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178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8. 푸른도적단과 마녀의숲 (2)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3.05.26 | 회차평점 0 |
(이전 회차에서 연속됨)
일전에 윤혁은 진에게서 얼핏 우주의 상위 차원 구조에 대해 총론 격의 강의를 들은 바 있었고 형에게서도 더 깊은 보충 설명을 들었었다. 오늘은 진의 텔레파시에 첨부된 전자 백과를 통해 몇 가지 지식을 추가로 가르침 받았다. 전에 배운 것들에 새 정보들이 더해지자 전반적인 틀이 일목요연하게 이해되었다.
고차원계의 기틀이 되는 축들은 크게 세 부류의 카테고리로 분류된다. 일반인들에게도 이미 익숙히 알려진 벌크-멤브레인(Bulk-Mbrane) 차원축들,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리얼리티-시뮬레이션(Reality-Simulation) 차원축들, 그리고 극소수의 학자들만 그 존재를 아는 셋째 카테고리까지. 그 마지막 카테고리에 속한 축들을 통틀어 부르는 용어가 ‘소스-홀로그래피(Source-Holography) 축’이다.
벌크(Bulk)가 4차원 이상의 상위 시공간이고 멤브레인(M-brane)이 그 벌크 속을 떠다니는 하위 시공간인 것처럼, 소스(Source)가 근원적 상위 실체라면 홀로그래피(Holography)는 그로 인해 파생된 이차적 하위 실체다. 용어에서 직관적으로 알 수 있듯, 이 관계는 영사기와 그림자의 관계와도 같다. 소스라는 광원에서 투영된 이차적 투영체가 물리 실체로 발현된 것이 홀로그래피인 셈이다.
사실 이번 세기 이전에도 유사한 개념 이론은 있었다. 21세기 과학자들은 우주의 본질과 관련해 우주의 현상들이란 우주 외곽 경계면에 저장된 정보들이 발현된 일종의 3차원 영상이라는 급진적 우주론을 내세웠었다.
이 개념에서 착안한 아이디어에서 시작하여 오늘날 인류는 ‘소스-홀로그래피’라는 상•하위 차원 역학 관계를 밝혀내게 되었다. 과거인들이 막연히 떠올렸던 ‘정보를 담은 경계면’은 그 실체가 ‘소스’였음이 드러났고 그제야 비로소 막무가내식 우주론은 올바른 이론적 개념으로 정립되었다.
한편 ‘경계면 내부의 정보가 발현된 현상’은 과거 우주론 속 용어대로 ‘홀로그래피’라는 용어로 고착화됐다. 물론 실험적으로 밝혀진 실제 소스-홀로그래피 관계의 기하학적 구조는 ‘경계면’과 ‘홀로그래피 영상’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긴 했지만 어쨌건 그 개념적 맥락만은 오늘날까지 계승되었다.
인류가 살아가는 터전이자 별들의 공간인 통상의 3차원 우주 공간 역시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홀로그래피 중 하나에 불과하다. 맨눈으로 관측할 수는 없어도 그 근원이 되는 소스는 엄연히 존재하며, 나아가 그 소스 역시 더 거시적인 차원에서 보면 더 높은 상위 소스에서 빚어진 홀로그래피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소스-홀로그래피 관계의 무한 연쇄 속에서 우리 우주는 피라미드 밑바닥에 놓인 존재에 불과하다고 한다.
인류는 꾸준한 관측을 통하여 모든 소스-홀로그래피 관계들에 적용되는 모종의 보편적 규칙을 발견하였다. 하나의 소스에서 직속 하위 홀로그래피 차원이 생성될 때는 여러 변수가 담긴 고유 방정식으로 표현되는 일종의 언약 관계가 둘 사이에서 맺어진다는 규칙이었다.
흥미롭게도 이때 방정식 구축 주체인 소스는 관계 방정식 자체는 그대로 둔 채로 방정식 내부의 변수들의 값만 변형함으로써 기존에 만든 홀로그래피 이외에도 제각기 다른 형태의 홀로그래피들을 양산하여 낳는 일이 가능하였다. 인류는 이렇게 동일한 소스 차원에서 투영되어 본질은 동일하되 구체적 성상은 다른 홀로그래피들을 서로 ‘형제-홀로그래피(Sibling-Holography)’의 관계에 놓여 있다고 부르기로 정의하였다.
한편 홀로그래피의 일종인 ‘우리 우주’ 역시 동일 부모와 동일 방정식을 주물로 삼아 생산된 형제-홀로그래피들을 여럿 지니고 있다. 그 형제-홀로그래피 차원들의 물리 속성과 법칙을 통상의 공간으로 끌어온다면 어떨까? 당연히 법칙들의 마찰로 인한 온갖 물리 이변 현상을 빚어낼 수 있게 된다.
최근에는 그러한 법칙 마찰에 의한 이변 원리가 마도 공학 기술에 그대로 접목되었으며 안정화 문제와 운용 효율성의 문제까지 해결되었다고 한다. 칼티엔뉴르 주민들의 미신적인 관점을 빌려 표현하자면 일반 마법도 아닌, 다중우주적 마법이 창조된 셈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런 위험한 스케일을 손쉽게 다룬다고?’
윤혁은 일전에 우주에서 보았던 ‘천 개 행성의 도시’를 떠올렸다. 그 큰 건축물은 홀로그래피 차원을 다루는 기술이 카이젤 외에는 쉽게 건드릴 수도 없는 고위 기술임을 보여주는 산 증거였다. 얼마 전 시점까지만 해도 분명 그러했다. 그런데 고작 몇 년이나 지났다고 그런 무지막지한 기술력이 범용화된단 말인가. 그만큼이나 과학의 발전 속도가 빨랐단 말인가?
여하튼 진은 곧 윤혁이 만날 청건당이라는 조직의 수장들이 형제-홀로그래피 차원과 접속하도록 빚어진 일종의 양산형 실험체일 것으로 추측했다. 그렇다면 청건당이라는 조직은 그 실험체들의 힘을 부분적으로 빌리거나 기생하는 존재들이리라. 어쩌면 그 능력을 안정적으로,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만들어낸 보조 장치일 수도 있고.
‘전문가 소견을 가벼이 여기면 안 되겠지. 조심해야겠군.’
리온과 루디아가 깨어난 뒤 윤혁은 청건당에 대해 얼추 설명한 후 셋이서 모여 대도시 위주로 이동할 것을 제안하였다. 아무래도 치안이 튼튼한 도심은 무법자들이 손쉽게 공격하기 어려우리라 판단되었다. 상황을 이해한 동료들은 이를 곧바로 승낙하였다.
셋은 여러 도심 영지를 순회하면서 전도 여행을 했다. 그 와중에 청건당에 대한 소문도 틈틈이 수집하였다. 과연 수수께끼 가득한 조직답게 주민들마다 평가가 엇갈렸다. 어떤 이들은 청건당을 수상한 범죄자들로 여겼고, 다른 이들은 의적이라고 주장하였다. 마을마다 청건당의 행보에 대해 증언하는 바도 제각기 달라서 과연 같은 대상을 말하는 것이 맞는지조차 의심되었다.
특이하게도 청건당은 보통 도시를 점령하고 나면 일반적인 침략자와는 달리 약탈이나 행정체계 재편을 시행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대신 그들은 점령지의 내부에서 비밀리에 모종의 일을 벌인 후 몇 달 만에 점령지를 버려둔 채 타지로 떠나가는 패턴을 보여왔다고 한다.
이러한 청건당의 기이한 행보 때문인지 외부에서 온 낯선 방문자들의 이슈조차 이곳에서는 그다지 충격을 주지 못했다. 어떤 사람들은 윤혁 일행을 보고 태연스레 ‘당신들도 그치들과 연관된 무리요?’라고 질문할 정도였다. 모든 도시의 이목은 오로지 그 수수께끼의 조직에만 몰려있었다. 그 덕분인지 낯선 곳에 복음이 처음 선포될 때 으레 나타나는 격한 폭동이나 반발은 마주하지 않아도 됐으나 한편으로는 빠른 소문 전파를 역이용하지 못해 아쉬운 면도 있었다.
“차라리 그 작자들을 직접 만나 정공법으로 공략해볼까?”
문득 윤혁의 호기심은 엉뚱한 방향으로도 튀었다.
“반대.”
“나도……, 그리 현명한 생각은 아니라고 봐.”
“하하, 역시 무리수였으려나.”
물론 리온과 루디아의 반대 덕에 그 제안은 무산되었다.
그러나 며칠 후 의도치 않게 윤혁의 제안은 현실이 되었다. 그날은 일행이 ‘이르투스’라는 이름의 대도시의 광장에서 사람들에게 선포하던 날이었다. 날이 저물어가려던 무렵(칼티엔뉴르에는 인공태양 시스템이 있었기에 지구와 똑같은 밤낮 주기가 갖춰져 있었다) 셋은 숙박을 위해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쉬던 무렵 갑자기 폭음이 들려왔다. 사람들이 혼비백산하여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인근의 번화가에서는 군중의 시끌벅적한 외침이 들려왔다.
“기습인가?”
긴장한 윤혁은 강제로 루디아와 리온의 인형을 깨워 접속 상태로 끌어올렸다. 혼자서 인형 두 기를 챙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행동력을 갖춘 인원이 하나라도 더 많을수록 좋을 것으로 판단되었다.
“어서 떠나자.”
그들은 부랴부랴 여인숙을 벗어났다. 그때 하늘 위에 번쩍거리는 천둥소리와 함께 섬광이 나타났다. 놀라서 위를 바라보자 기이한 광경이 보였다. 마법사? 도사? 승려? 정확히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지 감이 안 잡히는 해괴한 무리가 복면을 쓰고 공중에서 도술 판을 벌이고 있었다.
“저것들은?”
그들은 시공간을 기괴하게 비집어 뒤틀고 있었다. 온갖 현란한 환영을 만들어낸 뒤 그것에 생기를 불어넣어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중이었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빛과 공간의 향연, 광학적인 묘기의 연속, 환상과 실상을 넘나드는 유려한 힘의 폭주까지, 아름다우면서 두려움을 자아내는 공연이었다. 정확히 무엇을 하는지는 파악하지 못했으나 추측건대 마법사들끼리 대결을 벌이는 듯했다. 죽일 기세로 해하지는 않았지만, 그 못지않은 치열한 기운이 부딪혔다.
리온과 루디아는 그 광경을 보고 두려움에 홀리지 않도록 시선을 땅에만 고정한 채 골목을 빠져나갔다. 친구들을 뒤따라가면서 윤혁은 황급히 머리를 굴렸다. 진이 경고했던 청건당 일행임이 분명했다. 아마 지금 펼쳐지는 기교가 홀로그래피 차원 마법이리라. 막상 처음 보니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이 느낌……, 데자뷔가 느껴져.’
먼저 제로원 지하에서 본 아공간 기술과 공간 조작 기술이 떠올랐다. 그리고 지구를 둘러싼 우주 구조물인 ‘뫼비우스의 차원 곡면’의 기묘함도 회상되었다. 비록 그것들에 비하면 한참 초라한 스케일에 조잡한 정교성이긴 하지만, 청건당 일행의 마법도 비슷한 류의 기괴함을 얼추 흉내 내고 있었다.
‘위험해. 휘말리지 말고 달아나자.’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갑자기 그들 앞으로 공중에 있던 한 여성이 사뿐히 내려와 착지했다. 청건당의 일원으로 보이는 그녀는 푸른 복면과 두건을 쓰고 있었기에 눈 말고는 신체 부위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세 선교사가 달아나지 못하도록 주변의 공간에 희미한 이형 공간체를 덧씌웠다. 일종의 형제-홀로그래피 차원 혹은 그것을 오려낸 조각이리라 짐작되었다. 무력 저항은 의미가 없으리라 판단한 윤혁은 동료들이 다치지 않도록 항복했다. 그녀는 부연 설명도 없이 윤혁 일행을 데리고 자신들의 본부로 인솔해갔다.
청건당은 포로들이 자신들의 본부에 도착하자마자 눈을 가린 수건을 풀어주었다. 뻣뻣이 긴장한 선교사들 앞으로 높은 계급으로 보이는 사람 두 명이 걸어왔다. 푸른 두건을 쓴 일당 전부가 일제히 경례하는 것으로 보아 수장 격 인물로 보였다. 하나는 수염을 지긋이 기른 키 큰 남자였고 다른 하나는 젊어 보이는 고매한 분위기의 여성이었다. 먼저 여성 쪽이 입을 열었다.
“음, 이방인들이라……, 아니 이계인들이라 불러야겠군요.”
이계인이라는 표현에 놀라기도 전에 남성 지도자 쪽이 덧붙였다.
“칼티엔뉴르의 경계 바깥, 저 머나먼 우주에서 온 자들이군요.”
그 말에 다시금 적잖이 놀란 일행. 지금껏 선교사들이 이방에서 왔다고 믿는 이들은 많았지만, 우주에서 건너왔다는 사실까지 눈치챈 이들은 하나도 없었다. 사실 칼티엔뉴르의 우주관은 인류사적으로 꽤 미개한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세계 전체가 하늘도시라는 시스템에 종속되어 제어 당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여하튼 그렇기에 청건당 수장의 뜻밖의 정확한 간파는 실로 충격적이었다.
그때 여성 지도자가 다시 입을 열어 자신들을 소개했다.
“제 이름은 상향(Up), 그리고 제 옆에 계신 분의 존함은 하향(Down)입니다. 우리 둘 다 청건당을 이끄는 여섯 명의 스승 중 하나입니다.”
칼티엔뉴르의 언어권도 기본적으로는 인류 공용어이긴 했으니 이름으로 공용어 단어가 나온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업이나 다운 같은 용어는 아무래도 사람 이름으로 붙이기에는 적합한 타입이 아니었다.
‘아마 진이 말한 실험체들이란 자들이 여섯 스승인가?’
아무래도 그 추측이 옳은 듯했다. 이어지는 하향의 설명에 따르면 그 둘 이외에도 여섯 스승 가운데 기묘(Strange), 매력(Charm), 상천(Top), 지저(Bottom)라는 자들이 청건당 내에 존재한다고 한다.
“정말 이상하기 그지없는 이름들이네?”
루디아는 의미를 몰라 고개를 갸우뚱거렸으나 윤혁이 금세 부연해주었다.
“저 여섯 이름은 모두 ‘쿼크(Quark)’, 그러니까 중성자와 양성자를 구성하는 기본 입자의 여섯 가지 종류의 타입 이름을 본뜬 이름이야.”
“아, 그런 거였어?”
점차 그 여섯이 실험체였으리라는 의심이 굳어져 갔다.
“저희의 이력을 간단히 소개해 드리죠.”
상향은 계속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녀 말에 따르면, 현재의 청건당은 과거와 달리 분열되어 있다고 한다. 청건당의 시작이 언제부터인지는 스승들조차 잘 모르지만, 그들은 예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온 고귀한 임무를 맡아 책임져왔었다. 명령을 내린 주체는 정체불명이었지만, 청건당의 스승들은 성실하게 그 주체들이 준 사명을 섬겼다. 스승들은 대대에 걸쳐 여러 대륙을 누비며 칼티엔뉴르의 마법의 진화를 촉진하는 역할을 맡아왔다. 이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써 때로는 대륙 곳곳을 침략하는 행위도 서슴지 않고 일삼았다. 그러나 목적이 목적인 만큼 정복을 하더라도 살상이나 약탈은 일절 저지르지 않은 채 오로지 마법 체계만 변화시켜 준 뒤 떠나가는 방식으로 행해왔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 전에 우리에게 임무를 내렸던 존재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실체가 개입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용해온 ‘이계의 힘’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힘을 지닌 존재였죠. 정체를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그 실체는 주로 꿈을 통해서 청건당 일원들에게 간섭해왔습니다.”
그 개입으로 인해 청건당 세력은 여럿으로 나누어졌다. 상천과 지저는 기존의 전통적인 임무에만 충성하기 위해 ‘의문의 존재’를 배척하였다. 반면 기묘와 매력은 의문의 존재를 새로운 주인으로 모시고자 행동 노선을 바꾸었다. 상향과 하향은 이도 저도 아닌 중립 입장이었는데 여기에는 그들만의 의도가 있었다.
“우리는 두 세력 모두와 별개의 입장입니다.”
“무엇을 노리시는 겁니까?”
리온은 두 사람이 꾀하는 바가 무엇인지 대담하게 질문하였다.
“진실. 우리는 세계 밖에서 우리를 조종하는 실체의 정체를 알아내기를 원합니다. 누가 우리에게 힘을 제공한 것이며 왜 간섭하는지도 말입니다. 혹 바깥에서 온 당신들이라면 그 단서를 줄지도 모른다고 여겼습니다.”
상향과 하향은 일행더러 비밀을 들춰내 달라고 요구했다. 리온과 루디아는 윤혁 쪽을 쳐다보았다. 이 자리에서 그런 선교 외 정보를 다루고 결정할 만한 이는 그뿐이었다.
(다음 회차에 연속됨)
이전회
177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8. 푸른도적단과 마녀의숲 (1) |
다음회
179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8. 푸른도적단과 마녀의숲 (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