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192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11. 히어로즈 I (1)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3.07.06 | 회차평점 0 |
Chapter 11. 히어로즈 I
똑같은 호쾌한 얼굴, 똑같은 시원한 머리 스타일, 똑같은 보기 좋은 체격. 복제 인간인 마냥 쏙 빼닮은 세 명의 흑발 청년이 운동장처럼 넓은 사유(私有) 체육관에서 운동 경기를 즐기며 젊음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청년들은 활기가 넘쳐흘렀다. 역경이나 어려움 따위는 전혀 모르며 성장해서 그런지 그들의 표정에 그늘은 한 점도 녹아있지 않았다.
“이쪽으로 패스, 현민.”
“나이스.”
“조금 더 빨리!”
열정이 넘치네. 보기 좋구나. 역시 청춘이란 좋은 것이로구나. 감탄이 절로 흘러나오는 광경이었다. 고민을 품고 산다는 것은 세쌍둥이에게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 개념이었다. 자고로 염려나 고민은 대뇌피질의 몫이지 소뇌나 기저핵은 그저 몸을 활발히 움직이는 일을 도우면 그만이다. 누가 봐도 고민하는 모습은 그들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신선한 느낌이라.”
그들과는 사뭇 대조적인, 이지적이고 무거운 기운이 운동장 반대쪽 벤치에 앉아 똬리를 틀고 있었다. 192cm에 달하는 장신의 남성, 그는 얌전히 웅크린 채 깊은 사색에 잠겨 있었다. 그의 표정은 유하면서도 동시에 차갑고 날카로웠다. 따분하고 고된 일상생활에 지쳤는지 무덤덤함도 얼핏 보였다.
오늘은 365일 고급 정신노동만을 거듭하던 사내가 간만에 휴일을 맞은 날이었다. 그는 반쯤 부탁에 가까운 명령을 받고서는 자기 식구들이 거하는 곳에 내려온 참이었다. 그렇게 휴식을 명령받았건만, 그의 습관은 어찌할 수 없었는지 하루 내내 그는 머릿속으로는 탐구와 노동을, 몸으로는 혹독하리만큼 가혹한 수련을 거듭하였다. 가족들과 놀이를 즐기러 온 이 순간까지도.
조금 전까지 체육관에서 거친 체력단련을 해서 그런지 사내의 상반신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는 더위가 거슬렸는지 아예 상의를 벗고 공기 중에 땀을 말리는 중이었다. 그렇게 더우면 편히 누워서 잠을 즐기면 될 터이나 사내는 간헐적인 휴식만을 스스로에게 허락한 채 몸의 혹사를 멈추지 않았다. 원래 잡념을 쫓아내는 데는 운동만 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늘은 별 효과가 들지 않는지 쓸데없는 고민이 자꾸만 괴롭혔다.
“신선함……, 무슨 관련이지?”
고뇌하는 사내의 탄탄하게 빠진 전신 근육이 성이 난 듯 뚜렷이 갈라졌다. 근육들은 혹사로 잔뜩 쌓인 피로를 해소하려는 것인지 가볍게 경련을 일으키며 주인의 심호흡에 반응해 오르내렸다. 해부학적 근조직 하나하나가 자기주장이 뚜렷했다. 현자의 두뇌와는 대조되는 야수의 고요한 맹렬함이었다.
사내는 초점 없는 눈동자를 운동장 저편 쪽으로 돌렸다. 건강하고 맑은 정신력을 내뿜는 세쌍둥이가 농구 경기를 막 마쳤는지 다 같이 어깨동무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의 등을 장난치듯 두드리면서 친근감을 표시하였다. 그러더니 운동선수들처럼 축축하게 젖은 상의를 벗어 던지고는 바람에 땀을 말리며 웃고 떠들었다. 라커룸으로 향하는 세쌍둥이의 잘 다져진 기골에서 건강미가 돋보였다. 지나치지도 않고 부담스럽지도 않은 건강함이었다.
“흠.”
다시금 공적인 고민에 잠긴 갈색 머리의 남자는 턱에 손을 괸 채 갈색 눈동자를 굴렸다. 어릴 적부터 느낀 것이지만, 이런 대조적인 그림 속에 놓일 때면 왠지 모르게 생각 없이 편하게 사는 동생들이 부러웠다. 사실 그럴 자유가 있음에도 스스로 이런 삶을 자처하는 것이긴 하지만.
때마침 허공 위에 홀로그램 메시지 화면이 나타났다.
{마물왕(魔物王)께서 연락을 원하십니다.}
“승낙한다.”
무미건조했던 사내의 입가에 작게 미소가 걸렸다.
“오랜만에 통신 유동성도 점검해보지.”
{메시지 전달 모드는 어떻게 설정하시겠습니까?}
“시그마(Σ) 타입 원격공명식 유사 텔레파시 양자통신으로 해줘.”
{알겠습니다. 모드 설정하겠습니다.}
이내 순식간에 갈색 머리 남자의 주변 공간이 다른 무언가로 덮어씌워졌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되 오로지 수신자와 송신자의 뇌 속에서만 인식되는 오감 공유 기술이었다. 남자의 육신은 여전히 자기 사유지의 운동장 안에 있었으나 인식 체계는 다른 유사 공간으로 이동했다.
통신 공간 안에 도달하자마자 사내는 또 다른 접속자의 존재를 확인하였다. 과연 초대자는 딱히 이동한 흔적도 없이 사내 옆자리에 고요히 서 있었다. 줄곧 곁에 있었던 것처럼. 갈색 머리 사내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분위기였다. 격식 없는 티셔츠와 청바지 차림, 짙은 피부색에 검은빛이 감도는 붉은 머리카락, 흑표범처럼 날렵하고 다부진 몸매, 반항적인 매력이 깃든 근사한 이목구비까지, 친구는 늘 변함이 없었다.
“성운.”
“안녕, 친구.”
성운은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상대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는 친구 퀴퀘그, 아니 태양을 삼키는 늑대에게 잠시 눈짓으로 약식 인사를 전한 뒤 곧바로 앞에 있는 물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성운, 간만의 휴가 중에 불러내서 미안.”
“천만에, 내 자문이 필요하다면서. 나야 좋지.”
역시 일 중독 습성은 속일 수 없었다.
“그나저나…….”
성운과 늑대 앞에는 거대한 인공 생체 구조체가 조성되어 있었다. 구조물의 크기는 실로 거대했다. 그 형태는 워낙 복잡해서 지구상에 존재하는 기존 생명체 중 어느 것에도 비견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아니, 애초에 생명체라고 하기에도 어폐가 있었다. 단백질 기반 생체 시스템과 전혀 다른 유전 체계 시스템, 그리고 탄소 생명체가 아닌 시스템, 심지어는 신(新)물질 기반 생명체까지 뒤섞은 복합체였으니까. 엄밀한 학술 용어로는 ‘유사 유기체를 기반으로 만든 기계’라고 칭하는 편이 올바를 듯했다.
“해처리(Hatchery). 보완 공사를 금세도 마쳤네.”
“이제 인류와 우주가 생물학적인 태생 한계를 뛰어넘을 만반의 채비가 마련되었어. 새로운 차원의 특이성을 지닌 종족들이 탄생할 거야. 그것들 위에 군림하기 위해 차기 인류도 유전적으로 진보해야 할 당위성을 얻겠지.”
늑대는 씩 웃으며 야심을 내비쳤다.
“이번에는 보스 도움을 거치지 않고 너 혼자서 완성한 건가?”
“만일 마스터가 개입된 프로젝트였다면 휴식 중인 널 부를 수도 없었지. 휴일을 명령한 주체가 마스터 그분이었다며.”
“아무튼 대단한걸. 이전 버전까지는 전부 그분의 기술력과 창조성을 거쳐야 했는데 이제는 슬슬 이 프로젝트도 독립이구나. 고무적이야.”
눈앞의 거대한 유사 생체 구조물은 ‘잭과 콩나무 시리즈’라는 프로젝트의 결실로써 만들어진 작품 중 가장 최신작이었다. 통신 공간으로 투영시키긴 했으나 본체는 현재 태양을 삼키는 늑대와 함께 버뮤다 삼각지대에 자리하고 있었다. 버뮤다 전체를 지지대로 하여 자라난 괴물 나무, Hatchery 12.0. 이 초대형 플랜트는 현재까지 열두 차례의 개화를 거쳤고 마침내 안정화 궤도에 올랐다.
원래는 온갖 유형의 인공 생체물을 생산하기 위해 지어진 플랜트였으나 지금까지는 그 본 목적을 성취하는 데 제약이 많이 따랐다. 무작정 작동시키려면 어떻게든 사용은 가능했으나 문제는 잠정적인 부작용, 오작동 가능성이었다. 완벽주의자였던 카이젤은 완전무결한 안정성, 안전성, 심미적 완벽성, 윤리학적 무결성을 보장하기 전까지는 이 플랜트를 봉인하기로 하였고 그 관리와 개발 책임은 부하인 늑대에게 양도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최근 들어 한계 극복이 완료되었다. 해처리 가동은 시스템과 법령에 의해 허락되었고 그 즉시 크기, 밀도, 속도, 생존력, 수명 등 생물학적 한계를 뛰어넘은 개체(unit), 기관(organ), 조직(histologic tissue), 종족(species), 집합적 군집체들이 이 나무에서 생산되었다. 늑대의 야망과 비전이 현실화하는 기념비적인 순간이었다.
생물학 실험 특성상 위험성과 불확실성은 존재했기에 이를 제어하기 위한 특수 안전장치가 버뮤다라는 거대 실험실 전반을 겹겹이 두르고 있었다. 어찌나 규모가 큰지 대기권마저 넘어갈 수준이었다. 더불어 실험장 내부에는 자동 확장이 가능한 아공간도 설치되어 있었다. 위험성도 위험성이지만 해처리의 크기가 얼마나 거대한 것인지를 나타내는 방증이었다. 만일 일반 공간에서 키웠다면 행성을 가뿐히 여럿 삼켰을, 가늠조차 힘든 덩치였다.
“해처리의 클론들은?”
“은하계 콜로니들에 설치된 부화장들에 묘목을 대량으로 심었어. 현재 양산 중이야. 시시각각 무궁무진한 응용 버전들이 제작되고 있지. 해처리 자체에 시뮬레이션 우주에 접속할 두뇌까지 있으니 알아서 스스로 잘 진화할 거다.”
항상 차가운 무기체만 다루던 공학자인 성운은 나름 호기심이 넘치는 눈빛으로 해처리를 쳐다보았다. ‘마물왕’이라는 이명을 소유한 친구, 태양을 삼킨 늑대. 그가 이런 별명을 얻은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저런 경이로운 변형 생명체를 제작해내는 탁월한 생명공학 지식을 지닌 것은 물론, 만들어진 생체들을 제어하는 데 특화된 ‘특수 바이오리듬’이라는 고유 재능을 지닌 것이 그 이유였다.
“진화(Evolution)라.”
성운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예전에는 ‘위대한 지적설계자’라는 개념을 배제하고 오로지 ‘우연의 연속’과 ‘무한정 긴 시간’이라는 개념만을 통해 만물의 발생을 설명하려는 이론이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소위 ‘자연 진화’라는 개념은 현대에 와서는 실상 불가능한 공상임이 기정사실화되었다. 오늘날은 ‘진화’라는 단어가 조금 다른 의미의 밈(meme)으로 쓰이는 중이었다. 인간의 기술력을 통해 생명 체계에 내재한 자연적인 한계를 초월하려는 능동적인 프로세스, 현재는 이것이 ‘진화’라는 용어의 말뜻이었다.
그러한 진화의 일환으로 이미 인류는 온갖 유형의 이종족을 창조했다. 유기물 기반, 무기물 기반, 유사 생체 기반, 초-차원체 기반, 심지어는 우리 우주라는 멤브레인(M-brane)에 속하지 않은 물질을 기반으로 형성된 생명 체계까지. 이런 이종족들은 ‘기계’와는 대조되어 하나의 ‘종(Species)’으로 취급되었다.
최근에는 기계와 이종족의 경계마저도 허물어질 기미가 보였다. 기계도 생명체의 속성을 점차 획득하고 생명체도 기계의 우수성을 획득하는 중이었다. 다양성의 분화가 앞으로 어느 경지까지 이를지는 초인들조차도 알 수 없었다. 해처리를 보니 이러한 실태가 다시금 상기되었다. 약간 두려움을 느꼈는지 성운의 목울대가 긴장으로 울렁거렸다.
‘인간은 원래 아무것도 창조하지 못해. 항상 그래왔지.’
늘 아이디어는 자연에서 모방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렇다면 지금껏 우리가 만들어낸 기괴한 생명체들은 대체 무엇을 모방한 것일까? 그 아이디어의 원본은 대체 어디 놓여있는 것일까?
‘오늘날의 우리는 당최 누구에게서 아이디어를 받는 것일까?’
깊이 생각해봐도 뾰족한 정답은 나오지 않았다.
“목줄은?”
성운은 늑대에게 주의사항부터 질문했다.
“어떻게 씌울 계획이야?”
“글쎄? 그건 마스터와 상의해서 처리해야 하지 않을까?”
“쉽지 않은 일이야. 해처리 레벨에서는 그나마 텔레파시, 마인드컨트롤, 생체시계 제어 등의 임시방편으로 커버가 되겠지만 최종적으로 갤럭시 클래스 바이오스피어(Galaxy-class Biosphere)까지 도달하면 제어 불가야. 보스께서도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실 텐데.”
성운의 질문에 늑대는 쓰게 웃었다.
“맞아, 분명 그렇지.”
카이젤이 생명공학 같은 위험한 분야를 하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늑대에게 허락한 데는 다 정당한 이유가 있었다. 인디언 출신인 태양을 삼키는 늑대는 자기 민족이 정당한 권리를 백인들에게 뺏겼던 수모스러운 역사를 가슴속 깊이 뼈저리게 새기고 있었다. 그렇기에 인류라는 새 집단 정체성에 소속감을 둔 지금의 그도 인간의 지위가 다른 종족에 의해 침탈당하는 일에 민감했다. 그렇기에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경계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성운 네 말대로 마스터께서는 조만간 아예 ‘데우스 엑스 마키나’와 동등한 레벨의 별도 지배 체계를 제작하실 모양이야. 내가 관할하는 유기체뿐 아니라 모든 스펙트럼의 이종족을 제어할 수 있도록 말이지.”
성운의 눈썹이 놀라움과 의심으로 흔들렸다.
“그런 일을 감당할 물건이 세상에 존재할 수나 있으려나? 설령 존재케 한다고 해도 한 인간과 무사히 융합시킨다고? 게다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종족 개수와 개체 수를 감당하려면 무한의 역량이 필요할 텐데?”
“모르지. 하지만 마스터는 워낙 우리의 예상을 벗어나는 위인이시니까 덜컥해낼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야 그렇긴 하지만…….”
걱정되는 부분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의심 많은 둘 모두 보스의 생각과 성취력은 확신했기에 개의하기를 포기했다. 성운과 늑대 둘은 해처리를 찬찬히 살피면서 보완해야 할 점들에 관해 정보 교류와 토론을 나눴다. 유사 텔레파시의 특수 성질 덕분에 단 몇 분 만에 수일 치 분량의 대화가 끝났다.
“마무리 작업 수고해라.”
성운은 연결을 끊었다.
“응, 너도 일은 그만하고 집에서 좀 쉬어라.”
늑대의 배웅이 허공에 옅게 메아리치며 흩어졌다.
성운의 의식은 다시금 한국에 있는 자택 실내 운동장으로 되돌아왔다. 마침 눈을 떠 보니 성운 앞쪽에 세쌍둥이 동생이 두런두런 모여 앉아있다. 젖은 옷을 갈아입었는지 셋 다 편안한 운동복 차림이었다.
“형, 일 때문에 피곤해?”
“우와! 그렇게 열심히 운동하면서 여기서도 두뇌 활동이야?”
“형은 늘 힘이 넘치는 걸 보면 신기하다니까.”
큰형의 탄탄하고 억센 팔근육을 본 현민이 직접 매만져보며 감탄하였다. 표범 앞에서 강아지들이 겁도 없이 호기심을 보이는 격이었다. 맹수는 자비롭게 강아지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우리랑 경기 몇 판 더 뛸래?”
“피곤하면 방에서 놀자.”
현우와 현성의 촐랑거림에 성운은 좋은 미소를 연기해 보였다.
“먼저 가서 쉬어. 난 잠시 더 쉬었다 올게.”
“칫, 이번에도 또.”
늘 이런 식이었다. 매번 함께 어울려주지 않는 형이 그들에게는 조금 야속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그들은 그를 매우 좋아했다. 그들이 아는 한 가장 멋진 사람이기도 하지만 가족에게도 충실했으니까. 세쌍둥이는 나중에는 꼭 같이 놀아 준다는 약속을 받아낸 뒤 퇴장했다.
‘내가 얄궂었나 보군.’
녀석들이 장난스럽게 때린 성운의 어깨에 옅은 손자국이 남아있었다. 성운은 어깨를 어루만지며 쓴 미소를 머금고 몸을 일으켰다. 그는 상의를 걸치지도 않은 채 수건을 목에 두르고 테라스로 향했다. 어차피 테라스부터 체육관까지 전부 성운의 한 사유지 공간 안에 있었기에 편안히 다녀도 문제는 없었다.
(다음 회차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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