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184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9. 무덤에서 온 전언 (2)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3.06.16 | 회차평점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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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미니센 공화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일행은 더욱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정처 없이 모험을 지속하였다. 아델라와 헤어진 이후 다섯 마을을 더 돌아다녔으나 큰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다.
그렇게 일행은 실망감과 기대감 사이에서 흔들리며 길을 재촉하던 중 어느 기묘한 분위기의 숲에 다다라 길을 잃고 말았다. 하필 그곳에는 여러 비밀스러운 정령들이 서식하고 있었다. 그것들은 낯선 이들이 나타나자 즉시 불과 번개와 독과 안개와 얼음을 내뿜으며 사방 지형지물을 뒤흔들었다. 어떤 것들은 훨씬 더 초월적인 규모의 힘을 방사하였다. 형형색색의 현란한 섬광들이 하늘을 수놓았고 미묘한 시공간 떨림마저 발생했다.
-인간들이네.
-그런데 느낌이 기묘하게 달라.
-표식이 안 느껴져.
-어디에서 온 거지?
도망 다니는 중 윙윙거리는 음성들이 귓가를 때렸다.
-아, 기억났다. 저들은 주의해야 할 대상이야.
-주의 대상?
-요정왕님이 보내신 정령왕들께서 ‘바깥 인간’들에 대해 얘기해준 적이 있어.
-바깥의 인간? 왜 그들이 여기에 들어왔지?
-큰일이네. 우리는 그들을 공격하지 못하게 되어 있잖아.
-그렇지. 하지만 우리들의 비밀을 눈치채도록 내버려 둬서도 안 돼.
정령들은 제각기 다른 음색과 주파수로 떠들어대었다.
“저 녀석들, 대체 무슨 이야기를 떠드는 거지?”
윤혁은 당혹감에 중얼거렸다. 정령들이 방출해대는 굉음과 섬광은 이미 그의 관심 바깥으로 밀려났다. 훨씬 더한 규모의 것들도 실컷 봐왔던 윤혁에게 고작 이 정도의 정령 마법은 별 감흥을 줄 수 없었다. 이 순간 그의 집중을 사로잡은 것은 의미 모를 정령들의 대화 내용이었다.
“이야기라고?”
도망하던 중 루디아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하지만 윤혁아, 나는 그저 흥얼거리는 음악 소리밖에 안 들리는데?”
곁에서 달리던 리온도 화들짝 놀랐다.
“윤혁, 너 설마 저 녀석들 말이 이해가 돼?”
“뭐? 너희한테도 들리는 거 아니었어?”
두 친구의 증언을 듣고서야 윤혁은 방금 자신이 인지한 언어 정보가 음성 기반 언어가 아님을 눈치챘다. 데자뷔가 강하게 스쳤다. 아니 이제는 너무 자주 겪어본 바인지라 기시감이라 할 것도 없었다.
‘뇌리에서의 강제 정보 인식?’
당연한 이치겠지만 윤혁이 저도 모르는 새 요정의 언어나 커뮤니케이션 기술을 따로 습득했을 리는 없었다. 십중팔구 이종족 텔레파시 계열이리라. 그러나 그 부분을 감안해도 전과는 조금 차이가 있어 혼란스러웠다. 이전에 수영장에서 신수들과 대면했을 때 그들의 텔레파시로 전해 들은 것은 웅얼거리는 짐승 소리뿐이었다. 지금처럼 명료하게 언어적 의미가 이해되지는 않았다. 차이점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보고서야 감이 잡혔다.
‘설마 이 반지의 영향인가?’
형한테서 선물로 받은 반지. 그것의 간섭 말고는 설명할만한 단서가 없었다. 여행 중 슬쩍슬쩍 드러난 반지의 잠재 효력은 형의 말대로 프리패스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은 수준이었다. 생각해보니 그 반지는 아직 정식으로 소유권이 이양되기도 이전, 상자 속에 봉인되어 있던 때에도 윤혁에게 온갖 프리패스를 공급했었다. 그 예로 상자를 매개체로 생체 코드를 이식해주어 기함 젠타르콘의 타임필드 속에서 자유로이 존재할 수 있게 해주었다. 최근에는 하늘도시 방벽도 넘게 해주었고 마석마저 흡수해 능력을 뽑아내는 기염을 토했다.
‘대체 잠재력이 어디까지인 거지?’
그때였다.
-저 침입자들을 쫓아내자!
-아냐, 그냥 아무도 모르게 없애버리는 것은 어떨까?
정령들의 흉악한 대화를 엿들은 윤혁은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인간을 향한 충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대화. 그러나 정작 더 가관은 다음 대목이었다. 그 섬뜩한 회담의 화살촉이 느닷없이 윤혁 쪽으로 옮겨졌다.
-잠시만! 저 사람 좀 주목해! 위험한 기운이 느껴져!
-맨 가운데에서 가장 빠르게 달리는 키 큰 사람?
-그래! 왜 저놈에게서 하필 ‘그분’의 기운이 느껴질까?
직감적으로 저들이 형을 언급하는 중임을 눈치챈 윤혁. 리온과 루디아는 여전히 아무 말도 못 알아듣고 있었다. 윤혁은 구태여 정령들의 말을 번역해주지 않은 채 달리는 데만 집중했다. 신뢰하는 친구들에게 뭔가를 숨기는 건 미안했으나 지금 같은 정신 없는 상황에서 괜한 불미스러운 구설까지 더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서 달아나자.”
그는 선두에서 방향을 잡고 일행이 숲 바깥쪽으로 벗어나도록 이끌었다.
-쫓아가!
-키 큰 남자는 건드리지 마. 나머지 둘은 감찰해보니 가짜 몸이야. 정신만 인간이고 진짜 본체는 다른 곳에 있어. 저건 인형이니까 그냥 없애버려도 돼!
‘제길.’
특수 분석 능력. 윤혁은 이를 악물었다.
“덱스트로, 레보, 아머 모드로 변환해줘.”
이에 뒤에서 조용히 일행을 보좌하던 불가시 모드의 덱스트로와 레보가 움직였다. 사실 그들은 보조자들이긴 했으나 본질은 인류연합의 종복들이라 그런지 매번 위기 때마다 간을 보면서 일행이 어떻게 위기를 헤쳐나가는지를 한참 확인한 뒤 정 대책이 없을 때만 굼뜨게 나서서 도움을 주곤 해왔다. 이번에도 그 태도는 다르지는 않았다. 기분 나쁘긴 해도 그런 그들의 보조라도 절실했다.
덱스트로와 레보는 트랜스포밍 기능을 발동하여 전투 로봇 형태로 모습을 바꾸었다. 그 뒤 그것들은 사람이 입을 수 있는 외골격 형태로 변신하여 리온과 루디아의 인형 몸체를 감싸 안았다. 동시에 염력 비슷한 기술이 담긴 특수 재질의 밧줄을 생성해 윤혁의 허리에 휘감았다.
두 로봇은 나무들을 넘어 공중을 가로질러 가며 윤혁을 견인했다. 뒤쪽에서는 정령들이 발악하며 날뛰는 중이었다. 그것들은 기이한 모습으로 변모하여 맹렬한 공격을 쏟아부었다. 하나같이 굉장한 위력이었다. 그나마 그것도 윤혁이 다치지 않도록 완급을 조절한 것이리라.
그때 갑작스레 정령들이 멈춰 섰다. 윤혁은 잠시 의아해했으나 곧 그 이유를 깨달았다. 반대편 하늘에서 어떤 의문스러운 힘이 소용돌이치는 것이 느껴졌다. 윤혁과 로봇들은 잠시 지상으로 내려와 대기하였다. 곧이어 허공에 소용돌이를 만들어내는 한 여인이 나타나더니 지상에 유유히 착륙했다.
“어째서지? 왜 정령들이 인간을 공격하는 거지?”
그녀는 동토의 혹한처럼 냉혹해 보였다. 정령들은 우물쭈물하며 그녀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 대화를 몰래 엿들으면서 윤혁은 상황을 대강 눈치챘다. 여자는 정령과 소통을 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거기다가 정령의 힘을 능숙히 다루는 패턴으로 보아 아예 신체 자체가 정령과 융합했을 가능성도 있어 보였다.
‘정령들과 거의 대등한 위치에서 대화하고 있군.’
그때 여자가 고개를 돌려 윤혁을 지목했다.
“당신들은 왕국 주민이 아닌 외부인인가요? 어째서 이 위험한 곳에 발을 들여놓은 거죠? 대체 무슨 목적으로 오셨습니까. 염탐입니까?”
“저, 그게…….”
당황한 윤혁은 최대한 얼버무리며 자신들의 무죄함을 증명하려 애썼다. 외골격을 벗고 나온 루디아와 리온도 그의 곁에서 변호를 거들어주었다. 여인은 상황을 대강 이해했는지 한숨을 쉬면서 그들에게 길을 안내하였다.
“제 이름은 아르셰인, 정령의 영토와 인간의 영토를 함께 다스리는 관리자입니다. 제가 이 자리에 있는 이상 저 정령들도 당신들을 공격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 지역에 머무는 동안에만 그러하니 지금 바로 떠나시지요.”
아무쪼록 다행이었다. 일행은 함부로 숲에 발을 디딘 것을 사과하고는 발걸음을 돌려 이동을 서둘렀다. 정령들이 마음을 바꾸기 전에 벗어나야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정령이 나타나 아르셰인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불길했다. 은밀하게 작동하는 작은 소리여서인지 이번에는 윤혁도 엿들을 수 없었다. 그리고 곧 불길한 느낌은 적중하였다.
“잠시만 멈춰서시죠.”
떠나가는 일행의 발걸음을 아르셰인이 붙잡았다.
“해명해야 할 부분이 있군요.”
윤혁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당신들은……, 외부 지역이 아니라 외계에서 온 사람들이군요.”
셋은 아무 말도 못 한 채 벙어리가 되었다.
“게다가 정령이 말하길 당신을 특별히 주시해야 한다고 하던데.”
아르셰인이 콕 집어서 윤혁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유는 왜인지 말해주지 않는군요.”
오도 가도 못하게 된 윤혁은 침묵으로 응수했다.
“뭐, 제가 한 번 직접 그 이유를 알아보면 되겠죠.”
그렇게 일행은 꼼짝없이 붙잡히게 되었다. 덱스트로와 레보를 시켜 싸워볼까도 했지만 조금 전 아르셰인이 보여준 무력은 두 로봇 이상으로 보였다. 괜한 분쟁을 일으키기보다는 시간을 들여서라도 해명하는 편이 나을 듯했다. 셋은 아르셰인이 거느린 부하들의 호송 하에 아르셰인의 커다란 수정궁전으로 끌려갔다.
일행은 조사실에 갇혔다. 조사관이 여러 차례 찾아와 정보를 캐물었다. 이미 한 번 경험이 있었기에 두려워할 이유는 없었다. 윤혁은 청건당의 상향과 하향에게 설명했던 것처럼 일부러 장황히 외부 관리자들의 비밀을 실토했다. 이번에도 그들은 윤혁이 말한 내용을 인식하지도 믿지도 못했다. 범우주적 정신 간섭이 존재하리라는 가설에 점점 근거와 힘이 실렸다.
선교사들은 전략을 바꾸어 부드러운 톤으로 전도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자 전도를 들은 이에게서 긍정과 부정 중 한쪽으로 극명한 반응이 나타났다. 그리고 전도를 들은 조사관마다 정신 제약이 흐드러진 것인지 바로 전까지는 무관심하게 대했던 외부 세계의 소식에 호기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반면 전도를 듣지 않은 조사관 쪽은 여전히 외부 체제에 대한 정보 자체를 인식하지 못했다. 의도하지 않게 이는 조사관들 내부에 교란을 가져오는 결과를 낳았다. 조사관들은 자신들끼리 결론을 하나로 모으지 못하여 혼란스러워했다.
이는 뜻하지 않은 호재로 이어졌다. 결국, 아르셰인 본인이 직접 청문회를 열어서 셋을 심문해야만 하는 지경이 이르렀다. 거의 한나절에 이르는 긴 토론이 이어졌다. 무슨 이야기를 꺼냈는지도 일일이 기억하지도 못할 정도였다. 세 친구는 하나님의 말씀에 담긴 진실과 더불어 인류연합이 하늘도시 주민들에게 감춰둔 비밀을 다 함께 폭로하였다. 혼란이 더욱 번졌다. 배심원들의 웅성거림이 참으로 가관이었다. 듣는 이들의 마음에 얼마나 열매가 맺혔는지는 알 길 없지만, 이날의 재판은 사실상의 설교 집회처럼 변해버렸다.
“저들에게서는 간첩죄의 증거를 찾지 못하겠습니다.”
아르셰인도 지쳤는지 두 손 두 발을 들었다.
“그냥 동부의 공작에게로 보냅시다.”
재판의 결론은 이렇게 허무하게 매듭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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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들은 동부로 이송되었다. 동부의 공작인 젠토는 윤혁 일행을 예의 바르게 대하며 크게 환대하였다. 그는 아르셰인의 정령 왕국에서 선교사들이 받은 수모를 대신 사과하였다. 그리고 일행이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지내도록 자신의 영지 안에 항구적 거처를 마련해주겠노라고 제안했다.
“감사드리지만 저희는 남은 시일 내에 나머지 땅들을 둘러봐야 합니다.”
리온이 대표로 나서서 그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물론 샅샅이 모든 지역을 방문할 작정은 아니었다. 애당초 그러기에는 인력도 시간도 부족할뿐더러 전략상으로도 그리 현명한 접근법이 아니었다. 단기간에 복음을 퍼뜨리기 위해서는 대도시 위주로 공략하는 편이 나았다. 혹시라도 믿는 사람이 생겨나면 그들이 다시 동포를 구원하려는 마음으로 근방 지역에 말씀을 전파할 수도 있으니 그 부분에 기대를 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정이 바쁜 것은 변함없었다. 최소한 지리적인 장벽이 복음 확산의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하려면 주요 요충지들만큼은 남김없이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했기에 축소하고 추려내도 여전히 방문 후보지 목록은 길었다.
“그렇다면 대접만이라도 거절치 마셨으면 합니다.”
젠토 공작은 신사다운 외모를 지닌 호인이었다. 그에게는 신비한 힘이 담긴 검이 있었다. 그는 그 명검을 다룰 수 있는 유일한 자로써 대륙 곳곳에 명성을 떨쳤다. 사실 그 명검은 휴먼 솔져 전용 특수 무장을 모양만 변형시켜 마법의 세계에 어울리는 디자인으로 바꾸어놓은 것이긴 했지만 당연하게도 그런 어처구니없는 내막이 알려지지는 않았다. 어쨌건 젠토 공작은 명망 있는 사람이었고 그런 그의 호의를 무조건 거절하기만 하기에는 부담감이 느껴졌다.
선교사들은 적절한 선 안에서 호의에 응답하는 예의를 보였다. 그들은 전도 사명도 겸할 겸 반나절 간의 숙박만을 받아들였다.
젠토 공작의 저택에서 머무는 동안에 그들은 집안의 여러 사용인을 만날 수 있었다. 특별히 공작부인은 셋이 전하는 새로운 가르침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녀는 그들에게 직접 새 교훈을 배우고자 융숭한 대접으로 손님들의 환심을 샀다.
(다음 회차에 연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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