치 거침없이 달리는 경주마를 연상시켰다.
인간들은 이를 보며 앞으로도 지금보다 더 행복해지리라는 착각 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행복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더 부유하리라고 자신할 것이다. 모든 것이 사라질 날이 언제가 될지는 알 길이 없지만, 그때에 인류는 자신들이 모래 위에 모래성을 쌓았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인류가 이룩해낸 업적들의 웅장함과 화려함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영원토록 이어질지는 보장할 수 없어도 당장의 겉모습만 보면 인류의 영광스러운 행진은 승승장구 일대일로로 보였다. 그들은 과거 조상들이 감히 꿈꾸지도 못할 위업들을 당당히 이뤄냈다.
먼저, 항성혼의 실재성을 입증한 뒤 건축 및 에너지 산업에 본격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높았던 에너지 효율과 산업 생산 효율이 지수함수적으로 뛰었다. 불과 석 달 만에 이룩한 쾌거였다. 물론 아직은 항성혼의 잠재력을 충분히 활용하지는 못했다. 항성혼의 지극히 작은 일부분을 관측하고 진동시키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 지극히 작은 부분을 쓸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는 가히 경이로운 혁명으로 이어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자연 상태의 항성 하나를 가공해서 얻을 수 있는 자원은 딱 항성 한 개 분량이 전부였다. 기거서 조금 더 추출량을 늘려봐야 반물질 반응을 통한 항성 질량만큼의 등가 에너지 생산이 한계였다. 다시 말해 원래는 화석연료하고 본질적으로 크게 다를 것 없는 유한한 자원이었다.
인류는 여기서 에너지 효율을 조금만 더 높이고자 갖은 수작을 부려왔다. 상위 차원의 문을 열어서 그곳 에너지를 꾸준히 펌프질해 항성의 힘을 보충하는 방식이 대표적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진정한 영구 기관에는 이르지 못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에까지 도달하긴 무리였다. 사실 탐욕만 부리지 않았으면 한 개 항성으로도 충분히 오랫동안 문명을 영위할 수 있었음에도, 인류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한 채 온 우주를 정복하길 바랐다.
그런데 이번에 항성혼을 물리적으로 검증한 뒤 엔지니어링에 본격적으로 이용하면서부터 항성 에너지 효율성이 이전의 몇만 배 이상으로 뛰었다. 또한 항성 핵에서부터 끝없이 쿼크와 렙톤 입자를 생산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 입자들의 핵융합을 통해서 다양한 유형의 원소를 생산한 뒤 그 원소들로 물질 자원까지 충당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오늘날 인류의 주요 동력원은 핵융합이나 반물질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게이트 기술을 기반으로 한 최첨단 엔진. 개조 항성 속에 탑재된 게이트 기반 엔진들 또한 항성혼 제어 기술로 말미암아 한 단계 더 상향되었다. 덕분에 이젠 초신성 규모의 에너지조차도 완벽하게, 안전하게, 지속적으로 운영할 산업적 여건이 갖춰졌다.
이러한 생산력과 에너지 효율을 기반으로 거대한 수효의 인공행성, 인공항성, 요새, 콜로니, 함선, 개척 부대가 무한정 복제되었다. 반복되는 생산으로 질적 수준도 거듭 진보되었다. 하루가 멀다고 최신 모델이 바뀔 지경이 되었다. 이렇게 ‘소모되지 않는 샘솟는 물’이 된 항성에 타임필드까지 씌우자, 수천 년 분량의 생산을 며칠 만에 해치우는 일도 가능해졌다.
나아가 이제 대량 생산이 허락된 물질은 무기물만이 아니었다. 탄소, 수소, 산소, 질소, 인, 황과 같은 분자를 항성 핵융합을 통해 무한정 생산하고 분자로 합성하여 온갖 종류의 화학 물질들을 생산하는 일도 가능해졌다. 생산 시설은 이렇게 만들어진 분자들을 적당히 분리하여 생태계를 구성하는 데 필요한 자원을, 이를테면 물, 신선한 공기, 유기물 분자들을 따로 모았다. 덕분에 지구 없이도 우주 내에서 생태계를 자체적으로 생성하는 일이 허락되었다.
한편 인류연합은 지구에서 가져온 각종 생태계의 생물 종자들을 테라포밍된 콜로니 내에서 키워내었다. 유기물 자원과 환경 자원은 항성 요새에서 무제한으로 찍어낼 수 있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시간 역시 타임필드 덕분에 무한정 공급되었으며 에너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덕분에 그들은 모든 생물 종들을 우주 내에서 필요한 만큼 양산해내게 되었다. 식량 부족이니 환경 자원 부족이니 하는 이야기는 무의미한 옛이야기로 전락했다.
반대로 해로운 미생물이나 오염물질들은 빠짐없이 분리되어 블랙홀이나 고온 항성 내부에 던져짐으로써 완벽하게 폐기되었다. 이 과정에서 엔트로피의 처리 역시 깔끔하게 이뤄졌다. 환경 오염이니 우주 오염이니 하는 이야기도 더는 인류의 발목을 붙잡지 못하게 되었다.
“더는 그 어떤 ‘자연의 구속’도 우리의 걸림돌이 되지 못해.”
왕은 홀로 체스 말을 만지작거리면서 무표정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생각에 진정한 적은 이런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유치한 과제’들이 아니었다. 좀 더 멀리 있는 불확실성, 장차 이룰 절대군림의 방해물, 인류의 존엄성을 해치는 존재. 그는 미지의 ‘초자연’을 적으로 규정했다. 언젠가는 그들 또한 넘어서리라. 그는 먼 앞날까지 계산하고 청사진을 짰다.
왕이 그리는 큰 그림을 이루기 위해선 은하계 안에 갇혀 있어서는 곤란했다. 인접 은하들에 닿는 것만으로도 부족했다. 그는 가시 우주 전역을 남김없이 정복할 필요성을 느꼈다. 초은하단뿐 아니라 그 사이에 있는 빈 공간들과 그곳을 채우는 암흑에너지들까지 전부 다 포함해서 말이다.
이를 위해 왕은 워프 효율성을 꾸준히 진화시켰다.
단순히 팽창하는 공간을 도약해 빠르고 정확하게 멀리 이동하는 것만이 목표의 전부가 아니었다. 워프 시 에너지 소모 효율이 관건이었다. 워프에는 기본적으로 방대한 에너지 소모가 필수적이었다. 애초에 광년 단위 거리를 시간 소요 없이 넘는 반칙에 아무 대가가 없을 리는 만무했다. 지금까지는 에너지 효율 문제가 미지의 세계에 진출하는 데 방해되는 여러 주요 장애물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곧 옛날이야기가 되리라.
얼마 전 있었던 외부 은하 토벌에서 뜻밖의 부수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워프란 본래 ‘어나더 멤브레인’(지구와 우주가 존재하는 3-브레인, 즉 떠다니는 삼차원 공간과 평행하게 놓인 또 다른 3차원 공간들을 의미한다. 별들이 존재하는 우주와는 다른 방향, 다른 속도로 팽창하거나 수축하거나 평행 이동을 한다)을 발판으로 삼아 도약하는 기술이다.
그런데 이번 외우주 원정 때 88세대 워프를 시범적으로 시행하는 과정에서 혁신적인 발견을 하나 얻었다. 워프 발판인 어나더 멤브레인으로부터 자체적으로 에너지를 뽑아내어 워프 시 소모된 에너지보다 훨씬 더 많은 에너지를 추출할 가능성에 대한 단서였다.
카이젤은 즉시 이 단서를 놓치지 않고 진과 칼리드에 더해 지구의 일곱 엠페러들까지 모아서 프로젝트를 진행하였다. 며칠 만에 기대했던 성과로 이어졌다. 실전에 널리 응용하기까지는 약간의 연구가 더 소요되겠지만, 워프 에너지 효율 문제는 사실상 완전히 극복되었다.
‘무한 연속 워프가 가능케 되는 것도 시간문제다.’
이 큰 그림만 실현된다면 우주 장악도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었다.
새로운 기술의 위대함은 단순히 개체를 효율적으로 이동시키는 ‘에너지 유용성’ 정도의 차원이 아니었다. 이제는 워프 대상 물체의 크기 제한마저 사라질 예정이었다. 항성이나 블랙홀 크기의 자연물이나 인공물을 은하단을 넘어 이동시키는 시대가 눈앞에 이르렀다. 원래라면 그런 운반을 하면 득보다 실이 압도적으로 컸겠지만, 곧 역전될 판이었다. 광역 정복을 시행할수록 힘이 소진되기는커녕 더 많은 에너지와 자원을 얻는 시대가 코앞에 다가왔다.
한편 기존에 설치된 인접 은하로의 ‘은하 간 게이트’를 재건하는 대대적인 프로젝트도 근 한 달간 비약적이고 성과를 보였다. 기존의 낡은 웜홀 방식이 개편되었고 각종 첨단 차원 기술들이 대신 접목되었다. 더불어 이번 원정 때 타 은하로 파견된 함선들이 은하 너머에서 보내온 ‘차원 도약 항법 자료’들까지 성공적으로 다운로드되어 기술 개편에 도움을 주었다.
이 모든 것이 모여 궁극의 화룡점정이 이루어졌다.
인터갤럭틱 디멘션 도어(Intergalactic dimension door).
그 경이로운 기술의 결정체가 실효성을 입증하기 위해 실험 가동되었다.
{은하 Gal-A-230에서 Galaxy-0로 IDD 오픈, 총면적 32,201 제곱 광년.}
식민지 은하로부터 우리 은하 Galaxy-0을 향해 거대한 차원 문들이 열리기 시작했다. 기존의 웜홀 방식 게이트는 지정된 위치에서만 열렸다. 하지만 은하 중심 블랙홀끼리의 싱크로 작용으로 웜홀을 대신하면, 두 은하를 잇는 차원 문을 각각의 은하 내부의 어느 좌표에서든 열 수 있게 된다. 은하 외곽에서 출발해 암흑에너지의 바다를 가로지르는 구식의 ‘항구 게이트(Harbor-Gate)’는 이제 시대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다. 앞으로는 임의의 은하와 은하를 잇는 IDD 게이트가 인류가 장악한 모든 은하들을 촘촘히 연결할 것이다.
{은하 Gal-B-12에서 Galaxy-0로 IDD 오픈, 총면적 1,001 제곱 광년.}
별들이 수놓아진 광활한 검은 공간이 퍼즐이 해체되듯 열리더니 반대편 은하계로 이어지는 문이 열렸다. 이윽고 수천 개의 물체, 곧 행성과 위성과 작은 항성이 문을 넘어왔다. 이제는 우리 은하계의 1천억 개의 항성계조차도 인류의 자원 한계를 규정하지 못할 것이다. 외부의 은하로부터 무한정 별과 자원을 가져와 주머니를 채울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우주 기지에 머물던 진은 ‘은하 문’이 열리는 웅장한 장관을 보면서 속으로 경탄했다. 위대한 과학자인 그마저도 두려웠다. 통제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중인 미래의 세계가. 이 변화의 끝에는 뭐가 기다리고 있을까? 아버지께서는 어떤 청사진을 그리고 계실까?
“하하, 이런! 수작을 부리시려면 좀 서두르는 편이 낫겠군요, 강윤혁 씨. 앞으로 길어봐야 3년, 그 후에는 당신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 버리게 생겼군요. 아직 인류 거주지의 범위가 은하계 안으로 제한된 지금, 주어진 시간 내에 당신이 원하는 일을 완수하시길 바랍니다.”
진이 예측한 모래시계의 제한 시간은 3년.
공교롭게도 윤혁이 헌신하기로 봉헌한 시간과 비슷했다.
“그나저나 된통 혼날 각오를 했는데, 의외로 넘어가 주시는군.”
동생에게 함부로 손댔기에 큰 징계를 받을 줄 알았건만 약간의 감봉과 근신 처분만 받게 되었다. 늘 그랬듯 무슨 생각이신지 가늠이 안 됐다. 아버지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기분이었다. 체념한 진은 실소를 터뜨렸다. 이렇게라도 유익한 아들이 되어드리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
백 명가량의 사람들이 검은 상복을 입고 묵념하였다. 그들은 푸른 잔디밭에 세워진 검소한 모양새의 흰 묘비 앞에서 기도하였다. 다들 진중한 표정이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죽음의 무게에 짓눌린 모습은 아니었다. 그들이 추모하는 이 사람이 지금 어디로 향했는지를 명확히 알기에 그럴 수 있었다.
“에드레이 테일란드 씨.”
윤혁은 무덤 앞에 씁쓸히 중얼거렸다. 짧다면 짧고, 길면 긴 인연. 특별한 경험을 추억으로 남긴 것도 아니고 단지 고민거리를 나누며 아픔을 위로해주고 조언을 주고받았을 뿐인데, 뇌리에서 도통 잊히지 않았다.
그가 윤혁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는 짧은 수필이었다.
‘Χ의 축복.’
한 청년이 어렸을 때부터 그릇된 길로 나아가다가, 인생의 깊은 구덩이에서 절망하던 끝에 죄를 깨닫고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얻는 이야기. 대부분의 지면은 과거 그의 죄악으로 얼룩진 삶과 구원에 이르던 여정에 할애되어있었다. 이후 삶에서 어르신이 남긴 각종 성취에 대해서는 수백 페이지 중 마지막 페이지에 아주 짧은 단 몇 줄의 문단으로 요약되었을 뿐이었다.
분명 각지의 그리스도인들을 위기에서 구해냈고, 복음을 전파했고, 세계를 큰 위기들에서 여러 차례 구했던 훌륭한 일꾼이었다. 무려 그 카이젤조차도 어르신의 공로를 인정했으며 이전 세대 중 유일하게 그만은 존경했다. 그럼에도 정작 에드레이 본인에게는 구원받았던 날의 은혜가 가장 소중했던 모양이었다.
‘일생의 마지막 순간에 그날의 은혜를 다시 회고하셨겠지.’
윤혁은 스리슬쩍 눈물을 소매로 훔쳤다.
그 옆에서 부모님이 아들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하였다.
리온은 곳곳에 흩어진 자신의 동료들을 이 자리에 초대했다. 물론 주 안에서 잠든 선배의 영면을 추모하려는 값진 목적도 있었으나 그보다 더 중요한 목적은 앞으로 쌓여있는 과제를 논의하는 것이었다. 영민한 분별력과 지혜를 지닌 리온은 에드레이가 자신과 사부를 이미 파악하고 있던 점, 그리고 친구 윤혁에게 전해 들은 에드레이의 과거를 종합해보았다.
‘이분의 죽음은 하나님의 더 큰 계획의 시작점에 불과하겠구나.’
유산으로 받은 성경책을 펼쳐보니 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윤혁, 어르신께서 돌아가신 이때 이런 말을 하면 실례가 될지 모르겠지만, 역시나 이분은 우리가 가늠하기도 힘든 대단한 현자이셨다는 생각이 들어. 당장 나에게 전달해준 유산만 해도 그래.”
리온이 받은 성경책의 각 면은 나노기술을 접목한 일종의 컴퓨터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모든 언어로의 변환이 자유로웠다. 원어인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원본 훼손 없이 고스란히 담고 있었으며 독자에게 직접 한 단어 한 단어 번역해주는 기능까지 탑재되어 있었다.
더욱이 읽는 독자의 지적인 수준을 책이 자동으로 인식하고 고려하여 번역과 주석의 난이도를 자율적으로 조정하는 기막힌 능력도 있었다. 어린아이도 손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교육 주석부터 신학자들에게마저 엄청난 도전이 되는 고난이도의 주해가 한 책 안에 녹아있었다.
지식수준의 적절성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책에 탑재된 주석들은 철저히 십자가의 진리를 기반으로 한 것들로, 세속적이거나 배교적인 철학은 일절 포함되지 않았다. 누구라도 손쉽게 성경을 이해하고, 누구든 깊게 공부할 수 있게 만든 시스템인 동시에 진리를 보호하기 위한 안전장치였다. 또한 ‘진리의 틀’ 안에서 다양성도 지녔다. 인류 교회사 속의 거의 모든 신앙의 위인들이 남긴 자료들이 오류인 부분만 제외하고 빠짐없이 담겨 있었다.
한 가지 더, 이 책은 원어를 기반으로 성경의 각종 예언과 코드를 풀어낸 객관적 분석도 담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예언적 지식은 물론, 잘 알려지지 않은 숨겨진 내용도 풍부했다. 여기에 더해 성경과 연관된 수학, 과학, 고고학적 검증 자료까지 담겨 있었다. 설령 불신자라 할지라도 도무지 그 객관성을 부정할 수 없도록 넘쳐나는 증거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책은 미래 예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모두 열어둔 채 중립적인 견해를 밝히고 있었다. 저자의 균형 잡히고 겸손한 시각이 돋보였다. 특별히 21세기부터 현세대까지의 세계 이면의 여러 역사가, 특히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가 첨부되어 있었다. 읽는 자들이 시대의 징조를 각자 분별하도록 돕기 위한 소소한 도움이었다.
“그러니까 너무 슬퍼하지만은 마. 어르신께서는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훌륭히 마치고 떠나셨으니까. 물론 가끔씩 슬픈 감정을 해소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 나 같았어도 그런 멋진 멘토가 떠났다면 울었겠지.”
“응.”
눈시울이 붉어진 윤혁은 억지로 담담한 척 말했다.
“이제 남은 우리가 다음 일을 맡아야지.”
“그래.”
그들이 맡아야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았다.
‘당장 큰 목표에 지레 겁먹지 말고 작은 일에서부터 최선을 다하자.’
윤혁의 목에는 사슬 목걸이가 걸려 있었고 사슬에는 반지가 매달려 있었다. 며칠간 윤혁은 형이 준 반지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참으로 많이 고민했다. 그것은 세상의 기술을 상징하는 물건이었으니까. 처음에는 버릴까도 고민했었다. 형의 정체가 악을 위한 그릇임을 알게 되면서 경계심이 치솟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물질과 기술 그 자체는 중립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앞으로 가야 할 곳에서 꼭 필요한 열쇠인 만큼 심각히 고민되었다.
고민 끝에 윤혁은 손가락에 끼우지 않은 채, 순수한 ‘열쇠’의 목적으로, 목걸이에 매달아두기로 했다. 때로는 의학이나 공학 같은 세상 기술의 산물이 선한 일에 쓰이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하나님 대신 세상적 수단에 마음을 쏟고 과하게 집착하고 의지할 때, 그것들은 독으로 변한다. 그래서 보유는 하되 마음을 내어주지 말자는 결정을 내렸다. 이렇게 다짐해도 언제 또 유혹을 받게 될지는 장담 못 하리라는 생각에 책임감이 무거워졌다.
(다음 회차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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