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177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8. 푸른도적단과 마녀의숲 (1)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3.05.23 | 회차평점 0 |
Chapter 8. 푸른 도적단과 마녀의 숲
일행은 하그위스 섬을 떠나 엘리바스에 인접해있는 대륙인 ‘톨루미온’으로 이동을 개시하기로 했다. 리온과 루디아는 본체의 건강 상태를 점검하고 회복도 할 겸 인형과의 접속을 잠시 중지하였다. 윤혁은 보호용 캡슐에 동료들의 인형 몸체들을 감싼 후 덱스트로-레보 융합형 모터사이클에 탑재하였다.
그 후, 윤혁과 모터사이클들은 바다를 가로질러 이동했다. 이번에도 바다는 위험천만했다. 인공생명체들의 습격이 반복되었다. 신수나 요정 군단을 비롯해 기이하게 생긴 괴물들이 몇 차례나 공격하는 통에 다칠 뻔하기도 했다. 다행히 그때마다 신기하리만큼 절묘하게 치명적인 위기가 그를 비껴갔다.
“지금껏 겪은 고생에 비하면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
고생을 반복하면서 몸은 서서히 지켜갔으나 정신은 꺾이지 않았다. 이미 안일함이 충분히 닳아버린지라 자기 몸을 아끼려는 이기심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힘들어 무너질 것 같을 때면 기도로 악착같이 버텼다.
그렇게 고생하며 바다를 가로지르던 중 반가운 소식이 도달했다. 진으로부터 잠깐이나마 텔레파시 연결이 접속되었다. 비록 지속 가능한 시간은 몇 분밖에 안 되겠지만, 절대 불가능할 것이라고 예고를 들었기에 내심 포기해왔던 참인지라 호재가 오자 반가움이 들었다. 최대한 간결하게 용건만 물어봐서 정보를 챙기자. 윤혁은 미리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였다.
“오랜만입니다. 잘 지냅니까?”
상대방은 뭐가 즐거운지 실실거리는 목소리였다.
“나름대로 고생은 실컷 하는 중입니다.”
약 올리는 진이 조금 얄미운 감도 들었다.
“그런 것치고는 편안하신 것 같아 보입니다만.”
“시간이 없으니 거두절미하고 궁금한 점만 묻겠습니다.”
“하하, 네, 그러시죠.”
윤혁은 칼티엔뉴르에서 본 마법 문명들에 대해 진에게 털어놓았다.
“음, 그 특성을 보아하니 마도왕 지그문트가 본격적으로 식민지 개입에 관여하기 시작했군요. 지구 담당자가 혼자 했을 리는 없고, 아마도 제 의형제인 제1 철인왕이 그자와 손을 잡은 것 같습니다.”
과연 초인이 분석에 참여하니 유의미한 진단이 순식간에 도출되었다.
“마도왕이라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로스트엠페러. 은하계 식민지들을 관할하는 철인왕들에 대응되는 지구 쪽의 최상위 일곱 초인입니다. 지그문트도 그 일곱 중 하나인데 유럽 대륙을 아우르는 에우로페 제국의 총통입니다.”
에우로페 제국은 신국(新國)이 멸망한 뒤 등장한 국가. 2세대 초인들이 다스리던 시절의 유럽 대륙을 주름잡던 신국에서는 유독 마도 공학이 발달해 있었는데, 후발 주자로 세워진 에우로페 제국은 신국의 유산들을 모조리 삼킴으로써 마법을 방불케 하는 기묘한 과학 기술을 초고도로 발전시켰다. 그래서인지 에우로페 제국은 오늘날까지도 마도 공학의 범람으로 대단히 유명했다.
“그렇다면 대강 이해가 가네요. 설마 지구와의 접점이 있었을 줄이야. 그렇다면 칼티엔뉴르의 마법은 모두 마도왕 그자에게서 유래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가 이바지를 한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여러 가지 다른 요소들도 개입되었습니다. 특별히 아버지께서 아주 흥미로운 일을 벌이셨더군요.”
“형까지요?”
이제는 딱히 새롭지도 않은 지 윤혁은 이마를 짚었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랍니까?”
“시뮬레이션 우주에 대해 제5세대까지 설명해준 것 기억하십니까?”
“물론이죠. 직접 데려다주시기까지 했잖습니까?”
“아버지께서 이미 제6세대 S-unvs를 완성하신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저희에게까지 숨기셨다가 최근에야 공개하시는 바람에 저도 늦게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진의 이야기가 영 느낌이 심상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6세대라고요? 또 무슨 기능이 추가된 겁니까?”
“리얼리티. 쉬운 말로 표현해서 ‘실체화’ 기능입니다.”
윤혁은 하마터면 조종판을 놓칠 뻔했다.
“실체화라니요? 시뮬레이션 우주 내 물체를 현실로 옮겨오기라도 합니까?”
“완벽히 똑같지는 않지만, 대강은 비슷합니다.”
“기가 막힐 노릇이네요.”
진의 설명이 연달아 이어졌다.
“당신이 들어간 그곳처럼 일반인들도 손쉽게 범용 마법을 다루는 문명은 구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마법에 가까워 보이는 기술을 현실에서 구현하려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우주 규모 시설의 기반을 필요로 하니까요.”
카이젤은 최근 시뮬레이션 우주 속의 허상을 현실 세계로 부분적이나마 가져오는 기술력을 발명함으로써 이러한 마도 공학의 근원적 한계를 극복했단다. 윤혁은 이 이야기를 듣고는 칼티엔뉴르라는 세계 전체가 S-unvs 실체화 기술을 실용적 목적으로 실험해보기 위한 일종의 실험장으로 채택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짙게 들었다. 그러나 일단 그 의심은 제쳐놓기로 했다.
‘지금은 진도 확답을 못 주겠지.’
그보다는 당장 급하게 물어보고픈 질문이 따로 있었다.
“이곳에 서식하는 인조 바다 괴물들, 유독 다른 사람보다 저를 민감히 공격하는 것 같더군요. 그러면서도 막상 가까이 다가오면 치명상을 입히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현상은 왜 나타나는 것입니까? 짚이는 바가 있는지요?”
이에 진이 잠시 뜸 들이는 기색을 보였다.
“설마 이것도 형과 관련 있는 것입니까?”
“흠, 아니라고 할 수는 없군요. 인류연합이 제작한 이종족들은 기본적으로 아버지께 복종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습니다. 아직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하나의 지배체계 플랫폼으로 지배체계가 통합되지는 않았지만, 그들도 분명 아버지의 종들이죠. 그런데 그런 이종족들 중 일부는 육안 관측으로 사람의 유전자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아마 아버지와 공통된 유전 인자를 가진 당신을 보고 잠시 혼란을 느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기능이 있었을 줄이야.’
설마 과거 수영장 사건 때 신수들이 공격을 시도했던 것도 그와 관련이 있으려나?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장되었다. 그러나 허락된 시간의 제한성을 생각할 때 더 낭비해서는 안 될 듯했다.
“한 가지만 더요. 수상한 감이 느껴지는 부분이 하나 있었습니다.”
끝으로 윤혁은 티라노아 대륙의 헬레아 제국에서 만난 아이카르 황자에 관하여 질문했다. 복음을 전달받은 다른 사람과는 달리 그에게서만은 유독 무언가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던 기억이 선명히 남았다. 증언을 듣자마자 진은 윤혁이 느꼈던 이상한 감각의 정체를 설명해주었다.
“아이카르라고 하는 그자……, 아마도 초인 후보자겠군요.”
“네? 뭐라고요?”
이어지는 설명은 조금 충격적이었다.
인류연합은 지금껏 정기적으로 여러 하늘도시에서 유능한 자질을 가진 아이들을 세대별로 선택한 뒤 말을 뗄 정도의 나이에 이르면 하늘도시에서 빼내어 훈련용 우주 요새로 옮겨놓는 프로세스를 운영해왔단다. 이른바 초인 선발. 목적은 말 그대로 아이들로 하여금 초인으로 각성케 하는 것이었다.
“지구에서 태어난 3세대 초인들은 대부분 선천 각성이지만 우리 우주 출신 3세대 초인들은 거의 다 후천 각성입니다. 그리고 그 후천 각성은 대부분 인위적으로 유도된 것이죠. 혹독한 시험과 훈련을 거쳐서 말입니다.”
진 자신도 역시 여러 다른 식민지 출신의 아이들과 치열한 경쟁을 한 끝에 겨우 최상위 초인으로 각성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진은 고농축 타임필드 내부에 들어가 긴 세월을 견디기도 했고 동면 상태로 오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나마 진은 수월하게 통과한 경우란다. 그의 말에 따르면 후보자는 지극히 많으나 무수한 경쟁과 시험의 허들이 워낙 높다 보니 최종적으로 각성에 성공하는 이는 모래밭에 떨어진 바늘만큼이나 적다고 한다.
“실패자들은 어떻게 됩니까?”
“아, 죽지는 않습니다. 보통은 동면시켜서 반복 재시험을 치르게 합니다. 윤회의 수레바퀴를 거치는 셈이죠. 그럴 실력도 안 되는 조기 탈락자들은 기억을 지운 채 자신이 태어난 고향과는 다른 하늘도시에 배치됩니다.”
“아이카르 같은 티라노아 대륙의 세 제국의 후계자들도 그러한 상황에 해당합니까? 그러니까, 조기 탈락자 말입니다.”
“정황상 확실해 보입니다.”
그 말대로라면 그자들이 유독 다른 이들보다 탁월한 마법 능력을 갖추고 있는 것도 어느 정도는 설명이 될 듯했다. 이어지는 진의 정보는 좀 더 통찰할 거리가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초인 후보자였다 탈락한 이들은 보통 하늘도시에 떨어지기 전 특수 능력을 이식받습니다. 보통은 인간의 능력보다는 이종족의 능력에 가까운 아류 기술력이죠. 철인왕의 ‘현자의 눈’보다는 훨씬 못하지만 비슷한 계열의 능력도 제법 많죠. 그중에는 타인의 유전자를 인식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이카르 황자가 저를 그냥 놓아준 것도…….”
이제야 미심쩍었던 바가 얼추 정리되었다. 왜 아이카르 황자가 감정적으로는 윤혁을 적대시했으면서도 죽이지는 않고 놓아주었는지, 아울러 왜 마석을 선물로 주는 호의까지 베푼 것인지 이해가 갔다. 그에게 만일 유전자를 인식하는 능력이 있었다면 신수처럼 기묘한 행동 반응을 보일 이유는 충분하다.
“아마 무의식적으로 당신의 유전자를 감지하고 압박감을 받았을 것입니다. 식민지 주민들은 그분이나 그분의 정보를 직접 알지는 못하나 대신에 그분에 대한 두려움이 뼛속까지 새겨져 있거든요.”
진의 언급 속에는 하늘도시 주민들에게 보편적이고 강력한 제약이 걸려 있다는 사실이 어렴풋이 암시되어 있었다. 아마도 그 제약은 정신 간섭과 관련 있을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알지도 못하는 유전자와 단지 공통분모를 지닌 유전자를 감지했다는 이유로 무의식적인 두려움에 압도될 정도면 얼마나 짙고 철저한 족쇄이겠는가. 윤혁은 저도 모르게 손바닥에 손톱이 박힐 정도로 손을 꽉 쥐었다.
*****
진은 톨루미온 대륙에 관하여 한 가지 정보를 추가로 남겼다.
“당신의 다음 행선지인 톨루미온이라는 지역, 그 부근 좌표에 준동하는 마법 기술에 관한 상세 정보 중 일부를 간접적으로나마 관측했습니다. 다만 지극히 제한적입니다. 현재로서 제가 줄 수 있는 건 이게 전부입니다. 세부 상황은 당신들의 임기응변으로 대응해야 합니다.”
뒤이어 첨부 메시지가 뇌리로 전송된 후 텔레파시 연결이 종료되었다.
‘참 찝찝하게도 끊네.’
해변에 착륙한 윤혁은 진이 대화 끝자락 즘에 준 불길한 경고를 되씹으며 앞으로의 대응 계획을 궁리했다.
‘그 특정 대상만은 조심하라고 했었지.’
청건당(靑巾黨). 모든 구성원들이 푸른 로브와 푸른 두건을 쓰고 다니는 기괴한 마법 집단. 그들은 칼티엔뉴르 최대 면적의 대륙인 톨루미온 전역을 활보하는 무법 조직으로 비유컨대 고대 몽골 기마대와 유사한 자들이었다. 드넓은 대지를 휘저으며 도시나 왕국을 점령하는 것이 일상사인 족속인데 때로는 마법사나 민간인을 노예로 삼기까지 한다고 하였다. 가까스로 톨루미온 내 왕국들이 연합하여 청건당을 몇 차례 격퇴하긴 하였으나 온전히 세력의 뿌리를 뽑지 못한 탓에 지금까지도 엎치락뒤치락하는 대치 구도가 해결되지 못했단다.
“그 마법은 상당히 위험도가 높을 겁니다. 제 나름대로 조사를 좀 해봤는데 이 세계에는 ‘형제-홀로그래피 차원’과 관련된 기술력이 도입된 흔적이 있습니다. 게다가 지그문트의 계정을 해킹해서 데이터 교환 경로를 검색해보니 외부 개입 기록 중 흥미로운 정보가 있더군요.”
윤혁은 종전의 진의 조언을 되새김질했다.
“형제-홀로그래피 차원 관련 테크놀로지를 범용화하려는 프로젝트에 쓰인 실험체 중 몇이 그 지역으로 이동해 아예 자리를 틀었더군요. 푸른 두건 일당도 아마 그들을 씨앗으로 시작된 집단일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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