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159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2. 악몽 (1)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4.04.11 | 회차평점 0 |
Chapter 2. 악몽
(주의 : 상당한 양의 폭력성이 담긴 잔인한 묘사가 등장합니다.)
사내는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온몸에 극렬한 통증이 흘렀다. 허리춤에서 피가 흐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다리 근육은 뒤틀린 듯 격렬히 경련하였고 등의 상처가 따갑고 아려왔다. 털은 쭈뼛거렸다. 몸은 식은땀 범벅이었고 강철처럼 팽팽한 근육들은 경련을 일으켰다.
얼마나 되었을까? 몽롱한 상태로 꽤 오래 있었던 것 같다. 싸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 상태였다. 주변은 어두웠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리, 욕하는 소리, 금속 가는 소리 따위가 들려왔다.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에 어울리는 상당히 소름 끼치는 음성들이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찬찬히 여기 오기까지의 경위를 떠올렸다. 기계들의 반란 사태가 사소하게, 그러나 돌발적으로 나타나면서부터 일이 시작되었다. 반역자들이 시스템의 틈을 비집고 정체불명의 교묘한 방법으로 반동 정신을 기계들에 퍼뜨렸다. 그간 미처 해결하지 못하고 축적해두었던 불확정성 요인들이 한꺼번에 엮여 나비효과를 일으켰고 급기야 생각지도 못한 큰 사태로 이어지게 되었다.
누가 그 일을 시도했을지는 자명했고 수법도 뻔했다. 잠시 당황하긴 했으나 사태 자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손쉽게 해결했다. 하지만 그것은 양동에 불과했다. 이어진 연쇄 효과로 갑작스러운 혼란이 곳곳에서 야기되자 부하들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결국, 놈들의 계획대로 자신이 직접 움직였고 그것이 화근이 되어 함정에 빠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럼에도 일이 낯선 방향으로 꼬이기 전까지는 능히 이길 재간이 있었다. 실제로 그는 전략상 우위에 있었다. 반역자들이 제아무리 머리를 맞대어 음모를 꾸며도 그에게는 모든 시나리오에 대처할 계획이 있었다.
그러나 방심한 탓에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 오만의 뼈아픈 열매를 먹고 말았다. 인정하기 싫지만 크게 한 방 먹었다. 적이 그토록 예측 밖의 조력을 많이 숨겨두고 있을 줄은 미처 가늠하지 못했다. 시스템을 지키는 데는 성공했다. 아마 지금쯤 부관들이 미리 비상 훈련을 받은 대로 시스템을 수호하고 있으리라. 정작 문제는 막판에 와서 납치 당한 본인이었다. 덫에 발목을 붙잡히듯, 시스템의 도움과 두절된 격리 공간 안에 무력하게 갇혀버렸다.
납치된 이곳은 공간 자체가 분절된 불안정한 아공간. 통상 시공간과는 불안정한 끈으로 겨우 연결되어 있을 따름이었다. 시간 또한 외부보다 느리게 흘렀다. 이번 사태 때 반역자들은 혼란을 틈타 몰래 연합 연구 시설들을 역이용해 파편화된 분절 아공간을 형성해냈다. 그들의 교묘한 음모에 휘말려 이곳에 무장이나 장비도 없이 단신으로 공간이동 당했다. 체내에 융합된 초지능체들이나 나노머신도 외부 시스템과의 연결이 두절되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도 모종의 수법 때문에 마비되었다. 조금만 더 과학 수준이 발전했다면 아공간 제어도 가능했겠지만 안타깝게도 현 기술력으로는 간섭이 어려웠다. 공간 틈새를 무리하게 가로지르려 시도하면 자칫 차원 틀 전체가 붕괴할 판이었다.
불행히도 이곳에는 다른 곳에서 소환된 사냥개들도 있었다. 혼돈의 시대 당시에 사회를 어지럽혔던 중범죄자들을 가둔 세계 각지 수용소에서 원인불명의 워프 오류 반응이 발생하는 바람에 실험 장치용 특수 셀에 봉인되어 있었던 흉악범들이 죄다 이곳으로 날아왔다. 음모를 꾸민 자들이 미리 안배해둔 것인지 이 범죄자들은 정확히 사내와 같은 좌표에 당도했다.
반역 배후들은 미리 아공간 내에 적절한 설비를 담은 건물을 설치해둔 뒤 사나운 하이에나들을 그 우리 안에 던져 넣었다. 워프된 범죄자들은 아공간 속 건물에서 눈을 뜨자마자 녹화 영상으로 지시를 받았다. 영상 속 가면 쓴 괴한이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지 상세하게 알려주었다. “이곳에 있는 고문 도구를 써서 먹잇감을 협박해라. 그가 너희들에게 심겨진 ‘조작’을 풀어주도록 강요해라. 반드시 그 자리에서 시행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사냥감이 된 사내에게는 몹시 불행한 일이었다. 하이에나들은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았다. 사형수에 준하는 범죄자였기에 더 잃을 것도 없었다. 공간이 단절된 곳에 갇혔기에 원래 세상으로 못 돌아갈 위기에 놓였음에도 그들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공간 분절? 정신이 나갔군.’
시공간의 기틀 자체가 불안정해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런 미친 짓을 저지른다고? 사실상 인류의 앞날을 고려하지 않는 자살 전략이었다. 분명 반역자들도 세상을 자기들 손에 넣고 싶어 하였을 텐데. 이것은 그들의 머리에서 나올만한 발상이 아니었다. 게다가 무슨 수로 그들이 배신자들을 꼬드겼는지도 이해되지 않았다. 부하들 중 자신을 버리고 그들을 따를 만한 이들은 없었다. 체제의 지도자를 배반하고 무정부주의자들을 돕는다는 것은 상식적인 초인이라면 시행할 수 없는 일이다. 낯선 위화감이 들었다. 뭔가 더 위험하고 거대한 차원의 존재가 계획한 악의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끼이이익.
불안감에 잠겨 회상하던 중 때마침 낡은 철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뚜벅뚜벅 거친 장화 소리가 들려왔다. 원래라면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했을 범죄자들이 기세등등하게 다가왔다. 녀석들의 킥킥 비웃는 소리를 듣자마자 어젯밤 잡혀 오면서 당한 수모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전날 그들은 손발이 꽁꽁 묶인 채 땅바닥에 질질 끌려 들어온 그를 내려다보며 마구 발길질을 퍼부었었다. 그 대단하신 분이 왜 이렇게 되었냐면서 욕설과 비아냥거림을 퍼부었다. 그리고 민감한 급소를 발로 걷어차 공격했다. 고통스러운 절규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키야, 이거 원.”
사형수 하나가 사내의 머리채를 잡고 머리통을 위로 잡아당겼다.
“거참 기가 막히게 잘생겼네.”
비아냥거리는 어조였지만 솔직한 감상평이었다.
“이런 비현실적인 천상의 외모가 실제로 존재했을 줄이야.”
그는 걸작품을 감상하듯 포로의 이목구비를 눈으로 핥았다. 포로의 얼굴은 그야말로 신이 만든 걸작이었다. 시대별 최고의 미남을 전부 모아 데려오더라도 그 앞에 세우면 빛을 잃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완전무결한 조형물 같은 수려한 이목구비는 피와 흙과 타액과 멍으로 더럽혀져 있었다.
“꺼져.”
나지막이 사내가 욕설을 내뱉자 다른 사형수가 그의 뺨을 힘껏 때렸다. 그 바람에 사내의 입에서 피 섞인 침이 튀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상대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섬뜩한 금안이 섬광을 발했다. 세상에서 가장 힘센 맹수가 먹잇감을 찢어발기기 전 준비 태세를 갖추는 듯한 모양새였다. 그러나 현실의 그는 영락없이 사슬 글레이프니르에 묶인 늑대 펜리르 신세였다.
그때 등 쪽으로 차가운 통증이 전달되었다. 누군가가 작은 단도로 허리를 찔렀다. 내장을 피해갔기에 치명상은 아니었지만 극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는 신음을 내지 않으려고 일부러 기를 쓰고 세게 이를 악물었다.
“장난은 그만하자. 가면 놈이 알려준 방법대로 무장해제 시켜.”
“죽으면 곤란하니까 주의해서 적당히 해.”
좀 더 거칠게 생긴 사형수 한 명이 똘마니들에게 차분히 명령을 내렸다. 급조된 조합이었음에도 그들은 의외로 임시적인 위계질서를 잘 유지했다. 이에 음흉하게 웃던 두 명이 사내에게 다가왔다. 그들의 손에는 예리한 칼이 들려져 있었다. 칼이 맨몸에 닿자 사내는 섬뜩한 공포감에 부르르 떨었다. 굴욕감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천만다행인지 칼은 살갗을 뚫고 들어오지는 않았다. 칼날의 용도는 옷을 찢어서 제거하는 것이었다. 먼저 멋들어진 양복을, 그 후에는 안쪽에 있는 셔츠까지 찢어냈다. 워프 과정에서 슈트 같은 첨단 장치는 제거되었기에 재래식 칼로도 거칠 것이 없었다. 곧 벗은 상반신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키야, 몸도 장난 아니군. 이렇게까지 잘 단련된 몸은 처음 보는데.”
“그래봤자 이제 다 쓸모없게 될 텐데 뭐.”
억센 야성미와 예술적인 조형미가 동시에 도드라지는 육신이 드러났다. 드넓은 어깨 근육, 억센 팔, 광활한 등판, 두텁고 각진 대흉근, 열 조각으로 깊고 뚜렷하게 쪼개어진 복근까지. 인간이라면 누구든 동경심에 눈을 떼지 못할 훌륭한 육체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조롱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이제 양팔을 천장에 달린 사슬에 묶고 다리도 땅에 묶었다. 곧이어서 온몸의 구멍으로 미리 시설에 마련된 기구들이 비집고 들어왔다. 사내는 엄청난 구역질과 고통에 몸부림쳤지만, 그것들은 쑤시고 들어오기를 멈추지 않았다. 체내에 쌓인 것을 빨아들인 뒤에야 기구들이 거칠게 빠져나왔다. 이어서 놈들은 넝마 조각이 된 하의와 속옷마저 남김없이 찢어내었다. 이후 소독약 같은 액체가 샤워기에서 분출되었다. 엄청난 수압에 눈조차 뜰 수 없었다. 이어서 정맥으로 촉수 같은 기계 팔이 침투했다. 촉수는 가지를 뻗으며 온몸의 조직을 헤집고 다녔다.
굴욕적인 무장해제를 마친 뒤에야 전신에 박혀 들어간 촉수 조직들이 빠져나왔다. 숨이 거칠어졌고 근육은 미세하게 떨렸으며 땀에는 피가 섞여 흐르기 시작했다. 사형수들은 엉망진창이 된 사내의 나체를 보며 조롱하였다. 잘생긴 얼굴은 침, 피, 눈물, 콧물로 더럽혀져 있었다. 199cm의 큰 키, 균형 잡힌 황금 비례의 체형, 군살 한 톨도 없이 화려한 근육으로 탄탄하게 꽉 짜인 몸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 가운데 딱 한 군데 감추고픈 치부가 있었다. 조롱자들은 사내의 수치스러운 중심부를 보더니 경박한 폭소를 크게 터뜨렸다.
“푸하하. 그 얼굴이랑 몸이 다 아깝네.”
“그토록 기세등등하던 임금님께서 사내구실도 못할 줄이야.”
“세상에서 제일 잘나신 인간이라더니 아랫도리는 볼품없군.”
그들은 한껏 조롱하며 사내의 몸을 채찍과 매로 두들겨 팬 뒤 다리 사이 민감한 부위를 발로 힘껏 가격했다. 숨 막히는 고통에 몸을 뒤로 빼려 했으나 꽁꽁 묶인 채라 움직이지 못했다. 사내는 벌레처럼 몸을 비틀며 절규했다.
*****
고문은 며칠 밤낮을 쉬지 않고 이어졌다. 그 하이에나들은 본래 온갖 흉악 범죄를 저지르고 사회로부터 격리된 자들이었기에 잔학성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첨단식 고문부터 미개한 중세시대 고문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생각해낼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잔악하고 능욕스러운 행위가 사내의 몸에 동원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단 한 번도 잠들지도 정신을 잃지도 않았다. 심지어 구걸하거나 굴욕적으로 고개를 숙이지도 않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당장에 쓰러지거나 기절했을 격통에도 이를 악물고 버텼다. 감각이 둔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감각은 대단히 민감했고, 기억력도 어마어마했다. 그를 버텨내게 한 것은 인간의 범위를 넘어선 강인한 정신력과 육체 회복력이었다.
그러나 처절하고 긴 고문 과정에서 남자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버티는 것만으로도 용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억세고 우람한 근육들이 기운을 잃는 동안에도 그의 눈만큼은 매서운 독기를 머금었다.
“이제 슬슬 해답을 알려주지 그래.”
사형수들이 이곳에 그를 잡아둘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두 반역자의 머리에서 나온 계획 덕분이었다. 하지만 사형수들은 음모를 꾸민 그자들의 수하는 아니었다. 그저 우연히 몰이 당한 굶주린 하이에나들일 뿐이었다. 그들의 목적은 사내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옭아매는 족쇄를 푸는 것이었다.
지난 몇십 년간 세상은 큰 혼돈을 겪었다. 많은 자연재해와 인재(人災)가 겹치면서 각국의 사정은 엉망진창이 되었으며 여러 민간 지역이 무법지대가 되었다. 국가 간의 분쟁과 국가 내 반역도 끊이지 않았다.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범죄자가 양산되었다. 이에 자연스레 사형 제도가 부활하였다. 인간의 존엄성을 배제하고 실험체로 만드는 양식으로.
최근 몇 년 사이에는 강한 지도자들에 의해 혼돈이 정리되었다. 숨어있던 도적과 불한당들은 남김없이 모조리 체포되었다. 증거를 따로 모을 필요도 없었고 공소시효 따위는 적용되지 않았다. 그들은 새로운 패권 정부인 인류연합의 추적에 걸려들어 체포되었고 각국의 사형수 교도소, 정확히는 실험실에 구금되었다. 워낙 악질 범죄자들이었던지라 처벌 시스템을 비판하는 여론은 없었다. 참고로 체포된 죄수의 과반수는 혼돈의 여파를 가장 많이 받았던 근동, 중앙 아시아, 중동, 북아프리카, 터키 출신의 민족이었다.
사형 급 형벌에 처한 자들은 사회에서 격리되어 형벌 시스템하에 놓여 속박 장치의 제어를 받게 되었다. 그 족쇄는 단순히 육체를 옭아매는 것을 넘어 자유의지와 감정, 이성마저 제어하는 장치였다. 한마디로 자유를 박탈하는 힘. 덕분에 사형수들의 정신과 몸은 실험체로 사용될 수 있었다. 단순하게 죽는 대신에 사회를 위한 유익한 재료로 쓰이게 된 것이다. 그렇게 수백 만에 달하는 과거 중범죄자들이 족쇄에 묶이게 되었다.
사실 이런 처벌은 지난 세기부터 조금씩 도입되었던 관습이었다. 당시에는 사형수 중에서도 극악한 자들에 한하여서만 부여되었고 겉보기에는 잔인하지는 않았지만, 분명 인간의 자격을 부정하고 박탈하는 장치였다. 잔학한 고문이라기보다는 답답한 예속에 불과했지만, 생리적 본성인지 영적인 본성인지 사형수들은 그 구속에 극도로 반발 심리를 느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사형수들의 족쇄를 풀려는 생리적 욕구는 비정상적으로 증폭되었다. 이윽고 그 욕구는 생존 본능마저도 넘었다. 족쇄의 구현 원리를 이해하는 자는 세계의 지배자 한 명뿐이었다. 그에게는 족쇄를 마음대로 풀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사형수들은 자신들을 발밑에 깔아뭉갠 세상과 그 세상을 발밑에 둔 왕을 증오했다. ‘왕을 우리 발로 짓밟으면 어떨까. 어차피 더 잃을 것도 없는데. 기회만 온다면 그를 밟을 텐데.’ 그들은 이렇게 꿈꿔왔다.
그러던 여느 날 기적처럼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누군가가 납치극을 벌여 기회를 주었다. 솔직히 말해서 도박이었다. 왕을 해치려 했다가 어떤 결과가 따를지 예측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어차피 잃을 것도 없는 처지였고 이미 족쇄를 향한 혐오감 때문에 이성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던 터였다. 그들은 기꺼이 왕을 고문하는 역할을 받아들였다.
(다음 회차에 연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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